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시장 투자설명회를 위해 미국을 방문 중인 전 위원장은 20일 "금융위기 극복을 위해 예전에 쓰던 낫과 망치를 준비하고 있다"며 "특히 정부의 적극적인 역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 전광우 금융위원장이 은행들의 구조조정도 염두에 두고 있음을 밝혀 시장에 충격을 주고 있다. 사진은 지난 98년 퇴출 결정 소식이 알려지자 눈물을 흘리고 있는 동화은행 노조원들. ⓒ연합 |
1998년 외환위기 당시 국제결제은행(BIS) 기준 자기자본비율이 8% 아래로 떨어졌던 12개 은행 중 동화, 동남, 대동, 충청, 경기 등 5개 은행이 퇴출됐다. 전 위원장의 "낫과 망치" "짝짓기" 등의 발언은 은행들의 건전성이 계속 악화될 경우 이 같은 구조조정을 시도할 수도 있다는 경고다.
금융위원장, 고강도 '경고'
최근 국내 18개 은행의 BIS 비율이 지난 9월 말 현재 10.79%로 3개월 사이에 0.57%포인트 하락하는 등 건전성이 크게 악화된 것으로 알려지면서 일각에서는 공적자금 투입 등 선제적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BIS자기자본비율 BIS비율은 국제결제은행이 정한 위험자산 대비 자기자본 비율. 이 비율이 높을수록 경영상황이 좋은 것이다. 금융당국의 지도기준은 8%이나 10%가 넘어야 우량은행으로 분류된다. |
BIS비율을 높이기 위해선 부실채권을 털어내거나 자본 확충이 필요한데 경기 위축으로 부실채권이 늘어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자본 확충의 길을 터줘야 한다는 얘기다. 정부가 부실이 더 늘어나기 전에 선제적 조치로 공적자금을 투입하고 부분 국유화한 뒤 은행들의 경영에 관여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현 글로벌 금융위기로 미국과 영국은 일부 은행들에 대한 부분 국유화 조치를 단행했다.
이같은 공적자금 투입 요구에 대해 전 위원장은 지난 14일 "대부분 은행이 스스로 자본을 확충할 여력이 있어 정부가 직접 자본을 투입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시기상조'라는 입장을 밝혔었다. 하지만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아 "짝짓기"까지 언급하며 고강도의 경고를 보냈다. 그만큼 상황이 녹록치 않다는 얘기다.
금융위원회는 전 위원장의 발언이 '최악의 사태'도 염두에 두고 있다는 차원이라고 설명했다. 아직은 직접적인 공적자금 투입보다는 산업은행을 통한 후순위채 매입 등 측면 지원 방식을 쓰겠다는 입장이다.
또 지주회사의 차입을 통해 은행 자회사의 증자를 지원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허용하겠다고 밝혔다. 지주회사가 회사채를 발행해 자회사인 은행의 증자에 사용하는 것에 대해 일단 '급한 불부터 끄고 보자'는 차원에서 허용하겠다는 것이다. 금융위 일각에서는 이같은 방식이 지주사 건전성 악화 우려가 있다며 반대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하나금융지주와 우리금융지주는 각각 1조 원 규모의 회사채를 발행해 자회사인 하나은행과 우리은행 증자 등에 사용하겠다고 밝혔었다.
은행들 '속앓이'…실물경제 나아질 기미 안 보이는데
'최악의 상황'이 다가올 수도 있다는 위기감은 은행권 내에서도 나오고 있다. 적어도 1-2년 정도 실물경제 침체가 예상되는 상황에서 '출구'를 찾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지난 몇년간 지속된 장기 저금리 기조 하에서 은행들은 '덩치 키우기' 경쟁 차원에서 대출 경쟁을 벌였고, 그 결과로 빚어진 게 자산 인플레이션과 가계부채의 증가다. 또 부동산 가격이 상승하면서 은행들은 건설사들에 대한 대출도 늘려왔다. 이런 가운데 글로벌 금융위기로 유동성 위기가 오면서 국내 경기침체가 심화되고 자산 디플레이션이 진행됨에 따라 은행들의 부실자산이 늘어나고 있다. 디플레이션이 길어지면 부실자산은 더 늘어날 수밖에 없다. 은행들의 건전성이 악화되면 자본 확충은 갈수록 어려워진다. 금융위기가 실물위기를 불러오고, 실물위기가 다시 금융위기를 심화시키는 악순환의 궤도에 어느 정도 진입했음을 누구도 부인하기는 힘든 상황이다.
조기욱 하나금융지주 부사장은 20일 '포럼 새로운 한국'이 주최한 심포지엄 '세계 금융위기와 한국의 미래'에서 사견임을 전제로 "정부의 큰 개입 없이 민간주도로 잘 넘어갈 수도 있지만 정부 개입 여부를 배제하기는 어렵다"며 "어느 시점에 가면 정부의 자본 투입이 필요한 '최악의 시나리오'가 진행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정부 자금이 투입될 경우 은행간 합병 필요성이 증대될 수 밖에 없고, 이미 시장에 나온 외환은행과 정부가 민영화 방침을 밝힌 산업은행, 우리은행, 기업은행 등과 함께 정부 주도형 2차 금융 구조 개편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 조 부사장은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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