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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주의자의 양심' 폴 크루그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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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진보주의자의 양심' 폴 크루그먼

[기고] '재앙의 예언자'에게 주어진 노벨 경제학상의 의미

1. 실천하는 진보주의자로서의 폴 크루그먼

크루그먼은 경제학자로서는 신케인즈주의자요, 정치적으로 진보주의자다. 그의 블로그 명칭도 '진보주의자의 양심(conscience of a liberal)'이다. 지난 6월 번역되어 출간된 최근 저서 「미래를 말하다」의 원제도 '진보주의자의 양심(the conscience of a liberal)'이다.

"진보주의 운동가가 된다는 것은 당파성을 띤다는 것이다. 적어도 지금은 말이다 .진보주의 운동의 안건이 입법화되는 유일한 방법은 민주당에서 대통령이 나오고 동시에 민주당이 의회에서 공화당의 반대를 극복할 수 있도록 다수당이 되는 것이다.(진보주의자의 양심, 342면)"

그는 '보수주의 운동'에 대해 대단히 비판적이다. 지난 2003년 번역된 칼럼집 「대폭로(the great unraveling)」에서는 이들 세력을 '혁명적 세력'이라고 했다(6면). 「진보주의자의 양심」에서는 '보수주의 운동'이라는 완화된 표현을 사용한다(132면). 그가 생각하는 보수주의 운동은 이렇다.

"새로운 보수주의는 강력한 정치세력으로 자리잡아, 지지세력과 반대세력은 이를 '보수주의 운동'이라고 불렀다. 이는 흔히 '정치' 하면 떠올리는 범주를 훨씬 넘어선, 사람과 조직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네트워크였다. 보수주의 운동은 공화당과 공화당 소속 정치인 말고도 언론 그룹, 싱크탱크, 출판사, 그리고 그 이상을 포함했다."(진보주의자의 양심, 195면)
▲ ⓒ로이터=뉴시스

우리나라의 뉴라이트 운동(?)을 비견할 만하다. 한 사람의 진보주의자로서 보수주의운동에 대한 그의 기본태도는 무엇일까?

"위험을 적시에 경고하는 사람은 인심을 소란케 하는 사람으로 간주되며, 환경에의 적응을 권고하는 사람은 균형감각을 갖춘 분별 있는 사람으로 간주된다." 원래 키신저의 말이다. 그는 이 말을 차용한다. 그리하여 '혁명적 세력(대폭로)', 즉 '보수주의 운동(진보주의자의 양심)'의 위험성을 강력하게 경고한다. 그는 '양심의 이름'으로 강단을 넘어 끊임없이 현실세계를 향해 펜을 휘두른다.

2. 경세가이자 신케인즈주의자로서의 폴 크루그먼

<포천> 지는 어느 서평에서 그를 두고 이렇게 평했다. "크루그먼은 존 메이너드 케인즈 이후로 글을 가장 잘 쓰는 경제학자다." 맞는 말이다.

케인즈는 1928년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가 주식시장의 과열을 냉각시키려고 채택한 긴축적 통화정책을 보면서 이러한 정책이 가져올 위험성을 경고했다. 모두가 낙관론에 들떠있을 때 대공황의 가능성을 경고했던 것이다. 케인즈는 탁월한 경제학자였다. 폴 크루그먼도 이미 3년 전 부동산 버블을 경고했고 금융위기를 예견했다.

케인즈는 제1차 세계대전의 전후 문제 처리를 위한 파리강화회담에 영국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가했다. 프랑스와 영국 등 승전국은 '죄와 벌'의 논리를 적용하여 독일에게 가혹한 배상금을 부과했다. 하지만 케인즈는 온건한 배상안을 주장했다. 새로운 전쟁에 대한 염려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제안은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케인즈는 대표 직을 사임했다.(박종현, 시장경제를 위한 진실게임, 60면) 그런 의미에서 케인즈는 탁월한 경세가였다.

제 2차 세계대전을 경고한 경제학자 케인즈의 말이다. "만일 우리가 중부유럽의 궁핍화를 고의적으로 의도한다면 보복이 곧 닥쳐 올 것이라고 예언할 수밖에 없다. 그 무엇으로도 반동세력과 혁명의 절망적 진동 사이에 일어나는 마지막 내란의 발발을 오랫동안 지연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그 내란은 최근 세계대전의 공포를 무색케 할 것이며, 누가 승리하든 문명과 우리 세대의 진보를 파괴하고 말 것이다." 크루그먼은 지금 경제적 예언가로서나 국가의 개입정도에 대한 경제정책적인 측면에서나, 그리고 탁월한 경세가로서 다른 시대를 사는 케인즈다.

