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보도를 보니(☞ '최고개인회원' 이명박과 4·19축사의 교훈) 우리 대통령은 조찬기도회에서 여호수아를 자주 들먹이는 모양인데, 여호수아는 모세 사후 유태인들을 이끌면서 끊임없이 "담대"하고자 애를 썼던 사람이다.
전에도 한번 이 칼럼에서 지적했듯이(☞제비뽑기의 공평함), 이명박 대통령이 재보선 결과에 대해 담대한 것은 내게 별로 놀랍지 않다. 그래봤자 한나라당은 170석인데 민주당은 84석일 뿐이고, 게다가 친박연대나 선진당은 주요 이념과 정책에서 한나라당과 뿌리가 같기 때문에, 국회의 세력판도에는 하등 영향을 받지 않는다. 더구나 "이거 기본적으로 없애버려야" 한다는 내심을 본의 아니게 들켜버린 유명환 장관이 "이거"로써 설사 국회를 가리켰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CEO 대통령이 별로 문제라고 생각했을 것 같지는 않다. 내가 보기에 우리 대통령은 국회가 시간과 비용과 정서를 상당히 낭비하는 좀 소모적인 기관이라고 여기는 듯하다. 나는 이명박 대통령이 한나라당에 대해서도 자기가 입은 덕은 별로 없고 자기가 베푼 덕은 많다고 생각하리라고 본다.
한 나라를 이끄는 대통령이 299석으로 구성되는 국회 의석 다섯 개의 향배 때문에 경기를 일으키는 것보다는 담대하고 의연한 것이 백번 다행이다. 하지만 그런 담대함이 다른 영역에서는 왜 발휘되지 못하는 것일까? 다른 것은 접어두고 대북관계만 한번 보자. 북한이 일단 원하는 것이 6·15공동선언과 10·4합의를 "인정한다"는 공표라는 점은 이미 수많은 전문가들이 지적한 바 있다. 노무현 전대통령이 그렇게 밉다면 10·4합의는 나중으로 미루더라도, 6·15선언의 정신만은 계승한다는 발언을 왜 담대하게 하지 못할까?
6·15선언은 당사자들에게 노벨평화상을 안겨줄 정도로 전세계가 축복했던 사건이었고, 이명박 대통령이 믿는다는 그리스도의 평화와 화해 정신과도 철두철미하게 부합하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소떼를 몰고 방북하는 파격적인 발상으로 세계에 행복한 충격을 안겨준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의 염원에서 맺어진 자연스러운 결실이기도 했다. 혹시 현대건설 사장 출신이라 워낙 담대한 탓에 이런 소소한 사연들은 감지되지 않을지 모르니, 그렇다면 "실용주의"라는 차원에서 한번 보자.
6·15선언은 내용이라고 해봐야 기본적으로 덕담수준의 원론으로 이루어져 있다. 통일문제의 자주적 해결, 1국가 2체제의 통일방안 협의, 이산가족 문제의 조속한 해결, 경제협력을 비롯한 남북한 교류 활성화, 합의사항 조속이행을 위한 실무회의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답방, 등이다. 실용주의적으로, 그리고 "선거판에 무슨 말을 못하냐"는 배포로 해석한다면, 끼워 맞출 수 있는 후속조치의 범위는 무한하다고 봐야 한다. 하물며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후, 이 조항 중 어떤 것이 맘에 들지 않는지 의사가 표명된 적도 전혀 없다. 그러면서도 6·15선언을 계승한다는 립서비스에는 거의 심술스럽다고 봐야 할 정도로 인색하다. 그 사이에 금강산에서는 관광객이 한 명 숨졌고, 개성공단에는 현대아산 직원 한 명이 한 달째 억류되어 있다.
