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지고 보면, 한 시대와 사회의 성격이나 과제에 대한 일반시민의 인식과 기억, 나아가서 국가공동체의 집단적 정체성도 대형 불법비리 스캔들의 처리과정에서 대부분 형성되고 규정된다. 한 마디로 역사 의식과 규범 의식의 가장 중요한 구성요소는 동시대의 불법비리에 대한 공통의 기억과 해법인데, 이것을 만들어가는 정치사회화 과정에서 언론매체가 제공하는 기초적인 법제지식과 다양한 법리논쟁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지난 한 달간 언론매체를 뜨겁게 달군 대형사건들, 이를테면 용산철거민 참사, 촛불재판 압력, 연예계 성상납, <PD수첩>과 YTN 언론인 구속, 박연차 뇌물스캔들도 공론과정과 사법절차를 거치며 시민법교육의 생생한 현장으로 기능했다. 예컨대 용산 철거민 참사는 생존권 투쟁에 대한 정당한 경찰력 행사와 부당한 과잉진압의 차이를, 신영철 대법관사건은 정당한 사법행정권 행사와 부당한 재판개입의 차이를, 피디수첩 손보기 수사는 개인인격의 명예훼손과 정책당국의 명예훼손의 차이를 집중 교육했다.
반면 지난 3월 30일 국무회의 통과로 드디어 법령의 허울을 걸친 현 정권의 인권위 무력화 시도는 만만치 않은 불법의 무게와 사회적 파장에도 불구하고 만족할만한 법교육적 효과를 내지 못했다. 정치권의 주요 쟁점으로 부상하지 못한 탓에 언론의 주목을 덜 받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인권위 사태의 정점을 찍은 지난 30일의 인권위의 헌법재판소 권한쟁의 심판청구도 별다른 세간의 이목을 끌지 못했다. 인권위의 독립성이라는 법원칙과 국가기관간의 권한쟁의 심판제도에 대해 집단적으로 학습할 좋은 기회를 놓친 셈이다.
비상식적 상황, 헌법 소송은 인권위가 뽑아든 마지막 카드
헌법재판소의 권한쟁의 심판은 일반적으로 피청구 기관(이번에는 행정부)의 권한의 유무나 적정범위를 쟁점 삼아 진행된다. 국가기관 상호간 보다는 국가기관과 지자체 사이나 지자체 상호간에 발생빈도가 높다.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 상호 간에는 권한다툼이 발생해도 제3자인 헌법재판소로 달려갈 가능성이 낮다. 나름대로 다양한 견제와 균형 법리들이 확립된 데다 상호 대등한 최고 권력을 가진 3부가 자율적으로 다툼을 해소하지 못하고 제3자인 헌재로 달려가는 게 아무래도 어색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인권위가 행정부의 직제령 개정권 일방행사에 대해 국무회의 의결을 몇 시간 앞두고 헌재에 권한쟁의소송을 낸 것은 몹시 이례적이고 흥미로운 사건이다. 중앙부처 등 중앙행정기관의 직제는 모두 대통령령인 직제령에 의해 정해진다. 하지만 대통령을 수장으로 삼는 행정부 소속인 중앙행정기관은 대통령 방침에 따른 직제개정에 절대로 반기를 들 수는 없다. 인권위가 대통령과 행정부를 상대로 권한쟁의심판을 낼 수 있는 이유는 대통령과 행정부 소속기관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권위가 헌재로 달려간 이유는 직제령 주무부처인 행안부가 국내외 여론에 귀를 닫고 인권위 직제축소를 일방적이고 자의적으로 강행했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인권위는 행안부의 직제축소안에 대해 줄곧 강력하게 반대했다. 논란이 지속된 지난 3개월 동안 인권위가 받은 국제사회와 시민사회의 관심과 성원은 누구도 예상치 못했을 정도로 크고 뜨거웠다. 짧은 기간 동안 국내외에서 높은 평판과 위상을 획득한 인권위를 격려는 못할망정 축소할 명분은 누가 봐도 없는 게 분명했다.
인권위원장과 상임위원도 이례적으로 국무회의와 차관회의에 각각 참석하여 직제축소의 부당성을 호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관회의와 국무회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만장일치로 조직축소안을 통과시켰다. 이렇듯 비상식적인 상황에서 인권위가 뽑아든 마지막 카드가 헌재에 대한 권한쟁의심판청구, 즉 일방적 직제축소에 대한 헌법소송제기다. 정부입법절차를 모두 거치고 관보게재만 남겨놓은 일방적 직제개정령이 인권위의 독립성을 침해한 무효처분임을 확인해 달라는 것이다. 안경환 인권위원장은 소장제출 직후 기자회견을 열고 권한쟁의심판이 내려질 때까지 직제개정령의 효력을 정지해 줄 것을 헌법재판소에 특별히 당부했다.
