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는 비정규직 사용 기간을 현행 2년에서 4년으로 연장하자면서 경제 위기로 인한 실업 대란을 조금이라도 막기 위해서라고 했었다. 비정규직 노동자를 위한 것이라고 틈만 나면 강조했다.
그런데 한나라당이 최근 정부안 대신 '기간 제한 규정을 아예 유예하자'는 쪽으로 방향을 잡아가자 정부의 말이 바뀌고 있다. 2년을 연장하든, 2년을 유예하든 현 정부 아래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은 없는 것은 똑같음에도, 노동부는 "미봉책"이라고 반발한다.
결국 경제 위기로 인해 일자리를 아예 잃어버릴 위기에 놓인 비정규직을 위한 것이 아니라 법 개정 자체가 목적이었던 셈이다. '비즈니스 프렌들리' 정책이라는 비판에 "억울하다"던 노동부의 하소연이 낯 뜨거워지고 있다.
노동부 "기간 제한 규정 유예는 잠깐 모면하는 것일 뿐"
최근 한나라당이 정부의 비정규직법 개정에 제동을 걸고 나서면서 노동부는 "일시적인 미봉책으로는 안 된다"며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4월 국회 처리가 무산되는 것은 물론이고, 한나라당은 법 개정 방향조차 틀 조짐이다.
여전히 김성태 의원 등 한나라당 내부에서도 일부의 반발은 있지만, 기간 연장 대신 법 조항 자체를 유예하는 방법이 거론되고 있다. 비록 노동계는 법 시행 유예를 놓고 "노동계의 반발을 누르기 위한 꼼수에 불과하다"며 반대 입장을 밝히고 있지만, 정부가 법 개정 의지를 굽히지 않는 한 현재로서는 가장 '무난한' 타협안이다.
이런 움직임에 대해 노동부는 못 마땅하다는 기색이 역력하다. 노동부 관계자는 최근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잠깐 모면하는 것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라며 "'유예'란 그때 가서 경기가 좋아질 것이라는 기대가 깔린 것인데 비정규직 문제는 경기가 좋아진다고 해소될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이 말은 경제 위기 때문에 법을 손보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노동부 스스로 언급한 것이다. 또 그간 "경제 위기 상황에서 고용 기간을 4년으로 재설정하는 것이 비정규직 고용유지를 위한 가장 현실적인 대안"이라며 법 개정 필요성의 1차적 원인을 경제 위기에서 찾았던 이영희 노동부 장관의 '소신'과도 근본적인 배경이 다르다.
처음에는 "대량 해고 막는 것이 목적"으로 '비즈니스 프렌들리' 아니라더니…
▲이영희 노동부 장관은 비정규직법 개정안을 입법 예고하면서도 '경제 위기'를 이유로 꼽았다. "지금은 정규직 전환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기업주가 비정규직을 고용하도록 하는 고용유지가 우선"이라는 것이다.ⓒ뉴시스 |
지난해 10월 처음으로 이 장관이 '100만 해고설'을 언급하며 "노동부가 (대량 해고 사태를) 그대로 보고 있을 수는 없다"며 법 개정 절차에 나설 의지를 밝힐 때도 비슷한 맥락이었다.
이후 '100만 해고설' 자체에 대한 논란이 벌어지면서 "정부가 국민을 상대로 공포 정치를 하고 있다"는 비난이 빗발쳤지만, 노동부는 중요한 것은 100만이냐 30만이냐가 아니라 "지금은 좋은 일자리를 찾을 것이 아니라 일자리를 하나라도 더 구해야하는 절박한 상황이라는 점"이라고 주장해 왔다.
심지어 노동부는 신뢰도 측면에서 잡음이 일어난 인터넷 설문조사 결과를 토대로 "비정규직 당사자도 기간 연장을 원한다"며 언론 플레이를 하기도 했다. 기업을 위한 법개정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이 발표는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줄곧 부딪혔던 "이 정부에는 오직 '비즈니스 프렌들리'만 있다"는 비난에 대한 반박의 성격도 있었다.
여당의 '법 유예' 제동에 말 바꿔 "법 자체가 문제여서 개정하려는 것"
조금씩 진짜 속내가 나오기 시작한 것은 여당인 한나라당 내부에서조차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면서 부터다. 특히 한국노총 출신 의원들은 정부의 법 개정 시도에 대해 노골적으로 제동을 걸기 시작했다.
지난 2월 이영희 장관은 국회 경제관련 대정부질문에서 "이 법이 비정규직 근로자를 보호하지 못하고 해고를 촉진하는 법이 됐다는 것은 엄연한 현실"이라며 "그 현실이 뻔히 보여서 개정해야겠다고 얘기했다"고 말했다. 법 자체가 문제라는 것이다. "5년간의 사회적 논의를 통한 진통과 고통 끝에 만들어졌다"는 김성태 의원의 지적에 대한 반론이었다.
노동부의 강력한 의지에도 불구하고 한나라당은 뜻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홍준표 한나라당 원내대표는 "지금 경제가 어렵고 정규직 전환을 하려는 중소기업의 사정도 점점 어려워지고 있기 때문에 복수노조 허용, 노조 전임자 임금 지급 금지 조항을 13년 째 유예하고 있는 것처럼 상황이 호전될 때까지 기간제한 조항을 유예하는 것이 옳다"며 개정 대신 유예로 가닥을 잡겠다는 의지를 내비쳤다.
"'유예'로도 비정규직법은 '유령'되는데…" 이참에 귀찮은 규제 없애는 게 목적?
노동계는 사실 이 방향에도 발끈하고 있다. "비정규직법을 실질적으로 무력화시키는 내용"이라는 것이 이유다.
▲ 노동계는 비정규직 기간 제한 조항의 유예 방향에도 발끈하고 있다. "비정규직법을 실질적으로 무력화시키는 내용"이라는 것이 이유다.ⓒ프레시안 |
비정규직법의 핵심 조항은 기간 제한과 차별 시정이다. 이 가운데 차별 시정의 경우 고용이 불안정한 비정규직 당사자가 차별 신청 자체를 꺼리고 있고,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업무 분리 등을 통해 차별 시정을 피해가려는 기업의 전략도 이미 상당부분 완료돼 실효성이 없다는 지적이 많다.
여기에 기간 제한 규정마저 유예되면, 꼭 그 기간만큼 비정규직법은 '있어도 없는 유령'이 되는 것이 되는 셈이다. 특히 4년이 유예되면 현 정부의 임기 동안은 비정규직법은 기업에게 전혀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노동부가 "유예는 안 된다"며 법 개정의 필요성을 계속 강조하고 있어 "이참에 기업이 비정규직을 마음대로 사용하는데 걸림돌이 되는 규제를 원천적으로 없애겠다는 것이 진짜 목적 아니냐"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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