3. 정치적 양극화에 대한 비판론자로서의 폴 크루그먼

그는 대부분의 한국 경제학자들과 달리 예언자적 능력에서 탁월하다. 그 밑바탕은 본질적으로 현상을 해석하는 능력이다.

"정치계와 언론계의 많은 인물들은 진보주의자들이 '브로더리즘(Broderism)이라 부르는 병폐를 앓고 있다(고 말한다). 브로더리즘은 지금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양당의 대립에 대해 안타까워하면서도, 그것이 마치 현대 정치인들이 무슨 특별한 개인적인 결점이라도 있어서 사이좋게 지내지 못해 일어난 현상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말한다. 물론 몇몇 정치인사들은 자질에 심각한 결함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미국 정치에서 양극화의 골이 이렇게 깊어진 원인은 정책상의 문제이지 정치인의 자질 때문은 아니었다.(역주: 브로더리즘 : 워싱턴 포스트의 기자 데이비드 브로더의 글처럼 정치인들이 어디서나 통하는 상식을 지키고 중도를 지켜야 한다는 주의)" (진보주의자의 양심, 196면)

그는 한탄한다.

"어쩌다 미국이 이 지경이 되었나? 1990년대에 그토록 이성적인 경제지도력을 발휘했던 미국의 정치 체계가 어쩌다 지금과 같은 부정직과 무책임의 난국으로 들어갔나? (…) 내가 보기에 그에 대한 부분적인 대답은 미국 정치가 대단히 양극화되어 버렸다는 사실이다. 중간이 힘을 쓰지 못했다. 그 정치적 양극화의 기초를 이루는 것은 갈수록 심화되는 소득 불평등이다. 그 결과는(가난한 사람들이 부자들울 호되게 때리려 시도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 엘리트들이 자신들의 특혜를 확대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계급 전쟁이라는 형태이다."(대폭로, 233면)

일부 우리나라 정치평론가들에게 '정치는 곧 싸움'이다. 정치를 배척하고 정치에 대한 혐오감을 조장하는 글쓰기를 즐겨한다. 하지만 크루그먼이 보기에 이런 태도은 비양심적이다. 소득의 불평등이 정치적 양극화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솔직하게 '계급전쟁'이라고까지 표현했다.

다시 진보주의자로서, 경세가로서 그의 탄식을 들어보자. 어쩌면 이렇게 우리의 현실과 하나도 다르지 않은지 신비스러울 정도이다. 간단하다 미국 공화당을 한나라당으로 바꿔 읽기만 하면 된다.

"사실 공화당의 우경화에는 이해할 수 없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첫 번째는, 어째서 미국의 두 거대 정당 중 하나가 복지국가를 무너뜨리려는 운동을 시작한 것일까? 그것도 소득 불균형이 급증하고, 중산층과 빈곤층의 복지를 위해 부유층으로부터 세금을 거두는 정책이 더 큰 인기를 구가할 수 있는 시기에 말이다. 두 번째는, 어떻게 공화당이 대중의 이익을 생각지 않는 경제정책을 내세우면서도 선거에서 그렇게 여러 번 승리할 수 있었을까?(195면)"

4. 경제적 양극화에 대한 비판론자로서의 폴 크루그먼

그의 정밀한 분석은 원인에서 현상으로, 다시 해법으로 이어진다.

"만약 빌 게이츠가 어떤 술집에 들어가면 그 술집 고객의 평균 재산은 급상승할 것이다. 그렇다고 그 술집에 이미 앉아 있던 고객들이 실제로 더 부자가 된 것은 아니다. (…) 경제학자들이 어떤 그룹에서 아주 부자이거나 가난하지 않은 평균적인 사람들의 재산에 대해 얘기할 때 일반적으로 평균소득이 아니라 소득의 중앙값을 언급하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다."(진보주의자의 양심, 165면)

