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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식 법치'로 "바른 나라"를 외치는 역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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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진시황식 법치'로 "바른 나라"를 외치는 역설

[박동천 칼럼] 폭력과 은폐의 방정식

런던에서 G20 정상회의가 열리고 있던 4월 1일, 항의시위가 벌어지던 근처에서 이안 톰린슨이라는 가판신문장수가 숨졌다. 처음에 경찰은 사인을 심장마비로 발표하면서 경찰과의 접촉은 없었다고 밝혔다. 아울러 시위대 때문에 응급처치를 위한 의료진의 접근이 방해를 받았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4월 8일 <가디언>지가 입수해서 공개한 동영상을 보면, 톰린슨은 시위대와는 떨어진 위치에서 홀로 서성이던 중 경찰에게 곤봉으로 다리를 얻어맞은 후, 뒤에서 등을 떠밀려 앞으로 고꾸라진 것이 보인다. 넘어진 후 그가 뭐라고 말을 하지만, 주위에 십여명의 경관들 가운데 누구도 그를 돕지 않는다. 이 동영상이 공개된 후, 런던 경찰당국은 톰린슨을 뒤에서 공격한 경관의 직무를 정지시키고, 유가족이 입회한 재부검을 통해 사인을 조사했다. 4월 17일 중간발표에 따르면 톰린슨은 장출혈로 사망했는데, 장출혈의 원인은 확정되지 않은 상태이다. 만약 경관의 공격이 원인이었다고 판명 된다면 해당 경관은 최소한 과실치사로 기소될 확률이 높다.

용산참사 직후인 1월 23일에 「왜곡과 은폐의 악순환」이라는 기고를 통해 나는 권력이 왜 은폐의 유혹을 받을 수밖에 없는지를 밝힌 바 있다. 미국의 워터게이트 사건, 프랑스의 드레퓌스 사건, 그리고 한국의 박종철 사건 등에서 권력의 은폐시도를 저지한 양심세력의 활약으로 사회가 정직한 방향으로 거듭나게 되었음을 상기시켰다. 진상을 가려내지 않고는 사회갈등의 치유가 불가능하다는 내 주장은 「로드니 킹 사건과 용산참사」, 「거짓말 공화국」, 「조선일보의 고발, 반갑다」 등에서 반복되었다. 이번에 런던에서 벌어진 톰린슨의 사망 역시 권력조직이 은폐의 유혹에 얼마나 취약한지를 잘 보여준다.

톰린슨의 장출혈이 경관의 폭행 때문인지 아니면 지병 때문인지는 아직 가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심장마비로 봤던 첫 번째 부검 결과가 틀렸다는 데까지는 분명하다. 그렇지만 만약 <가디언>이 동영상을 폭로하지 않았다면 십중팔구 심장마비로 처리되고 끝났을 것이다. 1991년 로드니 킹에 대한 경찰의 폭력도 이웃 주민이 찍은 동영상이 아니었더라면 없던 일로 묻혔을 것이다. 드레퓌스 사건은 피카르 중령의 수사의지와 양심적인 지식인들이 조성한 여론이 없었다면, 한 개인의 불운 정도로 치부되고 덮였을 것이다. 박종철 사건 역시 진상을 원하는 민주시민들의 여론과 황적준 박사의 용기가 없었다면 "'턱'하고 치니 '악'하고 죽었다"는 수준에서 조율되고 정리되었을 것이다.

워터게이트 사건에 관해서는 최근 프레시안북에서 두 권의 번역본이 나온 모양이다. 『권력과 싸우는 기자들』과 『워싱턴 포스트 만들기』인데, 개략적인 내용은 「이런 '족벌언론'이라면 한번 가져보고 싶다」에 소개되어 있다. 우드워드와 번스타인이라는 기자 또는 <워싱턴 포스트>라는 신문사가 진실을 향해 바친 헌신과 용기에는 양식을 가진 사람이면 누구나 찬사를 보내게 된다. 그러나 워터게이트 사건을 우리사회의 현주소와 연결해서 바라보면, 그 밖에 눈길을 줘야 할 요소가 적어도 두 가지 있다. 사법부와 공론이다.

워터게이트 사건에서 미국의 재판소들은 닉슨이 잘라낸 도마뱀 꼬리들을 공정한 법률의 잣대에 따라 재깍재깍 유죄로 판결했다. 권력의 심장부와 관련이 있을 수도 있는 문제라는 이유로 시일을 천연하며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지 않고, 목전의 사건을 증거와 법률과 양심에 따라 재판한 것이다. 백악관 대화가 녹음된다는 사실이 알려진 후, 법무장관이 임명한 특별검사는 백악관에게 녹음테이프 제출을 요구했다. 이런 특별검사를 해임하라는 닉슨의 요구를 닉슨이 임명한 법무장관이었던 리차드슨은 거부하고 스스로 해임되는 길을 택했다. 후임 특별검사마저 정의의 이름으로 테이프 제출을 요구하자 닉슨은 대통령의 행정대권에 기대 버텼지만, 연방대법원이 이것은 행정대권이 적용될 문제가 아니라고 판시함으로써 모든 방벽이 무너진 것이다.

