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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모차부대 엄마와 참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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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모차부대 엄마와 참교육

[김지하의 '촛불을 생각한다']

시청 앞 촛불 때 유모차를 밀고나온 엄마들을 처벌한답시고 경찰이 대활약 중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비판 여론이 물 끓듯 한다.

소탐대실(小貪大失), '긁어 부스럼'이다.

불교 조계종 지관 총무원장 수색으로 엄청난 불교 반발을 불러 거대한 문명사 변동의 물결을 촉발시킨 경찰이다.

혀를 차서나 웃음이 나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기이한 느낌이다.

경찰의 행동은 윗전의 분위기를 쫓아가기 마련이니 바로 그 윗전을 스님들이 거듭 '역행보살(逆行菩薩)'이라 부르는 까닭을 뚜렷이 알겠다.

거의 양식(良識) 잃은 짓으로밖엔 안 보이는 이따위 행동을 거듭하는 데는, 경찰 책임자를 죽어라 두둔하는 윗전의 태도에는 단순한 기이함을 넘어 어떤 신비스러움까지도 느껴진다.

촛불에 단단히 덴 것이 틀림없다.

영부인이 '입덧'이라고까지 표현한 것을 보면 알 만한데 사실은 촛불의 정체를 도무지 이해 못하는, 한 기업인 토목업자의 단순 뇌구조의 결과에다 남의 말을 죽어라 듣지 않는다는 윗전의 그 유명한 고집의 후과일 터이다.

하기야 내노라 하는 지식인들도 촛불의 정체를 잘 모르기는 마찬가지다.

요즘처럼 지식이 쪼가리 쪼가리 나누어진 시대엔 문명사의 변동을 눈치챌 만한 깊은 융합적 지혜를 갖기 힘든 건 필연일 터이다.

오죽하면 유모차 밀고 나온 엄마들을 집까지 찾아가 몇 시간씩 따따부따 하겠는가!
▲ ⓒ프레시안

'그래서 얻을 것이 무엇이냐'라거나 시위의 자유권 문제 얘기가 아니라 그렇게 함으로써 참으로 전 인류 문명사 대전환의 실속이 오묘하게도 속속 드러나게 되는 것이어서 기이하고 신비롭기까지 하다는 것이다.

촛불의 정치 아젠다 중 아주 중요한 것 하나가 교육 문제다.

바로 엉터리 교육 제도와 교육 정책, 이른바 몰입영어교육이라고 통칭되는 참으로 무지 몰각한 자들의 자칭 경쟁력 교육이 바로 이 문제의 발단이라는 것이 나의 견해다.

유모차 부대 엄마들을 들볶는 경찰의 법적 명분이 다름 아닌 '아동학대죄'다.

인권과 교육 문제이겠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촛불의 교육 문제 정치 아젠다였다. 지금 정부의 교육정책이 '아동학대' 그 자체라는 것이다.

박정희시대 이래 교육의 절대 목표는 산업 전사 양성이었다. 반독재 민주화의 상징이라는 김대중 시대의 교육관 역시 '신지식인' 즉 쓸모 있는 지식인이었으니 이른바 국제 경쟁력이다.

교육 내용을 따지기도 전에 이미 바로 그 경쟁력이라는 교육 목표 자체가 철저히 비교육적이라는 얘기다. 그리고 그 내용으로 들어가더라도 경쟁력이 철저한 '서구짝퉁'으로 일관되어 있어 사실상의 경쟁력 상실 교육인 것이다.

이제까지 서구가 세계를 지배해 왔으니 서구짝퉁일 수밖에 없었다고 치자.

그러나 지금도 그런가?

지금의 세계, 서구식의 경쟁력 자체의 질적인 내용이 지금에 있어서도 짝퉁으로 충족되는 건가?

산업 기술이나 기업 경영 같은 실용적 방면에서마저 경쟁력의 중심은 모방이나 흉내 내기가 아니라 창의력이고 저만의 생각이고 전통적인 문화력인 시대다.

하물며 과학이나 사상이나 예술에서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렇다면 교육은?

어떤 한 사람이 오랜만에 자기 모교인 하버드 대에 가서 지금은 그곳 교수가 돼있는 옛 동창들을 만났다 한다. 만나자마자 그 동창들 가라사대

'너 베끼러 왔느냐?'

창피한 노릇이었다 한다. 그러나 문제는 도리어 그 다음에 있었다고 한다.

'이젠 우리가 너희를 좀 베끼자!'

그 동창들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한국이나 동아시아 전통 지식들 명칭을 들으며 등골이 서늘했다는 것이다.

유교·불교·노장학이나 동학 같은 정학(正學)은 그래도 그러려니 했지만, 풍수·사주·명리·역술·술수 따위 이른바 잡학(雜學)까지도 다 튀어나오고 자기도 잘 모르는 요즈음의 한국학 등이 거론됐을 때는 심한 절망감에 사로잡혔다는 것이다.

이 분의 마지막 말은 다음이었다.