그는 "지금처럼 전체적인 경제성장과 일반적인 미국 국민의 재산과의 연계가 단절된 것은 내가 아는 한 현대 미국 역사상 전례를 찾아볼 수 없다(255면)"고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리하여 "2001년 이후의 상황은 마치 빌 게이츠가 어떤 술집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255면)"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감세정책에 대해서 비판적이다.
"(혁명적 세력, 즉 급진우파들의) 목표란 자본으로부터 얻는 소득에 대한 모든 세금을 없애고 오직 임금에만 과세되는 체제로(만약 당신이 동의한다면 그것은 노동소득에는 과세되지만 불로소득에는 과세되지 않는 체제이다) 옮아가자는 것이다"(대폭로, 11면)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한다.
"(부시 대통령은) 최고 부유층에게 가장 큰 이득이 돌아가는, 예산 파괴형 세금인하를, 불필요한 세수를 일반 가정들에 되돌려 주는 온건한 계획으로 묘사하였다(대폭로, 146면)".

그래놓고는 "적자가 대규모로 쌓이기 시작하자 그는 그 자신과 그의 정책들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거론하지 않은 채 그의 통제권 밖에 있는 사악한 테러범들과 테러세력을 탓했다.(146면)" 하지만 크루그먼은 경제학자로서 사태가 어떻게 진행되어 가고 있는지를 이해하고 있었으므로 칼럼에서 그것을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그러자 "비판자들은 나를 가리켜 재앙의 예언자라고 했다.(146면)" 그랬을 것이다. 미국도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5. 대안정책론자로서의 폴 크루그먼

미국의 전후 중산층 사회는 프랭클린 루즈벨트 행정부 정책의 일환인 전시 임금통제를 통해 몇 년이 채 안되는 기간 안에 만들어졌다. 이를 '대압착(Great Compression)'이라고 부른다. 그때의 평등지향은 그 후 30년 이상이나 계속되면서 미국의 또다른 황금시대를 구축한다. 크루그먼은 "70년 전과 같은 극단적이거나 급작스런 변화를 기대해서는 안된다"고 했다. "지금 불평등을 줄이는 과정은 대압착이라기보다는 대완화(Great Moderation)라고 볼 수 있겠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불평등을 줄이고 미국을 중산층 국가로 다시 만드는 것은 현실적으로 가능하다. 지금이 바로 행동을 개시할 때(진보주의자의 양심, 332면)"라고 주장한다.

"우리가 평등한 기회 비슷한 걸 가지고 있다는 생각은 완전히 환상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현대 미국 사회는 계급, 그것도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계급이 능력에 우선하는 것이, 절대적인 사실은 아니지만 현실에 좀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진보주의자의 양심, 313면)"

그가 생각하는 방식은 두 가지다.
첫째는 시장영역 밖에서의 소득 불균형 줄이기다. 문제는 세금이다. "부유층에게서 더 많은 세금을 거두어 국가적 차원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자는 것이다.(진보주의자로서의 양심, 320면)" 한마디로 감세제도를 폐기한다는 주장이다.(323면) 세제상의 허점도 없애야 한다는 것이다. 헤지펀드 매니저들의 소득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324면) 그는 본질적으로 시장주의자다. 그래서 "시장영역 밖에서의 정책을 확대하고 개선해야 한다. 즉 지금 시장소득의 불평등은 그대로 놔두고 그 여파를 줄이는 조치를 취하는 것이다."(318면)

둘째는 시장영역 안에서의 불평등 줄이기다. 최저임금 인상에 동의한다. "노조를 되살리는 것이 진보적인 정책의 최종목표여야 한다.(330면) 그야말로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차분한 정책적 수단이다.

하지만 그는 시장만능주의자가 아니다. 진보주의자로서 그는 시장에 대한 민주주의의 우위를 솔직하게 긍정한다. "지금 실천하는 진보주의가 된다는 것은 진보주의 운동가가 된다는 것이고, 진보주의 운동가가 된다는 것은 당파성을 띤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최종 목표는 일당독재가 아니라 진정으로 살아있는, 자유로운 경쟁에 의한 민주주의를 재정립하는 것이다. 결국 진보주의자가 추구하는 것은 민주주의이기 때문이다."(진보주의자의 양심, 마지막면 마지막 결론)

폴 크루그먼은 신케인즈주의자다. 실천하는 진보주의자다. 탁월한 예언자요, 경세가다. 평소 그의 글에 '흠뻑' 빠져 살던 나는 더더욱 기쁜 마음으로 올해 노벨경제학상 수상을 축하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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