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옛날엔 헤비메탈을 좋아했어요."
어떤 사람은 거나하게 나이에 취한 듯 측은한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철 지난 옷을 입고 있어 부끄럽다는 투로 특정 장르의 사후경직을 단언하고, 멀쩡한 건물을 폐허로 묘사한 화가를 흉내냈다.
헤비한 음악이 죽었다는 주장은 지금도 지지를 받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그렇게 되어야 했다. 얼핏 보기에 1980년대에서 1990년대 전반기까지 무대 위를 주름잡았던 시끄러운 음악은 계단을 걸어 내려가긴 했다. 그런데 그 시기는 헤비메탈만의 전성기가 아니었다. 힙합의 흥기도 그 무렵이었다. 다시 말해 단순한 추억은 무언가를 놓쳐버린다.
현재는 주도적 조류가 없다는 조류만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시계추처럼 좌와 우를 오가며 중심을 유지하고, 저마다의 영역에서 동시에 공존한다. 한스 제들마이어가 논증했듯이 통일성은 예술의 외부에 주도적인 가치가 있던 시절의 특징이다. 그가 말한 "비워놓은 왕좌"를 굳이 무엇으로 채우려고 하지 않는다. 하지만 음악은 대형 선박처럼 수면 아래에 더 큰 부분을 숨기고 있다. 그것이 항해를 가능케 한다. 지금도 "문턱에 발을 딛고 고개를 숙여" 심해를 내려다보는 움직임은 왕성하며, "아직 들어갈 순 없지만 엿보는" 이들 또한 적지 않다. 그 부분을 비추려는 조명등에 수면을 뚫을 만한 힘이 없었을 뿐이다.
헤비뮤직은 1990년대 중반부터 '음악적인' 전성기를 맞았다. 유럽 언더그라운드에서 새로 돋아난 가지와 깊은 뿌리가 경계를 확장하며 성장했다. 점차 스스로를 조롱하고 옛 시절과의 간극을 즐길 정도의 여유까지 부리게 되었고, 신인들이 앨범차트의 한 자리를 꿰차는 건 이제 새삼스럽지도 않다. 메탈리카(Metallica)니 건스 앤 로지즈(Guns'n Roses)니 하며 '죽은 자식 무엇 만지기'에 머물러 있으면 이 현황을 알지 못한다. 기교와 과장을 중시했던 시대의 잔여물? 그건 오래된 '팔 없는 조각상'을 원래의 모습이라고 상상하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움직임과 함께 시끄러운 음악을 계승한 다른 축이 있다. 한 때 의미가 잘못 전해진 '하드코어 펑크'이다. 스래시·데스메탈이 시스템과 개인의 관계에 대한 성찰을 바탕으로 적의와 분노를 표현했다면, 하드코어 펑크는 사회의식과 삶의 태도를 강조했다. 가령 '크러스트 펑크'는 돈이 돈을 낳고 재화가 웅덩이로 쏠리는 사회를 인식하고, 반체제 사상을 공유하며 정규직을 거부하고 공동체와 생태주의를 지향했다. 한편에선 아나키즘 특유의 매력 때문이겠으나, 치기어린 소년들로 치부된 펑크 청년들이 아나키즘을 공부하고 전승했다.
특히 '뉴 스쿨 하드코어'는 유럽의 헤비메탈을 수용하면서 저변을 넓혔다. 각각의 전통을 조합하는 초기에는 원시적인 병렬이 주된 방법이었으나 섞임을 거치며 전과 다른 성격이 만들어졌다. 무거움을 무겁지 않게 표현하는 새로운 세대는 주석만 달지 않았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언더그라운드에서 인디뮤직으로 발꿈치를 옮긴 후 새로운 음악인들이 꾸준히 등장했다. 그리고 최근으로 한정했을 때 함께 말할 수 있는 두 장의 앨범이 여기 있다. 조금 떨어져 위에서 바라보는 부감법을 활용하면 그 둘을 연결하는 매듭이 하나씩 드러난다.
49몰핀즈(49Morphines)의 오랜 기다림, [Partial Eclipse]
▲49몰핀즈의 새 앨범 [Partial Eclipse] ⓒ프레시안 |
이들은 극단적이고 서정적인 연주에 절규하는 목소리가 입혀지는 '스크리모'를 구사한다. 생소한 장르에는 반응이 없거나 있더라도 오해인 경우가 많다. 고딕이나 매너리즘 등 다수의 예술사조들이 경멸적이거나 별다른 뜻이 없는 단어에서 시작된 것처럼 음악 장르들 중에는 '라운지'처럼 기능성 용어에서 출발한 경우가 있다. 스크리모 역시 별다른 의미를 가진 말은 아니었으나 지금은 무시할 수 없는 혁신 세력의 지붕이다. 간혹 장르 무용론을 제기하는 경우가 있는데, 자기 음악에 대한 규정을 거부하려는 음악인의 입장표명이 아니라면 무지의 합리화라고 해야 한다. 장르 언어에는 역사와 연유가 있기 때문이다.
