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과 함께 추억의 대상이 되어가는 한류라든가 심리적 저지선에서 다시 올라온 주류 가요의 갱신(?)은 비즈니스 관점에선 성공적일 수 있다. 그러나 문화적 관점에서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경제적 관점과 문화적 관점의 분리가 야릇하게 보일 정도의 세상이 되었다. 그리고 몇몇 가수들과 기획사 그리고 방송이 다스리기에는 대중음악 판도 너무 넓어졌다. 지난 연재("대중음악도 '비즈니스 프렌들리'하면 된다?" )에서 음악산업의 현황과 한계를 살피며 이 문제를 훑은 바 있다. 이제 대중음악정책이 어디쯤에 와있는가를 본다. 어느 방향으로 가든 정책과 한번쯤은 마주치기 때문이다.
작은 영화 제작비에도 미치지 못하는 관련예산
다른 분야에 비하면 뒤늦었으나 자료의 수집·정리를 위한 첫걸음은 떼어가고 있다. 문화콘텐츠진흥원은 한국음악데이터센터의 구축 및 운영사업을 시작했다. 대중음악과 관련된 음반·기록·자료 등의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는 사업이다. 당국은 아니지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도 3년 동안 민중음악 관련 자료들을 수집하고 정리해왔다. 역사의 축적과 활용, 즉 과거에 대한 정리는 모든 분야에서 가장 기초적인 작업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미래와 현재를 위한 정책이다. 보도에 따르면 당국은 "연구개발(R&D) 투자비용을 134억 원에서 441억 원으로, 저작권 보호 강화 비용은 150억 원에서 231억 원으로 늘리고, 전문인력 양성, 콘텐츠 기획·창작 역량 강화 등에 집중 투자하겠다"고 밝혔다. 근사한 말이지만 단서가 필요하다. 제대로 초점을 맞춘다면 말이다. 다른 사회문제와 마찬가지로 방향과 절차는 비슷해 보이더라도 실제 내용에 대한 관점과 강조점이 차이를 만든다. 자본으로부터 독립하여 창작의 근간을 이루는 부문에 대한 관심 없이는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서의 문화산업"은 말뿐일 수밖에 없다. 아니, 정말 수식용일 뿐일지도 모른다.
한국처럼 사회복지가 미약하여 지속적인 창작활동이 불가능에 가까운 국가에서는 더더욱 소규모 창작에 대한 지원이 필수적이다. 대중음악 역시 예외는 아니다. 그런데 문화부 산하 문화콘텐츠진흥원의 예술지원예산은 지난 정부에서 30억 원에서 24억 원 규모였고, 이 중 대중음악지원 부문은 불과 3억 원 정도였다. 저예산영화로 분류되는 영화 한 편의 제작비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다. 대중음악은 알아서 잘 되고 있어서? 아니면 상업적인 분야라서?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대중음악에 대한 완벽한 오해이다.
몇 가지 원인을 유추해볼 수는 있다. 대중음악은 '전통'과 '순수' 보호육성이라는 당위에서 비껴서 있었고, 다른 예술분야처럼 학제를 중심으로 제도화되어 배타적 지위를 획득하지도 못했다. 학제시스템을 강화해야한다는 생각에는 이런 이유도 있지 않나 싶다. 또한 종사자 집단이 한 목소리를 내지 못해왔다. 음원수익분배율 협상 초기에 드러났듯 공통의 창구가 없었으며 사업자들은 안이하고 계산적인 태도를 드러냈다. 가수협회 등 대중음악인단체들은 아직은 정책 등에 관련된 구체적이며 효과적인 역할까지 하고 있진 않다. 하나 더. 다수의 대중음악인들은 사회적 기여에 소홀했고, 젊은 음악인이나 음악애호가 중에는 정치·사회적 무관심을 '쿨'한 것으로 여기는 90년대식 정신에 아직까지 묶여있는 경우가 있음을 인정해야 할 것 같다. 발언권은 사회적 발언을 통한 기여도와 비례한다.