이 사건에서 미국의 법조인들 대부분이 이렇게 단호한 태도를 보인 저변에는 물론 진실을 가려서는 법치가 불가능하다는 법조계의 상식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법조계의 상식만이 아니라 일반 사회의 상식이라는 점도 강조되어야 한다. 진상을 발굴할 실마리가 없는 일에 대해서야 사법부든 여론이든 더 이상 어떻게 할 방법은 없다. 그러나 의혹이 있고, 파고들어가 볼 만한 여지가 있는 대목에서 탐사를 그만두고 묻어버린다면, 하나의 진실이 가려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진실을 가리는 셈이 된다. 언제 탐사를 그만 둘 것인지를 결정하는 권력의 존재를 승인하는 셈이고, 그런 권력은 법보다 우월하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자기에게 불리할지 모를 일을 은폐할 수 있는 권력이 버젓이 활개를 친다면, 법은 단지 그런 권력의 하수인 노릇에 만족한다는 말과 같다. 이러한 점들이 미국 사회에서는 하나의 상식이자 사회적 통념에 해당하는 것이다.

톰린슨의 사망에서 처음 부검한 결과가 심장마비로 나온 것이 의도적인 은폐였는지 아니면 단순한 실수였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경찰과 물리적 접촉이 없이 톰린슨이 넘어졌다든지, 의료진의 접근이 시위대 때문에 방해를 받았다는 최초의 발표는 명백한 거짓말이다. 아무리 사소한 거짓말이라도, 정신질환을 앓는 사람이 아닌 한 거짓말에는 고의가 있기 마련이다. 동영상이 공개된 후 런던 경찰이 부랴부랴 재부검을 실시하고 사태의 진상을 밝히는 데 협조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영국 사회의 상식을 감안할 때 조직적 은폐를 계속하다가는 조직 자체가 위험에 처할 것이 뻔히 보이기 때문이다.

경도로 135°나 떨어져 있고, 시차만 9시간인 머나먼 나라에서 한 사람 죽은 일을 가지고 왜 이렇게 길게 말하는가? 우리사회와 아주 좋은 대조를 이루기 때문이다. 용산에서 여섯 명의 생목숨이 스러진 지 이제 겨우 석 달이 지났는데, 여론은 거의 역사의 한 페이지로 치부하는 분위기다. 검찰의 수사 결과에 대한 수많은 의문이 남았는데, 지식인 사회에서 앞장서서 망각을 축복으로 여기자는 흐름이다. 강준만은 물론이고, 홍세화마저도 용산참사를 완료형으로 여기는 듯하다. 이제야 재판이 시작되었는데 말이다.

검찰이 수사기록 공개를 거부할 수 있는 것은 이런 분위기 덕분임에 틀림이 없다. <프레시안> 기사를 보니 미공개 수사기록의 열람등사를 허용하라는 법원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검찰은 공개를 거부한다고 한다. 이유인즉슨, "객관 의무를 충분히 인식하고 있으며 편파적으로 농성자에게 유리한 증거를 감추는 것이 아니다. (재판과) 별 상관없는 정치적인 것이 포함돼 있고 사건 진행에 방해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란다. 무엇이 누구에게 유리할지 말지는 공개여부와 상관이 없다. 변호인측에 유리한 증거를 감추지 말아야 하는 것은 물론이지만, 유리하지 않은 증거라고 해서 감춰도 좋은 것은 아니다. 수사기록은 검찰조직의 사유물이 아니라 공공적 자산이며, 법정공방에서 실체적 진실을 밝히기 위해 변호인 측에서도 마땅히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법원의 명령이 없어도 허용했어야 할 일을 법원이 명령한 다음에도 거부하고 있다는 것은, 진실을 가려내야 문명사회가 유지된다는 상식에 정면으로 반하는 야만에 해당한다.
▲ "수사기록은 검찰조직의 사유물이 아니라 공공적 자산이며, 법정공방에서 실체적 진실을 밝히기 위해 변호인 측에서도 마땅히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법원의 명령이 없어도 허용했어야 할 일을 법원이 명령한 다음에도 거부하고 있다는 것은, 진실을 가려내야 문명사회가 유지된다는 상식에 정면으로 반하는 야만에 해당한다." ⓒ프레시안

