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혹적인 음향과 소통 가능한 서정을 함께 중시하는 경향이 이어지고 있다. '잠'과 '우리는 속옷도 생겼고 여자도 늘었다네'가 그러했고, 최근의 '로로스'는 통속성마저 껴안는다. 이러한 흐름은 장르적으로는 멀어 보이지만 '할로우 잰'과 '49몰핀스' 그리고 '불싸조'에도 가지를 뻗는다. 노이즈/슈게이징 또는 포스트 록의 기법을 부분적으로 활용한 예는 더욱 많다. 이 역시 2000년대의 주목할만한 여러 움직임들 중 하나일 뿐이니 결코 한국의 인디음악계를 작다고 할 수 없다.
이 대열에 신선한 작품과 함께 합류한 '비둘기우유'는 2003년에 첫걸음을 떼었고, 지금은 이종석(기타/보컬) 함지혜(기타/보컬) 성기훈(베이스) 이용준(드럼)이 화폭을 채워가고 있다. 인디레이블 '일렉트릭 뮤즈'의 스튜디오에서 그들을 만나 젖은 종이컵들이 어지러이 놓인 탁자 주위에 둘러앉아 이야기를 시작했다. (언급되는 해외 밴드의 이름은 괄호 안에 영문을 표기하여 국내 밴드와 구분했다. 빈번히 등장하는 음악용어에 대한 양해를 구한다.)
"초조감보다는 오히려 음악의 진정성이 고민거리였다"
나도원 : 앨범커버아트에 대한 이야기부터 해보자. 어떤 질감을 표현한 듯한 겉면의 스케치와 안쪽에 자리한 화사한 작품의 대비가 비둘기우유의 음악과 통하는 구석이 있다.
이종석 : 친분이 있는 밴드인 '머머스 룸'의 이명훈이 작업해줬다. 비둘기우유가 활동해오는 과정을 보아온 친구라서 우리의 이미지에 대해 잘 알 것 같았다. 관여하지 않고 전적으로 그의 재량에 맡겼다. 결과적으로 우리 음악을 잘 표현해줘서 흡족하다. 안에 있는 아크릴화도 그가 직접 그렸다. (음반을 펼쳐 보이며) 특히 이 지평선이 마음에 든다.
나도원 : 이종석 씨가 함지혜의 기타연주에 반한 것이 함께 활동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들었다. (함지혜는 밴드 '적적해서그런지'의 기타리스트로도 활동 중이다.)
이종석 : 2004년경이었다. 지금은 '데이드림'에서 활동하는 친구가 당시 비둘기우유의 드러머였는데, 그가 군대를 가면서 베이스 멤버와 나만 남아 있는 상태였다. (함)지혜는 클럽 '재머스'에서 '그리니쉬 옐로우'라는 밴드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역동적인 그림이 그려져서 눈여겨봤던 팀이었다. 후에 우리가 기타와 보컬을 맡을 새로운 사람을 구하고 있을 때 누군가 모집광고를 보고 전화를 걸어왔다. 그런데 자신이 '그리니쉬 옐로우'에서 활동했다는 것이다. 지혜였다.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같이 하자고 했다. 한 달 정도 후에 (이)용준이가 들어오고, (성)기훈이는 사정이 있어서 밴드를 나갔다가 다시 돌아왔다. 그렇게 모였다.
함지혜 : 나도 예전에 비둘기우유 공연을 좋게 보았다. 비슷한 시기에 둘 다 팀이 흩어지고 새로운 팀을 찾거나 멤버를 구하던 때에 만나게 되었다.
나도원 : 이종석 씨는 나이에 비하여 작품발표가 다소 늦은 편이다. 초조함은 없었는가?
