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5년 3월 부동산 투기 의혹으로 이헌재 경제부총리의 사표를 받아들이면서 노무현 전 대통령이 밝힌 심경이다. 1997년과 2002년 대선에서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를 지지하는 등 본인과 특별한 연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노 전 대통령은 이헌재 전 부총리 교체에 강한 아쉬움을 표명했다. 경제부총리의 교체는 경제정책 전반을 흔들어 국정운영에 큰 타격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전쟁을 해서라도 부동산 투기를 잡겠다"고 공언한 노무현 정부에 '부동산 투기 의혹'이 불거진 경제수장은 용납할 수 없는 존재였지만 노 전 대통령은 끝까지 이 전 부총리를 붙잡고 싶어 했다.
이명박 대통령에게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의 경질은 노 대통령의 이헌재 전 부총리 경질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힘든 일인 것은 사실이다. 두 사람은 1980년대 소망교회를 통해 만나 20년 넘게 친분을 유지해온 관계다. 특히 강 장관은 747(7% 성장, 1인당 국민소득 4만 불, 7대 경제대국)로 대표되는 'MB노믹스'의 입안자다. 그래서인지 강 장관은 7일 단행된 개각에서 제외됐다.
하지만 이는 노 전 대통령의 이헌재 전 부총리에 대한 '미련'이 노무현 정부의 '부동산 투기 세력과 전쟁'에 대한 의지를 의심하게 만들었던 것과 마찬가지 잘못된 결정이다. 이 대통령의 강 장관에 대한 '미련'은 "제3의 오일쇼크", "경제살리기의 횃불을 들어야 한다" 는 등 자극적인 말들을 동원해 '경제위기론'을 설파하는 이 대통령의 진의를 의심하게 만든다.
"고환율정책 실패 책임은 최중경 차관"…최 차관 희생양으로
이동관 청와대 대변인은 이날 소폭 개각을 발표하면서 강 장관 유임 배경에 대해 "우리 경제가 부딪히고 있는 3고는 전세계 공통"이라며 현 경제위기는 전적으로 외부 요인에 따른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대변인은 "쇠고기, 총선, 정부조직법 개편 등으로 부처 통합 시스템 구축에도 시간이 걸렸다"며 "한번 더 기회 줄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 대변인은 또 "국정 안정성, 연속성 차원에서 각료의 잦은 교체는 적절치 못하다는 판단이 있었다"고 덧붙였다. 이 대변인이 이날 밝힌 유임 배경은 이 대통령이 지난달 19일 기자간담회를 통해 직접 말했던 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것이다.
고환율정책으로 인한 물가급등 등 강만수 경제팀의 구체적인 실책에 대해선 모두 이번 개각에서 경질된 최중경 재정부 제1차관의 책임으로 돌렸다. 강만수 장관과 함께 고환율정책을 고집해온 최 차관은 유일하게 차관급 인사 중 이번 개각에 포함되는 불명예를 당했다. 최 차관은 강 장관과 함께 '최강라인'으로 불리우며 성장일변도의 현 정부 정책을 대변하는 인물 중 하나로 거론됐었다.
이 대변인은 최 차관 경질에 대해 "실무적으로 환율 등 기조 설정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있었고, 환율을 책임진 차관을 경질한 것은 그런 여론을 부분적으로 반영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 대변인은 '고환율정책에 대한 책임이 어떻게 장관이 아닌 차관 책임이냐'는 질문에 "실무적으로 환율에 대한 최종 책임자는 차관"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MB가 '강만수 유임' 강력 주장하면서 아무도 나서지 못했다"
이 대변인의 이런 공식적인 '설명'과는 달리 강만수 장관에 대해 청와대 내부에서도 경질론이 비등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한 청와대 관계자는 "청와대에서도 강 장관을 문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면서 "그러나 결국 이명박 대통령이 강력하게 유임을 주장하면서 아무도 앞으로 나서지 못하는 분위기가 됐다"고 전했다.
여당의 분위기도 강 장관에 대해 우호적이지 않았다. 김성식, 김성태 등 일부 초선 의원들은 강 장관의 경질을 공개적으로 요구했다. 이에 앞서 이한구 전 정책위의장, 임태희 현 정책위의장 두 사람 모두 금리인하, 추경예산 편성 등 문제를 놓고 '강만수 경제팀'과 마찰을 빚었다.
강 장관에 대한 이 대통령에 대한 미련은 결국 "성장 중심 경제정책에 대한 미련"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외부적 경제 환경 악화에 따라 7%라는 성장 목표가 4.7%로 대폭 후퇴된 것은 사실이지만, 이 대통령은 높은 성장률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 이 대통령은 이날 일본 교도통신과의 인터뷰에서도 "목표치는 수정해야 하지만 그동안 당초 목표를 달성할 수 있도록 잠재력을 키워가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다.
"MB, 경제위기를 제대로 인식하고 있나"
경실련 김한기 경제정책팀 국장도 강 장관의 유임에 대해 "이 대통령이 성장일변도의 정책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김 국장은 "강 장관은 MB노믹스의 중심에 있고, 이후 경제상황이 좀 더 나아지면 이전에 준비했던 것을 하기 위해 꼭 필요한 인물"이라고 지적했다.
김 국장은 "하지만 이 대통령이 이런 인식을 갖고 있다면 현재의 경제 위기에 대해 매우 안이하게 상황을 인식하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그는 "현재 강 장관은 시장의 신뢰도 국민의 신뢰도 모두 잃었다"며 "강 장관을 유임하는 것 자체가 이후 경제상황을 더욱 어렵게 만들 수 있다"고 강조했다.
고물가와 저성장이라는 스태그플레이션에 접어든 우리 경제가 난국을 헤쳐 나가기 위해선 국민들의 정부에 대한 신뢰가 필요하다는 것. 이런 신뢰를 바탕으로 각각의 경제주체들에게 '고통분담'을 요구해야만 하는데 과연 강만수 경제팀으로 가능하겠냐는 지적이다. 당장에 이 대통령은 자신의 측근 하나 교체하지 않으면서 국민들에겐 '고통분담'을 요구하냐는 불만이 나올 수 밖에 없다.
김 국장은 "새로운 모습을 보이기 위해서는 대폭적인 경질이 필요하다"고 강 장관의 교체를 거듭 촉구했다.
'강만수 유임', 여전한 갈등의 불씨
경실련은 이날 강 장관의 경질을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또 오는 8일 서울 세종로 정부종합청사 앞에서 강 장관의 경질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겠다고 밝혔다.
이처럼 '강 장관 유임'으로 촛불집회 등으로 등돌린 민심을 수습한다는 내각의 애초 목적은 달성하기 힘들게 됐다.
시민단체 뿐 아니라 정치권의 반발도 거세다. 강 장관 유임은 지난 주말 출범한 민주당 새 지도부의 첫번째 요구를 이명박 대통령이 내친 것이다. 정세균 신임대표는 이날 오전 첫 최고위원회의에서 "지금까지 고유가 대책 제대로 못 세우고 물가 폭등 등 경제운용 실책을 범한 현 경제팀의 경질이 꼭 필요하다"면서 "특히 환율정책 등의 실책을 저지른 마당에 경제팀 교체 없이 국민 공감대를 얻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민주당 뿐 아니라 자유선진당, 민주노동당도 이날 논평을 발표해 강 장관 유임에 대해 강력 반발하고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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