2001년부터 우정으로 맺어진 구성원들 중 여럿은 국악을 전공하고 현재 여러 국악단에서 활동 중이다. 그러나 국악을 반영한 록 음악을 상상하면 곤란하다. 쓸만한 것이 생기면 쓰고 싶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들은 국악과 록의 접목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밝힌 바 있으며, '13스텝스' 등의 하드코어 밴드에 참여하여 열성적으로 활동했다. 오히려 전혀 다른 방향에서 접근했다. 현대국악 작곡가 원일이 오래 전에 발표한 <달빛춤>을 10분이 넘는 연주곡 <The Moonlight Dance>로 재탄생시켰다. 바이올린·첼로와의 협연도 인상적이지만, 록 기타 연주자 자신이 피들러(바이올린 연주자)의 자리에 서는 장중한 대곡이다.
지난 EP에 수록되었던 <Oblivion Past (Episode)>가 연주곡으로 변신하여 폭발을 준비해가는 이 앨범은 헤비하다. <Few Days Later>와 <Broken Fist>를 지나며 절정으로 향하는 각을 세우고, <혼돈의 가장자리에서>에선 격정이 흘러내린다. 이들이 던지는 소리 덩어리에 비하면 홍대의 주말거리는 적막할 정도이다. 커다란 소리 때문에 가사가 잘 들리지 않지만 소리 자체로 더 많은 것을 담아 말할 수 있다고 믿는 것 같다. 노래 실력을 과시하려고 '소를 몰고 다니는' 가수들이 분명히 다른 곡들을 같은 노래처럼 들리게 하는 경이로운 재주를 과시하는 것과 달리, 성시영(보컬)의 목소리는 하나의 악기로 기능한다.
원래 49몰핀즈는 공연을 하는 동안에는 게을러졌다. 관객의 시선에 신경을 쓰면서 옷매무새를 가다듬거나 하는 데에는 게을러졌고, 그런 것들을 잊은 채 연주에 몰입하는 밴드였다. TV로 인기를 쌓은 후에 콘서트로 팬 서비스를 하는 브라운관 가수들과 달리 음악인에게 공연은 처음이자 끝이다. 하지만 라이브 밴드라고 해서 음반을 단지 공연초대장 정도로 만들어버리는 것만큼 맥 빠지는 일도 드물다. 음반과 라이브는 다른 차원에서 존재한다. 그래서 공연에서만 가능한 사운드가 있고 음반에서만 가능한 그림이 있다. 이따금 밴드가 모여 라이브로 녹음하기도 하지만, 그런다고 반드시 음반에 라이브감이 담기진 않는다. 이 두 가지를 참고해볼 때에 49몰핀즈는 음반을 배선장치가 충실한 작품으로 만들었다.
기술이 아닌 감정을 위한 연주
49몰핀즈의 곡은 연주의 비중이 크다. 거기에도 두 가지의 특징이 있다. 연주는 격정과 광기 그리고 슬픔 등의 감정은 물론이고 신경질과 스트레스, 유머까지 담아낼 수 있다. 얼마 전에 국내외 재즈 음악인들의 즉흥연주 공연에서 연주자 간의 경쟁과 배려까지 보았다. 한국 연주자들은 극단에 이르면 하나같이 상대를 제압하려는 듯 광기로 치달아버렸다. 배려하는 외국 연주자들과 달리 평면적이었다. 만약 그런 정열이 한국적인 것이라면 철지난 유행어를 빌려 '쿨한' 여유가 나아 보였다. 표정도 감정도 없는 반주보다는 낫겠지만, 진짜 연주는 경쟁이 아니다. 49몰핀즈는? 격한 감정을 드러내면서도 누구를 제압하려들지 않는다.
다른 하나는 기교의 과시와 거리를 둔다는 것이다. 형식의 확장은 감성의 확장으로 연결되기에 기교는 중요하다. 음악은 사상과 기법 중 어느 하나가 주도하지 않고 서로 영향을 주며 발전했다. 그러나 단지 기교가 확장하려고 할 때와 정신이 기술로 발현되어 말을 걸어올 때의 연주에는 차이가 있다. 병약한 정신 뒤로 물러서 양식만 중시하는 연주는 극히 세련되어도 과거에서 대출해온 장식물에 불과하다. 그것은 소리이긴 하되 음악이 될 수 없으며, 무슨 논문이라도 쓰는 양 괜한 각주들을 치렁치렁 매단 글만큼이나 재미없다. 그래서 창조에 종사하면 예술가고, 제작에 종사하면 기술자라고들 한다. 중요한 건 설득력이다.
49몰핀즈의 연주는 명확한 지향을 가지고 있다. 생경한 음악이 연주되는 공연장을 박차고 나가는 것은 일차적으로 육체적 거부반응 때문이다. 그런데 고통을 유발하는 소음을 정렬하는 질서를 알아차리고 즐기게 되면 상황이 달라진다. 이런 동물적 반응이 음악이 지닌 고통의 연대성과 치유를 설명한다. 49몰핀즈의 정교한 연주가 지나는 지점은 역설적이게도 체계화된 혼돈, 또는 혼돈의 체계화이다. 삭정이에 붙은 불을 키워가듯이 단편들을 모아 소란스러운 구조물을 만들어간다. 이내 광폭한 서정은 가장 빠른 순간, 가장 느린 명상에 이른다. 시간으로 존재하는 음악으로 시간이 녹아 사라지는 순간, 즉 정화를 위한 제의를 펼친다.
