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대로 대통령의 참평포럼 연설이 공무원의 중립의무조항 위반으로 결론나자 청와대는 공언해 온대로 선관위의 결정에 불복하고 법적 대응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어차피 대통령의 정치활동의 범위와 수준을 둘러싼 공방이 한참동안 진행될 모양이니 법률적 판단은 당분간 유보하기로 하자. 다만 차제에 이번 사태가 갖는 정치적 함의에 대해서 한번쯤은 짚어 볼 필요가 있을 듯하다.
'판을 흔들어보고 싶은 노 대통령'
바둑에 '용패'라는 것이 있다. 그냥 두면 '무난하게 질' 바둑판을 흔들기 위해 불리한 패를 자청해 둘 때 쓰는 말이다. 그러니까 이도저도 안될 때 마지막으로 한번 둬보는 꼼수일 수도 있고, '밑져야 본전'이라는 식으로 한번 해보는 승부수일 수도 있다. 용패에 대해서는 평범하게 대응하는 것이 상책이다. 용패 자체가 무리수이므로 평범하게 두면 시비의 여지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누가 바둑을 심리전이라 했던가. 승부의 신은 바로 이 대목에서 장난기를 발동한다. 상대의 용패를 보는 순간 '욱'하고 성질을 내거나 '아예 버릇을 고쳐놓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은 것이다. 이렇게 작정하고 나서면 열에 아홉은 상대의 항복을 받아낼 수 있다. 그러나 열에 한번 정도는 다 진 바둑을 뒤집는 그야말로 '멋진 승부수'가 통하기도 한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용패를 써서라도 판을 흔들고 싶은 유혹에 빠지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용패는 정색하고 응징하려는 사람만 위험부담을 안는 것이 아니다. 사실은 용패를 쓰는 사람이 먼저 위험부담을 안게 된다. 아무리 불리해도 포기하지 않고 조금씩 조금씩 추격해 오는 사람 앞에서는 누구든 더 긴장되고 부담되는 법이다. 그리고 바로 거기서 실수가 나오고 역전의 실마리가 주어지는 것인데 용패는 이 모든 변화와 역전의 가능성을 먼저 버리고 용패 하나에 모든 것을 올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열에 하나도 안되는 확률에.
이런 식의 승부는 "져도 그만"으로 '막가지 않으면' 좀체 생각하기 어렵다.
이번 사태에서 '용패'를 쓰는 대통령과 '욱'하고 화를 내면서도 행여 말려들까 착점을 망설이고 있는 한나라당을 연상했다면 지나친 것일까? 노무현대통령은 어떻게든 향후 정국을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가게 만들려고 하는 것처럼 보인다. 자신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한 '친노 : 반노' 구도라도 자신이 정국의 주변부로 밀려나는 것보다 백번 나은 선택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사실 이러한 구도는 지지율 20-30%대의 대통령에게는 그리 나쁘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집토끼'와 '산토끼'의 딜레머
그러나 어떤 형태로든 50% 내외의 득표를 목표로 승부를 해내야만 하는 범여권 주자들에게 이 구도는 참으로 고통스러운 질곡이다. 20-30%대의 '집토끼'를 잡으러 가면 갈수록 나머지 '산토끼'들은 점점 멀어져만 가는데, 그렇다고 그 중 손쉬운 '집토끼'를 팽개치고 기약없이 '산토끼'를 좇아 헤맬 수는 더욱 없기 때문이다. 고건, 정운찬이 이 딜레마를 풀지 못해 포기했던 것이고, 정동영, 김근태도 이 딜레마 앞에서 몇 개월째 좌고우면하고 있는 것 아닌가?
이러한 정황이 더욱 역설적인 것은 이 딜레마가 노무현의 힘과 영향력을 능가하는 누군가가 후보로 나서 자신을 중심으로 정국을 재편할 때에만 해소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여기에 더해 한나라당이 '친노:반노' 구도를 은근히 유도하면서 '즐기고' 있다는 사실도 여권후보들을 곤혹스럽게 만드는 변수다. 한쪽에는 자신을 중심으로 판을 짜고 싶어하는 대통령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대통령의 그런 구도를 내심 반색하며 편승해 가는 강력한 야당이 있는데, 지지도 2-5%에 불과한 여권의 후보들이 무슨 수로 이 구도 전체를 흔들어 자신들을 중심으로 판을 재편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활로는 있는 법, 나는 DJ의 어제(8일) 발언 속에 그 유일한 활로가 있다고 생각한다. "대통합에 기여한 사람이 후보가 될 것이다." 난데없는 '배제론'과 소통합, 분열과 편가르기가 난무하는 지금의 형국이 소모적일수록 대통합의 당위는 강력해진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의 혼돈을 대통합을 위한 1단계 정지작업이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노무현의 틀'은 대통합에 도움이 되는 것인가?
대통합의 관점에서 볼 때 '노무현 프레임'은 정(正)의 방향성을 가질 수도 있고 부(否)의 방향성을 가질 수도 있다. '노무현 프레임'이 '한나라 : 반·비한나라' 구도로 확대되면, 대통합과 정의 방향에서 시너지를 만들어내게 될 것이나, '노무현 프레임'이 '노 : 비·반노' 구도로 고착되면 대통합과 부의 방향에서 부딪치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갈림길에 서 있는 사람은 노무현 대통령만이 아니다. '배제론'을 미봉한 중도통합신당도, 탈당을 예고한 전직 당의장들도, 열린우리당을 '사수'할 사람들도, 독자적 활로를 모색하고 있는 손학규, 천정배도, 그리고 '민주평화개혁'의 정체성을 갖고 있는 세력들도 모두 대통합의 갈림길에 서 있다.
대통합의 동력은 공동의 적이 가시화 될수록 강해지는 법이다. 한나라당과 보수세력의 지난 4년간의 행보는 이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노무현 참여정부'라는 구체적 '적'을 앞에 두고 한나라당과 범보수세력은 자신들 내부의 '사소한' 차이를 넘어 '올드'와 '뉴'가 하나 되어 보수대통합을 이뤄내지 않았던가. 이명박, 박근혜 진영 사이에서 자못 적대적인 공방이 벌어지고 있음에도 이들이 아직 한나라당이라는 틀을 유지하고 있는 것도 보수대통합의 강력한 힘 때문이 아니던가.
그러므로 한나라당과 이명박, 박근혜를 구체적으로 상정하고 공세적으로 진영을 가른 '노무현 프레임'이 '방법론적'으로 범여권의 대통합을 이루어내는 데 매우 효과적일 것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노무현의 방식'을 통해 'DJ의 방향'으로 가려면…
문제는 지금껏 늘 그래 왔듯이 왜 출마도 안할 '노무현'이냐는 데에 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노무현'의 절제와 양보를 요구할 수도 있고, 범여권 주자들의 분발을 촉구할 수도 있다. 과연 어떤 것이 맞는 것일까? 과연 어떤 것이 가능한, 실효성 있는 방안일까?
'DJ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노무현식'으로 달려가는 것이 뭐가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범여권 주자들의 좌고우면과 지지부진함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답답한 심중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싶은 6월의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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