북한은 로켓 발사에 이어 6자회담을 거부하고, 나아가 핵실험을 다시 할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이명박 정부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이건 담대한 것이 아니라 무감각 또는 등한 또는 직무유기 또는 무개념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 무슨 이유일지는 별로 알고 싶지 않으나 만약 오기나 심술 때문이라면, 그따위들은 과감하게 맘속에서 지워버리고 6·15선언과 10·4합의를 수용하면서 한반도 평화정착을 위해 남북협의를 시작하는 것이 담대한 자세가 아닐까? 아니면 적어도 6·15선언/10·4합의 가운데 이명박 정부가 맘에 들지 않는 대목을 수정해서 새로운 원칙에 합의하자고 나서기라도 해야 담대에 비슷해지기라도 하지 않을까?
2. 영화 <더 퀸>과 <쇼생크 탈출>에서 한 장면씩을 보자. 다이애너 비가 왕세자 찰스와 이혼한 후 사고로 사망한다. 엘리자베스 2세는 이미 다이애너가 왕실 가족이 아니기 때문에 장례는 친정집에서 알아서 할 일이라고 애써 무덤덤한 태도를 견지한다. 하지만 이런 냉혹함을 비난하는 여론이 들끓자 할 수 없이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공식 장례식을 거행하고, 400년 만에 최초로 버킹엄 궁에 반기를 게양하며, 여왕이 직접 텔레비전 방송을 통해 애도의 말씀을 공표하는 데 동의한다. 왕실을 폐지해야 한다는 의견이 20%대에 이른다는 블레어 수상의 말에 이런 획기적인 양보를 취한 것이다. 블레어는 여왕의 이런 결단력을 치하한다.
반면에 <쇼생크 탈출>의 교도소장이 보이는 행동은 정반대다. 아내가 애인과 살해된 탓에 살인죄를 뒤집어쓴 앤디는 쇼생크 교도소에서 소장의 검은돈 세탁을 도와준다. 풋내기 잡범 토미의 공부를 도와주던 앤디는, 토미가 전에 복역한 감옥에서 엘모 블래치라는 죄수로부터 들은 얘기에 접한다. 웬 여자와 그 애인을 자기가 죽였는데 그 여자의 "잘나가던 은행가" 남편이 몽땅 뒤집어썼다고 하면서 낄낄댔다는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앤디는 교도소장을 찾아가 재심의 절차를 밟는 데 도움을 청하지만, 오히려 냉대와 경멸을 당한다. 소장으로서는 앤디가 석방되면 자신의 비리가 안전하지 못할까봐 염려한 것이다. 격분한 앤디는 "어떻게 그렇게 둔감할(obtuse) 수 있느냐?"고 힐난하지만, 소장은 자기를 "둔감"하다고 불렀다는 이유로 앤디를 독방에 처넣는다. 그리고 심복을 시켜 토미를 쥐도 새도 모르게 처치해 버린다.
환경의 변화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아집을 관철하는 것이 담대라고 치면 <쇼생크 탈출>의 교도소장 노턴이 담대한 사람이다. 환경의 미세한 변화에서 중대한 의미를 읽어내고 반응하는 것을 소심이라고 치면 <더 퀸>의 엘리자베스 여왕은 소심한 사람이다. 그러나 이런 경우 누가 노턴을 담대하다고 하며 엘리자베스를 소심하다고 하겠는가?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앤디처럼 노턴을 둔감하다고 말할 것이며, 블레어처럼 엘리자베스의 결단력을 치하할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취임 후 첫 단추 인사에서부터 "강부자", "고소영" 따위 조롱의 대상이 되었고, 소고기 파동 때는 엄청난 촛불의 저항을 겪었다. 그럼에도 민심의 변화를 읽어서 적응하는 방향에서 담대하려고 하지 않고, 사사건건 배후세력을 의심하면서 자기변명으로 일관하는 방향으로 담대하려고만 노력해왔다. 대통령의 그런 태도에서 적어도 지침을 읽은 것이 분명한 경찰수뇌부가 용산참사라는 야만을 저질렀는데도 지금까지 유감 표시 한 마디가 없고, 국회의원 재보선에서 텃밭에서조차 한나라당 후보들이 패배했는데도 여전히 한미 FTA 비준과 미디어법 통과를 강행할 전투태세가 굳건하다.
