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별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겠지? 엄마는 내 몸 속에서 또 하나의 생명이 자란다는 사실이 너무 신기해. 그렇게 바라마지 않던 별이가 엄마 몸 속에서 자라고 있다니 이보다 더 신기한 일이 또 뭐가 있겠니.
그런데 말이야, 별이한테는 조금 미안하지만 요즘 엄마는 이 신기함을 제대로 느낄 만한 여유가 없단다. 남들처럼 먹자마자 토하거나 하루 종일 변기를 붙들고 있어서 탈수증에 걸릴 정도로 입덧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하루 종일 속이 울렁거리니 그것도 쉽지가 않구나. 음식을 잘 못 먹으니 속도 쓰리고. 게다가 지난번에 하혈을 한 이후, 잠깐만 밖에 나갔다가 와도 자꾸 피가 비쳐서 계속 집안에만 있다 보니 머리가 계속 지끈거리는구나. 평소 같았으면 이런 증상이 나타나면 아마 당장 제산제랑 진통제를 찾았을 거야. 하지만 별이가 엄마 몸속에 있다고 생각을 하니 차마 이런 약들에 손이 가지가 않네.
약을 먹지 않다보니, 문득 그동안 살아오면서 꽤 많은 약을 너무도 쉽게 먹었던 기억이 나. 그런데 막상 임신을 하고 보니 아무 생각 없이 먹었던 진통제, 제산제, 소화제, 정장제에도 손이 가지 않을 뿐 아니라, 상처에 바르는 연고, 습진용 연고, 근육통 겔 등에도 쉽게 손이 가지 않네. 아마도 많은 엄마들이 임신 중에 이런 경험을 했을 거야. 모든 약이 다 아기한테 위험해 보이고 믿을 수가 없어서 어지간한 증상들은 그저 참고 견뎠던 경험 말이야.
엄마도 마찬가지야. 어지간한 것은 그냥 참게 되고, 평소에는 아무렇지 않게 사용했던 약들도 사용하기 전에 반드시 의사나 약사에게 반드시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지. 그런데 막상 전문가들에게 물어봐도 각자 의견이 달라서 오히려 헷갈리는 경우가 많았어. 같은 약이라도 어떤 의사는 된다고 하고, 어떤 의사는 안 된다고 하고, 의사는 된다고 하는데 약사는 안 된다고 하고, 반대로 약사는 먹어도 된다는데 의사는 가능한 먹지 말라고 하고…. 도대체 먹어도 되는 건지 아닌 건지 종잡을 수가 없어서 결국 임신 기간 내내 일반의약품은 거의 써 본 적이 없어. 확실하게 알지 못할 때는 안 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말이야.
임신한 여성들의 약물에 대한 공포는 상당히 심한 편이야.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약을 꼭 써야 할 정도로 심각한 경우에도 약물을 거부하는 경우가 있기도 해. 그건 아마도 1950년대 있었던 '탈리도마이드 사건'이 준 충격이 아직도 가시지 않기 때문은 아닐까.
탈리도마이드(thalidomide)란 1953년 독일에서 처음 제조된 약물로 일종의 진정제야. 1958년부터는 임산부의 입덧 진정에 효과가 있다는 것이 알려져서 입덧으로 괴로워하던 임신부들을 대상으로 대량으로 처방되었지. 당시 탈리도마이드를 판매하던 측에서는 동물 실험의 결과, 이 약은 부작용이 없고 안전하다고 선전하였기에 많은 의사들은 이 약을 처방했고 많은 임신부들은 아무 의심 없이 이 약을 먹었지. 하지만 선전과는 달리 탈리도마이드는 전혀 안전하지 않은 약이었어. 특히나 태아에게는 더없이 위험한 약이었지. 탈리도마이드는 많은 유산과 사산을 일으켰을 뿐 아니라, 소위 '탈리도마이드 베이비'라고 불리는 불행한 기형아를 탄생시키고 말았어.
탈리도마이드가 어째서 기형아를 유발하는지 알려진 건 1990년대 들어서야. 탈리도마이드는 태아의 혈관 형성을 억제시키는 작용을 해. 성인의 경우, 이미 혈관들이 다 자라 있어서 큰 이상이 나타나지 않았지만, 이제 막 온몸의 혈관들이 자라나기 시작하는 태아에게 있어서는 탈리도마이드의 혈관 생성 억제는 치명적이었지. 이런 부작용이 보고된 이후, 1962년부터 탈리도마이드는 사용이 금지된 약물이 되었지.
