<프레시안>은 성공회대학교 사회적기업연구센터와 공동으로 최근 큰 관심을 모으는 '사회적 기업(social entrepreneur)'의 현주소를 확인하고 더 나은 모습을 찾는 새로운 인터뷰 연재를 마련한다. 전문 인터뷰어 권은정 씨가 직접 한국의 다양한 사회적 기업가를 찾아가 그들이 세상을 어떻게 바꾸고 있는지 그 생생한 목소리를 직접 듣는다. 이 연재는 총 20회에 걸쳐 매주 목요일 독자 여러분을 찾아간다. 이 연재를 공동으로 진행하는 성공회대학교 사회적기업연구센터(소장 이영환 교수)는 사회적 기업가 인적 자원 개발 교육과 사회적 기업 발전을 위한 연구 활동을 하는 성공회대학교 부설 연구기관이다. (☞사회적기업연구센터 바로 가기) ① "'금호동 철거민' 유 이사, 사고 치다" ② "20대 청년의 반란…빗자루 들고 아줌마와 함께 청소를!" ③ "일하고 싶은 실업자는 다 모여라" ④ "중고를 새 컴퓨터로…덤으로 세상도 재생합니다" ⑤ "'대박' 연극 흥행 비결은? '옆집 아저씨·아줌마!" ⑥ "귀농? 농사 지을 생각은 일찌감치 버리세요" ⑦ 바리의 '유혹'…"연해주 땅 10평을 1만 원에 펴냅니다" ⑧ 이런 건설회사가? "집이 아닌 '착한' 세상을 짓는다" |
▲ 원주 의료생협 최혁진 전무이사. ⓒ프레시안 |
최혁진(40) 전무이사가 같은 층에 있는 의료생협 사무실로 안내한다. 점심시간이 지나 오후진료가 시작된 모양이었다. 여섯 살짜리 꼬마가 엄마 손을 잡고 의사에게 진찰을 받고 있었다. 얼핏 보기에는 다른 동네의원과 달라 보일 게 없다. 하지만 저 하나의 작은 진료 행위가 있기까지 참으로 많은 이들의 정성과 열의가 필요했다.
무위당 장일순은 살아 있다
▲ "고등학교 때부터 고민을 했지요. 소수 엘리트만이 세상을 이끌어가는 게 과연 정상인가? 현장 풀뿌리 사람들의 힘이 강화될 수 있도록 하는 활동을 고민했다." ⓒ프레시안 |
"장일순 선생님의 영향이 컸습니다." 좁쌀 한 알에도 우주가 있다고 한 사회운동가 무위당 장일순, 서로 핏대를 올리며 이념 논쟁으로 싸움박질 할라치면 무심히 일어나 꼽추 춤으로 주위를 누그러뜨린 분, 우리가 어떻게 서로를 위해 실천해야하는지 가르쳐 주었던 분, 그의 숨결은 여전히 강렬하다. 최 이사의 눈빛에서도 무위당은 살아있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고민을 했지요. 소수 엘리트만이 세상을 이끌어가는 게 과연 정상인가? 많은 평범한 이들도 스스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는데, 그런 기회를 제공받지 못하고 있는 게 우리 사회의 현실입니다. 진보건 보수건 엘리트 의식이 강하지 않습니까? 현장 풀뿌리 사람들의 힘이 강화될 수 있도록 하는 게 바로 생협 활동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간 안전한 먹을거리 중심으로 이루어진 생협 운동에서 좀 더 나가고 싶었다. 평소 보건의료나 복지 분야등으로 영역을 넓혀나가고 싶었는데 타이밍도 잘 맞아떨어졌다. 그가 원주에 막 돌아왔을 때 지역 선배들이 준비 중인 의료생협의 실무 역할을 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다. 선배들은 그가 대학에서 한 활동을 눈여겨 보아두었던 것이다.
최 이사는 대학생활협동조합을 성공적으로 일군 경험이 있다. 그가 다닌 대학은 전국에서 처음으로 학생소비자협동조합이 생겨난 곳이었다. 원주 출신인 그에게 안성맞춤 대학이었다.
"입학하자마자 활동에 합류했습니다. 시장 중심으로 가는 게 대안이 아니라는 생각, 협동조합 조직이 많아지면 건강한 진보가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했지요. 당시 학생들이 출자해서 자판기, 매점을 운영했는데 아주 성공적이었습니다. 학교 당국이나 주위에서는 학생들이 운영하면 곧 망할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오히려 정반대였어요.
학생들이 아주 적극적이었고, 아이디어로 많았고 자원봉사도 기꺼이 했지요. 매출을 많이 올렸는데 수익금 8000만 원으로 장학금 지급도 하고 그랬습니다. 학생복지센터 건립을 위한 적립도 하고 있었어요."
