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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IMF 이후 하루도 힘들지 않은 날이 없었다"

[위기의 한국경제, 현장을 가다④] 맨 몸뚱이로 태풍 맞는 비정규직

"10년 전보다 요즘이 더 힘들어요."

본격적인 질문은 시작도 전인데, 인터뷰 취지를 설명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

물가는 오르는데 임금은 받쳐주질 않는다. 아니, 제 자리 걸음이면 그나마 다행일 텐데 수입은 최근 오히려 더 줄었다. 은행 대출이라도 조금 있으면, 한숨은 더 깊어진다. 게다가 일하면서 들어가는 비용을 고스란히 개인에게 떠넘기는 이상한 시스템은 혼자서는 어쩔 도리가 없다. 아무리 지나간 일은 미화되기 마련이라지만, 이를 감안하고도 98년 외환위기 때보다 지금이 더 힘들다는 하소연이 쏟아졌다.

그런데도 경영계는 임금 동결을 얘기하고 있다. "고통을 분담하자"는 것이다. 실제 많은 기업이 내년도 임금을 동결했다. 노동부가 7000여 곳의 사업장을 조사한 결과 올해 2분기 실질임금 상승률은 2.6%에 그쳤다. 아이들은 한 해 한 해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커 가고 돈 들어갈 구석은 한 두 곳이 아닌데, 주머니 사정은 빤하니 정규직 노동자도 사는 일이 힘에 부친다.

10년 새 두 번이나 경제위기의 '총알받이'가 된 사람들

하지만 매월 일정 수입이 보장되고 당장 잘릴 걱정은 안 해도 되는 정규직은 이들보다는 한 걸음 뒤에 서 있다. 경제위기라는 태풍을 둑 위에서 맨 몸으로 고스란히 받고 있는 사람들은 따로 있다. 바로 비정규직 노동자.

그나마 일정 기간 고용이 보장되고 일정 금액의 월급이 꼬박꼬박 나오는 기간제 노동자는 좀 덜하다. 이영희 노동부 장관은 "최저임금이 최근 너무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다"며 제도 개선을 언급했지만, 딱 최저임금 수준만 받고 일을 하는 용역·도급 등 간접 고용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장관의 얘기에 절로 고개가 땅으로 떨어진다.

하는 일의 양에 따라 수입이 달라지는 사람들은 더 '죽을 지경'이다. 대리운전은 당장 경기가 어려운 탓인지 콜 수가 눈에 띄게 줄었다. 상대에게 돈을 많이 받아내야 내 월급봉투가 두꺼워지는 채권 추심도 전체적인 경제 위기 속에 빚 받아내기란 하늘의 별 따기가 됐다. 개인사업자로 분류돼 각종 세금 뿐 아니라 일하는 데 들어가는 기름 값마저 직접 부담해야 하는 덤프트럭 운전자는 일할수록 카드빚만 늘어간다. 운임을 몇 달 뒤에나 지급하는 건설현장의 잘못된 관행에다 최근 들어 전문건설업체들이 부도나는 경우가 적지 않아 임금 체불 위험도 3~4배나 늘었다.
▲경제 위기라는 태풍을 둑 위에서 맨 몸으로 고스란히 받고 있는 사람들은 따로 있다. 바로 비정규직 노동자.ⓒ프레시안

"요즘 같아선 매일 매일 눈을 뜨는 일이 고통스럽다"는 이들은 모두 10년 전 한 차례 벼랑 끝으로 내몰렸었다. 구조조정과 명예퇴직, 개인 사업의 부도 등을 겪으면서 한때 자신의 삶과 가정이 지옥 같은 시절을 보내야 했던 이들이 10년 후 또 다시 '총알받이'가 돼 가고 있다.

"경기가 좋아야 월급봉투가 두꺼워질 텐데…"

외환위기 직전까지 손병일 씨는 15년 동안 대우중공업에서 일했었다. 광주영업점에서 일하던 손 씨는 '대우 사태'를 겪으면서 회사를 그만둬야했다. 그리고 2002년부터 신용보증기금에서 채권을 회수하는 비정규직으로 일하고 있다.

