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에 은행은 내주고 방송은 아직 못 줬다."
2일 여야의 '극적 타결'을 아주 야박하게 평가하면 이렇게 얘기할 수 있다.
민주당이 경제법안을 모조리 내줄 수 있었던 '진짜 이유'
'벼랑 끝에 몰린' 민주당은 미디어 관련법에 대해 '사회적 논의 기구를 통한 100일 간의 논의 뒤 표결처리'라는 한나라당의 양보(?)를 얻는 대가로 경제관련 법안을 거의 통째로 내줬다. 여야는 출자총액제한제도 폐지와 관련된 공정거래법, 금산분리 완화 내용을 담은 은행법을 3일 본회의에서 처리하기로 했다. 금융지주회사법과 산업은행법, 주공·토공 통합법 역시 4월 국회에서 처리키로 합의했다.
재벌에게 은행과 방송 중 어떤 것을 내주는 것을 막는 게 나았는지 우선 순위를 따져야 하는 상황 자체가 기가 막히긴 하지만, 민주당의 이같은 합의가 과연 '최선'이었는지는 의문이다. 사실 민주당은 출총제 폐지와 금산분리 완화에 대해 명확한 의지를 갖고 있지 않았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한나라당과 대결 구도 때문에 민주당의 '반대' 입장이 명확해졌을 뿐이다.
민주당 내부에서는 이번 합의에 대해 불만이 제기되고 있다. 100일이라는 시간을 번 것 이외에 성과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당 안에서도 불만이 제기될 정도니 당 밖의 '지원군'들의 불만은 극에 달했다. 오랫만에 민주당에 전폭적인 지원을 했던 시민사회단체들은 당장 비난을 쏟아냈다.
주요 시민사회단체들의 연합인 민생민주국민회의는 "극적 타결이 아니라 비극적 타결"이라고 비난했다. 이들은 미디어법 관련 합의에 대해 "100일 후에 한나라당이 직권상정과 밀어붙이기를 하더라도 그것을 막을 수 있는 어떠한 안전장치도 없다는 점에서 시간만 뒤로 미뤘을 뿐 사실상 언론악법을 추인한 것"이라면서 "'의원직을 걸고 언론악법을 저지하겠다'고 까지 공언한 민주당이 결코 해서는 안 될 굴복"이라고 비난했다.
또 경제관련 법안을 전부 내 준 것에 대해서도 "MB 독재의 '들러리'를 자처한 것에 다름 아니다"며 "이 모든 민주당의 우둔한 선택에 엄중 항의한다"고 밝혔다.
국내 재벌만 은행에 눈독 들일까
문제는 금산분리 완화와 출총제 폐지가 가져올 결과다. 방송을 내주는 것 못지 않게 나라경제에 악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높다. 이동걸 전 금융연구원장은 "금산분리 완화는 금융계의 대운하"라고 주장한 바 있다. 운하 건설을 위해 한 번 땅을 파면 다시 원상복구가 거의 불가능한 것처럼 재벌들의 은행 소유 역시 되돌릴 수 없다는 지적이다.
금산분리 완화로 은행 소유를 저울질하는 것은 삼성 등 국내 산업자본만이 아니다. 외국 산업자본도 국내 은행 소유가 가능해진다. 이미 외환은행, 제일은행, 한미은행(현 시티은행)이 외국계에 넘어갔고, 나머지 시중은행들도 지배주주가 외국계가 아닐 뿐이지 외국계의 지분율은 매우 높다.
이런 상황에서 금산분리 완화로 산업자본의 은행 진출을 허용할 경우, 자금력이 있는 외국 산업자본의 은행 소유는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다.
경실련은 금산분리 완화에 대해 "국적 없는 외국 산업자본들에게 모든 것을 내 맡기게 됨으로써 우리 은행을 더욱 후진적으로 만들 가능성이 크다"며 "WTO 규정이나 한미 FTA에 따르면 은행에 대한 국내자본 소유를 허락할 경우 외국의 산업자본이나 사모펀드에게도 똑같이 소유의 기회를 주어야 하며, 만약 이를 정책적으로 정부가 방해할 시에는 국제분쟁기관에 제소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경실련은 "결국 이번 정부여당의 금산분리 완화 방안은 국내재벌뿐 아니라 국내 재벌보다는 훨씬 경쟁력을 가지고 있는 외국 산업자본에게 송두리째 우리 은행을 모두 내맡기자는 것에 불과하다"며 "국내은행을 국내재벌들에게 주기 위해 꼼수를 부리다 오히려 국제적 산업자본에게 넘기게 될 가능성이 크다"고 비판했다.
출총제 폐지에 대해 경실련은 "국내재벌의 총수일가가 적은 지분으로 계열사 전체를 지배하는 소유지배구조 왜곡은 개선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최근 더욱 악화되고 있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는 상황에서 출총제 페지는 시장 규율 공백 상태를 초래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경실련은 "97년 IMF 이후 출총제를 일시적으로 폐지하였다가 재벌들의 문어발 확장에 놀라 부랴부랴 2002년에 부활했던 전철을 또 다시 밟자는 것이냐"고 강조했다.
이런 우려에도 불구하고 정부여당은 금산분리 완화와 출총제 폐지를 밀어붙여 통과를 목전에 앞두고 있다. '경제 살리기'가 아니라 '경제 죽이기'가 눈에 뻔히 보이는 이들 법안 통과를 강행하는 이유에 대해 이동걸 전 원장은 "그 혜택이 특정 집단에 집중되기 때문인 것 같다"고 밝혔다. 국가경제를 위한 것이 아니라 특정집단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는 지적이다.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해 너무나도 쉽게 합의한 민주당도 공동 책임을 지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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