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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는 목소리…'착취 당할 기회를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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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는 목소리…'착취 당할 기회를 달라'"

조순경 교수 "국가가 빈곤 해결? 그건 환상이다"

'고용'이 화두다. 실업급여 수급자는 매월 최대 규모를 갱신하는데 새 일자리는 생길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실직자가 늘어나니 자연스레 '먹고 사는 일'이 고민이다. '빈곤의 확대'가 우려되는, 유례없는 전 세계적 경제 위기다. 그 첫 피해자가 여성과 비정규직 등 사회적 약자임이 확인되고 있다.

정부가 이런 저런 대책들을 내놓지만, '부자 감세' 규모에 비하면 턱없다는 비판이 곳곳에서 쏟아진다. 복지 등 사회 안전망 확충에 대한 요구가 빗발치지만, 정부는 일단 기업을 살려 일자리를 늘리는 것이 우선이라는 입장이다. 대체 이 위기를 우리는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

조순경 이화여대 교수는 14일 "빈곤이 우리의 시야에서 점차 사라지고 있다"며 "빈곤 극복을 위한 일차적인 과제는 빈곤하고 차별받는 현실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일자리를 잃고 "우리에게도 착취당할 기회를 달라"고 호소하는 이들의 참혹한 현실이 사람들의 눈앞에 보이지 않는다는 얘기다.

조 교수는 이날 이화여자대학교 국제교육관 LG컨벤션홀에서 '지구화 시대 빈곤과 여성 노동'이라는 주제로 열린 제11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국제학술회의에서 "빈곤은 친밀한 관계의 결핍으로 인한 것이기도 하다"며 이 같이 주장했다.

조순경 교수의 이 같은 문제 제기는 그간 이뤄졌던 빈곤 연구와 전혀 다른 차원의 접근이라는 점에서 관심을 모은다.

"우리는 착취당할 기회조차 없다"

▲ 조순경 이화여대 교수는 14일 "빈곤이 우리의 시야에서 점차 사라지고 있다"고 말했다. 일자리를 잃고 "우리에게도 착취당할 기회를 달라"고 호소하는 이들의 참혹한 현실이 사람들의 눈앞에 보이지 않는다는 얘기다. ⓒ프레시안
"우리는 착취당할 기회조차 없다."


조 교수는 1980년대 중반, 디트로이트의 자동차 공장에서 해고당한 노동자가 한 이 이야기로 실업의 공포를 명료하게 설명했다.

조 교수는 "일본 등 외국에서 수입된 자동차로 미국의 자동차 산업이 경쟁력을 잃으면서 자동차 산업의 메카인 디트로이트 거리는 실업자로 넘쳐났고 이들에게 일자리를 갖는다는 것은 임금 수준과 근로 조건을 떠나서 특혜로 보이는 상황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20년이 훌쩍 지난 지금, "금융의 세계화는 전 세계적으로 경제적 불안정성을 심화시켜 왔다." 특히 "그 불확실성은 일차적으로 저임금 근로자와 저소득층에 피해의 부담이 전가되고 있다."

"국가가 빈곤 해결해줄 것이라는 기대는 환상"

문제는 이런 상황에서 국가가 전혀 이들을 보호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조 교수는 "그동안 연구자들이 가졌던 환상 가운데 하나는 국가 혹은 시장이 노동여성 빈곤의 문제를 일정 정도 해결해 줄 것이라는 사실"이라고 단언했다.

"어쩌면 우리는 국가에 대해 지나치게 과도한 기대를 해 왔는지 모른다. 그러나 지난 20년간의 경험을 통해 볼 때 국가와 시장은 일하는 여성들의 빈곤을 해결하는 주체가 되기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근거는 국가가 주도하는 빈곤의 비가시화다. 북경 올림픽을 치르기 위해 중국 정부가 치른 대대적인 빈민 소탕 작전은 단적인 예다. 조 교수는 "이런 방식으로 도시들이 '위생 처리'되면서 시민들의 시야에서 빈곤한 현실은 멀어져가고 있다"고 지적했다.

사정은 우리도 다르지 않다. 조 교수는 이화여대 정문 앞의 '달동네'가 고층 아파트로 재개발되면서 매일 등하교 길에서 마주치던 "빈곤의 현실은 학생과 교수의 시야에서 사라졌다"고 토로했다.

"노숙자로 드러나 보이는 남성의 빈곤, 여성의 빈곤은 드러나지 않는다"

그 가운데서도 이미 10년 전 외환 위기 때, "'자발성'으로 포장된 강요에 의해 대규모로 퇴출당했던" 여성은 최근에도 1차 피해자가 되고 있지만, 그들의 빈곤은 "더 더욱 드러나지 않는 방식으로 존재한다."

"거주할 곳이 없는 남성은 거리의 노숙자로 가시적으로 드러나 보인다. 여성에게 노숙은 성폭력 위험에 노출되는 것과 같기에 머물 곳 없는 여성들이 가게 되는 곳은 숙식을 '보장'해 준다는 티켓다방, 성매매 업소다."