그 사이에 시위대는 슬슬 숫자가 늘어나고, 원천봉쇄로 수고가 많은 일선 경찰의 맘속에는 시민들을 싫어하고 적대시하는 뒤틀린 심사가 새겨진다. 헌법이 보장하는 집회 및 시위의 자유를 원천봉쇄함으로써 분노를 부추기고 폭력을 도발하는 정부가 도리어 "폭력시위"를 자제해 달란다. 용역의 폭력은 눈감아주면서 거기에 저항한 철거민의 농성을 "도시게릴라"로 몰아간 지록위마를 계속 반복할 뿐이다. 이런 언어폭력과 거짓이 얼마나 악독한지에 완벽하게 둔감한 자세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꽃다발을 들고 웨스트민스터로 몰려드는 군중이 모두 다이애너만을 추모하는 데서 질투심을 느꼈다. 그래서 그들 앞에 나서기를 꺼려했고, 블레어의 경고성 설득 때문에 마지못해 나선 다음에도 심사는 편치가 못했다. 그러나 다이애너에게 헌화하러 온 줄로만 여겼던 한 소녀가 "이 꽃은 여왕님께 드리는 거"라고 하는 한 마디에 모든 질투심을 떨쳐버릴 수 있었다. 애당초 군중을 두려워하기만 하고 숨기만 했더라면 그런 화해의 계기는 절대 만날 수 없었을 것이다.
노턴은 은폐해야 할 범죄가 있었기 때문에 앤디의 무죄석방을 혀용하지 못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무엇 때문에 인민의 불만에 담대하고 당당하게 정공법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자꾸만 둔감하게 숨으려는 것일까? 한국어로 "담대"와 "둔감"이 무슨 뜻인지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명박 대통령이 지금 담대한 것인지 둔감한 것인지를 쉽게 알아차린다. 마키아벨리는 권력자가 경멸의 대상이 되면 가장 위험하다고 경고했다. 문명사회의 구성원일수록 드러내 놓고 내색은 하지 않지만, 대개 내심으로는 둔감한 사람을 경멸하는 것이 보통이다.
3. 지난 주 대한민국에서 가장 담대했던 정치인을 꼽으라면 나는 노회찬 진보신당 대표를 들겠다. 아고라 포토즐에 올라온 <진보신당 선거후 고급술판 벌여 충격>(☞ 관련글 보기)을 보니, 노회찬 대표는 빗자루기타로 즉흥연주를 하면서 원내 1석을 확보한 것을 축하한 모양이다. 남의 눈치보고 자시고 할 것 없이 즐거움을 민감하게 만끽하는 자세가 전혀 둔감하지 않으면서도 대단히 담대해 보인다.
▲ 4.29재보선 이후 자축의 자리를 가진 진보신당. 노회찬 대표(맨 오른쪽)가 빗자루를 들고 즉흥연주에 나섰다. ⓒ이상엽 작가 |
반면에 민주당의 주류, 그리고 민주당을 담대하게 뛰쳐나가 무려 70%가 넘는 득표율로 식상하게 당선된 후 복당을 공언했다가 다시 잠시 시간을 두고 보기로 했다고 하는 정동영 당선자는 나름대로 담대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상당히 둔감하기만 하다. 이명박 대통령이 혹시 이 글을 읽는다면 자기만 둔감한 것은 아니라고 위로를 크게 받을 수 있을 정도다.