다양성의 산실인 인디레이블, 지원이 사라지다
현장에 영향을 미치는 역할은 크게 문화예술위원회와 문화콘텐츠진흥원이 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음반작업을 위한 시설을 대여하는 프로그램도 있다. 문화예술위원회를 통해서는 프로젝트 별로 지원을 받는 식이고 문턱도 높았다. 게다가 앞으로 큰 변화를 겪게 되면서 더욱 어려워질 것으로 예상된다. 그나마 문화콘텐츠진흥원이 2003년부터 시행했던 '인디레이블육성지원사업'이 비교적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음악의 저변을 형성해온 인디레이블의 음반제작과 생산에 대한 정책적 배려가 필요했던 시점에 시행되어 실효성 있는 사업으로 평가받았다. 그동안 "안하는 게 돕는 것"이란 인식까지 있을 정도로 현장과 동떨어진 정책들 탓에 '차라리' 직접 지원하는 방식이 환영받았던 측면이 있다.
홍보력은 작지만 인디레이블과 같은 소규모 조직은 아이디어의 구체화가 빠르다. 크기가 작을수록 종의 존속기간이 긴 것처럼 인디레이블에는 장점이 있다. 음악인들이 직접 운영하는 레이블들이 나타나고 있어 창작자와 사업자가 결합되었고, 음악인 출신 프로듀서의 육성과 같은 구체적인 고민과 지역음악공동체에 대한 중요성이 공유되고 있다. 또한 대중성과 전문성을 겸하고, 비주류 정서와 기법으로 주류에 닿아간 사례들이 나타나 대중적 자신감도 커지고 있다. 무엇보다 내용면에서 나름의 가치와 재미를 통하여 주류 가요계와 구별되는 감성을 전달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거절당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이 시대의 진짜 내면풍경을 담아내는 작업을 기대할 수 있다. 결코 모든 인디음악이 훌륭하다는 말이 아니라 태생과 구조가 보다 열린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작품들이 증명한다. 리메이크를 넘어선 복고의 확장은 인디 씬에서 가능했다. 국내 음악과 해외 음악 사이에 있었던 약 5년 정도의 시차를 좁혀왔고, 삶과 고민을 대변하는 노래들도 더 자주 만날 수 있다. 이처럼 이윤만을 목표로 하지 않는 점이 한계이자 강점이다. 음악적 실험 또한 오버그라운드로 파급된다. 디즈니 취향의 피터 팬인 서태지는 상이한 것들을 조립하여 대중성을 획득해왔는데, 그가 활용하는 음악요소들 역시 비주류 음악에서 시작된 것들이다. 그렇다고 독립음악과 작가주의가 주류 대중음악을 대체할 수는 없다. 그다지 바람직하지도 않다. 각각의 배역을 맡아 평행하게 공존하며 겹쳐지는 면이 넓어지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미 문제는 왜 인디 씬을 주목해야하는가가 아니다. 어떻게 육성할 것인가이다.
그러나 인디레이블지원사업은 2007년도 사업을 끝으로 폐지되었다. 다행이다. 이제 인디레이블 관계자들과 음악인들은 지원서류를 꾸미느라 에너지를 소모하지 않아도 된다. 음반의 가치에 대한 성급한 판단과 함께 반복수혜, 지원금정산의 투명성이 제기되었다지만 가시적 지표가 결정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시기 때문에 현 정권이 없앤 것 아니냐는 얘기가 있지만 단순화하기는 곤란하다. 음악산업에 투자되던 예산 30억 원이 2006에 26억 원을 거쳐 2007년에는 24억 원으로 감소했고, 불과 1억5000만 원이 투입된 인디레이블지원사업 역시 2003년부터 지원대상이 40개에서 25개로, 다시 20개에서 15개 팀으로 해마다 줄어왔다. 세금절약의 모범사례를 제시한 놀라운 성과였지만, 이것이 "문화콘텐츠산업을 고부가가치 성장산업으로 육성해 문화콘텐츠강국을 건설하겠다"는 나라의 현실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음악계가 지원에만 목을 매고 있지는 않다. 예전의 인디음악 뮤직비디오들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었다. 일상의 공간을 멤버들이 떠돌아다니는 남루한 장면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제작비 문제 때문이었겠지만, 이러한 '부유'는 현실의 반영이기도 했다. 적잖은 이들이 생활이 아니라 생존 자체를 고민해야 했다. 하지만 이후 환경에 적응하면서 태도에도 변화가 생겨 과거에는 "프로페셔널=직업적"이었다면 지금은 삶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타협하지 않는 음악을 위해 음악활동에만 얽매이는 삶을 경계하기도 한다. 이를 통하여 대기업 등의 후원 없이는 존립이 힘들다는 다른 분야와 달리 스스로 씬을 만들어냈고, 진입보다는 자생을 위한 존립근거를 구축하고 있다. 그럼에도 전원공급과 아웃풋(output)은 필요하다.