그러나 학생생협운동은 3~4년 정도밖에 가지 못했다. 문교부로부터 압력을 받은 학교당국이 학생들에게 문을 닫도록 강요했던 것이다. 최근에는 국공립대학에서 의무적으로 생협을 만들라고 교육부에서 권고할 정도이고 사립대학에서는 기업에 유통 매장을 제공하는 상황이지만 1990년 초반의 학생생협은 두려운 존재였을 것이다. 전체 학생 중 거의 4분의 1이 출자했을 정도로 호응이 컸으니 당국에서 보기에는 눈엣가시였을 것이다. 그들은 생협운동이 사회주의 시스템이라는데 특히 방점을 찍었다.
당시 학생의 경영 실력은 놀라웠다. 아무도 대학구내 매점에서 일하는 사람을 직원이라 여기지 않았을 때 그들에게 4대 보험을 적용하고 정규직원으로 채용했다. 모든 경영을 수평적으로 논의하고 모두의 의견을 수용했다. 학생 생협 조직의 사무국장을 맡아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최 이사는 진지하고 의미 깊었던 그때의 활동 내용을 소개한다.
"협동조합 활동 안에서 우리의 교육 공간이 열린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일상생활 영역 안에 담긴 사회적, 정치적 의미를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때 두산기업의 낙동강 페놀오염사건이 있었는데 우리 조합에서 두산의 계열사 제품을 전부 불매운동하기로 했는데 학생들이 대거 동참했습니다.
또 태평양에서 여성노동자를 탄압한 사건이 있었는데 그런 기업과의 관계도 역시 보이콧하기로 했었지요. 그리고 동두천 기지 여성들이 자립자활을 위해 빵을 납품했는데 공동구매하여 학교에서 아침 빵으로 판매하기도 했습니다. 학생 조합원들이 이 모든 활동에 찬성했지요."
문교부가 왜 대학에다가 생협을 폐쇄시키라고 압력을 넣었는지 짐작이 갔다. 일상생활을 통해 사회적 정치적 변화를 꿈꾸었던 학생들의 사회변혁 운동이었던 것이다. 최 이사는 협동조합은 개인의 욕망에서 시작된다고 설명한다. 그 건강한 욕망을 실현시킬 수 있는 기회를 넓혀 나가고 내가 그런 것을 보장받기 위해서는 이웃이 함께 보장받을 수 있도록 실천해야한다는 것, 그 속에서 사회공공의 연대의식이 이뤄질 때 우리 사회는 약육강식이 아닌 더불어 함께 사는 사회로 간다는 것이다. 최 이사의 대학 경험은 지금 의료생협 활동의 토양이 되고 있다.
마음의 병을 함께 치료하는 병원
▲ "협동조합은 개인의 욕망에서 시작된다. 그 건강한 욕망을 실현시킬 수 있는 기회를 넓혀 나가고 내가 그런 것을 보장받기 위해서는 이웃이 함께 보장받을 수 있도록 실천해야한다는 것, 그 속에서 사회공공의 연대의식이 이뤄질 때 우리 사회는 약육강식이 아닌 더불어 함께 사는 사회로 간다는 것이다." ⓒ프레시안 |
건강한 생협들은 대개 지역 특성에 따라 각각 그 역할이 조금씩 다르다고한다. 맨 먼저 생겨난 안성의료생협의 경우는 의사들이 뜻을 모아 시작했다. 그래서 의료진을 구하는데 있어서는 별 어려움이 없었다. 의료와 병원 시스템을 건강하게 만드는데 집중하는 생협 조직이다. 원주의료생협의 경우는 다른 곳과 달리 일반 시민들이 만든 의료생협이다. 설립한 지 5년이 지나서야 안정권에 들어섰다. 처음 3년간은 의사 없는 의료생협이었다. 어려움이 만만치 않았지만 원주 사람들은 끄떡하지 않았다.
"다른 지역이었으면 이건 안 되는 것이라고, 진작 포기하자고 했을 겁니다. 초창기 그런 시기에도 조합원의 탈퇴가 한명도 없었지요. 의사가 없어서 진료가 안 되고 운영이 안 되었는데도 말이지요. 조합원 1세대 분들은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지요. 생협이 누가 큰돈 내서 하는 조직이 아니다, 처음은 누구나 힘든 것, 시간이 지나야 자리 잡히는데 닦달하지 말아야지, 도와주면서 지켜보자, 그러셨지요."
의료생협이란 의사가 함께 해야 하는 일인데 그때나 지금이나 돈벌이와 별 상관없어 보이는 일에 자신을 던질 의사들이 드문 게 현실이다. 더구나 의료생협이 원하는 의사는 주치의로서의 의사다. 단순히 병을 치료해주는 의사가 아니라 환자의 고민을 들어주는 인격적 관계를 맺을 줄 아는 의사를 원하는 것이다.
