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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광합성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다"

[위기의 한국경제, 현장을 가다⑤] '하이퍼인플레' 온다고?

설탕, 식용유, 밀가루, 라면, 휴지(유아가 있을 경우 기저귀 포함), 건전지, 비누 등 세제, 커피, 통조림, 휘발유….

최근 인터넷에서 돌아다니는 물가급등에 대비해 사재기해야할 생필품 리스트다. 9월 중순부터 본격화된 미국발 금융위기의 여파로 한국도 환율이 급등하는 등 금융시장이 요동을 치는 모습을 보이면서 '제2의 외환위기설'까지 나오고 있다. 그러다보니 서민들 입장에서는 당장 '먹고 사는 문제', 물가에 대한 불안감이 커질 수밖에 없다.

게다가 지난 연말 900원대였던 원-달러 환율이 1300원대까지 치솟으면서 물가에 부담을 주고 있다. 배럴 당 140달러대까지 치솟았던 국제 유가가 최근 70달러대로 거의 절반 가량 내려왔지만 9월 수입물가가 지난 8월에 비해 소폭 상승(2.3%)한 것은 최근의 환율 급등 때문이다. 수입물가는 시차를 두고 소비자물가에 반영된다. 소비자물가지수가 하반기에도 5%선에서 더 이상 내려오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다.

주부들 "한참 자라는 얘들을 채식주의자로 만들 수도 없고"

인터넷을 떠돌아다니는 '11월 물가대란설'은 이런 흉흉한 민심을 대변한다. 사재기해야할 생필품 품목에 들어간 물품들은 원재료가 수입에 의존하는 것들이다. 밀가루는 1년 전에 비해 90% 가까이 올랐다. 밀가루 값이 이처럼 폭등하다 보니 라면 값도 1년 전에 비해 14.5% 올랐다. 비스킷은 50.0%, 우유는 42.5%, 식용유는 20.6% 올랐다. 참치캔은 최근 14-20% 정도 가격이 올랐다.

환율이 크게 오르면서 수입 신선식품은 더 큰 폭으로 오르고 있다. 필리핀산 바나나 가격은 40% 가까이 올랐다.

문제는 최근 환율 급등분이 아직 소비자 가격에 반영되지 않았다는 점. 롯데마트 등 유통업체들은 호주산 쇠고기 가격을 15-20% 올리는 등 조만간 환율 급등에 따른 상승분을 가격에 반영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서민들의 장바구니는 더 가벼워질 전망이다.
▲ 고물가로 서민들의 장바구니가 갈수록 가벼워지고 있다. ⓒ뉴시스

13일 서울 마포구의 한 대형마트에서 만난 주부 이모(42) 씨는 "정말 물만 먹고 광합성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면서 한숨을 쉬었다.

"1년 전에 비해 식료품 가격이 아무리 적게 잡아도 1/4 이상은 더 들어가는 것 같다. 더구나 우유, 식용유, 밀가루, 돼지고기, 라면 등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도 없는 품목들만 골라서 올랐다. 광우병 파동 나면서 쇠고기는 안 먹는다고 쳐도 한창 자라는 얘들한테 돼지고기, 닭고기마저 안 먹일 수는 없지 않냐. 또 최근 멜라민 파동이 나면서 중국산 식품엔 선뜻 손이 가지 않는다."

직장인들 "외식비도 장난 아냐!"

원재료인 식료품 가격이 크게 오르니 외식비도 덩달아 오를 수밖에 없다. 외식비 상승은 직장인들의 주머니를 위협하는 주범이 되고 있다.

9월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39개 외식품목의 소비자가격은 올해 초에 비해 5.6% 올랐다. 같은 기간 소비자물가 상승폭(4.5%)을 크게 웃돈다.

특히 직장인들의 점심 식사 단골 메뉴인 김밥(22.4%), 자장면(12.8%), 볶음밥(9.5%), 칼국수(9.2%), 삼계탕(8.4%), 김치찌개백반(6.5%), 된장찌개백반(5.4%), 갈비탕(5.1%), 비빔밥(5.0%) 등도 소비자물가에 비해 많이 올랐다.

점심 식사 메뉴 뿐 아니라 저녁에 동료들과 가볍게 술 한잔하는 자리에서 즐겨 먹는 삼겹살(10.4%), 튀김닭(7.8%), 탕수육(5.4%) 등도 올랐다. 생맥주 가격도 5.6%나 올랐다.