대기업의 대리였던 외환위기 직전과 비교하면 애초부터 월급봉투 두께는 차이가 났다. 그런데 그마저도 올해 들어서는 20% 정도나 줄어들었다. 채권 추심 노동자의 임금이 기본급 85만5000원에 나머지는 모두 회수하는 채권 액수에 따라 성과급으로 받고 있기 때문이다.

손 씨는 "손에 쥐는 돈이 차이가 많이 난다"고 했다. 작년에 비해 연간 수입이 1000만 원 정도 줄었다. 당연히 "경제가 어렵다는 것을 직접 느낄 수 밖에" 없다. 이전보다 채권 회수를 위해 쏟는 노력은 더하다. 그런데도 핸드폰을 바꾸고 집마저 이사가 버리는 채무자가 눈에 띄게 늘었다.

본인도 자식들 학비 걱정에 한숨이 나오는데, 돈을 갚을 수 없는 상황이 돼 눈물로 하소연하는 이들을 지켜봐야 하는 것은 또 하나의 고통이다.

"얼마 전에는 노부부가 자기 아들을 보증인으로 세워놨는데 아들만이라도 좀 살려달라고 사무실에 찾아와 울면서 호소하는 것을 보니 마음이 참 아팠다. 자기가 이혼하고 혼자 사는데 암 투병을 하고 있다며 상환을 보류해달라고 찾아오는 사람도 있다. 사정은 딱하고 안 됐지만 그 사람들 얘기를 다 들어주면 일도 안 되고 내 월급도 안 나오고, 말 그대로 진퇴양난이다."

6개월째 임금 체불…"목만 안 졸렸지 숨통이 막힌다"

외환위기 때 개인 사업이 부도가 나서 딸이 집에서 학교도 못 다닐 정도였던 서정호 씨도 "목만 안 졸렸지 숨통이 막힌다"고 말했다. 덤프트럭 운전을 하고 있는 서 씨는 지난 4월부터 임금을 받지 못했다. 하루에 15~20만 원이 들어가는 기름 값은 이미 다 카드로 결제해버렸는데, 일한 돈은 6개월째 못 받은 것이다.

외환위기 이후 하루도 힘들지 않았던 날이 없었다. 꼭 대학교육까지 시키고 싶었던 딸은 결국 대학을 중퇴했다. 그런데 올해 들어서는 "죽고 싶은 날이 너무 많았다"고 한숨을 쉬었다. 임금을 못 받는 동안 식당일을 하는 아내가 생활비를 벌어들였다.

최근 건설업계에서는 서 씨와 같이 임금을 받지 못해 신용불량자가 되는 사람들이 눈에 띄게 늘었다. 건설노조 오희택 조직쟁의실장은 "건설 현장이 경기 악화의 직격탄을 맞고 있다"고 설명했다. "건설 경기가 좋지 않아 일자리가 줄어드는 것은 오히려 두 번째 문제고, 체불 임금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임금을 받지 못해 노사 분규가 일어나는 사업장이 지난해에 비해 4~5배나 된다.

"일하려는 사람은 늘고 콜 수는 줄고"…'이중고'에 시달리는 대리운전 기사
▲대리운전의 경우 기사는 늘고 콜 수는 주는 "이중고"에 시달리고 있다. ⓒ뉴시스

대리운전의 경우 기사는 늘고 콜 수는 줄어드는 '이중고'에 시달리고 있다. 진입 장벽이 낮고 기사 모집 업체의 경쟁도 대단하다보니 "한 달에 200만 원 보장"이라는 광고를 보고 대리운전 일을 하겠다며 찾아오는 사람이 최근 급증했다. 기사 수가 늘면서 당연히 콜 수는 줄었다.

대구에서 대리운전을 하는 최영환 씨는 "작년에만 해도 하루 8시간 일하면 10콜 이상 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5~6콜 밖에 못 한다"고 설명했다. 수입도 비례해서 줄어들었다. 그나마 대구 기준으로 보통 1~1만5000원을 하는 대리운전비 가운데 30%를 콜비로 떼이고, 프로그램 사용료와 PDA 사용료, 보험료 등을 내고 나면 손에 쥐는 돈은 별로 없다.

