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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예수' 曰 "연꽃과 십자가는 둘이 아니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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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예수' 曰 "연꽃과 십자가는 둘이 아니라네"

[철학자의 서재] <보살예수>

<프레시안>은 창간 7주년을 맞아 특별한 연재를 선보인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와 공동으로 진행하는 이 연재는 바로 '철학자의 서재'이다.

매주 주말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철학자들이 심사숙고해 선정한 책을, 철학자가 직접 심혈을 기울여 쓴 서평으로 소개한다. 이 연재를 통해 독자들의 책 고르는 안목이 더욱 깊고 넓어지리라 기대한다. <편집자>

언젠가 스님들과 축구를 한 적이 있다. 종교 간 대화의 일환으로 주선된 경기였는데, 열심히 뛰고 즐겁게 먹고 마셨다. 매우 유쾌한 기억으로 남았을 뻔했던, 그날의 하이라이트는 마지막 순간에 벌어졌다.

모두가 내년을 기약하며 다시 만나자며 인사하고 헤어지는데, 어느 목사님이 한 마디 했다. "스님, 예수 믿고 천당 가세요." 개신교 연합팀으로 소속된 한 목사님이 결국 본색(?)을 드러내고 만 것이다. 그 스님은 목사님의 진지한 얼굴을 확인하고 표정이 일그러졌다. 목사님은 장난이 아니라 그 순간에 복음(!)을 전하려 했던 것 같다.

축구공은 둥근데

나는 그 이후로 축구를 하자는 소식을 듣지 못했다. 축구를 하지 않으니까 대화도 중단되는 느낌이었다. 하기야 자기 일 하기도 바쁜데, 무슨 축구며 또 종교 간의 대화가 무어 그리 중요하단 말인가. 이렇게 생각하고 넘어가기엔, 너무 아쉬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생각해보라. 한 번 사는 인생, 종교에 투신하여 자신의 개인적 성취욕을 넘어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보살이 되어 열반을 꿈꾸고 중생을 구제하려는 사람들과,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십자가를 지고 하느님 나라의 건설을 위해 몸 바치겠다는 사람들이 만난 그 축구장은 얼마나 귀중한 자리인가.

그런데 어찌 "예수 믿고 가시라"며 판을 깰 수 있단 말인가? 나는 그 때의 경험 이후로 우리나라 그리스도교가 불교의 교세보다 크지 않은 것을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곤 한다. 만약 그랬다면, 축구를 했을 리도 없고,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도 하기 싫기 때문이다. 축구공은 둥근데 종교는 모가 나 있었다.

우리나라는 그리스도교(개신교와 천주교 모두를 아우르는 표현)와 불교라는 세계 종교가 막상막하의 세력으로 공존하는 지구상 유일한 나라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물리적으로만 공존할 뿐, 정신적으로는 상호 무관심이나 무시 속에 병존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불교를 깊이 이해하는 사람이 드문 것은 물론, 불자들 가운데서도 그리스도교 신앙을 피상적 차원을 넘어 이해하는 사람도 드물다.

그저 서로 불신이나 혐오감을 갖지 않으면 다행일 만큼, 두 종교는 이 땅에서 상호무지와 무관심 속에 지내고 있다. 이러한 문제의식에 공감하는 사람이라면, 길희성 교수가 몇 해 전에 발간한 <보살예수>(현암사 펴냄)를 읽으면 큰 도움을 받을 것이다.

<보살예수>가 세상에 나온 까닭

▲ <보살예수>(길희성 지음, 현암사 펴냄) ⓒ프레시안
길희성 교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불교학을 전공한 분으로, 자신의 몸을 두 종교의 만남의 장소로 평생을 대여한 분이다. 이 책은 2004년도 '새길기독사회문화원'에서 실시한 일요신학강좌를 다듬어 낸 것인데, 굳이 분류하자면 비교종교학 혹은 종교신학의 범주로 묶을 수 있을 것이다.