대통령이 민심의 흐름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170석을 가진 공룡 여당이 영혼이 없는 실정에서, 제1야당이라면 앞을 내다보면서 무슨 비전 비슷한 것을 내놓는 시늉이라도 해보면 안 될까? 다섯 석 재보선에서 전패해도 둔감하고, 아마 "지역선거" 따위에는 콧방귀도 뀌지 않을 대통령이지만, 가령 내년 지방선거에서 다시 참패한다면 달라지지 않을까? 내년이면 2012년의 국회의원 선거가 슬슬 가시권에 잡히는 시점이니, 대통령이야 변함없이 둔감하더라도 한나라당 국회의원들이 계속 꾸벅꾸벅 졸지만은 못하지 않을까? 그러니까 민주당으로서는 어떻든 내년 지방선거에서 대통령의 둔감증을 치료할 수 있을 정도의 결과가 나오도록 의제를 설정하고 야권의 선거연합을 주도하는 데에 지금부터 당력을 집중해야 한다는 결론이 자명하게 나온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단 일 년 정도의 앞날도 저 민주당에게는 너무나 까마득한 미래라서 감지할 수 있는 한계 안으로 도저히 포섭하지를 못 하는 것 같다. 참으로 빼어난 수준의 둔감이다. 하기야 정동영을 공천에서 배제할 때부터 감각에 고장이 난 증상은 분명하게 드러났었다. 예비선거나 여론조사라는 정상적인 경선의 기회를 그에게 부여하지 않았다는 것이 바로 그가 출마하면 거기서 무적임을 인정했다는 증거 아닌가? 그런 사람을 공천에서 배제하는 것을 보면서 나는 무소속 출마를 만류할 만한 무슨 카드가 있는 줄만 알았다.
지나고 보니 순전히 "당을 위해 희생해 달라"는 일방적인 명령 말고는 아무 카드도 없었다는 얘기 아닌가? 확고한 지역구 기반을 가진 정치인에게 그런 황당한 명령이 쓸모가 있을 리 없다는 사실에 둔감했었기 때문에, 이제 와서는 "복당은 어림없다" 따위 복수심을 빼면 아무것도 보여줄 게 없지 않은가? 내가 지금 정동영 당선자 편을 들고 있다고 생각되는가? 나는 이번 재보선에서 가장 억울한 사람이 완산갑에서 신건이라는 정동영발 유탄에 맞아 쓰러진 이광철 전 의원이라고 보는 사람이다. 그만큼 정동영 당선자와 신건 당선자의 "무소속 연합"이란 아무리 정치판이 뒤죽박죽이라도 어이가 없다고 본다. 아울러 나는 민주당 주류의 결정을 대국적인 견지에서 수용하지 못하고, 전주의 국지적인 인기에 의존해서 자신의 존재를 과시한 것으로써 그는 박근혜와는 체급이 여러 단계 차이난다는 사실을 스스로 증명했다고 본다. 단지 자기 행동에 그런 명백한 함의가 있다는 사실마저도 깨닫지 못할 정도로 둔감할 뿐이라는 생각이다.
그렇지만 그 두 사람이 당선한 것은 엄연한 현실이다. 그리고 그들이 민주당에 복당하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다. 따라서 기왕 받아들일 것이면 그냥 삼류 가십거리 만들지 말고 간단하게 받아들이라는 말일 뿐이다. 왜 가십거리를 만들지 말아야 하느냐고 묻는 사람은 정말로 둔감한 사람이다. 정 당선자와 신 당선자가 민주당에 들어갈지 말지는 마치 경주의 정수성 당선자 또는 친박연대의 송영선 의원이 한나라당에 복당하든지 말든지의 문제만큼이나 한국정치의 현실을 개선하는 데에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뒷골목의 싸구려 화제 거리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자기들끼리 지난날의 감정적 앙금을 가지고 지져먹든지 아니면 볶아먹든지 공동체의 운명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다만 정치인이라는 사람들이 그런 일에만 민감하고 공적으로 중요한 진짜 문제에 하염없이 둔감하다면 공동체는 개선될 가망이 없어질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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