이종석 : 음악을 계속하려고 마음을 먹기 시작하던 당시에도 상당히 늦었다고 생각했다. 그 때에는 취미밴드 식으로 활동을 해왔으니까 어떤 음악을 하겠다는 틀을 짠 것도 아니었다. 초조감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음악의 진정성이 고민거리였다. 내 안에 있는 모습에 대한 확신과 그 모습들이 제대로 나오고 있는가가 중요했다. 음악을 빨리해서 무엇을 이루겠다는 욕심보다는 어떤 것을 계속 찾아가는 느낌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나도원 : 다른 구성원들의 생각은 어떠한가?
함지혜 : 음악을 하는 이유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해보지 않았다. 오히려 음악을 하지 않는 것을 상상할 수가 없다. 내게 존재감을 준다고 할까. 중·고등학교 때 남자애들이 한번씩 음악에 빠지고 기타를 쳐보고 그러는데, 우리 친오빠들도 그랬다. 그들은 나이가 들면서 그만두었지만, 그런 모습을 보면서 자란 나는 자연스럽게 음악에 빠져들었다. 기타를 사고 레슨도 받다가 카피밴드부터 시작하게 되고. 그렇게 자연스럽게 여기까지 왔다.
이용준 : 내 경우는 훨씬 단순할 수 있다. 멤버들 중에서 가장 나이가 어리고 음악을 알게 된 기간도 짧을 것이다. 다른 팀을 하다가 비둘기우유로 온 것도 아니다. 고등학교 때 드럼을 배우고 대학교에서 동아리 활동을 하고 그런 식이었다. 단지 드럼을 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이 시점에서 무언가를 찾았다고 말하기엔 좀 이르겠지만, 음악과 밴드에 대해 처음 알게 된 비둘기우유에 대해 상당히 만족하고 있다. 나중에 다른 음악을 할 수 있고 지금도 찾아가는 과정이겠지만, 현재로선 만족하고 있으며 무언가를 찾은 느낌이다.
"앨범작업이 오래 걸린 것에는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다"
나도원 : 음반작업을 2007년 여름부터 시작했다고 하는데, 그 이후의 과정에 대하여 말해 달라. 프로듀서(음악감독)를 맡은 신계현과의 작업은 어떠했는가?
이종석 : 레이블(음반기획·제작사. 도서의 출판사와 같은 개념 *필자주) '일렉트릭 뮤즈'와 조우하고 바로 음반작업에 들어가면서 제시한 조건이 하나 있었다. 보통 '일렉트릭 뮤즈'는 이 안에서 만들어가는 시스템이지만, 신계현이라는 친구에게 엔지니어링과 프로듀싱을 맡아달라고 부탁을 해놓았기 때문에 그와 같이 해야겠다고 양해를 구했다. 원하는 결과물만 뽑아내면 되니까 흔쾌히 응해줬다.
신계현이 자신의 밴드 '데이드림'의 음반작업을 거의 6년 이상이나 해왔다. 그들도 처음부터 많이 알고 시작한 게 아니지만, 긴 시간 작업하면서 생긴 노하우 덕에 이런 쪽의 소리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졌다. 그래서 내가 바라는 것을 그 친구가 잘 뽑아내줄 수 있었고, 어떻게 보면 나보다 꼼꼼하고 소리에 대한 느낌도 세밀하기 때문에 내가 간과할 수 있는 부분을 캐치해줄 수 있었다. 물론 대화를 많이 나눴다. 앨범작업이 오래 걸린 것에는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다. 인디밴드들이 대개 그렇듯이 전업으로 할 수 있는 경우는 별로 없다. 당시에 계현이가 대학원을 다니는 등 나름대로 바쁜 시기여서 전적으로 우리 음반에 시간을 투자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그래서 틈틈이 작업하다보니 시간이 꽤 걸렸다. 마음에 안 들어 중간에 엎어버리기고 다시 녹음하기도 했다.
나도원 : 녹음과 믹싱(각각 녹음한 음원들을 하나로 결합하는 과정 *필자주)을 신계현, 김민규, 김원구, 이경환 등 여러 사람들이 나눠했다. 믹싱 스타일을 다르게 한 곡들도 있다.
