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자는 한국 힙합에 과연 '역사'라는 말을 쓸 수 있는지에 대해 의문부터 제기할지 모르겠다. 엄밀히 볼 때 틀린 말은 아니다. 1999년부터 몇 년 간 지속된 컴필레이션 앨범의 열풍에 힘입어 2000년대 들어 비로소 힙합의 정체성을 본격적으로 드러내는 뮤지션들이 하나둘씩 등장하기 시작했으므로 이렇게 보면 한국 힙합의 역사는 채 10년도 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정체성의 범주를 유연하게 늘어뜨린다면 한국 힙합의 시작은 1990년대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현진영, 서태지, 듀스로 대표되는 '랩댄스'를 한국힙합의 시초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랩댄스는 그 명칭에서 이미 알 수 있듯 음악적으로 온전한 힙합이라고 보기 어렵다. 하지만 이들 랩댄스 주역이 한국힙합의 문법을 일정부분 정립해놓은 점, 그리고 한국이란 나라가 힙합문화를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미리 토양을 닦아놓은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어릴 적 듀스의 음악을 들으며 래퍼의 꿈을 키웠다는 여러 힙합 뮤지션의 고백이 이를 단적으로 증명한다.
그렇다면 한국 힙합은 지난 십 수 년의 역사 동안 무엇을 성취했을까? 먼저 산업적인 측면을 살펴보자. 랩댄스 시대와 PC통신 시절을 지나 컴필레이션 앨범의 열풍이 일면서 한국힙합은 서서히 모양새를 갖춘다. 홍대 클럽가를 중심으로 힙합 전문 공연이 활발히 열리고 자신을 '힙합 뮤지션'으로 내세우는 이들이 점차 늘어갔다. 2000년대 초반 때마침 미국 빌보드를 장악하기 시작한 흑인음악의 파워 역시 국내에 호재로 작용했다. 이효리를 위시한 대중가수들이 앞 다투어 흑인음악을 들고 나왔고 힙합은 가장 인기 있는 음악으로 각광받았다. 에픽 하이(Epik High)의 출현은 가요계의 어린 팬들을 대거 힙합 씬으로 유입시켰으며 언더그라운드 힙합 씬의 움직임도 활발함을 더했다.
그 결과, '힙합'이라는 단어가 이제는 더 이상 낯설지 않게 되었고, 일정한 규모와 울타리를 갖춘 '한국 힙합 씬'이 형성되었다. 발전 정도가 처음의 기대에 못 미친다는 평가도 일부 존재하나 힙합이 한국 대중음악의 무시 못 할 한 축으로 성장한 것만은 틀림없다고 할 수 있다. 에픽 하이와 다이나믹 듀오(Dynamic Duo), 리쌍 같은 힙합 팀들이 음반 판매량 순위의 높은 위치를 항상 점유한다는 사실은 이 같은 판단을 더욱 공고하게 해준다.
음악적 측면을 보아도 긍정의 말을 풀어놓을 수 있다. 한 때 '한국힙합은 다 똑같다'는 식의 자조어린 말이 나돈 적도 있지만 이제 그런 말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먹통힙합'으로 상징되는 1990년대 초중반 힙합 스타일을 주로 받아들였던 한국힙합은 현재 비교적 다양한 스타일의 세분화가 진행되고 있는 상태다. 빌보드 차트를 휩쓰는 말랑말랑한 알앤비-힙합 스타일, 실험성을 주 무기로 하는 하이브리드(hybrid)-힙합 스타일, 댄스 플로어를 뜨겁게 달구는 클러빙 힙합, 그리고 특유의 한국적 멜로디와 감성이 어우러진 감상용 힙합까지 비록 양적으로 본토인 미국의 그것에 비할 바는 아니나 한국힙합 자체만 놓고 봤을 때 내부적으로 스타일의 세분화가 큰 무리 없이 진행되고 있다는 평가가 가능하다.