'이제 우리는 뭘 팔아먹고 살지요?'

재작년 내 시집이 파리에서 번역돼 그 출판 기념회에 간 적이 있다. 나의 시 낭독과 강연이 별로 재미없을 것이라고 짐작한 내가 주최 측에 미리 부탁해서 마지막에 프랑스 인들이 좋아한다는 판소리 한 토막을 들려준 적이 있다.

200~300명에 이르는 그곳 전문 문화인들 모두 얼굴이 이상하게 상기된 채로 끝난 뒤에도 다 한 사람 자리를 뜨는 사람이 없었다. 감동한 것이다.

늦은 식사 자리에서 한 그곳 문학평론가 왈.

"한국에서 많은 젊은이들이 프랑스 예술을 공부하러 오는데 도대체 저런 예술을 놔두고 여기 뭘 공부하겠다고 오는지 모르겠군요."

그냥 인사치레가 아니다.

그는 파리에서도 이름난 깍쟁이다.

그런데 이곳 풍경은 어떤가?

일산의 식당 골목, 풍동의 한 밤길에서다.

한 아주 조그마한 소녀가 앞에서 자전거를 타고 가고 그 뒤를 엄마인 듯한 한 젊은 여인이 뒤따라 자전거를 타고 가고 있었다. 뒤에 가는 여인이 앞의 소녀를 보고 말한다.

"하이 데이지! 웨어 아 유 고잉?"
(Hi, Daisy! Where are you going?)

'국화야 너 지금 어디 가는 길이니?'

이런 뜻이겠다.

대답이 돌아온다.

"고잉 노 웨어!"
(Going nowhere!)

"아무데도 안가!"

순간 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 모녀의 영어 문답은 매우 불길했다.

엄마의 질문은 좀 간지럽지만 영어 교육의 일종일 것이니 그렇다 치자.

그러나 아이의 대답은 매우 어둡다.

분명 모녀는 목적지가 있을 터이니 말이다.

문제는 영어의 단어나 구문이나 문법, 또는 인토네이션이 아니다.

엄마의 간지러운 목적의식에 대한 딸의 무뚝뚝한 튕기기 속에 들어 있는 어둠인 것이다.

"고잉 노 웨어!" (Going nowhere!)는 그 조그마한 소녀 수준으로는 매우 뛰어난 영어 솜씨다.

그러나 그러면 뭘 하는가?

어디에도 가는 곳이 없다니!

엄마와 함께 즐거운 자전거를 타고 나무 숲 좌우에 들어선 쾌적한 길에서!

더욱이 그 나이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어두운 음색이 문제다.

그 나이의 창의력의 동력은 기쁨이며, 기쁨의 동력은 창의력이고 애정이다.

전 세계가 아직까지도 거대한 언어학의 멘토로 우러러 보는 미국의 노엄 촘스키 교수의 말이다.

"인류의 보편 문법에 이르는 유일한 길은 우리가 주변부라고 부르는 민족 언어밖에 없다."

창의력!

한국의 학부모들이 그렇게 갈망하는 아이들의 경쟁력의 핵심인 창의력은 오직 모국어에서만 온다는 말이다.

삶을 세계로 열어주는 상상력 또한 그렇다.

현대 유럽인들이 스스로 빠져드는 영성고갈(靈性枯渴)의 피안은 어디입니까?

그들의 영성적 멘토인 유럽 최고의 신비주의자, 유기농과 녹색과 영성적 대안교육의 창시자인 루돌프 슈타이너는 무엇이라 대답하는가?

"모심뿐이다."

모심의 기초는 사랑뿐이다.

어렸을 때 그 사랑은 어디서 오는가?

친숙함이니 엄마요 가족이요 조국이요 모국어요 민족 문화요 자기가 태어난 문명이다. 아이는 거기서 얻은 친숙함과 사랑과 모심으로 이웃과 세계와 다른 나라와 다른 문명, 그리고 자연과 우주로 나아간다.

지금은 이른바 환경, 정확하게는 생명과 생태학의 시대다.

생태학 시대의 최고 지혜는 무엇일까?

호주의 생태학자 발 플럼우드는 '인격-비인격, 생명-무생명 등 일체 존재를 거룩한 우주 공동 주체로 드높이는 모심밖에 없다'고 단언한다.

'모심'은 어디서, 어떻게, 누구로부터 처음 배우는가?

'엄마'다.

'데이지가 아니라 국화'다.

'아무데도 없다가 아닌 어디로'다.

이미 그 아이는 '기위(己位)' 즉 음(陰)도 양(陽)의 간지(干支)도 아닌 '대황락(大荒落)'의 어둠, '꼬래비'로 쳐진 것이니 고향도 소속도 제 위치도 잃은 천덕꾸러기, 저주 받은 자의 처지에 든 것이다.

성경의 산상수훈의 대상 '네페쉬 하야(nephesh haoiyah)'에 불과한 것이다.

그 말(존재)의 어둠(저주)이 그것이다.