지난 2월 통계청 조사 결과 1년 전에 비해 여성 취업자는 13만9000명이 줄었다. 같은 기간 남성 취업자는 2000명 줄어 남녀 취업자 감소폭의 차이는 무려 70배나 된다. 그러나 그들은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통로조차 없다."

그들의 목소리를 대변해 줄 노동조합도 대외적 힘의 여부와 별도로, 여성 조직율 자체가 하락하고 있다. 여성 노동자의 노조 조직율은 지난 1997년 19.5%에서 2005년 5.1%로 늘기는커녕 오히려 14.4%포인트나 감소했다.

이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이유다. 여기에는 언론 등 미디어도 한 몫 하고 있다. 조 교수는 "전 세계적으로 주요 미디어에서 가난한 사람들의 존재와 이미지가 사라져 가고 있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며 "빈곤한 이미지의 제거는 마치 지구상에서 빈곤이 사라져 가는 것과 같은 착각에 빠지게 한다"고 말했다.

"빈곤이 일상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특별한 사건이 없는 한 보도 가치가 있는 뉴스 거리가 되지 않는다. 사회에서 배제되고 소외된 집단이 그들의 소리를 들리게 하기 위한 방법은 평상시와 다른, '특별한 행동'을 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죽음을 각오한 단식, 삭발, 쇠사슬로 온 몸을 감기 등등의 퍼포먼스는 그들의 소리를 사회에 알리기 위한 수단이다."

▲"사회에서 배제되고 소외된 집단이 그들의 소리를 들리게 하기 위한 방법은 평상시와 다른, '특별한 행동'을 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죽음을 각오한 단식, 삭발, 쇠사슬로 온 몸을 감기 등등의 퍼포먼스는 그들의 소리를 사회에 알리기 위한 수단이다." ⓒ프레시안

"빈곤의 또 하나의 원인, 친밀한 관계의 결핍"

"빈곤은 친밀한 관계의 결핍으로 인한 것이기도 하다"는 조 교수의 지적은 통계나 과학, 논리를 통해서 빈곤 문제를 해석하는 기존의 연구와는 또 다른 발상의 전환이다. 조 교수는 "관심과 보살핌이 있는 관계에서 빈곤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즉, 공동체의 해체가 빈곤을 확대시키는 또 한 축이라는 얘기다.

"전체 인구의 5분의 1이 빈곤하다는 것은 5분의 4는 빈곤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빈곤하지 않은 사람들이 빈곤한 사람들의 삶에 지속적 관심을 가지고 공동체적 의식으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면 빈곤한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효용과 효율의 가치가 지배해" 이미 원자화, 개별화된 사회에서도 특히 실업과 고용불안은 더 넓은 관계의 결핍을 초래한다. "일하지 않는다는 것은 곧 나의 삶에 타인이 부재하다는 의미"이며 "고용의 임시성은 노동현장에서의 사회적 관계의 형성 및 노동공동체 형성을 어렵게" 하기 때문이다.

그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노출되지 않은 소위 '미개 사회'에서는 한 사회 공동체가 통째로 빈곤한 상황에 빠지지 않는다면 그 공동체의 개인들은 굶어죽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그가 "관계의 부재가 빈곤을 야기하는 하나의 원인이라면 빈곤으로부터의 해방은 공동체적 관계의 부활, 나눔과 돌아봄을 통해 이뤄질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유다.

"대학과 학교, 연구자가 먼저 스스로를, 스스로의 노동을 돌아봐야 한다"

그리고 그는 "나눔을 '선한 마음'으로 가능한 도덕적 행위나 개인 차원의 구도행위"로 생각하는 것을 벗어나 연구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나눔의 의미가 무엇인지, 가능하게 하는 조건은 무엇인지, 활성화시킬 제도적 장치는 무엇인지, 정규직은 왜 비정규직의 삶에 무심한지, 빈곤 해결과 차별 해소의 방법으로서의 관계 형성은 어떻게 하는 것인지 등은 연구가 필요한 과제다."

물론 조 교수의 이 같은 고민이 당장 눈앞에 닥친 경제 위기의 해법은 될 수 없다. 정부는 오직 '가진 사람'의 세금을 깎아주는 데만 혈안이 돼 있고 관계조차 결핍된 이들을 위한 현실적 생존 방안에는 큰 관심이 없다. 이런 상황에서 '나눔'이라는 화두는 '꿈같은' 얘기로 들리기도 한다.

그러나 우선 학계를 향해 "스스로 돌아봐야 한다"고 요구하는 조 교수의 질문은, 어쩌면 점점 더 각박해지는 사회를 바꿀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

"지구상의 빈곤은 지식의 부재로 인한 것이 아니다. 직접 겪을 때까지 아무리 알려주고 말해도 못 알아듣는 인간 인식 능력의 한계가 하나의 원인이라면, 다른 하나는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의 인간의 복잡한 욕망 구조, 그리고 다양한 이해관계에 의해 움직이는 정치 때문일 것이다.

교육자로서, 그리고 연구자로서 대학에 있는 나 자신의 이해와 관심, 내가 있는 자리, 그리고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해 거리두기를 하고 냉정하게 돌아봐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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