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적인 질문은 시작도 전인데, 인터뷰 취지를 설명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
물가는 오르는데 임금은 받쳐주질 않는다. 아니, 제 자리 걸음이면 그나마 다행일 텐데 수입은 최근 오히려 더 줄었다. 은행 대출이라도 조금 있으면, 한숨은 더 깊어진다. 게다가 일하면서 들어가는 비용을 고스란히 개인에게 떠넘기는 이상한 시스템은 혼자서는 어쩔 도리가 없다. 아무리 지나간 일은 미화되기 마련이라지만, 이를 감안하고도 98년 외환위기 때보다 지금이 더 힘들다는 하소연이 쏟아졌다.
그런데도 경영계는 임금 동결을 얘기하고 있다. "고통을 분담하자"는 것이다. 실제 많은 기업이 내년도 임금을 동결했다. 노동부가 7000여 곳의 사업장을 조사한 결과 올해 2분기 실질임금 상승률은 2.6%에 그쳤다. 아이들은 한 해 한 해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커 가고 돈 들어갈 구석은 한 두 곳이 아닌데, 주머니 사정은 빤하니 정규직 노동자도 사는 일이 힘에 부친다.
10년 새 두 번이나 경제위기의 '총알받이'가 된 사람들
하지만 매월 일정 수입이 보장되고 당장 잘릴 걱정은 안 해도 되는 정규직은 이들보다는 한 걸음 뒤에 서 있다. 경제위기라는 태풍을 둑 위에서 맨 몸으로 고스란히 받고 있는 사람들은 따로 있다. 바로 비정규직 노동자.
그나마 일정 기간 고용이 보장되고 일정 금액의 월급이 꼬박꼬박 나오는 기간제 노동자는 좀 덜하다. 이영희 노동부 장관은 "최저임금이 최근 너무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다"며 제도 개선을 언급했지만, 딱 최저임금 수준만 받고 일을 하는 용역·도급 등 간접 고용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장관의 얘기에 절로 고개가 땅으로 떨어진다.
하는 일의 양에 따라 수입이 달라지는 사람들은 더 '죽을 지경'이다. 대리운전은 당장 경기가 어려운 탓인지 콜 수가 눈에 띄게 줄었다. 상대에게 돈을 많이 받아내야 내 월급봉투가 두꺼워지는 채권 추심도 전체적인 경제 위기 속에 빚 받아내기란 하늘의 별 따기가 됐다. 개인사업자로 분류돼 각종 세금 뿐 아니라 일하는 데 들어가는 기름 값마저 직접 부담해야 하는 덤프트럭 운전자는 일할수록 카드빚만 늘어간다. 운임을 몇 달 뒤에나 지급하는 건설현장의 잘못된 관행에다 최근 들어 전문건설업체들이 부도나는 경우가 적지 않아 임금 체불 위험도 3~4배나 늘었다.
"요즘 같아선 매일 매일 눈을 뜨는 일이 고통스럽다"는 이들은 모두 10년 전 한 차례 벼랑 끝으로 내몰렸었다. 구조조정과 명예퇴직, 개인 사업의 부도 등을 겪으면서 한때 자신의 삶과 가정이 지옥 같은 시절을 보내야 했던 이들이 10년 후 또 다시 '총알받이'가 돼 가고 있다.
"경기가 좋아야 월급봉투가 두꺼워질 텐데…"
외환위기 직전까지 손병일 씨는 15년 동안 대우중공업에서 일했었다. 광주영업점에서 일하던 손 씨는 '대우 사태'를 겪으면서 회사를 그만둬야했다. 그리고 2002년부터 신용보증기금에서 채권을 회수하는 비정규직으로 일하고 있다.
대기업의 대리였던 외환위기 직전과 비교하면 애초부터 월급봉투 두께는 차이가 났다. 그런데 그마저도 올해 들어서는 20% 정도나 줄어들었다. 채권 추심 노동자의 임금이 기본급 85만5000원에 나머지는 모두 회수하는 채권 액수에 따라 성과급으로 받고 있기 때문이다.
