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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을, 그 삶의 아우성을 벌써 잊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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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용산을, 그 삶의 아우성을 벌써 잊었나요"

[기고]지금 향긋하고 싱그런 '봄'을 기다리나요

봄입니다. 남녘에서는 봄맞이가 한창이라고 합니다. 햇살에 눈부신 섬진강의 작은 물결과 연두 빛 새순과 하얀 꽃잎은 얼마나 아름다운가요. 지리산 자락 산수유는 이미 만개하여 그 자리를 또 다른 봄에게 내주고 있겠지요. 그런데 지금 그 연한 봄 내음과 빛을 설레이는 마음으로 기다릴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젊은 시절 불렀던 어느 시인의 시가 입 안에서 계속 멤 돕니다. "봄, 너 먼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 진정 그런가요.

이명박 정권이 출범한 지 일 년이 지났습니다. 희대의 설치예술 '명박산성'이 상징하는 것처럼 이명박 정권은 법과 질서의 확립을 내세우며 신자유주의 경찰국가다운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 본질은 자본과 권력을 지닌 소수의 5%와 그로부터 철저히 배제된 다수의 95%가 기름과 물로 분절된 이 야만의 사회를 수호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노골화된 계급사회에서 '국가권력의 중립성'을 되 내이는 것은 이미 사치가 된 지 오래입니다. 사실 언제 국가권력이 억압, 수탈, 차별, 배제 받는 자들에게 중립적으로 행위 한 적이 있었나요. 누가 무어라고 해도 그것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하나의 이데올로기일 뿐입니다.


그렇기에 인간적 삶을 위해 보장되어야 한다는 기본권의 목록은 항상 권력과 지배세력에 의해 능욕의 대상이 되어왔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사회에서도 그것은 만신창이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자유로운 집회는 말 뿐 항상 진압장비로 무장한 경찰의 포위와 위협, 폭력 속에 놓여있습니다. 거짓을 말하고 대중을 선동한다는 혐의를 받고 있는 언론은 억압적 국가기구들의 공격 대상된지 오래입니다. 거대자본은 광고라는 합법적 무기로 그들의 숨통을 조입니다. 인권이 지니는 보편적 가치는 상대화, 차별화되면서 이런저런 유보조건들에 의해 그 생명력을 잃고 있습니다.

그 명칭도 아이러니한 '국가인권위원회'의 실질적 해체 시도는 그 상징입니다. 왜 아이러니하냐구요. 묻습니다. 국가 스스로가 인권을 제고시킨 사례가 단 한 건이라도 존재하나요. 오히려 인권의 역사는 그것이 억압, 수탈하는 국가와 지배세력들에 맞서 싸운 대중의 피의 대가라는 사실들만을 담담하게 기록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국가인권위원회'를 자신들의 의사관료기구로 만들려 하는 것 아닌가요. 아비규환의 용산을, 그 삶의 아우성을 벌써 잊으셨나요. 생의 터전을 지키고자 한 선량한 시민들을 테러리스트로 몰아 적대시하고 그것도 모자라 그 부당성을 고발하는 이들마저 체포, 구금하는 이명박 정권을 반인권의 경찰국가로 규정하는 것이 아직도 부당하다고 생각합니까. 좀 더 지켜봐야 합니까.


하지만 더 무서운 것은 따로 있습니다. 무엇이냐구요. 용산사태는 주권자의 범주를 재구성하고자 하는 이명박정권의 본격적 공세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첫발에 불과하다는 사실입니다. 그것도 소수 권력자들의 자의적인 판단에 의해서요. 용산사태는 이제 이 사회 구성원들에게 주어져 있다고 믿어 왔던 시민권이 더 이상 보편적인 것이 될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자본의 이익과 그것을 옹호하는 부당한 권력에 저항하는 자, 아니 그렇게 거창하게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죽지 못해 사는 삶을 유지하기 위해 저항할 수밖에 없는 평범한 자들은 언제 저 권력에 의해 주권자로서의 지위를 박탈당할 지 알 수 없습니다. 형식적이나마 주권자로 남고 싶다면, 말없이 살거나 그냥 고이 죽어야 합니다.