현재의 한국힙합 씬에 부는 믹스테이프 바람
이러한 한국힙합의 현재 가장 중요한 화두가 바로 '믹스테이프'이다. 힙합 뮤지션들이 약속이나 한 듯 최근 잇달아 믹스테이프를 내놓고 있는 것이다. 믹스테이프란 말 그대로 수록곡을 끊이지 않게 서로 연결해놓은 형태의 음반 기록물을 뜻하는데, 사실 오늘날 힙합과 믹스테이프는 서로 뗄 수 없는 관계다. 미국 현지에서는 이미 믹스테이프 시장이 거대하게 성장해 힙합 씬 안에서 무시 못 할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유명 시리즈물 믹스테이프를 제작하는 디제이는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돈을 벌어들이고 있고, 몇몇 스타 래퍼들은 정규앨범 한 장 없이 믹스테이프 만으로 부와 명예를 축적하는 일이 가능하다. 즉 믹스테입은 '정규 앨범'이 아니다. 때문에 믹스테이프는 주로 공식 발표를 앞둔 신곡이나 미공개곡, 그리고 다른 뮤지션이 이미 발표한 비트 위에 자신이 새롭게 랩을 얹은 곡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국 힙합 씬에 믹스테이프가 전무했던 것은 아니다. 대표적으로 라마(Rama)가 지난 2006년 두 차례 믹스테이프를 발표한 적이 있으나 큰 반향을 일으키지는 못했다. 또한 디제이들이 기존의 히트곡을 엮어 만든 형태의 믹스테이프는 간간히 발매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2008년 들어 한국힙합 씬에 '래퍼가 직접 자신의 이름을 걸고 내는 형태'의 믹스테이프 바람이 본격적으로 불어 닥친 것이다. 이-센스(E-Sens), 사이먼 도미닉(Simon Dominic), 더 콰이엇(The Quiett), 오버클래스(Overclass: 크루), 도끼(Dok2), 베이식(Basick), 딥플로우(Deepflow), 스윙즈(Swings) 등 시디로 발매한 이들을 비롯해 온라인 공개를 택한 이들까지 합치면 열 손가락이 넘는다. 어째서 이런 현상이 생기는 걸까?
우선 믹스테이프는 '비공식 앨범'이다 보니 상대적으로 더 높은 음악적 자유를 보장 받는다. 정규앨범의 콘셉트에 맞지 않아서, 혹은 '정규'라는 두 글자의 중압감에 눌려 시도하지 못했던 것들을 믹스테이프에서는 마음껏 할 수 있다. 즉 다루는 소재에 제한이 없어지므로 미발표 가사를 활용하기에도 안성맞춤이다. 믹스테이프 수록곡의 가장 보편적인 형태인 '다른 뮤지션이 이미 발표한 곡의 반주 위에 자신의 랩을 새로 얹고 원곡의 장치들을 창조적으로 재해석'하는 행위 역시 이 같은 자유로움에 기반을 둔다. 래퍼라면 누구나 이러한 믹스테이프의 매력에 한번쯤 끌리는 것이 당연하다.
신인이라면 믹스테이프를 자기 시험의 장으로 삼아볼만하다. 부담감이 있을 수밖에 없는 정규 앨범을 곧바로 내기보다는 그 전에 믹스테이프로 자신에 대한 시장의 반응을 가늠해보는 것이다. 잘 된다면 적지 않은 홍보 효과를 누릴 수 있고, 설령 잘 되지 않더라도 그다지 손해 볼 것은 없다. 실제로 위에 거론한 래퍼 중 절반 이상이 아직 정규 앨범을 내지 않은 이들이다.