국회를 통과한 법률안이 대통령의 공식 선포절차를 기다려 효력을 발생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국무회의를 통과한 대통령령도 관보에 게재될 때 비로소 효력이 발생한다. 관보게재에 소요되는 시간은 대략 1주일. 직제개정령이 지난 30일 늦은 오후에 국무회의를 통과했기 때문에 관보게재는 특별한 일이 없으면 4월 6일 월요일로 예상된다.
▲ 지난달 30일 오전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에서 국가인권위원회를 대표로 김칠준 사무총장, 박재승 변호사, 정연순 변호사(왼쪽부터) 등이 조직 축소, 정원 감축과 관련 행정안전부의 개정안에 대해 권한쟁의심판을 청구하고 있다. ⓒ뉴시스 |
헌재, 직제령 발효일 이전에 가처분 여부 결정해야
4월 6일자 관보게재로 개악 직제령이 효력을 발생하면 그날로 구 직제령에 따른 인권위의 조직편제는 효력을 잃는다. 다시 말해서 관보게재 시점부터는 새 직제령에 따라 국/과의 숫자와 명칭, 그리고 구성이 바뀌고 결재계통도 당연히 바뀐다. 인권위는 침통하고 흉흉한 분위기 속에서도 새 직제령이 발효즉시 빈틈없이 시행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진행 중일 것이다.
헌법재판소법 제65조에 따라 헌재는 직권 또는 신청에 의해 심판대상이 된 피청구인의 처분의 효력을 최종결정을 선고할 때까지 정지하는 결정을 할 수 있다. 인권위도 당연히 개정직제령의 효력정지 가처분결정을 내려줄 것을 신청했다. 이에 따라 헌재는 개정 직제령의 인권위의 업무독립수행권을 실질적으로 침해했는지를 따지기에 앞서 직제개정령에 따라 조직개편이 전면적으로 단행될 경우 인권위 측에 돌이키기 어려운 손해가 발생하는지를 따져보고 그에 따라 효력정지 여부를 먼저 결정해야 한다.
헌재는 기왕이면 4월 6일 새 직제령의 발효일 이전에 가처분신청의 인용여부를 정해야 한다. 어쩔 수 없는 절차 때문에 이 시한을 맞추기 어려우면 정부에 관보게재 연기를 요청해서라도 직제령의 정식발효 이전에 효력정지여부를 결정해야 한다. 이렇게 해야만 새 직제령의 발효시점에 발맞춰 단행될 인력 및 보직 감축으로 맘미암아 뒤따를 조직차원의 엄청난 고통과 혼란을 미리 예방할 수 있다. 헌재가 지금 서두르지 않으면 설령 나중에 권한쟁의심판에서 인권위의 손을 들어주더라도 인권위 조직과 직원이 새 직제령 탓에 떠안게 될 부당한 피해와 상처를 말끔하게 '원상회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무릇 모든 가처분신청이 그렇지만 대규모 인력감축과 보직축소가 걸린 인권위 사안에서는 가처분권자가 정말이지 지체없이 움직여야 옳다. 헌법재판소가 조금만 생각해 보면 인권위의 가처분신청에 대해서는 직제령 발효시점이라는 판단기한이 사실상 설정돼 있는 점을 알 수 있다. 헌재는 이때까지 가처분 인용여부를 판단하든가 정부에 관보게재를 늦춰줄 것을 요구해야 한다.
44명이 뭐 그리 대수냐고?
그 정도로 서두를 사안인지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20%가 넘는 44명의 인력감축에 더해 대국대과주의 전환으로 대규모 보직축소까지 당한 인권위 조직이 지금 치열한 생존투쟁에 시달리고 있을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구성원들 모두가 윈-윈(win-win) 상생할 기회를 제공하는 크고 작은 조직 확대와 달리, 대규모 조직 축소는 어제까지의 '한솥밥 식구들' 사이에도 야비하기 그지없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낳기 쉽다. 각자가 모두 생존본능에 따라 몸부림치기 때문이다.
새 직제령이 발효하면 인권위 조직은 국장자리 둘과 팀장자리 11개가 날아가고 44명을 솎아내야 한다. 22인의 팀장 중 절반은 4월 6일자로 더 이상 팀장이 아니다. 그 중에서도 별정직 팀장들은 팀장보직을 못 받는 순간 팀장자리는 물론 일자리 자체를 잃는다. 일반직 팀장도 이론적으로는 전적이 가능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받아주는 부처가 없다. 그렇다고 단순과원으로 남는 것도 용이하지 않다. 보직축소와 함께 직급별 인원도 줄기 때문이다.