이종석 : 예전에 앨범의 자체제작을 시도한 적이 있다. 자비를 들여 드럼을 스튜디오에서 녹음했지만, 경제적인 여건 때문에 더 이상 진행하지 못했다. 그 때의 작업물 중에서 양질의 것을 손봐서 이번에 사용했다. 물론 대부분은 '일렉트릭 뮤즈'에서 작업이 이루어졌다. 곡마다 믹싱 스타일이 다른 것은 완전히 의도적이었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그 전에는 계현이가 주도하는 부분이 많았는데 시간적인 제약 때문에 분담을 해야 했다. 이번 앨범에는 모던함과 드라마틱함이 구별되는 면이 있는데, 곡마다 적합한 느낌이 나오도록 저마다 어울릴만한 사람들에게 나눠서 맡겼다.
"락의 공식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다르다"
나도원 : '마이 블러디 발렌타인(My Bloody Valentine)'과 비교할 수 있는 면이 있다. 비둘기우유에게 자극을 준 음악은 무엇인가?
이종석 : 그들이 큰 모티브가 된 건 사실이다. 정서적으로 비슷한 면이 있다고 할 수는 있다. 멜로디의 흐름이라든가 하는 부분에서는 우리 정서의 표현이 전형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기괴한 멜로디를 쓰지 않고 멜로우하게 흘러가는 면에서 비슷하다는 말을 들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노이즈적인 밀도가 다르고, 1990년대 초반 슈게이징 밴드들의 기타 효과와도 다르다. 느낌을 만드는 방식과 결이 다르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기타 질감의 극대화를 추구했다. 4년 동안에 걸친 음악작업의 초점이 거기에 있었다. 물론 어렸을 때부터 들어온 모든 음악들로부터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받았을 테고, 지금까지의 여정 속에 체화된 부분이 많을 것이다. 비둘기우유에 영향을 주진 않았지만, 아직도 '아이언 메이든(Iron Maiden)'이나 '랜디 로즈(Randy Rhoads)'에 대한 로망도 남아있다.
함지혜 : 비둘기우유만의 느낌이 있다고 생각한다. 굳이 어떤 것을 모티브로 삼아서 하지는 않았다. 여러 가지에서 많은 영향을 받는 것이 음악이다. 굳이 슈게이징이 아니더라도 포스트 락이라든지 일반적인 팝에서도 그런 게 많다. 개인적으로는 '펫 샵 보이즈(Pet Shop Boys)'와 '에어(Air)'를 좋아한다. (이)종석 오빠는 '유투(U2)' 얘기도 많이 한다. 다른 장르임에도 그 안에서 통하는 느낌이 있다.
나도원 : 그동안 한국에도 소리 자체로 음악을 만들어가는 음악인들이 여럿 등장했다. 멀리 '옐로우 키친'부터 최근의 '로로스'에 이르기까지 그러한 뮤지션들이 꾸준히 나오고 있다. 그들의 음악은 들어보고 있는가?
이종석 : 홍대 씬에 발을 들여놓으면서 밴드들을 조금씩 알아가는 과정이 있었다. 1990년대 중반부터 활동해온 '옐로우 키친'은 19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초쯤에 알게 되었다. 여러 밴드들 중에는 친분이 있는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지만,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부분이 많은 것 같다. 클럽 '빵'에서 내가 '라이앙로즈'에서 활동하고 있을 때 봤던 '잠'에게도 좋은 인상을 받았다. '머머스 룸' 역시 서로에게 깊은 인상을 준 경우다.
함지혜 : 그런 밴드들이 많이 나왔으면 한다. '크라잉 넛'이나 '노 브레인'이 대중적으로 성공하면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이 쪽 음악도 감성을 자극하는 면이 있고 대중성이 충분하다. 이런 음악은 우리만 해야 돼, 하면서 붙잡고 있는 건 좋아 보이지 않는다. 많이들 그렇게 나갔으면 한다.