'갈 곳이 어디에도 없다'는 이 아이.

동·서양 수천 년 전통 고전 어디에나 나타나는 피 보호 대상, 네페쉬 하야.

수천 년서 남방 향으로 기울어 북극 중앙의 친정(親政) 위치를 찾지 못한 지구 자전축과 북극의 운하, 북극성, 북두칠성과 성운군들.

이십대에만 미성년 아동들이 그처럼 치열하게 싫어하는 몰입영어교육 따위, 경쟁력 타령이 다름 아닌 '저주받은 존재', '말의 어둠'인 'Going nowhere'의 주범이다.

'Going nowhere'가 한 달 30명씩이나 자살하는 대학생들의 절망의 근원이고 혼돈한 어둠 속에서 온난화와 간빙기와 북극 해체와 적도에 눈 내리는 이 컴컴한 종말, 생활·생태·생명·생계의 대붕괴 시대의 아이들의 대답이다.

갈 곳이 없는 것이다.

어디로 가느냐고 묻지 말라!

그것도 간사스러운 쫄따구 영어로!

그것도 엄마가!

어찌할 것인가?

그런 것 가르치면서, 짝퉁경쟁력 가르치면서 미친 쇠고기나 먹이고 생명력 그 자체라고까지 말할 수 있는 물을 장사꾼에 넘기고 가스 넘기고, 의료보험 몽땅 넘기고 최소한의 생계 보장의 길마저 무자비한 장바닥에 몽땅 넘기면서까지 몰입영어교육 시키겠다고 학원에, 과외 시간에, 잠 안 재우고 온갖 형태로 지지고 볶아대고 짓밟는 교육이 아이의 마음 깊은 곳에서 깨나갈 곳이 어디인지를 깨닫거나 스스럼없이 말하도록 할 수 있을 것 같은가?

같은가?

스승이 없다.

스승을 자처하는 자들은 있다.

그러나 그들은 물질만 가르치든가 정신만 가르친다.

검은 그늘, 삶의 어둠, 불행, 내 마음 깊은 곳과 저 골목 뒤편에 감추어진 악마적인 삶을 뚜렷이 말해주지도 않고 그것을 넘어설 지혜를 주지도 않는다.

아니 그들은 줄 수 없다.

피해갈 길만을 가르친다.

그것은 스승이 할 일이 아니다.

혼돈을 정면으로 대면하는 길.

혼돈에 빠져 들어가면서도 혼돈을 빠져나오는 혼돈 그 나름의 질서를 발명하는 지혜를 가르치는 자는 없다.

말만 풍성하다.

아이들은 그것을 아미 눈치 채 안다.

"Where are you going?"

이 말은 무엇을 전공할 것이며 어떻게 살 것이냐를 묻는 선생의 질문이다.

아이들은 이 말이 참다운 가르침이 아니라는 것을 이미 알아버렸다.

"Going nowhere"

이 대답이 차라리 혼돈에 직면하는 가르침, 아이 내면에 있는 참된 스승의 가르침인 것이다.

어디에도 우리의 갈 길은 없다.

이것이 우리가 사는 현실이요, 문명이다.

이 어둠. 이 절망을 우선 받아 들여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는 길을 찾아야 한다. 그 길을 찾아가는 데에도 꿈을 줄 수 있는 참 스승을 찾아내는 것.

이것이 지금 우리가 찾아내고 세워나가야 할 교육이다.

어째서 어렵게 어렵게, 그 엉터리 같고 마귀 같고, 거지 같고, 똥통 같고, 사기꾼 같은 그 교육지옥을 뚫고 들어간 대학에서 '절망에 빠져 한 달 30명 씩 자살한단 말인가?

그 원인이 교육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본디 좀처럼 자살 같은 것 하지 않는 강인한 사람들이 우리 민족이다. 더욱이 청년들!

이 모든 것. 교육의 모든 것은, 그 첫 샘물은 '엄마'에게 있다.

엄마 이야기를 해보자.

19세기 동학 이야기다.

동학은 현대를 후천개벽(後天開闢)으로 본다.

극도의 어둠을 뚫고 새 세계를 열어가는 전 인류 문명사의 근본적 대전환으로 본다. 그 전환, 그 돌파력의 첫째 조건을 '모심'으로 보다.

제1대 창시자 수운 최제우 선생이 처형당한 뒤 제2대 지도자인 해월 최시형 선생은 40년 동안 지하 도피 생활을 통해서 일관되게 아이와 엄마 사이의 모심의 교육을 가르쳤다. 우리는 지금 그분으로부터 배울 이유가 충분히 있다.

지금 교육은 아이를 사정없이 치는 매질이다. 우선 매질을 그쳐야 한다. 그것이 모심이다.

해월 선생은 '아이를 치지 말라. 아이를 치는 것은 한울님을 치는 것이다. 아이는 한울님이다.'

시청 앞 광장의 한 밤에 내 곁에 앉았던 한 아이는 왈 "경쟁력 좋아하네!" 그랬다.