현실에 대한 집착이 현실성 없는 정책을 낳다
2008년부터 문화콘텐츠진흥원은 인디레이블지원사업 대신 '인디음악공연활성화지원사업'을 시작했다. 또 다른 지원사업인 '우수신인음반지원사업'은 홍보 루트가 제한적인 음악인들을 지원한다는 취지로 출발했다. 그간 신인경연프로그램이나 대학가요제는 '통하는 음악'의 유형을 제시함으로써 다양한 음악의 가능성을 차단하는 데에만 성공해왔다. '산울림'같은 밴드가 등장해도 대중성이 없을 거라며 거부당할 판국이다(산울림은 당시 최고의 히트작이었다). '한국형' 모던 록 등의 유행이 여기에서 비롯됐다.
그런데 우수신인음반지원사업마저 대중이 좋아할만한 신인을 선정하는 대중성의 함정에 빠지곤 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위탁업체를 선정하여 방송사를 통해 노출시키고 해당 가요프로그램의 인터넷 방문자들이 결선투표를 하는 방식이다. 결과적으로 기획사의 매니지먼트를 보조하면서 취지에 부합하지 않게 되어버리는 절충의 한계를 노출한다. 그것이 현실이지 않느냐는 소박한 변명은 가능하다. 하지만 전혀 현실적이지 않은 현실을 해외 음악계에서 얼마든지 찾아 제시할 수 있다.
"저탄소 녹색성장"이라는 말처럼 "원-소스 멀티-유스"라든가 "선택과 집중"이라는 사실과는 먼 이야기들이 반복된다. 바지를 걷으니 다리가 있더라는 식의 획기적인(?) 이 슬로건의 유일한 약점은 도무지 현실성이 없다는 것이다. 분석이 아니라 기대한 것이다. 일본 등의 대중문화산업을 부러워하기 전에 어떻게 가능했는가에 대한 인정이 먼저다. 다양성을 건너뛰고 결과만 취하고자 하면 기대는 있으되 결과가 가능하도록 한 전제는 없는 소망일뿐이다. 또 치열한 내부경쟁이 외부경쟁을 가능케 하리라는 발상 역시 효율적으로 보이지만 결국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밖에 없기에 오히려 감당해야할 비용을 증가시키게 된다. 나무 몇 그루만 덜렁 심어놓는다고 좋은 목재가 나오지 않는다. 조림이 먼저이듯 다방면이 성장 후에 유망한 것도 골라낼 수 있다.
물론 정책이 전부가 아니며 지원이 정책의 전부도 아니다. 하지만 대중음악의 뒷받침은 저변과 창작집단이 있을 때 가능하다. 비용지출은 여기에서 유효해진다. 창작과 매개 그리고 수용, 즉 창작권과 향유권의 신장은 단기간에 조성되지 않는다. 거시적이고 연속적인 정책이 필요하다. 여기에는 창작지원과 스튜디오·중소공연장에 대한 면세 및 환급 등 다양한 방법들이 포함된다. 통솔이 아니라 '위로부터'와 '아래로부터'의 접목이 필요하기 때문에 필드 경험자의 아이디어가 수렴되어야 하지만 그런 예는 찾기 힘들다. (음악동네와 무관한 전문가, 행정속성에 무심한 예술가 사이에는 분명 갭이 있다.) 경험과 능력만큼이나 마인드가 중요하고, 그래서 듣기 싫은 소리도 들어야 하는 분야다. 이를 바탕으로 대중예술과 대중음악 역시 공공영역의 일부라는 인식이 외화 될 때 단발사업이 아니라 장기정책이 나온다.