비교종교학이 종교 사이의 핵심 개념을 배경과 용례에 따라 비교하고, 메시지의 상호 교환 가능성을 연구하는 것이라면, 종교신학은 종교들의 궁극적인 실재, 구원론, 신론 등을 신학적으로 탐구하는 영역이다. 그러니까 두 분야 모두 서로 조응할 수 있도록, 그렇다고 단순히 객관적인 태도가 아닌 방법으로 비교분석해서 보여주며, 오해되지 않고 올바로 이해되도록 소개하는 데 주력한다.

하지만 길 교수의 이 책 <보살예수>는 단순한 해설서나 종교 입문서가 아니다. 그는 특별히 불교와 그리스도교를 '창조적으로' 만나도록 주선하고 있기 때문이다. '창조적 만남'이란 무분별한 종교 혼합주의나 불신앙의 표현이 아니라 한국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두 종교의 긍정적 힘을 서로가 더욱 북돋아주는 방식으로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는가 라는 물음에 답하는 만남이다. '보살예수론'은 이에 대한 하나의 대답이다.

"결코 세인의 호기심을 자극하거나 필자 자신의 지적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랜 공부와 진지한 사색의 결과임을 확언합니다. 간단히 말해 예수에게서 보살의 정신을, 보살에게서 예수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확신을 반영한 것입니다. 인간을 구원하는 것은 결국 '사랑과 자비의 힘'임을 믿으며, 예수와 보살은 우리 모두에게 그러한 힘을 매개해 주는 존재임을 밝히고자 했습니다."

길 교수는 예수님의 눈으로 불교를 보고 부처님의 눈으로 그리스도교를 해석해보려는 야심찬 꿈을 펼쳐놓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와 불교의 창조적 만남

두 종교의 운명적 만남을 묘사하기 위해, 그리스도교 2000년 역사의 패러다임의 변화를 잠시 볼 필요가 있다. 첫 번째는 그리스 사상과 만난 것이고, 두 번째는 갈릴레이 이후의 근대과학과의 만남이다. 그리스도교는 두 번의 거대한 만남을 통해 패러다임 변화를 거쳐 복음정신은 유지하되 새로운 옷을 입었다.

그리고 지금 '동양 종교'와의 세 번째 변화를 위해 만나고 있다는 것이 길 교수의 지적이다. 그런데 이 동양 종교들은 철학이나 과학과는 달리 나름의 구원관이 있고 자신의 깨달음을 강조하고 있어서, 이전 두 번의 패러다임 충돌과는 판이하게 다른 변화를 겪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필자가 보기에도 이러한 생각은 대단히 유의미하며,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라 여겨진다.

그리스도교는 불교와 함께 출발 지역을 넘어 세계화된 종교이다. 이 두 종교는 다른 지역 종교들과 달리 계급과 신분 질서를 초월하여 누구나 구원(해탈 혹은 열반)을 받을 수(혹은 얻을 수) 있다는 보편적 구원관과 메시지를 지니고 있다. 매우 다른 것 같은 이 두 종교가 서로 이해하고 대화한다면, 다종교 다문화 사회를 살고 있는 모두에게 공동의 유익을 선물할 수 있을 것이다.

알고 보면 불교와 그리스도교는 서로 닮은 점이 많다. 우선 부처님과 예수님 두 분 다 가정을 버리고 떠돌이 생활을 했고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공동체 생활을 했다. 이분들은 독신, 무소유, 무욕의 삶을 살면서 열반과 '하느님나라'라는 초월적 실재와 가치를 추구했고, 절대적 평화주의자로서 증오와 폭력에 반대했으며, 무차별적 사랑과 용서를 설교하였다. 공식적 직함이 없었으나 비유의 명수였고 짧은 명구로 가르친 명교사였다.

