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면 몰라? 생선장수 앞치마가 젖지를 않잖아."
기자의 질문에 서울 종로구 효자동 통인시장에서 30년 동안 생선 장사를 해 온 노금자(59) 씨는 '정말 몰라서 묻느냐'는 표정을 지었다. 새벽부터 손님을 기다렸지만, 아직까지 생선 한 마리 다루지 못했다는 그는 허리에 두른 앞치마를 내밀었다. 정말 물기 하나 없이 빳빳했다.
지난 10일 오후 1시쯤 찾은 통인시장은 식사를 하려는 근처 회사원들 몇몇을 빼고는 지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주변 상인들은 한 목소리로 오전, 오후 다 손님이 붐비는 시간대는 없다고 했다.
최근 불거진 미국 발(發) 금융위기가 국내 실물경제로 옮겨가리라는 우려가 높다. 경기에 민감한 유통 부문에서 이런 우려는 이미 현실이다. 지난 9월 국내 대형마트의 매출액이 지난해 같은 달에 비해 최대 5.5% 감소했고, 국내 '빅3' 백화점인 롯데와 현대, 신세계백화점의 9월 매출 신장률이 각각 2%, 3%, 4%로 올해 들어 최저 수준으로 집계됐다. 이처럼 시장이 움추러든 상황은 재래시장에서 더 심각하다.
"하루 15만 원 수입이 5만 원으로"
재래시장이 어렵다는 소식은 하루 이틀 얘기가 아니다. 대형 양판점(할인 마트)과 인터넷 쇼핑몰이 활성화되면서, 재래시장을 찾는 손님은 급격히 줄었다. 여기에 최근 금융 위기에 따른 소비 위축이 겹치면서, 근근히 맥을 이어가던 재래시장은 생존 자체가 위태롭게 됐다.
통인시장 상가번영회 관계자에 따르면 1990년대까지만 해도 통인시장 인근의 효자동, 누하동, 옥인동, 통인동 주민들은 주로 이곳에서 장을 봤다. 하지만, 서울역에 롯데마트가 들어서면서부터 상권은 급속도로 시들었다고 한다.
그나마 드문드문 오던 손님도 올해 추석을 지나면서 확 줄었다.
이곳에서 30년 넘게 장사를 해온 건어물 가게 주인 김영식(64, 가명) 씨는 "계속 장사가 안 됐는데 한 달 전부터 특히 안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석 달 전만 해도 하루 15만 원 정도 벌었는데, 한 달 전부터는 5~6만 원 선에서 그친다"고 말했다.
같은 시장에서 반찬을 파는 이정순(50) 씨도 "최근 추석을 전후로 매출이 급감했다"며 "추석 전엔 하루 매출이 3분의 1 정도 줄더니, 지금은 거의 절반 가까이 줄었다"고 말했다. 추석 전 하루 20만 원 가까이 벌던 것이 이젠 10만 원 정도로 줄었다는 것이다. 그는 점포 한 귀퉁이에서 반찬과 상관없는 액세서리도 팔고 있었다.
"식용유 같은 식자재 원가가 30%도 더 올랐다. 그런데 오히려 반찬값은 내렸다. 안 팔리니까. 팥죽 3500원 하던 것 얼마 전에 3000원으로 내렸다. 원가는 30% 올랐는데, 금방 상하는 제품은 하루에 다 팔려고 가격을 내렸다. 다른 것이라도 팔아서 줄어든 수입을 채워야지…. 반찬만 가지고는 공과금 내기도 빠듯하다."
이 씨는 전기세, 가스비는 최대한 아끼고, 외식 안 하면서 사정이 좋아지기만을 기다린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빠듯한 벌이에 솔직히 사는 재미는 좀 떨어진다"고 씁쓸하게 웃었다. 점심값을 부담스러워하는 것은 이 씨 만이 아니었다. 점심 시간, 통인시장에서는 상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집에서 싸온 도시락으로 식사를 해결하는 모습이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새 물건 안 들이고 재고만 팔아요"
또 다른 가게를 들어가 보니, 마침 주인은 손님에게 국자를 팔고 있었다. 시장 초입에서 주방 용품 가게를 운영하는 원용채(65) 씨는 "오늘 처음으로 지폐 구경을 했다"며 돈을 보관하는 통을 보여줬다. 파란 지폐 한 장이 썰렁하니 놓여 있었다.
그에게 '왜 이렇게 장사가 안 되느냐'고 묻자 그는 "머리가 아프면 발끝까지 아프기 마련"이라고 했다.
"기름 값이 오르고, 환율이 오르니 우리 같은 장사치들이 버텨낼 재주가 있나. 가게에서 파는 대부분 물건 원가가 30~40% 정도 올랐거든."