그러나 요즘의 한국 힙합 씬에 믹스테이프 바람이 부는 가장 큰 원인은 '투자 대비 경제적 효율'이 크기 때문이다(라고 나는 생각한다). 한마디로 믹스테이프는 적은 자본으로 효율적인 수익을 올리기에 적합한 상품이다. 일단 수록곡의 대부분을 이미 기존에 발표된 곡들을 가져다 쓰는 형태로 채우기 때문에 곡비가 들지 않고(물론 이는 명백한 저작권법 위반이지만 미국 현지에서도 믹스테이프 시장의 영향력을 실감하면서 눈감아 주는 것이 관행처럼 되고 있다), 일련의 제작 과정과 비용이 정규 앨범에 비해 간소하기 때문에 그만큼 투자비용을 절약할 수 있다. 투자비용이 적으니 판매가 부진했을 경우의 위험부담 역시 감소함은 당연한 이치다. 또한 섣불리 단정 지을 수는 없겠지만 정규앨범보다 여러 모로 음악적 제약이 덜한 믹스테이프인 만큼 창작에서 오는 스트레스, 다시 말해 '정신적 투자' 역시 상대적으로 덜하다고 보아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잘 팔려서 오히려 문제인 믹스테이프
이러한 믹스테이프의 특성 자체에 대해 문제제기하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위에 열거한 점들은 '빠른 순환', '비교우위', '매력', '메리트'같은 단어들로 표현할 수 있는 부분이다. 문제는 한국힙합 믹스테이프의 가격에 '거품'이 끼어 있다는 사실에 있다. 상대적으로 적은 투자와 상대적으로 가벼운 내용물을 담고 있다면 그만큼 가격 역시 조정되어야 맞다. 미국의 경우를 보자. 미국에서는 보통 정규 앨범이 약 14달러에 판매되고, 믹스테이프는 5~7달러 수준에서 소비자에게 공급되고 있다. 딱 절반이거나 그 이하 수준이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보통 정규 앨범이 1만500~1만2000원에 판매되는 한편 믹스테이프의 가격은 8000원 정도다. 적게는 65% 수준에서 많게는 80%에 육박하는 수준이다.
물론 단순비교는 위험하다. 정황과 환경이 참작되어야 한다. 씬의 규모, 제작 시스템, 뮤지션의 여건 등이 고려되어야 비로소 온당한 비교 평가가 가능하다. 그러나 이러한 요소들을 고려한다고 해도 지금의 믹스테입 가격이 누구나 수긍할만한 합리적인 가격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온라인을 통한 무료 배포가 일반화되어 있는 미국의 경우처럼 '모든 믹스테이프의 온라인 무료 배포'라는 극단적인 주장을 할 생각은 없지만, 가격의 일정한 하향 조정에 관한 공론화의 필요성은 분명 있어 보인다.
사실 이러한 문제제기를 하는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믹스테이프가 (대체로) '잘 팔리기' 때문이다. 만약 믹스테이프가 '안 팔리면'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된다. 시장 원리에 따라 수요를 창출하기 위해 공급자가 가격을 내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공연히 비싼 가격 걱정할 필요가 없어진다. 작금의 상황, 즉 '비싼' 믹스테이프가 '잘 팔리는' 상황에는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믹스테이프의 개념과 가격에 대한 리스너들의 평소 인지 부족, 일단 사놓고 보자는 리스너들의 충성도 높은 소장 욕구, 믹스테이프에 붙어 나오는 '한정'이라는 꼬리표가 소비자에게 암묵적으로 전달하는 신호 등등. 그러나 잘 팔리는 것이 무조건 능사는 아니다. 오히려 길게 보면 뮤지션과 리스너 모두에게 좋지 않게 작용하는 악순환의 고리를 만들 우려가 있다.