혹시 인간 이하의 토끼몰이식 사냥감이 되고 있는 이주노동자들의 모습을 보며 "나는 아니야, 이 나라의 주권자인 나는 그들과 달라"라며 자위하셨나요. 천만의 말씀. 용산철거민들의 모습이 그들의 그것과 무엇이 다른가요. 바로 이것이 '5% 대 95% 사회'의 실체입니다. 그 5%에게 나머지 95%는 그저 먼 나라의 이방인일 뿐입니다. 불편하신가요. 하지만 이것이 혹시 자랑스러워하실 지도 모를 지금 대한민국의 실체입니다.


어디 이 뿐인가요. 이명박정권을 탄생시키는데 일조하였다는 극우세력, 이른바 '아스팔트보수세력'의 반민주적, 반사회적 언사와 선동이 공공연히 횡횡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용산사태 등을 국가권력을 무기력화하고자 한 좌파세력의 시도로 규정하며 이명박정권에게 더 강력한 공권력을 행사하여 국가기강을 바로 세울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자신들이 법치를 초월하는 힘으로 직접 행동하겠다고 위협하면서요.

이러한 주장은 만일 이명박정권이 파시스트권력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자신들이 그렇게 할 것이라는 점을 천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헌법위기를 조장하는 것이고 상황에 따라서는 헌법을 파괴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입니다. 이들은 분명 파시스트들입니다. 모든 문제를 특정 이념을 지닌 세력들에게 투사·전가하는 자들, 특정 이념을 인간의 존재 여부를 판단하는 준거로 삼을 수 있는 자들은 파시스트 이외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그 가능성 여부와 무관하게 결코 이러한 언술을 간과하여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자기 확신에 찬 이들의 이러한 발상과 도발적 행태야말로 이 사회를 파멸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을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어떻습니까. 시민사회를 국가에 대응한 자율적 민주주의 실현의 보루라고 말하는 자유주의자들 가운데 다수는 이러한 파시스트적 행태에 침묵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들은 속으로만 이런 예의 없는 자들의 행위에 대해 불쾌감을 표시하고 있을 뿐입니다. 물론 이러한 행태 또한 새로운 것은 아닙니다. 역사는 자유주의자들이 자신들의 발등에 불이 떨어진 후에야 자신들의 주저와 망설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닫는다는 것을 적지 않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미 그 때 그들의 눈은 감기고 귀는 막히고 혀는 잘려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보수 정당과 이른바 '민의의 전당'인 국회가 이러한 현실을 보정해 줄 수 있다고 믿나요. 하지만 신자유주의 우파인 수구여당은 행정권력의 거수기로 전락한 지 오래이며 애석하지만 민주주의에 대한 결속력이 약한 자유주의 야당은 대중의 기대로부터 멀어진 지 오래입니다. 아니 결속력이 약하다기보다 민주주의를 단지 법, 제도적 절차의 구비 정도로 이해하는 자들이 취할 수 있는 정치적 행보는 수구정치세력의 양보를 기대하는 것, 국회법, 그리고 한 발 더 나아 사법부의 판단에 호소하는 것이 전부일 뿐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선배들이 최종적으로 선택했던, 주권자들의 의지에 호소하는 '장외투쟁'조차 조직하지 못하는 무능한 정치세력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제 그것은 아스라한 과거의 추억이 되었습니다. 이 순간 제도 밖의 촛불을 거두고 민주주의의 본령인 정당과 국회에 그것을 넘겨 문제를 해결하자고 설파했던 명망적 지식인들은 어디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어느 안락의자에 앉아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또 무슨 언변을 준비하고 있을까요.


그러한 '이분법의 정치언술'이 보수정치학의 핵심이라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마치 그것을 진보정치의 교과서처럼 부여잡고 대중을 기만하는 진보정당의 리더들은 과연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고작 그들이 말하는 것이라곤 진보의 무능을 정책의 부재와 동일시하면서 실력을 기르자는 언술을 되풀이 할 뿐입니다. 그것이 '내 탓이로소이다.'를 반복하는 종교와 무엇이 다른가요. 진정 정책적 무능이 지금의 이 상황을 만든 것입니까. 진정 보수자유주의 및 수구정치세력에 견줄만한 정책적 아이템의 부족 때문에 대중이 지지를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나요. 그리하여 한 발 더 나아가 대중이 바라는 것이 당신들의 우경화입니까. 진정 보수독점의 정치가 지배하는 이 사회에서 그들에게 더 다가가는 것이 당신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까.