밝음의원(양창모 원장·40세)과 밝음한의원(정현우 원장·33세)에서 일하겠다고 스스로 찾아온 두 원장님 모두 평소 이쪽 방면에 관심이 높은 분인 게 틀림없다. 대학병원에서 수련의를 마치고 이곳으로 온 양 원장이나 근무하던 한의원에서 자리를 옮긴 정 원장이나 모두 훨씬 좋은 조건을 뒤로하고 기꺼이 의료생협에 합류한 이들이다. 더구나 둘 모두 서울이란 지역을 떠나는 용기(!)를 보여주었다.
"일하신 지 이제 2년 지났는데 그간 내원 환자가 많이 늘었고 진료 만족도도 아주 높습니다. 사실 그동안 급한 대로 한두 달 일할 분들을 모셔다 놓곤 하는 바람에 의사에 대한 환자들의 믿음이 없었지요. 얼마지 않아 떠나가 버리는 의사의 진료를 미더워하지 않았지요."
이제는 의사가 항생제 처방을 인색하게 해줘도, 주사약을 아끼는 듯이 보여도 환자들은 그냥 믿는다. 현재 밝음의원의 항생제 처방률은 세계보건기구(WHO)가 정한 기준에 매우 근접하고 있다. 의사가 진료에 쫓겨 시간적 여유가 없을 경우 주로 항생제 처방이 높아진다고 한다. 전체 환자 수에서 10~20% 만이 항생제가 필요한 정도라고 하니 항생제 처방률 80%를 육박했던 우리나라 병의원의 처지를 생각하면…. 요즘은 그나마 낮아져 50% 정도라고 한다.
1일 환자 수가 50명을 넘어서면 오진 발생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한다. 다행히 밝음의원의 1일 진료 환자 수는 그 정도를 넘지 않는다. 의료생협은 만약 환자수가 늘어나면 의사를 한 명 더 고용할 것이라고 장담한다. 물론 쉬운 문제는 아니라는 것을 안다. 현재 의료수가로는 의사 급여 기준을 충족시키기에는 역부족이기 때문이다. 영국의 경우는 의사 급여의 최대수치가 노동자 평균 급여의 3배 정도라고 잡고 있다. 그렇게 계산하면 630만원! 정도가 된다.(그 정도만 되어도 너무 좋겠다는 게 현재 근무 중인 의사들의 반응!)
의료생협이 지속 가능한 시스템으로 되자면 같이 일할 의사가 필수다. 의료생협 활동에서는 무조건적인 헌신을 요구할 생각은 전혀 아니다. 아직은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급여지만 조만간 적절한 수준으로 올리고자 한다. 최 이사는 우리나라 의료계의 문제는 의사의 숫자가 부족한 게 아니라 수도권 과밀화 현상이 문제라고 지적한다.
"지금 의사 급여가 제일 싼 곳이 서울입니다. 그다음이 경기도. 강원도 태백의 경우가 가장 높다고 볼 수 있지요. 지역별 편차가 아주 큽니다. 공공의료체제가 붕괴된 데서 대안이 없다는 게 문제이지요. 그동안 만나본 의사 분들이 그러지요. 경기도 정도만 해도 가겠는데 강원도는… 너무 멀다는 거지요. 혹은 의사 본인은 생협 활동을 하고 싶어 해도 가족들이 반대하는 경우도 많이 보았습니다. 제가 늘 말하고 다닙니다. 의사분이 의료생협 활동을 하도록 가족이 배려한다면 큰 덕을 쌓는 것이라고요. 하하하."
집 고쳐주는 병원?
▲ "난방도 안 되는 방에 사는 노인에게 관절염 약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안정된 의료 서비스는 기본이지만 건강하게 살 수 있는 삶의 조건을 만드는 게 우선이다." ⓒ프레시안 |
처음에 의료사업 프로그램으로 고령자층 중심으로 가정방문 서비스를 나갔다. 관절염을 앓는 노인에게 약을 전달하려고 했지만 난방도 안 되는데다가 외풍이 드센 방에서 겨울을 지내고 있는 처지를 보니 생각이 달라졌다. 건강문제를 새롭게 보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그런 집에 사는데 관절염 약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안정된 의료체계는 기본이지만 건강하게 살 수 있는 삶의 조건과 사회적 환경을 만들어야겠다 싶었지요."
집을 고치기로 했다. 환경정의와 함께 주거환경개선사업을 전개했다. WAP공법으로 에너지 문제와 주거복지문제를 결합했다. 단열시공으로 훨씬 적은 비용으로 더욱 안전하고 따뜻하게 살 수 있도록 집수리를 했다. 에너지 비용의 3분의 1이 줄어들었다고 한다. 현재 주거복지사업단은 자체수익사업과 외부 기금으로 조직운영을 활발하게 전개하고 있다.