크고 작은 관료조직은 그래서 조직 확대에 목숨을 건다. 위계조직이 잘 돌아가려면 무엇보다도 지속적인 조직 확대를 통해 인사숨통, 즉 승진자리를 확보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이걸 제대로 못하는 인사권자는 다른 걸 아무리 잘해도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다. 그 결과 각 부처의 증원요구안을 그대로 합하면 공무원 수가 매년 최소한 1.5배가 늘어날 정도다. 별별 명분과 핑계를 다 동원해서라도 다만 한 자리라도 늘리기 위해 애쓰는 게 조직사회의 미덕으로 칭송된다. 이런 상황에서 사상 유례없이 20% 조직 감축 핵폭탄을 맞은 인권위 조직은 그야말로 원망과 두려움으로 쑥대밭이 돼 있을 게 뻔하다. 이런 흉흉하고 낭패스런 조직분위기는 별정직과 계약직의 퇴출과 일반직과 기능직의 이적이 완료될 향후 1-2년간은 지속될 것으로 예상된다.
혹자는 44명이 뭐 그리 대수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부당한 해고는 그 자체로 가장 중대한 인권침해일 뿐 아니라 일반시민의 관점에서도 인권의 손발이 무려 21%나 잘려나가는 현 상황은 비상상황이 아닐 수 없다. 더군다나 일방적 조직축소를 조금도 양해한 바 없는 인권위 입장에서는 마른 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셈이다. 강간당한 것에 비유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일방적인 직제개정령에 따라 요구되는 전면적인 조직개편 및 후유증 부담은 피해자인 인권위의 2차 피해로 이해할 수 있겠다.
결론적으로 대규모 인력감축과 보직축소 단행을 목전에 둔 현재의 인권위 상황은 당사자들과 인권위 조직은 물론 국민의 관점에서도 큰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인권위 조직축소가 정녕 국민의 뜻이고 원칙에 맞는다면 아무리 일시적인 고통과 부작용이 따르더라도 감수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위헌적이고 자의적인 권력남용의 결과라면 한시라도 빨리 바로잡아서 쓸데없는 고통과 상처를 최소화해야 옳다. 헌법재판소는 오늘이라도 신속하게 가처분신청을 받아들임으로써 현 정부의 인권가치 몰이해에서 빚어진 쓸데없는 인권위의 고통과 혼란, 그리고 그에 따른 인권의 정체(停滯)와 퇴행에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 그것이 헌법재판소의 존재의의다.
인권위는 권한쟁의심판의 당사자적격이 있다
인권위의 권한쟁의심판청구가 형식적 이유로 각하될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헌재법상 상호간에 권한쟁의가 가능한 국가기관이 국회, 정부, 법원 및 중앙선관위로 열거돼 있기 때문이다. 권한쟁의 당사자적격을 가진 국가기관을 4개의 헌법기관으로 한정한 이 조항을 헌재는 이른바 예시조항으로 본다. 여기서 말하는 "국가기관"의 범위는 "헌법해석을 통하여 개별적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헌재는 국회의장과 국회의원을 권한쟁의 당사자적격을 가진 국가기관으로 인정했다. 하지만 헌재는 "그 국가기관이 헌법에 의해 설치되고 헌법과 법률에 의해 독자적인 권한을 부여받고 있는지 여부"를 판단기준의 하나로 거론함으로써 여전히 헌법기관을 전제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인권위는 분명히 헌법기관은 아니다. 그러나 기본권 보장을 직접적이고 전면적인 목표로 삼는다는 점에서 헌법적 국가기관이며 헌법기관과 마찬가지로 무소속 독립기관이라는 점에서도 헌법적 국가기관이라고 할 수 있다. 한마디로 인권위는 성격상 헌법기관이 마땅하나 헌법개정의 어려움 때문에 준헌법기관으로 설계됐다. 물론 인권위와 행정부 간에는 분명히 직제령 개정권의 목적과 성격, 절차와 한계를 둘러싸고 권한다툼이 존재한다. 이런 권한다툼을 적절하게 조정하고 해소할 다른 방법도 마땅치 않다. 한마디로 인권위는 당사자적격을 갖는 게 틀림없다.
본안판단으로 들어간다고 할 때 헌재는 누구 손을 들어줘야 하나? 차관회의와 국무회의에서 인권위의 입장을 공개적으로 옹호한 장차관이 한 명도 없었던 걸 보면 인권위 축소는 이명박 대통령과 정권차원의 특명사항이 틀림없다. 한편 시민사회와 국제사회는 인권위의 독립성을 이유로 대통령과 정권이 잘못한다는 입장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권위와 행정부 사이의 권한쟁의는 한편에는 이명박 정권과 보수우파, 다른 한편에는 진보적 시민사회와 유엔 등 국제사회가 당사자인 글로벌 권한쟁의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정치적으로 민감하고 국내외 시선이 집중된 인권위 사안에서 헌재는 과연 누구의 손을 들어줄 것인가?