민주주의의 보루라는 사법부는 또 어떤 모습을 하고 있습니까. 신영철 대법관의 '재판개입 및 압력사건'은 사법부의 현주소를 그대로 보여줍니다. 대법원이 사실상 재판압력가능성을 인정하는 발표를 하고 징계위원회에 회부할 것이라는 보도 이후에도 정작 관련 대상자는 어떤 결정도 내리지 않은 채 그저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고만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의 사퇴 여부가 아닙니다. 그것은 이미 사소한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수구세력들에게 중요한 것은 그들이 이미 사법부의 위상을 흔드는 일에 성공하였다는 점, 헌법기관으로서의 사법부에 대한 대중적 공신력을 실추시켰다는 점입니다. 진실이 아니라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중시하는 이들 수구세력의 목적은 이미 달성되었고 이런 맥락에서 사법부의 위상을 격하시키기 위한 그들의 '치고 빠지기식의 행태'는 향후에도 그치지 않고 계속 될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행정권력은 부당한 영장신청을 반복하여 신청하면서 사법부의 민주주의에 대한 결속력을 시험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내부에 균열이 생기고 지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마치 들개가 사냥감을 뒤 쫒으며 지칠 때를 기다리는 것처럼 말입니다.

바로 지금 직면한 정치현실이 이렇기에 다시 묻습니다. 진정 민의의 전당이, 민주주의의 보루가 국회와 사법부인가요. 아니면 국가인권위원회인가요. 법과 제도 자체를 부정하자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바르게 정초할 사회정치적 기반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입니다. 그것들이 사회관계와 권력관계를 초월하여 존재할 수 있습니까. 기존의 사회관계들과 권력관계들을 좀 더 민주적으로 구성하는 것만큼만 법과 제도는 억압, 수탈, 배제, 차별받는 자들의 고통과 신음에 민감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설마 잊으신 것은 아니겠지요. 오직 주권자로서의 예리한 비판, 저항의 결단, 그리고 연대만이 그 법과 제도에 민주주의라는 이름을 부여할 수 있는 원천이라는 것을 다시 확인해야 할 시점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봄, 먼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라는 시인의 노래는 수정되어야 합니다. 왜냐구요. 민주주의라는 봄은 먼데서 이기고 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여기에 존재하는 부당한 사회관계들, 권력관계들만을 문제시하고 그것을 넘어서고자 고군분투하는 실천들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거처하는 곳은 저 너머 그 어디쯤이 아니라 우리들이 서 있는 바로 이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민주주의는 결코 아름다운 향기와 싱그러운 빛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민주주의는 항상 피투성이이고 눈물범벅입니다. 그렇기에 민주주의는 양식 있는 모든 사람들을 번민하게 만듭니다. 불편하게 만듭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희망과 무관하게 민주주의가 착취, 수탈, 억압, 배제 받는 자의 편에 설 것인지, 아니면 기존의 관계에 눈 감으며 먼데서 온 민주주의를 머리 속에 그리며 살 것인지, 그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라고 끊임없이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무엇보다 그 많던 촛불이 어디로 갔는가를 묻기 전에 내가 그 촛불이라고 외치는 것이 필요한 순간입니다. 너무 과도한가요. 이상적인가요. 이 순간 용산과 순천향병원에서 망자와 가난한 자들과 함께 하고 있을, 노신부님과 시를 쓴다는 것을 자책하는 시인, 문학도를 꿈꾸었던 인권활동가, 그리고 난장이들의 아픔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또 다른 난장이들을 생각합니다. 바로 그들의 그런 아름다운 모습이 혹시 우리들의 모습은 아니었던가요. 그런 아름다운 사회를 그리는 것은 그저 이 봄 날 한 낮의 꿈일 뿐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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