그 아이는 경쟁력 타령을 저주하는 것이 아니라 히히 웃어치웠다.

웃음은 눈물보다 더 무서운 부정이다.

이 아이는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될까?

그러나 그 따위를 걱정할 필요는 없다. 해월 선생은 말한다.

"아이는 천지다.

아이 안에 천지가 있고 천지 안에 아이가 있다. 천지인 아이는 엄마 안에서 천지인 엄마로부터 먹고 배워서 다 큰 뒤에 엄마 밖에 나와 천지인 엄마 젖을 먹다가 또한 천지의 곡식을 먹으며 제 안에 있는 천지를 키우는 것이다."

생명의 진리다.

자신이 천지를 모시고 있고 그 천지 안에 자신이 모셔져 있음을 깨닫는다면 아무 걱정할 까닭이 없는 것이다. 천지를 모신 그 자신이 천지인 한울님. 그 아이는 순간순간마다 천지를 모시고 자신을 또한 그렇게 모실 것이다.

이른바 생명과 생태와 우주의 대 혼돈·오염·멸종·변질과 재 진화가 다시 시작되는 악질만세(惡疾萬世)의 대병겁(大病劫) 시대가 요구하는 모심의 사람, 천지를 모시는 사람이 바로 이 분 아닌가! 바로 이 시대에는 돈 벌이, 출세, 인격, 행복, 이 모든 것이 이 모심의 성취 위에서 비로소 이루어진다.

2008년.

지금은 그런 시대다.

정신을 번쩍 차려야 한다.

경쟁력?

끝가지 그것이 걱정된다면 좋다.

바로 그런 사람이 경쟁력이 있는 사람이다.

됐는가?

최고의 경쟁력이란 경쟁 상대가 없는 사람이다.

공자의 말 "어진 사람은 적이 없다(仁者無敵)"란 말은 아직도 진리라고 생각하는가?

이 우주 시대엔 그것이 '모시는 사람에겐 적이 없다(侍者無敵)'가 되지 않겠는가!
최고의 경쟁력 아니겠는가! 안심됐는가?

'어짐'보다는 '모심'이 더 적극적인 실천적 덕성이기 때문이다.

서양 자연 과학인 생태학에서 배워보자. '자유자연'이 그것이다. 모심의 윤리는 있을 리 없지만, 진화의 동력으로서의 자유의 원리는 같다. 됐는가?

"뭐, 동학 따위에서 배워?" 그러한가? 좋다. 그럼 서양 과학. 그것도 가장 첨단적, 더욱이 모심을 수억 천년 우주와 생명 진화의 기본 동력이자 그 신성과 그 영성의 기초는 광활한 무궁, '한울' 그 얽매임 없는 자유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한다.

누가 아이에게 이 '모심'을 가르치는가?

정치냐? 언론이냐? 학교냐? 학원이냐? 교회냐? 친구냐? 예언이냐? 도대체 누구냐?

해월 선생은 아이를 가르침에 있어 지켜야 할 열가지 금기(禁忌) 사항을 제시한다.

한울인 아이를 속이지 말라.
한울인 아이를 업수이 여기지 말라.
한울인 아이를 어지럽히지 말라.
한울인 아이를 죽이지 말라.
한울인 아이를 더럽히지 말라.
한울인 아이를 굶기지 말라.
한울인 아이를 부수지 말라.
한울인 아이를 싫어하지 말라.
한울인 아이를 굴복시키지 말라.

이상 열 가지 중 어느 하나인들 지켰는가? 지키기는커녕 그런 비슷한 것이나마 생각이나마 해보았는가? 최소한 나라의 어른이란 자들이 아이들에 대한 조그마한 자비심이나마 일으켜 본 적이 있는가?

그런 자들이 유모차 엄마들을 '아동학대죄'로 처벌하려는가? 염치가 있는가?

이러니 열 살 먹은 아이가 대통령에게 '너 나하고 끝까지 한 번 해볼래?' 하는 것이다. 모심의 완전 반대다.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것이 하나 있다.

이런 경우 책임이 어디에 있는가?

어른이다.

어른 중의 어른이 첫 번 책임자다.

그러면 그는 모심을 가르치기는커녕 생각이나 해봤는가? 모심 중의 모심이라는 '섬김'을 x입만 벌리면 떠들면서 실제로 한 짓들을 무엇이었던가? 하지 말라는 열 가지를 다 저지르지 않았는가?

엄마다.
가르치는 사람은 역시 엄마. 아이가 모심을 배우는 학교는 엄마의 배 속이다. 엄마 배 속이 최고의 스승이니 열 달의 교육에서 아이는 천지가 되고 신령한 한울이 된다.

미국에서 이 열 달을 철저히 과학적으로 공부한 사람이 아예 태교(胎敎) 전문가로 나서면서 인터뷰에서 한 말이 있다.

"이런 뇌세포의 70퍼센트 이상이 태교로 완성됩니다."

태교.