또 부처님은 바라문교의 전통에서, 예수님은 유대교의 전통에 있었지만, 새롭고 초월적인 비전을 제시함으로써 영적인 각성 운동을 일으켰다. 그리하여 한 사람은 자연적인 이름인 예수에서 구원자라는 뜻을 가진 그리스도로 불리었고, 한 사람은 시다르마에서 '깨달은 자'라는 뜻의 붓다라는 칭호를 얻었다. 자연인에서 구원자(메시아), 각자(覺者)가 된 것이다.

부처님과 예수님의 메시지의 핵심은 무엇보다 초월적 구원의 세계를 제시하고 인간 존재와 세계의 철저한 변화를 초구한 데 있다. 그것을 "열반"과 "하느님나라"로 제시하였다. 이것은 단순히 우리가 현재 영위하고 있는 세간적 삶의 방식, 세상적 질서의 연장이나 변형이 아니다. 그것은 가치의 완전한 전도가 이루어지는 세계로, 영적 세계, 초월적 자유의 세계이며, 초월적 사랑과 자비가 지배하는 세계이다. 이러한 세계를 불교는 '초세간적'(lokottara) 그리스도교는 '종말적'(eschatalogical)이라고 부르는데, 여기서 '종말'은 시간적으로 세상이 끝난다는 말이 아니라, 이 세상의 질서가 뒤집히고 새로운 질서, '새로운 하늘과 땅'이 열린다는 뜻이다.

이러한 열반과 하느님나라는 통상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초월적 실제이기 때문에 부처님과 예수님은 '영적 혁명'을 통해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나는 해방이 필요하다고 가르쳤고, 자기부정, 자기포기, 자기초월이라는 '죽음'의 과정을 거치는 사즉생(死卽生)의 세계와 십자가를 통한 부활의 영생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생각에서 보살과 예수가 비교된다.

보살의 참자아와 예수의 참자아는 모두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형성되고 살아가는 열린 존재이다. 보살은 공(空)의 진리를 깨달아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예수님은 하느님의 절대무상의 은총을 깨달아 자신에 대한 염려와 아집에서 해방되어 이웃을 향해 자신을 여는 존재이다.

보살과 예수는 거짓자아에서 벗어나 참자아로 해방된 존재이며, 자기상실을 통한 자기회복, 자기부정을 통한 자기긍정, 죽음을 통한 참생명을 얻는다. 현실의 논리, 전통이나 관습의 권위, 제도와 이념의 속박, 종교적 편견과 독선에서 철저히 자유로운 존재이다. 이것이 보살과 예수가 보여주는 자유의 세계이며, '보살예수'가 성립되는 배경이 된다.

물론 두 종교에는 차이도 많다. 신관이나 세계관이나 그에 따른 인간관의 차이도 적지 않다. 하지만 상대방의 언어로 제대로 이해하기 시작하면 그 차이라는 게 언어의 표현 차이이지, 부처님과 예수님의 차이가 아닌 경우가 많다. 구체적인 설명사례는 독자의 몫으로 남겨 둔다.

어떤 종교평화모임에서 어떤 스님이 이렇게 기도했다. "불교가 그리스도교를 잘 알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그리스도교가 불교를 잘 알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그리고 스님들은 부처님을 잘 알도록 도와주시고, 목사님과 신부님들은 예수님을 잘 알도록 도와주십시오. 그리하여 우리에게 평화를 허락해 주십시오." 각자 자기 종교를 잘 알고, 잘 하면, 평화가 온다는 메시지가 아닌가. 섬뜩할 정도로 아름다운 기도문이다.