재가케어사업, 재가장기요양기관, 요양보호사교육관, 지역아동센터…. 의료생협 안에서 챙기고 있는 사업 내용이다. 원주 의료기관 이용자들 중에는 특히 빈곤층, 고령자, 장애인 들이 많다. 장애인 자립생활센터를 열고 그 안에 보건의료지원센터를 만들어 장애인들과 같이 일자리를 만들어내는 일도 의료생협의 몫이다. 의료를 기본으로 하면서 취약계층이 어떻게 자기 중심성을 가지고 자립할 수 있는지 그 방안 모색에 열심이다. 관청에 제도 변화를 요구하기도 하고, 정책 시스템 변화를 함께 논의하기도 한다.
주민이 참여하는 병원
현재 원주 의료생협은 사회적 기업으로서 33명의 사회적 일자리를 지원받고 있다(전체 직원은 49명). 최 이사는 일자리 지원을 받는 직원들을 하루라도 빨리 정규직으로 전환시킬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사회적 일자리가 일회적인 일자리에 그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원칙 때문인 것 같다. 그는 민주적인 시스템을 위한 이사회 운영 방식에 대해서도 자세히 설명을 이어나갔다. 원칙과 신뢰를 지키면서도 활동을 성공적으로 진행시키는 게 놀랍기만 했다. 최 이사는 덤덤하게 말한다.
"원칙을 지키려고 노력해나갈 뿐입니다. 경영적 안정도 중요하지만 돈을 우선시하는 방식으로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파행적 운영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30만 원주 인구 중에 2만 가구가 생협 운동의 울타리 안에 있다. 수십 년 생협 운동의 맥을 이어오는 원주에서도 운동을 통한 연대가 늘 쉬웠던 것은 아니다. 그래서 협동조합협의회가 생겨났다.
"생협 운동 안에는 여러 당파적 의견이나, 사업적 이해관계로 이견이 있고 갈등이 있기 마련이지요. 그런데 의료생협을 하자는 데는 모두가 뜻을 모았습니다. 농민들의 고령화, 실업빈곤층에 대한 보건의료문제가 심각하니 최소한 뭘 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식이 있었던 것이지요. 의료생협과 더불어 협동조합협의회를 만들자는 데도 합의했습니다."
협동조합협의회는 여러 단위의 사업단이 네트워크해서 함께 활동하자는 것이다. 큰 조직은 작은 조직을 밀어주고 힘이 많은 조직은 약한 조직의 손을 잡아끌어주면서 나가자는 것이다. 한 개 협동조합이 저 혼자 경영안정화에 올라간다는 것은 별의미가 없다고 본다. 원주지역 전체가, 작은 지역까지 누구든지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는 터전이 되도록 하자는 게 협의회의 취지이다. 최 이사가 덧붙인다.
"지역마다, 마을마다, 시민사회마다 그 안에는 힘이 있습니다. 그 힘이 폭발적으로 나올 수 있도록 계기를 마련하는 게 우리의 역할입니다. 조직은 주민 위에 있으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활동에서 주민 참여가 최우선입니다. 시간도 걸리고 힘도 더 들지만 결국 이뤄내야 하는 협동조합운영방식입니다."
▲ "노인 걸음으로 10분 거리인 반경 500미터의 '마을 만들기'를 시작하자. 그 안에 진료소도 있고, 협동조합 점포도 있고, 복지상담 센터도 있고, 도서관도 있는…." ⓒ프레시안 |
병원, '마을 만들기'를 시작하다
원주 의료생협이 새롭게 시도하는 운동이 있다. 지역, 마을의 개념을 행정구역에서 삶터 중심으로 구분하자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반경 500미터가 한 마을이 된다. 노인 걸음으로 10분 거리가 한 마을이라는 말이다. 급하면 달려 올 수 있고 쫓아갈 수 있는 거리. 그 안에서 진료소도 있고 협동조합 점포도 있고 복지상담 센터도 있고 도서관도 있다. 사람을 만날 수 있고 숨 쉴 수 있는 삶의 터전. 원주라는 틀 안에서도 사람들의 삶터를 중심으로 생협을 만들어 나가는 그런 구조로 협동조합의 사업방식은 진화해나갈 것이다.
지금 원주 활동가들은 젊은 층이 많다. 40대가 주축을 이룬다. 1980년대 군부독재 때 운동권으로부터 생협운동은 개량운동이라며 냉대 받은 적도 있었다. 그때 주춤거렸던 청년들이 돌아온 양 원주 생협 운동에는 활기가 넘친다. 원주에 가면 사람들은 당신이 어디에서 왔는지 묻기보다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묻고자 할 것이다. 그들은 열심히 하는 누구에게라도 손을 내민다. 함께 나가자고! 원주에 가서 사는 즐거움이 무지 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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