이것은 고금동서가 똑같이 중요시 했으면서도 그 과학적 현실성을 크게, 깊이 믿지는 않았다.

해월은 자기 40년 활동 전체에서 바로 이 태교를 중심한 아이 가르침을 가장 중요한 사상으로 내세웠고 그에 관련된 '내측(內側)'과 '내수도문(內修道文)'을 최고의 경전으로까지 올려 세웠다.

내측, 내수도문은 살림과 아이 모시고 낳고 키우는 모든 생명 운동에 관한 것이다.

태교는 거의 누구나 안다.

무거운 것 들지 말고
함부로 뛰지 말고
이상한 생선이나 고기 먹지 말고
흉한 생각하지 말고
남 미워하지 말고
모로 눞지 말고
흉한 음악 듣지 말고 등등이다.

수천 년 전 고조선 때의 경전 '삼일신고(三一神誥)'에는 '신은 뇌 속에 내려와 있다(神降在爾腦)'는 구절이 있다. 하늘 보고 절 하고 나무나 바위에 기도하고 해와 달과 별, 또는 이상한 짐승을 보고 숭배하던 그 시절에 신이 인간의 몸 속에 있는 뇌에 산다고 밝힌 이 민족의 영적인 생명 사상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다. 그렇다면 신은 두개골에 있는 뇌에만 살아 있는 것인가?

경락(經絡)이나 기혈(氣穴), 단전(丹田)학에서는 신은 몸속에 기(氣)와 함께 움직인다. 특히, 단전에는 신이 산다고 했다. 최근 일본 분자생물학계뿐 아니라 미국 과학계도 전신두뇌설(全身頭腦說)을 거의 일반화하고 있다. 더욱이 일부 과학자들에 의하면 두개골 쪽으로부터 뇌신경이 몸 쪽으로 하강(下降)하는 경향이라면 그리고 몸 쪽으로부터 두개골을 향해서 상승(上昇)하는 경향의 과정인 하단전(下丹田) 기해(氣海)가 소뇌(小腦) 기능이라면 그 아래쪽의 회음(會陰)혈이 대뇌(大腦) 기능의 보다 더(두개골 쪽보다 더) 근원적인 원천이라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물론 아이를 모신 부인은 참으로 주의하고 조심해서 배 속에 있는 아이를 태교(胎敎)해야 한다. 따라서 온 몸의 기능과 신경과 정신이 아이에게 가 있을 수밖에 없다.

해월은 여인을 '후천개벽(後天開闢) 시대의 타고난 도인(道人)'이라고 불렀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

천지인 한울님은 아이를 포태(胞胎)하고 태교(胎敎)하고 출산(出産)하고 양육(養育)하고 교육(敎育)하는 사람. 다시 말해서 한울님. 즉 신인(神人)을 기르는 사람 아니겠는가!

5만 년 전을 선천개벽(先天開闢)이라 한다. 선천개벽은 고생물학자요 진화 과학자인 떼이야르 드 샤르뎅에 의하면 바로 5만 년 전에 그 이전까지는 일반화되어 있던 '직립사유인(直立思惟人)' 즉, 'Homo sapiens erectus', 생각하고 똑바로 걷는 인간들의 바다 속에서 어느 날 문득 몇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 뇌신경 안에서 반짝하며 '생각을 생각하는 인간' 즉, 'Homo sapiens sapiens', 제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스스로 알게 되는 인간 능력이 출현할 것을 말한다.

그때부터 언어가 생기고 노동의 사회화와 율법 종교와 왕권국가가 나타나는 문명 시대의 여명이 열렸다는 것이다.

이제 후천개벽이다 하는 것은 '생각을 생각하는 인간' 즉 'Homo sapiens'의 바다 속에서 문득 '신적인 생각을 생각하는 인간 즉, 'Homo sapiens sapiens', 안으로 신령이 있고 밖으로 기화(氣化)가 있으며 전 우주적 융합을 각자 제 나름 나름 이식하고 실천하면서 텅 빈 우주의 자유로운 무궁을 님이라 불러 부모처럼 친구처럼 모시는 인간이 태어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사람이 한울(人乃天)'이라는 것은 여인의 육체 속에서 신령한 정신개벽이 일어나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포태(胞胎)와 태교(胎敎)와 출산(出産)과 양육(養育)에 의해 몸속에서 신인(神人)이 출현하는 사건이니 여인, 즉 '엄마'가 다름 아닌 후천개벽의 도인인 것이다.

엄마는 성교(性交)를 통해 5만에 정자(精子) 중의 한 두 개를 자기 난자(卵子) 속에 받아들여 새 시대(우주 생명과 신성한 영성의 시대)의 한울님을 제 몸 안에 모시고 태교를 통해 가르치고 개벽적 출산을 통해 이 세상에 낳고 기르고 또한 가르친다.

스스로 새롭게 모심과 개벽의 길을 따라 삶을 모범적으로 살므로서 아이를 신령한 생명으로 가르친다.