손 씨는 "손에 쥐는 돈이 차이가 많이 난다"고 했다. 작년에 비해 연간 수입이 1000만 원 정도 줄었다. 당연히 "경제가 어렵다는 것을 직접 느낄 수 밖에" 없다. 이전보다 채권 회수를 위해 쏟는 노력은 더하다. 그런데도 핸드폰을 바꾸고 집마저 이사가 버리는 채무자가 눈에 띄게 늘었다.
본인도 자식들 학비 걱정에 한숨이 나오는데, 돈을 갚을 수 없는 상황이 돼 눈물로 하소연하는 이들을 지켜봐야 하는 것은 또 하나의 고통이다.
"얼마 전에는 노부부가 자기 아들을 보증인으로 세워놨는데 아들만이라도 좀 살려달라고 사무실에 찾아와 울면서 호소하는 것을 보니 마음이 참 아팠다. 자기가 이혼하고 혼자 사는데 암 투병을 하고 있다며 상환을 보류해달라고 찾아오는 사람도 있다. 사정은 딱하고 안 됐지만 그 사람들 얘기를 다 들어주면 일도 안 되고 내 월급도 안 나오고, 말 그대로 진퇴양난이다."
6개월째 임금 체불…"목만 안 졸렸지 숨통이 막힌다"
외환위기 때 개인 사업이 부도가 나서 딸이 집에서 학교도 못 다닐 정도였던 서정호 씨도 "목만 안 졸렸지 숨통이 막힌다"고 말했다. 덤프트럭 운전을 하고 있는 서 씨는 지난 4월부터 임금을 받지 못했다. 하루에 15~20만 원이 들어가는 기름 값은 이미 다 카드로 결제해버렸는데, 일한 돈은 6개월째 못 받은 것이다.
외환위기 이후 하루도 힘들지 않았던 날이 없었다. 꼭 대학교육까지 시키고 싶었던 딸은 결국 대학을 중퇴했다. 그런데 올해 들어서는 "죽고 싶은 날이 너무 많았다"고 한숨을 쉬었다. 임금을 못 받는 동안 식당일을 하는 아내가 생활비를 벌어들였다.
최근 건설업계에서는 서 씨와 같이 임금을 받지 못해 신용불량자가 되는 사람들이 눈에 띄게 늘었다. 건설노조 오희택 조직쟁의실장은 "건설 현장이 경기 악화의 직격탄을 맞고 있다"고 설명했다. "건설 경기가 좋지 않아 일자리가 줄어드는 것은 오히려 두 번째 문제고, 체불 임금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임금을 받지 못해 노사 분규가 일어나는 사업장이 지난해에 비해 4~5배나 된다.
"일하려는 사람은 늘고 콜 수는 줄고"…'이중고'에 시달리는 대리운전 기사
대리운전의 경우 기사는 늘고 콜 수는 줄어드는 '이중고'에 시달리고 있다. 진입 장벽이 낮고 기사 모집 업체의 경쟁도 대단하다보니 "한 달에 200만 원 보장"이라는 광고를 보고 대리운전 일을 하겠다며 찾아오는 사람이 최근 급증했다. 기사 수가 늘면서 당연히 콜 수는 줄었다.
대구에서 대리운전을 하는 최영환 씨는 "작년에만 해도 하루 8시간 일하면 10콜 이상 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5~6콜 밖에 못 한다"고 설명했다. 수입도 비례해서 줄어들었다. 그나마 대구 기준으로 보통 1~1만5000원을 하는 대리운전비 가운데 30%를 콜비로 떼이고, 프로그램 사용료와 PDA 사용료, 보험료 등을 내고 나면 손에 쥐는 돈은 별로 없다.