나도원 : 그들 다수가 서정성을 중시한다. 비둘기우유 역시 그렇다.
이종석 : '옐로우 키친'을 들었을 때는 '소닉 유스(Sonic Youth)'나 '마이 블러디 발렌타인' 같은 음악을 접하던 시기였다. 그 때엔 서정성보다 기타 효과에서 오는 부분에 많은 영감을 받았다. '너바나(Nirvana)' 이후에 '소닉 유스'나 '픽시스(Pixies)' 등을 접하면서 기타의 표현, 그러니까 이런 느낌이 이런 방식으로 전달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실마리를 잡았고, 소리들을 연구하게 되었다. 멜로디적인 면은 우리 정서에 부합하는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전형적으로 얘기되는 락의 공식이라든지 공식화된 느낌에 대하여 우리의 생각은 다르다. 만약 우리가 락 음악이라는 이름으로부터 거리를 두게 되거나 아예 포기하게 되더라도 이런 표현방식이 가장 잘 맞는다.
"노이즈는 질감이다"
나도원 : 노이즈는 비둘기우유에게 무엇인가?
이종석 : 한마디로 질감이다. 농축된 것일 수도 있고 자연발생적으로 나오는 것이 포착된 것일 수도 있다. 보통 디스토션(소리를 왜곡시켜 색다른 효과를 만들어내는 장치, 또는 그 소리 *필자주)은 쓰는 사람에 따라 비슷한 질감을 갖게 된다. 우리는 그걸 하나로 뭉쳐내고 극대화시켜 소리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밟았다. 그러면서 자연발생 되는 노이즈를 확장해갔다. '너의 눈으로 나를 본다'가 그런 곡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볼륨페달(소리의 양을 조절하는 장치 *필자주) 중에 아주 오래 써서 먼지가 많이 낀 것이 있다. 그런데 그걸 쓸 때마다 먼지소리랑 물려서 증폭이 되더라. 'Murmer's Room'에 그런 소리를 이용했다.
나도원 : 혹시 밴드 '머머스 룸'과 앨범 수록곡인 'Murmur's Room' 사이에 관계가 있는가?
이종석 : 제목에 대한 아이디어를 따오긴 했지만 직접적인 연관은 없다. 살면서 겪은 것들에 대한 단상이 작곡에 많이 작용한다. 'Murmur's Room', 그러니까 '중얼거리는 사람의 방'은 가족 중 한 사람과 관련이 있다. 그가 혼자 들어가서 나오지 않는 방이 있었다. 안에서 중얼거리는 소리만 들렸다. 어렸을 때부터 그 방에 들어가지 못했는데, 어느 날 들어가 보니 창문이 있고, 그 창문을 통해 별들이 보이고 있었다.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가 떠오르는 이미지였다. 물론 그 때에는 그런 생각을 안 했던 것 같은데, 나중에 그런 이미지로 각인되었다. 그러한 단상에서 'Murmur's Room'이 나왔다.
나도원 : 'Murmur's Room'과 'Siren'은 노이즈/슈게이징 어법으로 만들어진 곡들 같다. 반면 'I Might Be You'와 'Even Freedom'은 모던/그런지 스타일의 리듬파트와 뼈대 위에 노이즈로 옷을 입힌 곡들로 들린다. 노이즈만 걷어낸다면 스타일이 달라질 수 있는 곡들이다.
이종석 : 큰 틀에서 정서적으로는 다르지 않은데, 구성과 연주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I Might Be You'는 사이키델릭한 곡이라고 생각한다. 보컬로 모든 것을 끌고 가면서 그 쪽으로 집중시키는 곡은 아니다. 감상 포인트도 거기에 있지 않아서 모던 락적이라고 생각되진 않는다. 그런 느낌이 있는 'Elephant'와 'Even Freedom' 외에는 노래가 정서를 끌고 가는 곡은 별로 없다고 생각한다.