이처럼 서민들이 주로 찾는 외식품목의 가격은 소비자물가 상승률을 크게 웃돌았지만 고급식당의 비싼 메뉴들은 크게 오르지 않았다. 쇠갈비(1.3%), 생선초밥(2.2%), 등심(3.0%), 불고기(3.6%), 스테이크(4.1%) 등은 소비자물가 상승률보다 적게 올랐다.

직장인들은 껑충 뛴 외식비 때문에 불만을 토로하지만, 음식점을 운영하는 자영업자들 역시 고물가의 피해자들이다. 서울 강남에서 한식집을 운영하는 김모(58) 씨는 "요즘 죽을 지경"이라고 한숨부터 쉬었다.

"사람들이 '이 정도면 부담 없이 먹을 수 있다'는 심리적 마지노선이 5000원이다. 5000원 넘어가면 '비싼 메뉴'가 돼서 경기가 어려울 때는 사람들이 지갑을 열지 않는다. 3년 전에 5000원으로 올린 메뉴들이 지금도 5000원이다. 5000원짜리 찌개백반 팔아서는 안 남는다. 그렇다고 6000원 받으면 안 온다. 저 옆에 맥도날드 가봐라. 점심시간에 사람들 줄 서서 먹는다. 거기 점심 메뉴가 3000원 아니냐.

예전엔 차돌전골 같은 고가 메뉴를 추가해서 팔아 손실을 보충하는 식이었는데, 요즘은 차돌전골 찾는 사람들이 하나도 없다. 그러면 반찬을 줄일 수밖에 없는데 오피스타운에서 단골장사를 하는 입장에 손님들이 금방 알아채고 안 온다."

국제유가는 절반으로 떨어졌는데 휘발유 값은 제자리

상반기 물가상승의 주요한 원인 중 하나는 유가 급등이었다. 올 2월부터 급등하기 시작한 국제유가는 지난 7월 휘발유가격은 지난 7월11일의 147.27달러로 최고점을 찍은 뒤 하락세로 돌아섰다. 급기야 16일 11월 인도분 서부 텍사스산 원유(WTI)는 배럴당 69.85달러에 거래되는 등 절반 수준으로 떨어졌다.

국제유가는 다시 안정세를 찾았지만 휘발유, 등유, 경유 가격은 '제자리' 수준이다. 국제유가 상승을 반영해 소비자 가격이 크게 올랐지만, 유가 하락을 반영해 내려가는 속도는 더디다. 한때 리터당 1900원대까지 올랐던 휘발유값은 석유공사의 주유소종합정보시스템에 따르면, 16일 현재 전국 평균 1701.55원이다. 경유값은 리터당 1615.64원이다. 그나마 "원유값은 절반으로 떨어졌는데 휘발유값은 왜 안 내리냐"는 소비자들의 원성과 정부의 단속 때문에 근래 많이 내려간 게 이 수준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9월 차량용 연료(휘발유·경유·LPG)는 지난해 같은 달에 비해 27.3% 올랐다. 정유업계는 원유가 하락이 소비자가에 그대로 반영되지 않은 것에 대해 '환율 급등'을 이유로 들고 있다. 1200-1300원대까지 올라선 원-달러 환율은 유가 하락을 상쇄하는 효과를 갖는다는 주장이다.

치솟은 기름 값은 도시 주민들에게도 부담이지만, 농촌 주민들의 생활고를 더 가중시킨다. 도시는 크게 오른 휘발유값이 부담이면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되지만, 대중교통서비스가 열악한 시골은 없는 살림에 울며겨자 먹기로 자가용을 몰아야 한다.

충북 영동의 주부 이모(67) 씨는 "시골은 버스가 잘 안 다녀 자가용 없으면 못 다닌다"며 "집에서 읍내까지 왕복 40km정도 되는데 휘발유값만 한달에 20만 원이 넘는다. 이것저것 유지비까지 따지면 25만 원은 족히 든다. 한번 주유할 때 5만 원씩 넣고 다녔는데 예전에는 10일 정도 탔던 거 같은데 요즘은 1주일도 못 갈 때가 많다"고 말했다.
▲ 연탄값도 기름값 못지 않게 크게 올랐다. 특히 이명박 정부 들어 연탄보조금제를 축소하면서 가격 상승을 더 부추겼다. ⓒ뉴시스

차 뿐만이 아니다. 난방비도 도시가스가 보급된 도시에 비해 등유 등을 쓰는 농촌이 더 많이 든다. 이 씨는 "집에 등유 보일러를 쓰는데 한 달에 한 드럼(200리터) 정도 땐다. 기름값이 올라 한 드럼에 26만 원 한다. 재작년만 해도 드럼 당 12만 원이 넘지 않았다"고 말했다. 9월 등유값은 1년 전에 비해 39.4% 오른 것으로 나타났다.

