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거는 민주적인가>(버나드 마넹 지음, 곽준혁 옮김, 후마니타스 펴냄). ⓒ프레시안 |
지금도 촛불이 타오르고 있다. 용산 참사 때문에 사람은 자신의 의사를 또 다시 촛불로 표현하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촛불은 하나의 문화이자 상징이 됐다.
미선이, 효순이가 미군 장갑차에 희생됐을 때부터, 노무현 대통령이 탄핵됐을 때에도, 미국 광우병 쇠고기 수입 조치를 놓고도 전국에서 촛불이 타올랐다. 촛불이 타오르면 어김없이 나오는 이야기가 있다. 이런 현안 문제는 전문가인 정치가가 알아서 할 것이라고. 길거리에서 이러지 말고 장내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옳으니 그만 촛불을 중단하라고. 심지어 촛불은 천민 민주주의라는 말까지 나온다. 그것도 정치가 입에서.
그 정치가에게 직접 묻고 싶다. '다 알아서 해주는' 국회의원들이 있는데도 왜 사람들은 직접 자신의 의사를 촛불로 표현한다고 생각하는지. 대의 민주주의는 대표자를 통해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것이니까 정치가에게 맡기는 것이 옳다는 논리가 타당하다고 진심으로 생각하는 것인지. 민주주의는 전문가인 정치가가 다 알아서 해주니 사람들은 정치에 관심을 두지 않는 상태를 의미한다고 알고 있는지 말이다. 진심으로 그렇게 믿고 있다면 그 정치인은 수준 이하로 무식한 것이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말했다면 비열한 발언이다.
이 문제를 좀 더 살펴보자. 동물은 갈등을 본능으로 해결하거나 육체적인 힘으로 해결한다. 인간도 동물이기는 하지만, 갈등을 물리적인 힘으로 해결하려고 하지 않고 말과 이성으로써 조절하고 해소하려 하기 때문에 정치가 생겨났다고 볼 수 있다.
어원적으로 보자면 정치에 해당하는 영어 'politics'는 고대 그리스의 도시 국가 폴리스(polis)에서 비롯된다. 폴리스에 시민들이 모여 사적인 일이 아닌 공적인 일을 함께 논의하고 처리하는 것이 정치의 어원이 되었다. 게다가 인간은 혼자서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가치가 무엇인지, 그리고 이것을 실현하기 위한 정의가 무엇인지를 답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정치는 시작되었다.
민주주의는 모든 국민이 주권을 행사하는 정체를 의미한다. 아무리 대의민주주의 아래에서 국민의 대표를 위임받았다고 하더라도, 기본적인 국민의 정치 의사 표현과 정치 행위를 막을 수 있는 권리는 그 어떤 전문 정치인에게도 없다. 심지어 우리나라처럼 정치인의 전문성이 떨어지는 경우에는 더 더욱 동의하기 힘들다.
민주주의, 정치의 의미가 이러한데 국회의원은 국민들에게 정치적 관심을 없애라고 한다. 그러면서 거리에 촛불을 들고 나오는 행위는 천민 민주주의라고 한다. 유권자들의 축제날인 투표일에 투표하는 기계로서의 사명을 완수하는 것으로 정치적 행위는 끝난다고 주장하는 이 해괴망측한 논리는 국민을 지배하고, 통제하려는 가진 자의 발상일 뿐이다.
선거가 비민주적이라고?
오늘 소개할 책인 버나드 마넹의 <선거는 민주적인가>(곽준혁 옮김, 후마니타스 펴냄)는 우리에게 너무도 당연한 사실에 대해 묻는다. 대의민주주의 제도의 역사를 고대 그리스로부터 중세, 근대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꼼꼼하게 살펴보고 있는 이 책은 민주주의에 대한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대체로 사람들은 선거 제도에 대해 무의식적인 신뢰가 있다. 선거 제도가 비민주적이라는 논거가 제시되면 믿었던 도끼에 발등이 찍혔다는 심정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도 그럴 것이 선거 제도는 분명히 민주적이다. 우선, 대표자는 항상 여론에 주의를 기울여 하기 때문에 행위의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다. 게다가 유권자는 대표자의 과거 행적, 혹은 공약 이행 여부를 기준으로 그의 재선 여부를 결정할 수 있기 때문에, 선출된 대표자는 항상 '인민 재판의 날'을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직접 민주주의가 불가능한 현실에서 우리를 대표할 대표자를 자신의 의지대로 선출하는 선거 제도는 당연히 민주적이지 않느냐가 우리의 상식이다.
만일 선거 제도 자체가 비민주적이라면, 여러 가지 질문이 생긴다. 선거 제도의 비민주적인 측면은 무엇인가. 또한 오랜 세월 동안 선거 제도를 민주적이라고 여겨오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선거 제도가 민주적이라고 여겨지면 이득을 보게 될 계층이 따로 있었는가, 선거 제도가 아닌 다른 제도가 있다면 무엇을 어떤 기준으로 대체할 수 있는가, 도대체 무엇이 민주적인 것인가.