종교 평화는 어떻게 가능한가

필자는 성공회 신부로 살고 있다. 성공회는 영국의 정치적, 종교적 갈등의 산물인 교단으로, 인간의 한계를 신물 나게 경험한 후 신학을 수립했다. 그리하여 배타적이지 않으려 노력하며, 포괄적인 중용과 관용을 미덕으로 내세운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진리의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상대에게 배우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실제 현실에서 이러한 생각은 무시당하거나, 아무 입장이 없는 것으로 오해 당한다. 정체성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내 생각에 정체성을 강하게 하면 할수록, 예수의 복음정신과 보편성에서 멀어진다. 우리가 말하는 이른바 '정체성'을 한 꺼풀 벗겨보면 남들과의 차이, 독특한 것이 무엇이냐는 것인데, 그리스도교 안의 다양한 교파들의 차이란 실은 부수적인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본질이 아닌 부수적인 독특성을 정체성으로 삼고 있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교의 현실이다. 그리스도교는 모든 것이 연기적으로 상호의존하고 있다고 보는 불교의 기본 입장에서 배울 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절대적인 하느님을 믿더라도 그 하느님을 만나는 길(방법)은 여러 갈래일 것이다. 종교신학에 대한 내 생각은 존재론적으로 일원론이요, 인식론적으로 다원론의 입장이다. 목사 시인 고진하는 이런 시를 남겼다.

연꽃은 눈흘김을 모른다는 것 / 십자가는 헐뜯음을 모른다는 것.
연꽃보다 십자가보다 크신 분 앞에서는/ 연꽃과 십자가는 둘이 아니라는 것.
하나도 아니지만 둘도 아니라는 것. (고진하, '연꽃과 십자가' 중)


연꽃 십자가를 위하여

더러운 논밭에서 자라는 연꽃은 자신의 근거를 속세에 두되 깨끗함을 유지함을 상징한다. 원래는 치욕의 상징이던 십자가는 예수가 짐으로써 인류의 죄를 깨끗이 한다는 메시지를 지니게 되었다. 이런 점 때문에 시인은 노래한다. 연꽃과 십자가보다 크신 분 앞에서는 둘이 아니라는 것을, 하나도 아니지만 둘이 아니라는 것을.

그렇다. 연꽃은 연꽃으로 충분하고, 십자가는 십자가로 충분하다. 연꽃을 피울 사람은 연꽃을 화두삼아 인생의 바닥을 캐고, 십자가를 진 사람은 자기 피가 마를 때까지 십자가를 지다가 죽으면 되는 것이다.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시인 정호승이 말했던가, 이런 철저한 투신에서 두려움 없는 사랑과 자비의 실천이 가능하다고 본다.

진정한 의미에서 '가톨릭(보편적)' 신학자인 한스 큉은 종교 간의 평화를 위해 "내적 충실성, 외적 개방성"이라는 역설적 원리를 제시한 바 있다. 자기 종교의 본질에 충실하면, 타종교에 대해서 자유롭게 열릴 것이라는 말이다. 자기 종교의 본질을 미처 깨닫지 못한 채 몇 가지 부스러기 같은 교리 조각이 전부인 줄 알 때 배타주의에 사로잡히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무릇 자기가 '우연히' 속하게 된 종교의 본질(뿌리, 근본)에 충실해 보라. 그리하면 자기 종교의 본질이 타종교를 존중하라는 메시지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면 종교 간의 평화는 자연적으로 이루어지고, 그렇게 이루어진 평화는 세계의 공동선은 물론 우리나라의 고질적인 사회 문제들도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인간을 구원하는 것은 교리가 아니라 사랑과 자비이고, 모든 종교의 본질은 '이타적 존재'가 되는 데 있다. 무언가를 믿으면 복 받는다는 소리는, 거짓말이라 나는 믿는다. '이타적 존재'를 지향하며 사랑과 자비를 실천할 힘과 용기를 (하느님의 은총으로) 얻었다면, 그 자체를 나는 복 받은 것이라 생각하고, 구원에 이른 상태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모든 종교에 "자력구제는 없다"고 생각하는 길희성 교수가 조심스레 제시한 "보살예수"는 불가사의한 유토피아적 인물이 아니라, 모든 소박한 사람들도 꿈꿀 수 있는 평화적 인물의 원형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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