최 씨도 작은 개인 사업을 하다 외환위기 때 실패를 한 뒤 대리운전을 시작했다. 최 씨는 "잠시 머물러 가려 했던 건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손님을 모시러 다니다 보면, 바로 얼마 전까지도 장사가 그렇게 잘 되던 술집, 음식점 등에 요즘은 모두 파리만 날린다. 경제가 어렵구나 싶어 매번 깜짝 깜짝 놀란다. 덕분에 대리운전을 찾는 사람이 줄어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노동자는 죽어가도 업체는 살 수 있는" 구조에도 정부는 "직무유기"

특히 이들의 고통에는 구조적 문제까지 겹쳐 있다. 사실상 회사의 임금 체계 등을 따를 수밖에 없음에도 개인사업자로 분류된 특수고용직이기 때문이다. 기업은 자신들의 이윤을 모두 챙겨가면서, 위험 요소가 생겼을 때 발생하는 문제는 고스란히 다 이들에게 떠넘기는 구조인 것이다.

대리운전 기사 최 씨는 "보험만 해도, 비용은 대리 기사가 납부하도록 하고 권리는 업체가 다 가져간다"고 설명했다. 계약자는 운전기사로, 피보험자는 회사로 돼 있다는 것이다. 최 씨는 "자기 업체의 콜을 하다 사고가 났을 때만 보험 처리를 해주기 위해서"라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결국 2~3개 업체 콜을 모두 받는 경우에 보험도 똑같이 2~3개나 넣어야 한다. 그 뿐인 줄 아나? 기사가 늘어나면서 기사들 사이에선 '이러다 다 같이 죽게 생겼다'며 분위기가 흉흉하지만, 업체는 기사가 늘어날수록 수입이 더 증가한다. 프로그램 사용료라고 해서 한 달에 1만5000원 씩 우리가 내는 돈 가운데 일부가 업체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허위 광고로 기사를 끊임없이 모집하는 것이다. 기사는 죽든지 살든지 관계없이…."

물론 정부는 아무 대책이 없다. 최 씨는 "정부 통계로만 하루 밤의 대리운전 건수가 70만 건이고 우리 예측으로는 100만 건"이라며 "하지만 무보험 기사가 대리 운전을 할 수 있는 제도적 구멍 등에 대해서도 정부는 전혀 신경을 안 쓴다"고 토로했다. "직무유기"라는 것이다.

분노보다는 체념이 쌓이는 곳에 희망은 어디에?
▲"점차 나아지리라"는 희망을 품어보기엔 당장 오늘 저녁 반찬 마련할 일이 걱정이 크다. 그들이 지금 대한민국의 겪고 있는 위기의 실체다. ⓒ프레시안

최근 급증했다는 건설업계의 임금 체불도 사실은 만연한 다단계 하도급 구조와 연관돼 있다. 원청인 대기업이 이들의 임금을 지급해도 중간에서 뱉어내질 않거나 중간 업체가 부도가 나버리면 손 쓸 도리가 없다.

게다가 건설업체가 임금을 어음으로 결제해 주는 것도 악순환의 한 고리다.

"당장 현금이 필요하니까 사람들이 어음을 깡으로 할인해서 현금을 융통하곤 한다. 그런데 어음 할인깡은 개인이 하기 힘드니까 보통 현장소장 등 회사 사람들이 대신 해주는 경우가 많다. 그러면 대부분 그 어음이 사채 시장으로 가는데, 회사가 부도라도 나면 사채업자들이 건설 노동자에게 하이에나처럼 몰려들어 집을 난장판을 만들고 협박을 한다."

건설노동자 김상식 씨의 말이다. 김 씨는 "최근에도 연천에서 일하던 동료 13명 가운데 절반이나 사채 업자를 피하느라 집에 못 들어가고 현장에서 먹고 자고 있다"고 덧붙였다.

당장 먹고 살 길이 막막하니 경제를 살리겠다던 대통령에 대한 기대는 접은 지 오래다. 노동자를 위한다는 부서의 장관은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일 뿐이다.

"점차 나아지리라"는 희망을 품어보기엔 당장 오늘 저녁 반찬 마련할 일이 걱정이 크다. 그들이 지금 대한민국이 겪고 있는 위기의 실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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