하지만 최근 들어서는 탈리도마이드의 혈관 생성 억제 작용을 역이용해 이를 항암제로 사용하기도 해. 암세포는 영양분을 얻기 위해 기존의 혈관에서 새로운 혈관을 만들어 자신에게 직접 영양분이 전달되도록 하는 특징이 있거든. 마치 기름이 지나가고 있는 송유관에 구멍을 뚫어 기름을 빼내는 사기꾼들처럼 말이야. 따라서 주변 조직으로부터 암세포로 유입되는 혈관들을 제거하면 암세포는 굶어 죽어버려. 따라서 탈리도마이드는 제한적이지만 항암제로 다시 사용되고 있어. 이때도 역시 혈관 생성이 활발한 어린아이들에게는 사용금물이지만 말이야.
이처럼 끔찍한 결과를 가져온 탈리도마이드. 그런데 탈리도마이드에 의한 기형아 발생은 조금 이상한 패턴을 나타냈어. 임신부에 따라서 누군가는 탈리도마이드를 먹었는데도 아기가 무사히 태어난 반면, 임신 기간 중 딱 한 알의 탈리도마이드를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기형을 가진 아기를 낳은 경우도 있어. 이는 탈리도마이드의 태아 기형 유발 정도는 '얼마나' 먹었느냐보다는 '언제' 먹었느냐가 더 영향을 많이 미치기 때문이야. 이는 앞서 말했듯이 탈리도마이드가 혈관 생성을 억제하는 작용을 하기 때문이야. 따라서 탈리도마이드를 먹었을 때, 태아에게서 어떤 부위의 혈관이 발생하는 시기였느냐가 매우 중요해.
알려진 바에 의하면 탈리도마이드를 먹은 시기가 마지막 생리일로부터 35~37일경(임신 5주)이면 아기의 귀가 없어지고, 39~41일 사이면 팔, 41~43일 사이면 자궁, 45~47일 사이면 다리, 47~49일 사이면 엄지손가락이 자라지 못하는 기형을 유발한다고 해. 인간의 임신 기간은 약 280일 정도 되는데, 위에서 보듯이 그 영향이 나타나는 시기는 매우 단기간이야. 그것도 임신 6주에서 10주까지의 짧은 기간에 집중되어 있지. 따라서 임신 전 기간 중 단 한 번 탈리도마이드를 먹었더라도 그 시기가 위에서 언급한 시기 중에 포함된다면 아기는 이미 영향을 받았을 수 있다는 거지.
임신 시기는 크게 착상 전기(수정부터 완전 착상이 이루어지는 2주간, 즉 임신 4주까지)와 배아기(embryonic period, 임신 5~10주), 태아기(fetal period, 임신 11주 이후)로 나뉠 수 있는데, 매우 초기인 착상 전기의 경우에는 아직 엄마가 아기랑 완전히 연결되어 있지 않은 상태라 비교적 약물의 영향을 덜 받아. 가장 약물에 취약한 것은 배아기에 있는 태아로 탈리도마이드 사건은 우리에게 커다란 교훈을 두 가지 남겨 주었어. 그 중 하나는 태아와 성인의 신체 메커니즘은 전혀 달라서 어른에게 이상이 없다고 해서 태아에게 이상이 없으리라고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태아에게 있어서 약물의 영향은 절대적인 양보다는 '약물이 작용한 시기'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지. 특히나 태아의 모든 기관이 형성되는 초기 3개월은 약물에 민감한 시기이기 때문에 이 시기는 특히 주의하는 것이 좋아.
물론 이는 '약물을 사용하지 않아도 문제가 없는 경우'에 한해서야. 때로는 치료를 위해 약이 꼭 필요한 경우인데도 무조건 약이 나쁘다고 사용하지 않는 것도 문제가 돼. 그래서 자료를 찾다보니 임신 중에도 안전하다고 알려진 약물들에 대한 목록이 있었어. 가능하면 약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지만, 꼭 필요하다면 그나마 안전하다고 알려진 약들을 선택하는 것이 좋겠지.
이처럼 임신 중 약의 사용은 참 조심스러워. 그래서 엄마도 참 고민을 많이 했지. 그리고 원칙을 정했어. 일단 통증이나 이상이 나타나면 의사에게 보이고 조언을 구하고, 별다른 이상이 없는 임신 증상의 하나라면 그냥 견뎌보고, 꼭 필요한 경우에만 제한적으로 '안전하다고 공인된' 약물을 사용한다는 원칙 말이야.