"도시는 다 아파트고 연립주택이고 해서 위아래 양옆으로 집이 붙어 있어 열효율이 높다. 그런데 시골은 집들이 다 단독주택이고 도시보다 추워 기름을 많이 때야 한다. 산골이라 겨울도 일찍 오고 늦게 끝난다. 다섯 달 정도 보일러 돌려야 하는데 올 겨울 난방비만 100만 원이 넘게 든다는 얘기다. 시골이라 수입은 뻔한데 물가는 계속 오르니 정말 살길이 막막하다. 우리 집은 그나마 농기계가 없어서 그런데 농기계를 쓰는 집들은 더 난리다."

기름보일러 대신 연탄보일러로 바꾸고 연탄을 때려는 서민들이 늘었다. 하지만 연탄값도 크게 올라 서민들을 한숨짓게 만들고 있다. 작년까지 장당 300원대 초반이었던 연탄가격은 올 4월 현재 400원대 초반으로 올랐고, 최근에는 장당 40원 가량 더 오른 것으로 나타났다. 연탄가격이 이처럼 크게 오른 것은 연탄보조금이 축소됐기 때문이다. 이명박 정부는 상업적 목적에서 사용되는 연탄이 많다는 이유로 연탄보조금을 점차 축소해 2011년에는 폐지하겠다고 밝혔다. 현재 400원대의 연탄값은 지원금이 폐지되는 2011년 이후에는 장당 1000원이 넘을 것으로 예상된다.

전세계가 디플레이션 걱정하는데…

이명박 정부는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지난 7월 5.9%로 고점을 기록한 뒤 점차 안정세를 찾아가고 있다는 점에서 물가 안정보다는 경기침체 해소에 방점을 찍고 정책을 운용하고 있다. 한국은행이 10월 기준금리를 0.25%포인트 인하한 것도 이를 보여준다.

하지만 지난 9월 중순 본격화된 미국발 금융위기로 원-달러 환율은 다시 요동치기 시작했다. 전세계적으로 달러 약세 현상을 보이고 있는데 우리나라만 유독 원화 약세 현상이 두드러지면서 물가 상승 위협이 다시 커졌다. 전세계가 금융위기의 여파로 경기침체를 걱정하고 대비해야 하는 시점에 한국은 환율상승으로 경기침체와 물가상승을 동시에 고민해야 하는 진퇴양난의 상황에 빠져 있다는 얘기다.

김병권 새사연 연구센터장은 "올 상반기에는 수입 원자재가가 큰 폭으로 오르고, 하반기는 환율이 크게 올라 원자재가 하락의 효과를 거의 못 보고 있다"며 "올 연말까지는 소비자 물가상승률이 5%를 기록할 것으로 보인다"고 전망했다.

그는 "지난해만 해도 소비자물가상승률이 평균 2.5%였는데 5%면 2배 이상 오른 것"이라며 "최근 물가상승압력이 줄었다고 하지만 서민들에게 고물가 고통이 큰 것은 사실이다"고 말했다.

김병권 센터장은 그러나 최근 누리꾼들 사이에서 얘기되는 '하이퍼인플레이션'(hyperinflation)이 올 가능성은 없다고 말했다. 하이퍼인플레이션은 물가가 1년 사이에 몇배 이상 급등하는 급격한 인플레이션을 말한다. 실제로 아프리카 짐바브웨는 지난 7월 인플레이션이 2억3100%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금융위기를 맞은 미국과 유럽 정부의 무차별적인 유동성 지원을 놓고 부작용으로 하이퍼인플레이션이 오는 게 아니냐는 논란이 일기도 했다.

그는 "상대적으로 올해까지는 고물가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으로 보이는데 장기적으로는 더 걱정되는 것은 경기침체"라고 지적했다. '하이퍼인플레이션' 논란은 불안심리가 반영된 기우라는 것이다.

그는 그러나 "우리 자본시장이 외부 충격을 완충하거나 흡수할 장치가 거의 없이 물가에 환율 등이 파급을 미칠 여지는 남아있다"며 "정부가 외부 금융충격에 대한 완충장치를 시장에 맡기고 자금을 풀어 조정해보려 하지만 효과가 없다는 게 이미 드러났다. 정부가 시스템적 완충장치를 마련해 이를 해소하지 못한다면 언제든지 물가가 요동칠 가능성은 살아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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