조선일보사가 자기 회사와 "특정임원"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혐의로 이종걸 의원을 포함해 여섯 명을 고발했는데, 경찰은 소위 "장자연 사건" 수사를 대충 접으려는 낌새가 보인다. 장자연 문건에 조선일보 사장이 거론됨을 아느냐고 물은 이종걸 의원의 질문을 두고, 조선일보사는 장자연 사건과 관련이 없는데 관련이 있다는 듯이 말해서 명예가 훼손되었다고 고발했다. 이런 사건을 앞에 두고 적어도 수사를 하는 시늉이라도 했다고 말하려면, 장자연이 왜 그 문건을 작성했는지를 따져봐야 할 것이 아닌가? 경관도 관료조직에 속한 월급쟁이이니, 명예훼손 사건은 서울중앙지검의 사건이고 장자연 사건은 분당경찰서 사건이라는 관료제적 구분에 어느 정도는 따라야 함을 인정해 주더라도, 지금 분당경찰서가 수사를 제대로 할수록 나중에 서울중앙지검에게 도움이 될 것이 아닌가? 검찰총장, 법무장관, 국무총리, 그리고 대통령과 같은 고위직들이 관료조직 간에 업무분장으로 발생하는 낭비와 무능을 통할하라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명박 대통령은 4월혁명 기념사에서 "사회 모든 부문의 윤리 기준을 높이고, 잘 사는 나라를 넘어서 깨끗한 사회, 바른 나라를 만들어 가야" 한다고 호소했다. 내 상식으로 보면, 깨끗한 사회와 바른 나라를 만드는 데 수사기관이 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것보다 기초적으로 중요한 일은 없다. 윤리 기준을 새삼스럽게 높일 필요도 없이, 진상발굴과 공정한 절차라고 하는 문명사회의 원론적인 기본기만 발휘하면 될 일로서, "선진화는 절대로 부정부패와 함께 갈 수 없"다는 등의 과장된 수사가 필요 없는 것이다.

부패척결이라는 구호가 부족해서 한국 사회에 부패가 남아있는 것은 아니다. 권력형 부패를 수사기관이 파헤치지 못하고, 수사기관이 정치적 조직적 사회적 경제적 권력에 대해서는 눈치를 보면서, 그 때문에 발생하는 수사기관 자체의 비리들을 은폐하는 습성을 길러온 것이 핵심적인 원인이다. 이런 와중에 부패와 정직의 구분 자체가 뒤죽박죽으로 뒤엉켜, 결국 강한 자가 정직한 자고, 살아남는 자가 강한 자라는 정글의 법칙을 법치의 원리와 혼동하는 풍조까지 생겨버린 것이다.

워터게이트 사건은 최초 보도에서 닉슨 사임까지 2년이 넘게 걸렸다. 드레퓌스 사건은 최초 보도에서 최종 대단원까지 무려 12년이 걸렸다. 전제자, 즉 폭군이 무소불위의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시대가 아닌 한, 정의의 실현은 상대방의 항변권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이다. 상대가 악질일수록, 상대가 권력을 등에 업고 있을수록, 시간도 오래 걸리고 도정도 험난하다.

대한민국 사회는 2009년에 접어들면서 사법부가 정치공방의 중심에 위치한다는 사실에 주목하도록 인민에게 여러 가지 신호를 보내고 있다. 작년 말 미네르바 구속에서부터 용산참사, 신영철, 박연차, 장자연 사건, 피디수첩 수사, 등등에서, 이명박 정권은 진시황식 법치로 드라이브를 걸고 있지만, 사회구성원들은 이미 개인의 권리에 눈을 떴기 때문에 사법의 원리를 자기편의 방패로 활용할 줄을 알고 있다. 따라서 정권의 모든 시책과 조치들에 대해 심판을 내려야 하는 중책을 사법부가 더 이상 회피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공론에 참여하고 공론을 때로는 주도하는 기자나 지식인들이 이러한 역사적 변화의 기미를 조금이라도 일찍 깨닫는다면, 그만큼 사회는 깨끗해지고 나라는 바르게 될 것이다.

반면에 황우석 신드롬이나 신정아 사건 보도에서 나타났던 수준의 덩달이 입방아를 공론으로 착각하는 언론기관과 필진들은 사회의 개선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에 해당한다. 지금 박연차-정상문-노건호-권양숙-노무현으로 고리가 "이어질까 말까" 놀이에 몰입한 사람들이 바로 그렇다. 검찰 주변에서 흘러나오는 첩보를 조금이라도 정제하고 여과해서 나름의 의미 있는 스토리를 찾아보려는 시도의 흔적은 전혀 없이, 그냥 받아 적기에 몰두하다가 신정아 도배질을 해댔던 재작년의 일과 전혀 달라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점을 보면 다른 사람도 아닌 이명박 대통령이 "깨끗한 사회, 바른 나라"를 역설하는 모습이야말로, 현재 한국사회의 초상화로서 대단히 적확한 의미를 가지는 것 같다. 우리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를 자세히 따져 묻지 않는 습성은 이명박 대통령의 개성이라기보다는 우리사회에 만연한 풍토병이 아닐까? 이런 풍토병이 널리 퍼진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은 절대로 아닌 것 같고, 권력형 은폐에 너그러운 까닭이 어쩌면 거기에 있는 듯하여 한 마디 보태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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