회음(會陰)은 곧 모심의 자리다. 생명과 정신과 신령과 그 신령 속의 본선인 텅 빈 우주적 무중의 자유가 자라는 자리인 것이다.

엄마는 아이를 모시고 살린다.

아이는 엄마를 통해서 루돌프 슈타이너와 발 플럼우드가 현대 세계, 현대의 우주적 삶에서 최고의 윤리요 지혜라고 불렀던 바로 그 '모심'을 구하고 이 현실에서 누구나 다 아는 최고의 가치인 생명의 '살림'을 배우며 엄마와 가족과 이수과 사회, 그리고 학교 선생과 동료와 전 교육과정을 통해 자기의 신령한 생명의 우주적 의미와 그 이치와 제 할 일을 '깨친다.'

바로 이 같은 '모심', '살림', '깨침'이 참교육의 본질이다.

아이는 이 과정에서 자기의 인생관, 자기의 사회관, 세계관을 결정하고 거기에 알맞은 직업을 선택하는 것이지, 회초리나 몽둥이와 다를 바 없는 강제적 주입과 세뇌에 의해 이른바 싸움꾼으로서의 경쟁력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다. 마땅히 아니어야 한다. 그것은 교육이 아니라 비교육이교 반교육이다.

어떤 멍청한 선생님들은 묻는다. "그런 휴머니즘 가지고 어떻게 이 살벌하고 무정한 세상에서 씩씩하게 살아갈 수 있는 젊은이를 만들어 낼 수 있겠는가"라고.

이미 전문가의 말을 빌려 전제했다. 태교를 통해 70% 이상의 뇌세포가 형성된다고.

미국 쪽의 과학, 뇌 생리학 쪽에서는 인간 뇌세포의 90%가 아직 잠자고 있으며, 범인은 6% 정도, 천재는 9% 정도를 활용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큰 예언자나 성인(聖人)은 분명 15%나 20% 이상을 스스로 각성시켰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러나 최근 뇌 과학은 이미 개척 완료된 신경 컴퓨터의 가동 과정이나 그 이후의 이른바 정전 컴퓨터 또는 신령 컴퓨터의 뇌 원리를 탐색하는 과정에서, 현상적인 신경학적 컴퓨팅 과정에 참여하는 창의적인 젊은 세대 네티즌들의 영적인 정신 능력이 거의 어떤 때는 수십 퍼센트 뇌 세포의 각성, 활용을 보이고 있음을 발견했다고 한다.

그래서 극소수이긴 하지만 이전의 중관(中觀) 유식(有識) 정도의 불교 심리학, 8석 정도의 무의식 원리가 아닌 그 이상의 깊이, 넓이, 높이의 정신 현상, 예컨대 '화엄경 수준의 우주적 정신 확장과 극다양성'이 나타날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주장한다.

인간은 분명 크게 변화하고 있다.

그것도 낡아 빠진 유전자 공학이나 분자 생물학 수준이 이미 아니다.

경락(經絡)과 기혈(氣穴)을 역학(易學)에 연결시킨 참동계(參同契) 수준의 학문 연구, 그리하여 '몸의 정신체계'에 대한 개척이 이제 막 불꽃을 일으키고 있다.

단전학(丹田學) 등에 대한 관심을 통해서 한국 생명학은 회음(會陰)으로 최근 그 초점을 오므고 있다.

회음은 허준(許浚)의 동의보감(東醫寶鑑)에서도 나타나지 않았던 천응혈(天應穴) 아시혈(阿是穴) 등 수식 개의 새로운 혼돈혈(混沌穴)이 새롭게 출현해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근대 이후의 단전 계에 대한 북한 김봉한(金鳳漢, 여러 해 전에 동양 경락학 계에서 자취를 감추었다)의 파천황의 보고 이후 점점 생명의 근원적 이니시에이션으로 예감되기 시작한다.

회음은 생명, 생식, 배설, 포태, 노동, 생산, 무도(춤), 온 몸의 정수(精水), 예감, 신령한 신경 기능, 전 우주적 무한수(無限數)의 시작인 상수(常數), 천수(千數), 예수(禮數), 명수(命數), 역수(曆數), 율수(律數), 의수(醫數), 산수(算數)와 81수의 천부(天賦)의 역수(易數)의 근원이 하다전인 기해(氣海)와의 직관(直觀) 속에서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고 최근의 후천개벽적 사회 대변동과 지구 및 우주적인 대 파동들이 원형적으로 폭발하고 있으며 그 모든 수에 관한 각각의 천태만상의 7,8식(識)과 9,10식(識)의 앎이 음양, 삼극, 오행, 칠성(七星)과 팔괘, 삼관(三關), 승강(昇降), 진퇴(進退), 육십사 게의 방원(方圓)과 개폐(開閉), 은현(隱現), 그리고 생극(生剋)과 복승(複勝) 관계에 따라 수천 만 가지로 다양하게 생성 전개되고 있음이 인식된다.