마넹의 이야기를 빌리자면,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는 방법으로 아테네 시민들은 추첨 제도를 선택했다. 흔히 고대 아테네의 직접 민주주의는 작은 공동체였기 때문에 시민들의 직접 참여가 가능했다고 알고 있다. 이러한 상식은 복잡하고 거대한 현대에서 직접 민주주의는 불가능하다는 결론으로 귀결된다.
추첨 제도를 한국에 도입한다면?
하지만 아테네에서도 모든 시민들이 동시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여 정치적인 결정을 내리거나 수많은 정치적 직무를 한꺼번에 맡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 때 사용된 방법이 추첨이다. 추첨제는 원하는 자는 누구나 정치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여 시민이 추첨을 통해서 집정관이나 행정관이 되는 제도다.
추첨제를 21세기의 한국에 도입하자고 하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무능력한 사람이나 비전문가들이 정치를 할 수 없으리라는 두려움을 표현할 것이다. 현재의 상태에서도 무능력한 정치인들이 사회를 혼란스럽게 하고 민생을 고통에 빠뜨리는데 가능하겠냐는 우려가 대부분일 것이다.
하지만 능력 있는 전문가들만이 정책을 담당하고 정치의 주요한 결정을 내리는 것이 민주적인 것인가? 민주적인 정치는 그 사회 구성원들 모두의 견해와 입장을 반영하는 것일 게다. 오히려 전문가들은 수많은 일반인들의 입장을 알 수 없으며 이들의 생각을 알기 어렵다. 전문가들만이 정치를 담당하게 될 때 일반 국민들은 정치로부터 소외되기 쉽다. 현재의 정치를 국민들이 외면하고 있는 이유도, 그들만의 정치이기 때문이다. 일반 국민들의 고통이나 문제가 논의되지 않고 해결되지 않는 정치이기 때문이다.
추첨 제도가 민주적인 이유
그렇다면 왜 아테네인들은 무능력한 시민이 선출될 가능성이 있는 추첨이라는 제도를 선택했던 것일까. 아테네인들도 추첨제에 어떠한 단점이 내재되어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추첨이 몇 가지의 근본적인 민주주의적 가치를 표현한다고 믿고 있었다.
특히 아테네 정치 체제에는 미숙하거나 무능력한 행정관의 선출을 방지하는 제도적 장치가 있었다. 우선 기본적인 자격 심사가 있다. 철저하게 재산 심사를 했으며, 시민권 박탈과 같은 처벌을 받은 적이 없어야 했으며, 과두정(귀족정)을 동조하거나 찬양해서도 안 되며 납세 실적도 정당해야 했다.
그리고 행정관은 언제나 민회와 시민 법정의 감시를 받았다. 임기 중에도 시민들은 그들에게 불신임 투표를 제안함으로써 책임을 물을 수 있었고, 직무 정지를 요구할 수 있었다. 임기가 끝나면 행정관은 직무를 수행한 방법에 대해 또 한 번의 심사를 받아야 했다. 모든 시민들은 행정관이 되면 탄핵될 가능성이 늘 있고 소송에서 지면 처벌을 감수해야 한다는 사실 등을 사전에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무능력자들은 추첨에 자신의 이름을 내놓기를 꺼렸다. 추첨은 후보로 지원한 사람에 한해서만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렇게 자발성에 기초한 추첨 제도는 시민들로부터 정치 권력이 나오고 집행되는 민주주의를 이룰 수 있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시민이 잠재적인 공직자가 될 수 있도록 하는 추첨 제도는 통치자와 피통치자의 거리감을 줄이고, 실제 시민들의 입장이나 이해를 반영한 정책을 이룰 수 있다는 면에서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제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추첨 제도는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관직을 수행할 수 있는 평등한 기회를 보장했다. 이것은 전문가 중심의 정치를 배격하는 것이며, 관직 교체를 더 쉽게 하고, 소수의 전문가 집단이 정치를 좌우하지 못하게 한다.
사실 추첨제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 중에 하나는 민주주의와 전문성의 관계이다. 아테네 사람들은 정치적인 문제에서 민주정과 전문성을 서로 상충하는 것으로 인식했다. 절박한 이유가 없는 한 각각의 정치적 기능은 비전문가에 의해서 수행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들이 내린 가정은 만약 전문가들이 정부에 간여하게 되면 불가피하게 그들이 지배하게 되리라는 것이었다.
선거 제도가 비민주적인 이유
선거 제도는 소수의 귀족들(엘리트)을 위한 제도다. "민중은 최고를 선출하지만 최고는 대개 상위 계급에 속한다"는 몽테스키외의 지적을 다시 언급하지 않더라도 선거 제도는 결국 그 사회에서 더 많이 가진 자를 선출하게 되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나 루소, 몽테스키외는 모두 선거가 본질적으로 귀족주의적이라 지적한 것이다.