사이먼 도미닉이 지난 6월에 3000장 한정으로 발매한 믹스테이프 [I Just Wanna Rhyme Vol.1]이 출시 일주일도 채 안되어 품절되었던 사실은 이와 관련하여 몇 가지를 시사한다. 먼저 이것은 웬만한 한국힙합 뮤지션의 정규 앨범 판매고와 비슷하거나 그를 뛰어넘는 수치다. 게다가 적은 투자와 높은 가격을 수반한 '믹스테입'으로 이뤄낸 성과이니 '정규 앨범'으로 얻는 것보다 더 효율적인 경제적 실리를 얻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설령 사이먼 도미닉의 경우를 이례적인 성공 사례로 분류하더라도, '현재의 한국힙합 씬에서 믹스테이프의 위력은 정규 앨범 못지않다'는 일반론은 여전히 유효하다. 이처럼 믹스테이프으로 정규 앨범과 대등한(혹은 그를 능가하는) 판매고와 수익을 기록할 수 있는 한국 음악 씬(혹은 한국 힙합 씬)의 특수한 상황은 뮤지션들에게 강한 유혹과 동기 부여로 작용한다.
한마디로, 좀 극단적으로 말해 정규 앨범을 낼 필요가 없어지는 것이다. 여기에는 뮤지션들이 일반적으로 정규 앨범에 들인 투자와 노력만큼 온전한 보상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어려운 현실 속에서 모험보다는 비교적 안전한 길로 가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다. 좀 더 간편하고 위험 부담도 별로 없는 믹스테이프으로도 만족할만한 경제적 실리를 얻을 수 있는데 구태여 공들여 성공 여부도 불투명한 정규 앨범을 만들 이유가 없다.
물론 상황이 이렇게 극단적으로까지 치닫지는 않을 것이다. 오직 돈을 벌기 위해 기계적으로 음악을 양산해낼 것이 아니라면, 예술 작품을 만들어내려는 뮤지션들의 창작욕이 적절한 균형을 잡아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극단의 가정을 배제하더라도 '결과가 괜찮아 보이는데 나도 한번 해볼까' 식의 믹스테이프 발매가 혹시라도 만연하게 된다면, 그것이 씬에 끼치는 부정적인 해악은 긍정적인 영향 이상일 수도 있다.
이런 것이다. 일단 뮤지션의 입장에서는 자연스럽게 일회성 아이디어 위주의 결과물을 만들게 된다. 믹스테이프는 신선한 시도와 다양한 내용을 담아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으나 정규 앨범이 지니는 몇 가지 미덕, 다시 말해 앨범 전체를 관통하는 내러티브와 콘셉트 그리고 개별 곡의 정제된 완성도 등에서 태생적으로 미흡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믹스테입'도' 존재하는 씬이 아닌, 믹스테이프가 '주'가 되는 씬은 한번 의문을 제기해볼 필요가 있다. 리스너의 입장도 마찬가지다. 정규 앨범과 믹스테이프 간의 특성 차이를 인지하지 않은, 또 믹스테입 간의 완성도 차이를 고려하지 않은 '묻지 마' 식 지지와 구매는 필요 이상으로 높은 현재의 믹스테입 가격에 정당성을 부여해주는 셈이 되며, 결국 씬의 다양성을 해치고 더 정제된 음악을 들을 기회를 스스로 박탈해버리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현재의 믹스테이프 바람을 한국 힙합 발전의 도화선으로
한편으로는 작금의 믹스테이프 바람이 씬의 구조적 열악함에서 탈피해보려는 뮤지션들의 절박한 타개책으로도 보여 가슴 한편이 불편하기도 하지만, 무엇이든 지나쳐서 좋을 것은 없다. 한국 힙합 씬에서 믹스테이프는 정규 앨범에 담지 못했던 것들을 간헐적으로 소비하는 보완재적인 역할, 그리고 씬의 동력이 떨어졌을 때 신선한 아이디어와 재미로 활력을 불어넣는 일종의 구원투수 같은 역할로 기능해야 한다.
연이어 발매되는 믹스테이프를 둘러싸고 뮤지션과 리스너 각자 서로의 입장과 생각이 있을 줄 안다. 낯선 상황일수록 상호 간의 차분한 소통이 중요하다. 작금의 상황을 향후 한국 힙합 발전의 도화선으로 삼을 혜안이 필요한 때다. 더불어 저작권 문제와 적정 가격에 대한 밀도 높은 논의 역시 이루어져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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