그리고 이건 임신 중 뿐만 아니라, 평소에 약을 선택할 때도 적용되는 건데, 바로 '옷은 새 옷이 좋지만, 사람은 옛 친구가 더 좋다'라는 말을 기억해 두라는 거야. 이 때 약은 옷이 아니라 사람의 가치를 따라 선택하는 거야. 우리는 대개 '신약'이라는 말을 들으면 '획기적인 치료 능력을 가진 약으로 기존의 약보다 훨씬 더 좋은 약'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아. 하지만 신약(新藥)이란 말 그대로 '새로 나온 약'이라는 뜻이 더 강해. 즉, 새로운 효과를 기대하고 만든 약이지만, 새롭기 때문에 기존에 알려지지 않았던 부작용이 나타날 가능성도 있다는 거지. 특히나 안전성의 문제에 있어서는 새로 나온 약보다는 오래 전에 만들어져 수많은 사람들이 이미 사용했던 약이 더 안전할 수 있어. 안전하지 못하다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사용할 수 없었을 테니까 말야.
얘기가 잠깐 다른 데로 흘렀네. 위에서는 임신 중 사용할 수 있는 약물에 대해서 말했으니 이제 임신 중에는 절대로 사용할 수 없는 약물에 대해 알아볼까? 거의 모든 약물의 설명서에는 '이 약은 임산부와 유아에 대한 안전성이 입증되어 있지 않으니, 임산부의 경우 이 약을 복용하는 것이 질환을 방치하는 것보다 이익이 더 큰 경우에만 의사의 판단 하에 사용이 가능하다'는 이야기가 들어 있어. 임신부와 태아, 어린아이들의 경우, 임상시험을 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 이런 경고문이 붙은 거지.
하지만 모든 약이 이런 것은 아냐. 개중에는 '절대로' 먹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는 약들도 있지. 기형을 일으키는 약물이나 물질은 크게 테라토젠(Teratogen), 하데젠(Hadegen), 트로포젠(Trophogen)의 3가지로 구분돼. 테라토젠은 태아의 외형이나 기능을 영구적으로 손상시키는 물질을 뜻하고, 하데젠은 각 기관의 정상적인 성숙이나 기능을 방해하는 물질을 뜻하며, 트로포젠은 성장을 저해하는 물질을 말해. 이 중에서 가장 심각한 후유증을 남기는 것은 테라토젠류에 속하는 물질들이야. 그래서 임신 중에는 이런 물질들은 접하지 말아야 해. 테라토젠류에 속하는 물질들은 다음과 같아.
이 밖에도 다양한 약품들이 태아의 성장과 발육에 영향을 미칠 수 있어. 만약 내가 처방받은 약이 임신 중 먹어도 괜찮다고 알려진 약인지 아닌지를 알고 싶다면, 대한민국의약정보센터의 약품 검색을 이용하면 좋아. 검색란에 약품명이나 성분명을 치면, 이 약이 임신 중 써도 되는 약인지 그렇지 못한 약인지가 나타나.
예를 들어 임신 중 써도 안전하다고 알려진 해열진통제인 타이레놀(성분명 : 아세트아미노펜)을 검색하면 왼쪽처럼 '위험도 낮음'이라고 나오지. 이는 태아에게 위험성이 없다고 오랜 세월동안 연구된 약물이라는 뜻으로, 임신부가 비교적 안심하고 쓸 수 있는 약이지.
하지만 여드름약에 쓰이는 이소트레티노인을 검색하면, 'X등급', 즉 태아에게 영구적인 손상을 일으킬 수 있는 약물로 임신 중에는 절대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결과가 나오지. D와 X 등급이 나오면 태아에게 이상을 일으킬 위험이 매우 높은 약이기 때문에, 임신 중에는 절대로 피하는 것이 좋지.
누구나 자신의 아이가 건강하고 튼튼하게 태어나 자라주길 바라지만, 때로는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아이가 아프거나 이상을 가지고 태어날 수도 있어. 오늘은 그 비극의 원인 중 하나로 약물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 다음에는 또 다른 것들에 대해 알아보자. 계속 이런 비극적인 이야기를 해서 혹시 우리 별이가 겁을 먹었을지도 모르겠다. 비록 현재 알려진 선천성 기형의 원인 중 상당수는 '원인 불명'인 경우가 많다고 해. 하지만 나머지 원인들이라도 알아두는 것이 좋아. 원인을 알고 있다면 그만큼 불행한 결과를 피할 수 있을 확률이 높아지니까 말이야. 그러니 너무 겁먹지 말고 편히 쉬렴. 잘 자라, 아가.
참고 문헌
한국희귀의약품센터(☞바로 가기)
한정열, '임신한 여성을 위한 약물의 선택', <가정의학회지> 제28권 11호 별책, 2007.
이원영, <약물과 선천성 기형>, 칼빈서적, 1991.
산드라 스태인그래버 지음, <모성혁명>, 김정은 옮김, 바다출판사,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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