원 씨는 "25리터짜리 플라스틱 양동이가 5000원 했는데, 최근에는 7000원으로 올랐다"며 "석유 값에 민감한 플라스틱 제품은 물론 그릇이 전반적으로 다 올랐다"고 말했다. 그는 물건을 사오지 않고 재고만 팔고 있었다.
도매상도 힘들다…"지금이 딱 공황상태"
새 상품을 들여오지 못하는 현상은 원 씨만 겪는 게 아니었다. 훨씬 규모가 큰 서울 남대문시장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남대문시장에서 가장 장사가 잘 된다는 남도 수입상가의 한 점포에서 같은 날 새벽 6시, 가게 문을 여는 한 상인을 만났다. 수입 그릇을 취급하는 도매상인 김상재(67, 가명) 씨는 "요즘 장사하기 어때요"라는 기자의 질문에 "형편없다"고 딱 잘라 말했다.
그는 "물건 값이 너무 올라 마진이 남지 않는다"며 "팔고나면 다음 물건을 못 사올 정도"라고 말했다. 그는 "제품 원가는 영업 비밀"이라면서 예를 들어 설명해 줬다.
"원가 2만 원 하던 제품이 일주일 새 3만 원 가까이 올랐다고 보면 된다. 지난주에 원가 2만 원 하는 제품에 마진을 붙여 3만 원을 넘지 않는 가격에 팔았는데, 이번 주엔 원가가 3만 원 가까이 됐으니 도대체 어떻게 마진을 붙이라는 것인가. 가격을 올리면 소매상인들이 사가지 않는 건 당연하니 함부로 올릴 수도 없고…."
그래서 그도 소매상인 원 씨처럼 자연히 물건을 새로 들여놓지 않고, 재고 상품만 팔고 있었다. 그는 "물건도 얼마 안 남았는데, 더 살 수도 없고…"라며 말끝을 흐렸다. 그는 "지금이 딱 공황상태"라고 헀다.
"환율 떨어지기만 기다리는 수밖에…"
이곳 남대문시장 수입상가에서 수입 그릇, 양주, 등산용품 등을 파는 다른 상인들도 모두 같은 얘기를 한다. 이들은 "재고가 다 떨어져 가 큰일"이라고 말했다.
환율이 상승하면 원화 가치가 떨어져 외국에서 물건을 사올 때 더 비싼 가격에 사와야 한다. 또 국제유가와 원자재 가격도 오르기 마련이다. 그러면 제품 원가는 오른다.
이 같은 상황에서 외국 제품을 수입해 도매업을 하는 남대문시장 상인들이 직격탄을 맞은 셈이다. 아울러 남대문시장 같은 도매시장에서 물건을 가져오는 원 씨와 같은 소매시장 상인들도 그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미국에서 발생한 금융위기로 환율이 상승하고, 원자재 가격이 오르면서 재래시장 상인들도 그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한 목소리로 "환율 떨어지기만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IMF 때보다 더 하다…추석대목도 소용없다"
환율이 치솟아서 상인들이 몸살을 앓았던 경험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1997년 IMF 구제금융 시기와 지금을 비교하면, 어떨까. 남대문시장과 통인시장 상인들은 한 목소리로 "차라리 IMF 때가 나았다"고 말했다. 환율이 1600원까지 오르고, 기업들이 줄 도산하던 당시보다 사정이 더 나쁘다는 이야기다.
통인시장에서 10년 넘게 백반집을 운영해 온 박정석(65, 가명) 씨는 "IMF 때는 한 테이블에 소주 3~4병과 안주 몇 가지는 거뜬히 팔았는데, 요즘은 사람들이 힘들어도 술 사먹을 돈이 없는지 술손님이 없다"고 한다.
"한 달에 120만 원 정도 버는데 10년 전에도 그만큼 벌었다. 물가는 오르는데, 수입은 제자리인 셈이다. 10년 전에는 백반 1인분을 3500원에 팔았는데, 지금은 5000원에 파는데도 전체 매출이 같으니 원…."
통인시장 상가번영회 관계자도 "지난달 수입이 가장 적었던 점포는 추석 대목에도 불구하고 70만 원 정도였다"라고 밝혔다.
"IMF 때보다 더 심하다"는 목소리는 재래시장 상인들의 고통이 단지 환율 인하만 기다린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라는 것을 뜻한다. 대형 할인마트, 인터넷 쇼핑몰 등과 다른 재래시장만의 강점을 살릴 수 있도록 정부가 지원해야 한다는 뜻이다.
물론, 재래시장 활성화는 선거 때마다 단골 공약이었다. 이명박 대통령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상인들은 거창한 공약 대신 실질적인 대책을 원한다. 통인시장 번영회 관계자는 "근처에 주차장만 있었어도"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대형 할인마트로 차를 몰고가, 트렁크에 가득 물건을 담는 손님들을 보며 내뱉는 한숨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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