뇌 기능의 수없이 많은 갈래와 무수 무한한 유전자 기능들이 천태만상으로 복잡화 계열화하고 최근 뇌 생리학 등이 보고하고 있는 블랙홀이나 초신성의 복사, 죽지 않는 생명체의 출현 기능이나 외계 성운군의 이동, 생명 재 진화 현상의 초기 발진현상 등이 온갖 신경 정신 기능의 복잡화와 함께 거의 감각 수준으로 나타날 가능성이 농후하다.

특히 중단 전인 전중(膻中)과의 간관(間關)을 통해서 심장과 양 폐 사이의 여러 기능과 지속적인 사회적 사유(思惟)층들, 그리고 그에 연계된 심장 박동(搏動)과 들숨 날숨 호흡(呼吸) 사이의 여율(呂律) 생성 밑에 무궁 무궁하여 전개되는 한울, 즉 텅 빈 우주적 무궁 자유의 적막이 향후 우주의 큰 변동이나 영적 세계의 돌연한 드러남, 그리고 생명의 재진화의 파천황의 대 개벽과 전 유전자의 대변질 사태를 초절한 긴장 속에서 안에 숨기고 있다고 인식된다.

회음은 바로 모심의 자리다.

모심은 그 자체로서 일체 사물, 생명, 정신과 영, 신적 세계에 대한 '아니다-그렇다(不然其然)'의 양극 진자운동(振子運動)이며 끊임없는 중(中)과 비중(???中)의 교차 생성을 통한 숨은 세계가 드러나는 체험 과정이다.

이미 그 과정은 모심, 살림, 깨침의 전 진화 영역과 그에 연관된 일체의 변화와 그 변화의 예감 등을 수반한다.

회음의 모심과 텅 빈 한울의 모심은 거리두기(事, 숭배)와 하나 되기(同事, 친구)를 동시에 실현시키는 오묘한 삶의 지혜를 우리에게 허용한다.

이것이 곧 <시천주(侍天主)>의 신비다.

엄마는 이미 잠재적으로 바로 이 회음에 의해 포태, 태교한 출산으로서 전 육체적 개벽에 의해 아이의 삶에 일대 혁명을 일으키며 양육과 교육을 통해 그리고 그것을 끊임없이 잊지 않고 실천함으로써 <깨침>으로 아이와 자기 자신을 인도한다.
▲ ⓒ뉴시스

엄마는 영과 생명과 우주와 평화를 생래적으로 느낀다.

그녀는 미친 쇠고기와 석은 물과 위험한 가스가 가져올 거대한 생명 붕괴, 이른바 <대황락(大荒落)>의 지옥을, 그 '죽임'을 예감한다. 그녀는 스스로 아이와 함께 그 죽임에 맞서 '살림'의 길을 통해 '깨침'으로 가고자 한다.

후천개벽은 지구 자전축과 북방 성운군들의 북극 회귀, 지리극과 자기극의 상호이탈과 관계 재편성에 의한 뜨겁고 차가운 남반구 해수면의 대대적 상승, 북극 해빙과 적도의 영하 기온, 온난화와 간빙기 교차에 의한 온갖 사태들, 지진, 해일, 화산, 토네이도, 침강, 융기, 충돌, 변종, 멸종, 변질, 부패, 전염, 죽음, 괴멸, 파괴 이후에 드디어 동지(冬至), 하지(夏至) 중심의 극한(極寒) 극서(極西)가 아닌 온화하고 서늘한 춘분(春分) 추분(秋分) 중심의 새 유리세계(琉璃世界)에로 우주가 대전환할 때, 이제껏 '꼬래비'였던 미성년과 여성과 비정규직 등의 쓸쓸한 대중이 정치 전면에 나서고 이제껏 주인공이었던 지식인, 종교인, 정치인이 한 발 뒤로 물러나 보완적 위치에서 도리어 신세대와 여성과 쓸쓸한 외톨이들을 보호하고 껴안는 쪽으로 '무위 무불위(無爲 無不爲)'의 '태양정치'로 전환할 때 극에 달한 우주 생명의 혼돈적 질서인 혼돈적 생명 에너지를 치열하게 모시는 회음으로부터 이제껏 선천(先天) 5만 년 이후의 남성, 질서, 이성, 율법, 왕권, 장자(長子), 국가, 율려(律呂)의 집약지인 독점적 유전자 체계와 독재적 중추신경계와 제왕적 중심적 전체론 위주의 백회 등 대뇌 두개골 방향을 향해 후천개벽의 대 반역을, 그러나 부드럽고, 아름답고, 따뜻하고, 생산적인 '천지 굿'으로 '음개벽(陰開闢)'을 일으켜 비약적으로 상승하게 되는 것이다.

한반도와 동북아시아, 동아시아는 향후 2~3년 안에 정치, 경제, 사회, 사상, 문화적 대변동을, 향후 7~8년, 또는 13년 안에 온 세계와 연계되어 생명, 생태, 생활, 물, 식량, 건강, 에너지 등등에서 생태적, 기후적, 우주적 대변동, 악질만세(惡疾滿世)의 대병겁(大病劫)을 맞이하게 된다. 불가피하다.