실적압박과 장기정책 vs 장기정책과 내적동력
'미드'에 나올법한 사려 깊지만 뻔한 이야기다. 그럼에도 비경제적이고 비합리적으로 문화예술정책에 매번 '사정에 따라 변경될 수 있음' 스티커가 붙는 데에는 그럴만한 사정이 있다. 실적 압박이다. 그러나 당장 '가처분' 실적을 요구하는 것은 태어나자마자 화석화될 운명의 사고이다. 지원을 했으니 가시적인 음반판매량을 내놓으라거나 블루칩과 루키를 손가락으로 집어 보여 달라는 것은 출발부터가 어긋난 방식이다. 문화예술지원기관은 금융투자기관이 아니다. 우스운 예로 4할 타율의 9번 타자는 물정모르는 상상이다. 4할 타율이면 9번 타자에 놔두질 않는다. 심지어 그가 투수라면 얘기는 심각해지기까지 한다.
투기성 자금까지 가세해 호황을 누렸던 4000억 원대 미술시장이 올해 반토막 나고 있다는 지적은 시사하는 바가 있다. 그럼에도 경제효과부터 따지는 압박은 문화부에서 지원기관의 결정권자로, 그리고 실무자에게로 이어진다. 이러면 전문가들은 정치적 생존의 전문가가 되어야 하고, 가뜩이나 변수가 많은 상황에서 안정성을 위해 도전을 꺼릴 수밖에 없다. 신중함과 과감함이라는 그럴듯한 미덕 사이에서 긍정적인 아이디어는 '지금도 구상 중'이거나 '언제나 실험 중'으로 남게 된다. 더구나 2008년에는 사정에 하나 더 추가되었다. 문화콘텐츠진흥원과 문화예술위원회의 장들이 사퇴의사가 없느냐는 소리를 듣거나 예산삭감 방식으로 압박을 받는다는 얘기까지 흘러나온다. 이러니 장기정책은 더욱 불가능해진다.
지금이 대중음악 전체의 위기라고는 할 수 없으나 대중음악이 초래한 위기임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각각이 제시하는 모호한 원인만큼이나 각각의 대안 역시 모호하다. 음악이 단지 여가에 즐기는 사치나 이윤을 위한 상품으로 취급받을 때 음악가는 존중받기 힘들다. 이런 상황에서 정책방향은 음악경향에 영향을 미치기도 하고, 크게는 그 한 부분이 전체에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다. 실효만큼 중요한 것이 사기이고, 그렇게 만들어지는 내적 동력이 전제이다. 단지 대중음악에만 해당되지 투정 따위가 아니다. 한 예로 명화들의 공통점이자 조건은 좋은 음악이다. 훌륭한 영화음악은 망각의 우물에서 작품에 대한 기억을 수시로 길어 올린다. 이렇게 영화산업과도 연결되어 있으며, 무엇보다 정신적으로 음악은 음악 이상이다.
지난 8월, 사회자로 참석한 한·중 음악인 간담회에서 한 뮤지션은 "일반인이 음악을 즐기고 만들고 나눌 수 있는 환경을 위한 구체적인 아이디어 사례"를 제시했다. 미세한 각종 벌레와 균들이 서식하는 사람의 몸마저 하나의 생태계일진대 하물며 음악계는 어떠할까. 그 토양이 배우고 만들고 가꾸는 교실이자 강당이고 운동장이다. 그리고 이른바 문화선진국들의 풍요로운 문화향유가 다음세대에서는 가능하도록 하자는 긴 시각이 더 현실적이다. 그동안 참 바쁘게 뒤만 보고 걸어왔지만, 준비된 토양만 넘겨준다면 지금까지의 단절과 시행착오마저 의미 있는 과정으로 승격될 수 있다. 정확한 현실인식은 이상과 따로 있지 않다. 워낙에 이렇다할 예산이나 정책이 없기에 부득이 특정 기관을 언급했지만 한 두 기관이 떠 앉을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되는 문제이다. 장황했던 탓에 결론을 더 연장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서도 뭐 좀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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