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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김수환 추기경을 보내며] "편안히 영복을 누리소서"

추기경님.

누워 계신 지 여러 날 되옵고, 간간히 병환이 침중하시다는 얘기를 들으면서, 어쩐지 이번에는 일을 당하고야 말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을 갖고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이렇게 홀연히 가시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막막하고 허전한 마음을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를 지켜주던 크고 높던 울타리가 없어져버리고, 빈 들판에 혼자 남겨진 것 같은 이 허허로움이 어찌 저만 갖는 느낌이겠습니까.

이 땅의 민주화 과정에서 추기경께서는 이 나라, 이 공동체가 더 이상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막아주는 방파제였고, 불의에 짓밟히고서도 호소할 데 없는 사람들, 가난이 제 탓만이 아닌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기댈 언덕이셨습니다. 명동성당이 민주화의 성지로 저렇게 우뚝할 수 있었던 것도, 거기 추기경님이 계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민주화 이후에도 추기경께서는 이 나라가 어디로 가야 하는가를 일러주시는 방향타요 '어머니와 교사'이셨습니다. 과연 추기경께서는, 이 나라 이 공동체에서 또 하나의 정신적 정부였습니다. 추기경께서 이 땅에서 우리와 함께 하셨기에 우리들은 행복했고, 마음으로 든든했습니다. 살아계시다는 것만으로도 큰 위안이 되었습니다. 추기경께서는 우리 국민 모두의 가슴 속에 새겨져 있는 단 한 사람 원로요 스승이셨습니다. 이제 누구를 믿고 의지하며 살아가야 할지 탄식과 슬픔이 온누리에 깔리고 있습니다.

추기경께서는 속에 가진 뜻이 분명했어도, 표정은 온유하고, 말씀은 언제나 하도 지성스럽고 곡진해서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차마 그 말씀을 거역할 수 없게 하셨습니다. 유신시대, 그 엄혹했던 시절, 필마단기로 청와대에 들어가 벌인 독재자와의 담판에서도, 저들로 하여금 지학순 주교를 풀어내놓지 아니할 수 없게 하셨습니다.

1987년 6월 명동성당에서 농성 중인 학생들을 경찰이 진입하여 검거하려 했을 때 "수녀와 신부 앞에 내가 서겠다. 나를 넘고 들어오라"며 막아내어 그 모두를 승리자로 만들었습니다. 단호함에도 거기 사랑이 있었기에 누구도 감히 마음으로 범접하지 못했습니다. 추기경께서는 과연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 이 땅에 오신 분이셨습니다. 위엄이 있되 멀리 느껴지지 않았으며, 사랑이 가득하시되 그 앞에서 흐트러질 수 없게 하셨습니다.

추기경께서는 누가 미처 추기경인줄 모르고 "추기경을 닮았다"고 말하면 "가끔 그런 소리를 듣습니다"라고 말씀하시고, 황인철 변호사가 "교리도 잘 모르는 채 영세를 받았습니다"고 부끄러워하면 "추기경인 나도 잘 모릅니다"며 위로해 주셨습니다.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우리들의 추기경님이셨습니다.

추기경께서는 평범한 필부가 되어 이 땅의 선남선녀로 아들 딸 낳고 오순도순 살아가는 삶을 동경하셨습니다. 추기경께서는 또한 손수 운전을 배워 은퇴한 뒤에는 이 땅, 가보지 못한 구석구석을 마음놓고 다녀보는 것이 꿈이라고 하셨습니다만, 끝내 그것을 이루지는 못하셨습니다. 천성이 이렇듯 소박, 소탈하셨으니, 그런 분이 이 땅에서 추기경으로 사시느라 얼마나 그 삶이 힘들고 고달팠을까, 지금도 저의 가슴을 찡하게 합니다.

과분하게도 저는 추기경님의 사랑을 너무 많이 받았습니다. 1986년, 제가 수배당하였을 때는 인편을 통해 돈을 보내주셨고, 제가 그 수배로부터 벗어났을 때는 불광동 저의 누거에까지 오셔서 저희들을 위로해 주셨습니다. 제가 어줍잖은 책을 냈을 때는 과찬과 함께 그 서문을 써주셨고, 연말연시면 손수 쓰신 카드를 보내주셨습니다. 40년 가까이 받은 훈도가 더욱 사무칩니다.

때로는 제게 대필을 부탁하셨지만, 추기경님의 생각이 너무 깊어서 제가 과연 그걸 담아낼 수 있을지 고투하며 밤새우기 일쑤였습니다. 저에게는 추기경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이 나라 이 공동체에 마지막으로 남기고 싶으신 말씀을 꼭 제 손으로 정리하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이 있었습니다. 제가 그 일을 하지 못하도록, 추기경께서 이렇게 서둘러 선종하신 것이 저에게는 천추의 한(恨)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추기경님,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 추기경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사신 삶은 저희들에게는 커다란 기쁨이요 행복이 되었지만, 추기경님께는 너무도 힘들고 고달픈 일생이었을 것입니다. 이제 하늘나라에서 하고 싶으신 일 마음대로 하시면서 편안한 영복을 누리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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