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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변방에서 곤봉에 맞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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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변방에서 곤봉에 맞더라도…"

[촛불의 소리] 촛불은 이긴다

며칠 전 개봉한 <크로싱>이라는 영화를 보았다. 북한 주민의 인권 문제를 다루는 작품이라는 사전 정보를 갖고 영화관에 들어섰지만 막상 영화를 보니 북한 체제의 잔혹함 못지않게 북한 주민의 생활상의 어려움 그리고 가족과 이웃을 보살피려는 주민의 소박한 마음이 잘 그려진 영화라는 인상을 받았다.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비슷하다는 말이 이런 데에도 적용될 수 있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식량 약품 같은 기초 생필품을 구하기 위해 탈북을 시도하다 잡혀온 북한 주민을 수용소에 가두어놓고 가혹한 매질을 서슴지 않는 북한의 군인과 관료를 보면서 나는 좀 엉뚱하게도 우리 사회의 그림자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아마도 두 손에 촛불 말고는 아무 것도 들고 있지 않은 시민들을 방패로 찍고 곤봉으로 무자비하게 후려치는 경찰들의 잔상이 아직도 뇌리에 강하게 남아있기 때문이리라.
  
  생각해보면, 이런 느낌은 단순히 느낌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북한 사회가 국가 권력의 유지라는 지상 최고의 가치를 위해서는 개인의 자유나 생존권 같은 것은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취급하는 전체주의 국가라는 사실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는 것 같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어떠한가? 50일 이상 지속된 촛불 집회를 통해서 생명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다는 자명한 사실을 외치는 시민들에게 국가가 들려준 대답은 폭력뿐이다.
  
  따지고 보면, 터무니없는 쇠고기 협상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통해서 소수의 재벌에 이익을 몰아주기 위해 미국이라는 경제대국에 바치는 진상품이었다. 자유주의 정치체제에서 선거라는 절차를 통해 뽑힌 국가의 권력자들은 현재 한국 사회에서 재벌과 같은 거대 기업의 사적 이익을 정치적으로 조직하고 실행에 옮기는 기업권력의 하수인에 지나지 않는다.
  
  현재 한국 사회는 과거의 나치 정권이나 북한 같은 전체주의 체제와는 달리 자유주의적 정당체제가 존재하고 대중들을 집단적으로 동원하지는 않지만, 대중들은 그저 ("값싸고 질좋은 쇠고기"를) '소비하는 생물' 이상의 정치적·사회적 의미를 지니지 못하게 되는, 그런 또 다른 의미의 기업 전체주의 체제를 강요받고 있다.
  
  자유주의적 대의제 민주주의와는 구별되는 대안적인 참여 민주주의 체제를 모색해온 미국의 정치 사상가 셸든 월린은 9·11 사태 이후 '전도된 전체주의'라는 개념을 소개해왔는데, 이것은 미국의 신자유주의적 부시 체제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개념이기는 하지만, 이미 위에서 약술한 대로, 이 개념은 IMF 이후 급격히 신자유주의적 체제로 재편되어온 한국 사회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개념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미국의 '전도된 전체주의' 체제가 그동안 어느 정도 성공적으로 작동되어온 데에는 한국 사회가 흉내 내기 어려운, 근본적으로 다른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 중 하나는, 이미 여러 논자들이 지적해온 바이기도 하지만, 미국에 중심을 둔 다국적 기업의 영향력이 국가 경계를 넘어 세계화를 이루는 데에는 미국의 군사력이 결정적인 역할을 해왔다는 사실이다.
  
  이를 두고 <뉴욕타임스>의 칼럼니스트 토마스 프리드먼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은 보이지 않는 주먹 없이는 제 구실을 하지 못한다. 맥도날드는 맥도넬 더글러스(팬텀기를 제조하는 미국의 대표적인 방위산업체) 없이는 번성할 수 없으며 (…) 실리콘 밸리의 기술이 번창하도록 세계를 안전하게 유지해주는 보이지 않는 주먹은 미합중국 육군, 공군, 해병대라고 일컬어진다." (아룬다티 로이, <9월이여, 오라>에서 재인용. 82쪽)
  
  미 제국의 무력은 전 지구상에 흩어져 있다. 제국의 무력은 미국 국내가 아니라 미국인들이 쉽게 목격할 수 없는 725개가 넘는 해외 군사기지를 중심으로 행사된다. 기업 권력이 미국 내에서는 물론 해외에서도 막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해외 군사력의 존재 때문이다. 미국인들이 자신들의 사회체제가 기업 권력의 전일적인 지배 아래에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는 주요 원인 중의 하나가 바로 기업 권력을 물리적으로 지탱해주는 군사력이 해외에 산재해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 비해 우리 사회는 기업 권력이 비대해짐에 따라서 생기는 우리 사회의 공동체적 가치의 훼손과 경제적 빈부의 격차 심화에 따르는 사회적 모순을 외부적으로 해소할 만한 공간을 갖고 있지 못하다. 거대 자본의 팽창은 아류 제국의 꿈을 국민들 가슴 속에 심어준 것이 사실이지만 기업 권력의 급속한 확장을 위해 동원되는 사회적 자원의 고갈과 양극화 현상을 의식하지 못하게 할 만한 물리력을 행사할 공간이 한반도 남쪽 땅 이외에는 마땅한 곳이 없는 것이다.
  
  아무리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주류언론과 인터넷 포털사이트의 메인 화면을 장식하는, 친기업적으로 가공된 정보와 소비주의 쾌락을 조장하는 정보의 흐름에 우리가 세뇌된다 하더라도 일자리와 학교 그리고 가정의 일상생활 속으로 깊숙이 침윤되어 들어와 있는 갈등적 요인들을 감출 수 있는 공간이 우리에게는 없는 것이다. 글로벌 제국은 물론이고 동북아 중심 국가도 현실에서는 그저 정치적 구호이고 허허로운 수사일 뿐 우리의 남루한 일상은 화장이 지워진 맨 얼굴로 우리에게 그 모습을 드러낼 뿐이다.
  
  미국은 병영을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 차릴 수 있지만 우리는 경찰의 곤봉 세례를 온 몸의 통증으로 받아내야 한다. 그래서 '즐거운' 기업 권력의 이면에 숨어있는 진실을 미국의 일반 대중들은 쉽게 느낄 수 없지만 우리는 그것을 실감한다. 아고라와 서울 광장, 그리고 전국의 여러 곳에서 진실이 무엇인지를 토론하고 새로운 비전을 모색한다. 정권의 협박과 폭력이 더해질수록, 그들의 추한 진실은 더 드러날 것이고 광장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 것이고 우리들의 새로운 삶의 방식에 대한 비전은 더욱 명료해질 것이다. 촛불은 이길 수밖에 없다.
  
  후기
  
  영화 <크로싱>의 마지막 장면. 탈북자들의 비극적 가족사를 마무리 하고 영화는 두만강변에 다시 모여 밥을 나누어 먹으며 다함께 즐거운 한 때를 보내는 마을 사람들의 모습을 몽환적으로 보여준다. 국가 권력이든 기업 권력이든, 그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수평적으로 연대하여 공생공락하는 민중들의 자치의 공간이 열려있는 유토피아를 영화는 꿈꾸는 것일까? "우리는 남쪽으로 행진할 것이다. 더 이상 대통령을 찾지 않을 것이다." 정의구현사제단의 김인국 신부의 행진 선언이 자꾸 귓가에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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