우선, 선거 제도는 후보와 유권자의 관계가 불평등하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결국 유권자가 선출한 대표가 다시 유권자들 위에 군림하게 되기 때문이다.
특히 유권자들은 선택의 상황에서 다른 사람보다 훨씬 뛰어나고 우월하다고 생각되는 후보를 선택한다. 탁월한 후보를 뽑는 것은 선거 제도라는 구조적 원인 때문이다. 후보자들의 탁월성을 검증하기 위해서는 많은 자료가 필요하며 유권자는 그러한 정보로부터 소외되어 있다. 후보자가 자신을 알리는 데 있어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경제력의 차이에 따라 선거 결과가 좌우되는 경향이 있다.
미디어에 노출이 더 많이 되었던 사람, 정치 자금이 많거나 이전에 권력이 많았던 사람, 신분이 높은 사람들이 당선될 가능성이 더 많으며 또한 세습적인 요소가 많은 것이 선거라는 제도의 속성이다. 그러므로 선거는 본질적으로 귀족적이며 비민주적이다.
선거는 동의한 권력자에게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계기다
그렇다면, 어째서 추첨제의 전통이 사라지고 선거 제도가 대의민주주의를 대표하는 것이 되었을까? 마넹에 따르면 이것은 근대의 자연권 원리 덕분이다.
로크가 "태어날 때부터 모든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며, 독립적이다. 누구도 이러한 지위를 박탈당해서는 안 되며 스스로 동의하지 않는 한 다른 사람의 정치 권력에 종속되지 않는다"라고 선언한 이후 권력의 원천과 정치적 구속의 근원을 '피지배자의 동의나 의지'에 두게 되었다.
시민의 정부를 세우게 된 입장으로서는 정치적 정당성과 구속력의 근원이 더 중요한 문제였다. 시민들이 좀 더 자발적으로 정치에 참여하고 관직이 평등하게 배분되는가의 여부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추첨은 동의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쓸모가 없다. 동의에 기반을 둔 정치권력을 세우는 것이 목적이라면, 추첨보다는 선거가 더 효과적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선거는 투표자들에게 그들이 동의한 권력자에게 자발적으로 복종하고 헌신할 수 있는 유인까지 제공해준다. 그 결과 민주주의는 시민의 직접 통치에서 동의로 축소되었다. 현재의 선거 제도 아래에서 언론들은 투표일을 유권자들의 축제라 치켜 올려 세우지만, 민의가 반영되지 않는 현실에서 유권자는 정권의 정당성을 보장해주는 들러리일 뿐이다.
정당 정치에서의 왜소한 시민
근대의 정당민주주의의 기본은 토론이다. 토론의 정치란 설득의 정치를 의미한다. 자신의 정강과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정당이라 하며 정당은 자신의 정강을 설득하기 위해 토론을 한다. 이렇듯 정당이 정치 활동의 중심이 되면서 선거는 민주주의의 핵심으로 자리 잡았다.
민주주의 제도를 운영하는 많은 나라들 가운데에는 주권의 소유자인 국민의 뜻과는 상관없이 소수의 엘리트에 의한, 그들만을 위한, 그들만의 정치가 만연하는 것이 현실의 정치다. 토론이 흥정이 되고 정강이 굴절되면서 그들을 선택한 유권자의 뜻이 실종되기 때문이다. 즉 대의 민주주의의 핵심이 '대표'의 원리임에도 불구하고 정당 정치와 선거라는 형식은 진정한 대표를 뽑을 수는 없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민주주의를 위하여
마넹이 아무리 선거 제도의 비민주성을 강조한다고 해서 지금 당장 추첨제의 도입을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선거 제도는 그 나름대로의 민주적인 측면과 비민주적인 측면의 모호성으로 인해 오랜 기간 동안 안정적으로 현실을 반영하는 형식으로서 기능해왔다.
하지만, 선거 제도가 국민들의 정치적 열망과 권리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형식이라면, 일반 국민들의 포기된 정치적 권리를 수호하기 위해서라도 이에 대한 대안이 고민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마넹의 지적은 우리에게 스스로 제한하고 있었던 정치적인 상상력을 넓혀주는 데 충분하다.
물론 제도를 바꾸는 것만으로 민주주의가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맞는 적절한 제도를 고민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원칙과 내용에 대한 고민을 다시 이끌어내는 계기가 되기 때문에 의미가 있다.
권력의 정당성을 부여해주는 들러리로써의 유권자로서만 존재할 이유가 없다. 나를 둘러싼 구체적인 삶의 조건을 바꾸고 삶의 방향을 바꿀 수 있는 정치적인 행위를 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 필요가 분명히 있다. 새삼스럽지만 정치는 바로 삶의 문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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