정부 기분따라 바뀔 수 있는 인권위, 독립성을 뭐로 말하나
설마하니 헌재가 행안부의 손을 들어줄 리는 만무할 것이다. 만약 행안부가 인권위의 적극적 반대에도 불구하고 일방적으로 직제령 개정을 밀어붙일 법적 권한을 갖는다면 인권위의 독립성은 완전히 허구가 되고 말 것이다. 대통령과 행정부가 기분 나쁘면 아무 때나 직제령을 고쳐서 반토막낼 수 있는 인권위를 무슨 수로 대통령과 정부에 독립적인 인권위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인권위는 업무수행의 독립성을 가질 뿐 조직직제의 독립성은 갖지 못한다는 형식논리로 헌재가 발뺌할 수도 없다. 조직직제의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하지 않으면 업무수행의 독립성 확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대통령과 행안부가 인권위의 인력과 직제를 아무리 축소해도 남은 인력과 조직의 업무수행에 대해서 부당한 간섭과 방해를 하지 않으면 독립성이 보장되는 것 아니냐'는 식의 막가파식 난센스 형식논리에 기대지 않는 이상 헌재가 행정부 편을 들어주기는 몹시 어려운 사안이다.
사실 인권위는 속성상 권력통제기관이기 때문에 언제라도 대통령과 정권의 눈 밖에 나기 쉽다. 만약 대통령과 행안부가 인권위 직제를 일방적으로 바꿀 정당한 권한을 갖는다면 인권위의 활동이 대통령의 눈 밖에 날 때마다 조금씩 인권위의 규모를 축소하는 방식으로 보복성 경고를 날릴 것이다. 이 경우 인권위는 대통령과 행정부에 대해 권고할 때마다 자기 검열과 단속을 강화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헌재의 형식적 해석은 반드시 인권위의 독립성을 실질적으로 부인하는 효과를 낳는다.
표현의 자유 관점에서 조금 풀어서 설명해 보자. 인권위 독립성의 실질은 표현의 자유, 즉 헌법과 국제인권법에 따라 자유롭게 권고의견을 표명할 자유에 있다. 따라서 표현의 자유에 대한 자기검열 및 냉각효과(chilling effect)를 정당화하는 방향의 헌재 해석은 헌법해석상 용인되지 않는다. 한마디로 인권위의 권력감시 속성상 업무독립성과 기능독립성(functional independence)은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 떼어놓을 수 없다. 유엔 파리원칙해설서와 국가인권기구국제조정위원회가 인권위 독립성의 핵심요소로 기능적 독립성, 특히 예산과 인력의 독립적 운용을 꼽는 것도 같은 이유다.
헌재와 인권위는 인권 보호 상호보완적 관계…가처분 판단 서둘러야
헌재와 인권위는 사실 인권의 보호라는 동일한 업무를 수행하는 국가기관이다. 아마도 형제지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헌재가 근엄한 형 역할이다. 헌재와 인권위가 좋은 형제처럼 서로 자극하고 격려하며 인권보장을 위해 매진할 때 인권수준이 높아진다. 인권보장을 위해 분업과 협업을 하는 헌재와 인권위는 하나가 힘을 잃으면 다른 하나도 머지않아 힘을 잃는 그런 상호보완적 관계에 있다. 지금은 헌재가 인권위를 대공황에서 건져내야 할 시점이다. 헌재는 법원칙과 절차를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강행된 인권위 직제개정령의 효력을 일단 정지시켜야 한다. 이것이 절차요건상 여의치 않으면 최소한 정부 측에 관보게재 연기를 요청하고 가처분여부 판단을 서둘러야 한다.
마지막으로 인권위에 대한 당부 하나. 44명 혹은 21% 인력감축보다 정말 무서운 것은 살아남은 인권의 공복(公僕)들이 배전의 새로운 각오를 다지는 대신 "바람보다 먼저 눕는" 자기검열의 악습에 길들여질 가능성이다. 만약 인권위원과 직원의 정신과 의지가 독립성의 튼튼한 요새가 되지 못하고 조직축소 따위 보복의 두려움에 사로잡혀 썩어간다면 그때 인권위는 단순한 인권장사꾼으로 전락하고 국내외의 신망을 완전히 상실할 것이다.
신뢰는 눈사람 같아서 쌓아올리는 데는 시간이 걸리지만 녹아서 사라지는 데는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만약 인권위의 인력 20% 감원이 머지않아 20% 인권업무 감축으로 이어진다면 이는 그동안 쏟아졌던 국내외의 성원에 보답하는 길이 아닐 것이다. 인권위는 지금보다 20%씩 노동시간을 늘리고 노동강도를 높이는 한이 있더라도 종전의 업무수준을 그대로 유지할 비장한 결의를 다져야 한다. 이것이 현 국면에서, 악에게 지지 않고 악을 선으로 이기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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