그렇다고 이 앨범이 난해한 것은 아니다. 무슨 전시회를 찾아 그림 비슷한 무엇이 걸려 있는 벽 앞에 서서 괜히 시간을 연장시키는 듯한 수고를 들일 필요가 없다. 연예프로그램들이 '고품격' 간판을 내거는 세상이지만 진짜 고품격의 음악은 지식이 없어도 즐길 수 있다. 마니아가 간과한 중요한 것을 다른 장르의 애호가가 발견하는 일도 흔하다. 49몰핀즈의 곡들이 세속과 거리를 둔 것처럼 들리고, 갑자기 지표면에 드러난 동굴처럼 보일지 몰라도, 젊고 원초적인 감정이 물성(物性)을 갖게 된 순간들의 기록일 뿐이다.
▲"49몰핀즈의 정교한 연주가 지나는 지점은 역설적이게도 체계화된 혼돈, 또는 혼돈의 체계화이다." ⓒ권준경 |
역동적이며 진지한 신세대 록 밴드
물론 록의 새로운 기법을 탐구한 '포스트 록'과 소리와 공간을 탐사한 '익스페리멘틀'의 기법이 녹아들어 있다. 이것들은 스크리모 뿐만 아니라 유럽의 '로-블랙'의 진화형 등 다방면에서 애용하거나 차용하는 방식이다. 서울시 상징물과 관련한 표절 논란의 사례처럼 경계가 모호해진 것은 설치미술만이 아니다. 각 분야에서 자기는 아무렇잖게 아이디어를 가져오면서 남이 가져가면 문제를 제기하는 우스운 일이 벌어지고 있다. 대중음악에서도 장르뿐만 아니라 기술의 발달에 의한 샘플링이라든지 장르의 확산에 따른 연주법의 재활용이 빈번하다. 이 앨범 역시 경계를 대신한 완충지대에 둘러싸여 있다.
다만 변하지 않은 것과 변한 것이 하나씩 있다. <Broken Fist>과 같은 예전 곡들이 신곡들보다 돋보인다는 건 변하지 않았다. 앞으로도 청중은 EP에 실렸던 <One Day>가 연주되기를 기다릴지 모른다. 그리고 보컬의 역할 축소는 변한 것이다. 전부터 연주가 중심인 밴드이다 보니 "보컬이 없을 때가 더 좋다고들 한다"는 얘기를 보컬리스트 자신이 말한 적도 있다. 또 그가 현역군인으로 복무하는 동안 밴드의 성향이 더욱 심화되지 않았나 싶다. 동질성은 비역사성을 의미하므로 변화 자체가 긍정이나 부정의 대상은 아니다. 이럴 때에는 다른 밴드와의 대비가 효과적이다. 비교면과 대조면, 그리고 강점과 약점을 나눈 동료가 있다.
바로 그들, '할로우 잰'은 덜 정밀한 연주와 멜로디에 절절한 노래를 얹었고, 그들의 혼잣말은 모두와 공명했다. 환경의 차이가 절절함이나 기교의 차이로 이어졌을 수 있다. 그렇다고 비교에 민감할 필요는 없다. 서로의 위치를 명확히 해주는 비교대상의 존재는 좋은 일이다. 할로우 잰은 일본의 엔비(Envy)와 비교되고, '로로스'는 아이슬란드의 시규어 로스(Sigur Ros)와 비교되었다. 그리고 사실 병역 때문에 활동을 쉬긴 했으나 49몰핀즈가 먼저 두각을 드러냈기 때문에 그런 차원의 대비도 아니다. 어쨌든, 할로우 잰의 흐릿한 풍경화와 49몰핀즈의 어두운 정물화를 위해 음악이라는 이름의 화랑은 액자를 더 준비해야 한다.
[Partial Eclipse]는 연말에 발표된 앨범들의 불이익을 감수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때가 오면 다시 호명될 자격만큼은 갖추었다. 또한 49몰핀즈는 레이블에 중요한 자신만의 색채를 키워온 GMC 레코드의 가족으로 건실한 커뮤니티에 의하여 계속 회자될 것이다. 변화 중인 GMC는 미국의 빅토리 레코드처럼 외연 확대와 기반 축소를 겪게 될 수 있지만, 여전히 신뢰를 받고 있다. 제막식에서만 호들갑스러운 관심을 받는 조각상보다 자격 있는 지지자들이 떠받치는 작품이 낫다. 더구나 포장된 잡담과 농담이 사색을 이겨버리는 시대에 극단에 이르러 절망이 아닌 희망을 말하는 음악이다. 우리에겐 지금, 그런 음악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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