최 씨도 작은 개인 사업을 하다 외환위기 때 실패를 한 뒤 대리운전을 시작했다. 최 씨는 "잠시 머물러 가려 했던 건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손님을 모시러 다니다 보면, 바로 얼마 전까지도 장사가 그렇게 잘 되던 술집, 음식점 등에 요즘은 모두 파리만 날린다. 경제가 어렵구나 싶어 매번 깜짝 깜짝 놀란다. 덕분에 대리운전을 찾는 사람이 줄어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노동자는 죽어가도 업체는 살 수 있는" 구조에도 정부는 "직무유기"
특히 이들의 고통에는 구조적 문제까지 겹쳐 있다. 사실상 회사의 임금 체계 등을 따를 수밖에 없음에도 개인사업자로 분류된 특수고용직이기 때문이다. 기업은 자신들의 이윤을 모두 챙겨가면서, 위험 요소가 생겼을 때 발생하는 문제는 고스란히 다 이들에게 떠넘기는 구조인 것이다.
대리운전 기사 최 씨는 "보험만 해도, 비용은 대리 기사가 납부하도록 하고 권리는 업체가 다 가져간다"고 설명했다. 계약자는 운전기사로, 피보험자는 회사로 돼 있다는 것이다. 최 씨는 "자기 업체의 콜을 하다 사고가 났을 때만 보험 처리를 해주기 위해서"라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결국 2~3개 업체 콜을 모두 받는 경우에 보험도 똑같이 2~3개나 넣어야 한다. 그 뿐인 줄 아나? 기사가 늘어나면서 기사들 사이에선 '이러다 다 같이 죽게 생겼다'며 분위기가 흉흉하지만, 업체는 기사가 늘어날수록 수입이 더 증가한다. 프로그램 사용료라고 해서 한 달에 1만5000원 씩 우리가 내는 돈 가운데 일부가 업체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허위 광고로 기사를 끊임없이 모집하는 것이다. 기사는 죽든지 살든지 관계없이…."
물론 정부는 아무 대책이 없다. 최 씨는 "정부 통계로만 하루 밤의 대리운전 건수가 70만 건이고 우리 예측으로는 100만 건"이라며 "하지만 무보험 기사가 대리 운전을 할 수 있는 제도적 구멍 등에 대해서도 정부는 전혀 신경을 안 쓴다"고 토로했다. "직무유기"라는 것이다.
분노보다는 체념이 쌓이는 곳에 희망은 어디에?
최근 급증했다는 건설업계의 임금 체불도 사실은 만연한 다단계 하도급 구조와 연관돼 있다. 원청인 대기업이 이들의 임금을 지급해도 중간에서 뱉어내질 않거나 중간 업체가 부도가 나버리면 손 쓸 도리가 없다.
게다가 건설업체가 임금을 어음으로 결제해 주는 것도 악순환의 한 고리다.
"당장 현금이 필요하니까 사람들이 어음을 깡으로 할인해서 현금을 융통하곤 한다. 그런데 어음 할인깡은 개인이 하기 힘드니까 보통 현장소장 등 회사 사람들이 대신 해주는 경우가 많다. 그러면 대부분 그 어음이 사채 시장으로 가는데, 회사가 부도라도 나면 사채업자들이 건설 노동자에게 하이에나처럼 몰려들어 집을 난장판을 만들고 협박을 한다."
건설노동자 김상식 씨의 말이다. 김 씨는 "최근에도 연천에서 일하던 동료 13명 가운데 절반이나 사채 업자를 피하느라 집에 못 들어가고 현장에서 먹고 자고 있다"고 덧붙였다.
당장 먹고 살 길이 막막하니 경제를 살리겠다던 대통령에 대한 기대는 접은 지 오래다. 노동자를 위한다는 부서의 장관은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일 뿐이다.
"점차 나아지리라"는 희망을 품어보기엔 당장 오늘 저녁 반찬 마련할 일이 걱정이 크다. 그들이 지금 대한민국이 겪고 있는 위기의 실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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