시간이 많지 않다.

모심의 교육, 살림의 사회, 개침의 우주관을 지금 바로 시작해야 한다. 남은 때가 많지 않다. 엄마들은 뇌(腦)가 아니라 아이를 모시고 기르고 살린 바로 그 회음으로부터 직감적으로 안다.

'죽임'에 대한 '살림'으로 '깨침'에의 길을 가야한다는 것.

모든 아이들은 빠져있는 'Going nowhere'으로 가는 길을 찾아 가야 한다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비폭력, 평화, 유머와 웃음, 춤과 노래, 사랑과 화해, 그러나 단호한 생명의 의지로 물대포와 맞서기 위해 엄마와 함께 당당하게 밤거리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

그것이 후천개벽이라는 것.

이것을 아는 것. 이것이 참 교육이다. 진정한 교육은 자기 교육이다. 참된 스승, 참된 샘물은 자기 안에 있는 법.

5월, 6월에 아기가 유모차에서 본 것, 함께한 것, 그 엄마들, 언니들, 형들 그리고 쓸쓸한 아저씨들과 함께 경험한 그 위대한 날들을 아기가 그 후 평생을 두고두고 꺼내보고 다짐하고 새롭게새롭게 스스로 해석해야 할 진정한 '위키피디아'라는 것.

이것을 아기에게 주기 위해서 엄마는 그 날 유모차를 앞세우고 시청 앞에서 촛불을 켠 것이다.

그렇다.

이것이 참 교육이요 참 모심이니 이것이 바로 조용히 타오르는 촛불의 신비다. 엄마들은 2002년 붉은 악마 700만의 한 달 동안에도 효순이-미선이 촛불 때도 이미 아기들을 무등에 태우고 거리에 나가 있다.

그 위대한 날들은 그러나 단순한 정치 시위도 파업도 폭동도 혁명도 아니었다. 그것은 개벽이요 해방이요 전환이요 '깨침'이었으니 거기에 임하는 태도는 곧 '모심'이며 거기에 있음은 곧 '살림'이었다.

나는 두 살 때부터 기억한다. 바위다. 그 바위 앞에서 토방 마루로부터 굴러 떨어져 나뒹군 뒤 다 한 번도 넘어지거나 굴러 떨어지거나 크게 실수한 적이 없다. 이것은 자기 교육이 아닌가?

나는 어렸을 때부터 이야기를 좋아했다. 그래서 문학자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집 밖 길거리에서 밤마다 도는 '야경 똑딱' 소리만 들으면 이불 속으로 순식간에 숨어버렸다.

나는 단 한 번도 경찰이나 감시자, 정권, 권력자와 빅 브라더를 닮은 사상가나 과학자나 문학자를 다 사람도 존경한 적도 좋아해 본 적도 없다. 그저 읽거나 알았을 뿐.

이것은 교육, 자기 교육이 아니던가? 나는 지금도 그저 한 사람의 민중이요 가난한 시인일 뿐이다. 그리고 그것이 자랑스럽다. 뭐, 잘못된 것 있는가?

아기는 분명 그 날들, 그 밤들에 언니와 형과 엄마와 쓸쓸한 외톨이 아저씨들이 물대포 앞에서 외치던 그 소리 소리들!

'따뜻한 물 다오.'
'샴푸 다오!'
'비누 다오!'

그리고 누군가 자기 주변에서 화내며 경찰차에 뛰어오르며 외치던 소리소리.

'비폭력! 비폭력! 비폭력!'을 끝끝내 기억할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오늘날 삶과 세계를 크게 바꿀 것이다. 참다운 생명과 평화의 세계로!

그들은 하늘과 땅과 사람을 크게 바꿀 것이다. 해월이 아이를 천지라 하면서도 또한 천지를 다 제안에 모신 '한울'이라고 불렀던 까닭이다.

그들은 옛 수천 년 전 고조선의 천부경(天符經)에 '사람 안에 하늘과 땅이 하나로 통일돼 있다(人中天地一)'란 명제를 현실에서 이제 삶으로 실현할 것이다. 후천개벽이요 네오 르네상스다. 나는 안다.

촛불은 또 켜지고 또 켜지고 또 켜진다. 그것은 후천개벽이 완성되어 온화하면서도 서늘한 사천 년 유리세계(琉璃世界)가 시작되는 그날까지 계속계속 켜질 것이다. 그리고 나는 분명히 안다.

유모차 부대 엄마들을 괴롭히던 경찰이 이 글을 발표되기 훨씬 이전에 자취를 감출 것임을.

우리 국민을 만만히 보지 말라! 4.19 이후 50년 민주화 운동은 결코 공짜가 아니다.

서기 2008년 9월 24일

아침신문에서 유모차부대 엄마에 관한 경찰 수사 기사를 읽고

一第로 모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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