함지혜 : 그래서 다른 밴드들이 'Elephant'는 많이 연주해보려고 한다. 멜로디가 살아있는 느낌이라서. 멜로디만 보면 통속적이라고 해야 하나.
나도원 : 청량감 있는 'Even Freedom'은 다소 이질적이다. 그리고 비둘기우유의 음악을 큰 범주의 사이키델릭이라 할 수 있는데, 그 중에서도 '너의 눈으로 나를 본다'는 고전적인 사이키델릭의 느낌까지 가지고 있다.
이종석 : 'Even Freedom'을 이질감을 주려고 만들진 않았다. 같은 정서 선상에 있다고 생각한다. 점점 확장시켜 큰 덩어리의 스케이프를 만들려는 구상이었다. 그런 구성이 우리가 생각하는 정서나 감응에 적합한 구조이다. '너의 눈으로 나를 본다'는 가장 과격하고 밀도가 높다. 폭탄이 터지는 듯한 느낌을 주고 싶었다. 폭탄이 터지고, 그런 질감들이 연속되는 와중에 가녀린 정서의 멜로디가 어우러지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음반 속지에 아예 가사를 넣지 않았다"
나도원 : 전자음이나 키보드와 같은 군더더기 없이 기본적인 밴드 형태를 유지한다. 시간을 많이 들일수록 덜어냄을 알게 되는데, 그런 이유인가? 아니면 원했던 시도들을 여건상 다음으로 미룬 것인가?
이종석 : 공연에서는 편곡을 달리해서 연주하는 부분들이 있다. 우리의 포맷 밖에서 더 들어온 것은 없지만 그 안에서 가미한 것들은 있다. 그런데 소리들이 많이 숨어있어서 구분하기 힘들 것이다. 전자음악을 도외시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기타에 대한 실험을 밴드의 지향으로 삼고 있고, 기타의 질감으로 색다른 감정과 색채를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건반의 사용에 대해서 특별히 고려해보진 않았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나도원 : 이종석, 함지혜 두 기타연주자의 역할분담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이종석 : 내게는 선율적으로 만들어가는 부분이 많다. 멜로디와는 좀 다른 개념이다. 곡을 쓰다보면 코드들이 분해 되는데, 그렇게 코드가 바뀌면서 나아가는 부분에 찔러 넣는 연주를 구사하는 편이다. 지혜는 전체적인 색깔을 만들어가는 역할의 리듬기타로서 내가 어떤 멜로디를 넣으면 다른 느낌의 대구를 만들어낸다.
나도원 : 명확하지 않은 풍경이 그려진다. 보컬 역시 메시지보다는 어감을 전달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새삼스럽지 않은 얘기지만, 한국어와 영어를 혼용한 가사 역시 느낌의 전달을 위해서인가?
함지혜 : 보컬도 악기의 한 파트라고 생각한다.
이종석 : 음반 속지에 아예 가사를 넣지 않았다. 보통 노래가 곡을 끌고 가면 가사에 집중하게 된다. 그런데 가사와 노래에 집중하면서 음악을 듣다보면 많은 정서들을 놓치게 된다. 비둘기우유는 노래로 끌고 가면서 정서감을 주려는 밴드는 아니다. 한국어와 영어를 같이 쓰는 특별한 이유는 없다. 다만 어떤 부분에서 어떤 어감이 나왔으면 좋겠다는 정도이다. 느낌이 전달되길 바란다.
나도원 : 영어로 노래하는 것은 해외시장을 의식해서가 아니라 '상상된 공동체'에의 참여라는 분석이 있다. 영어로 노래해 세계적인 음악인이 된 경우도 없다. 결국 선택의 문제이며 사운드의 일부로 기능한다. 반면, 한국의 음악인이라면 언어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있어야한다는 생각도 있다.
이종석 : 일단 우리 음악은 영어든 한국어든 가사전달이 잘 안 된다. (웃음) 가사가 들어가지 않는다고 해서 의미가 없지는 않다. 다만 명확하게 내리는 의미지정이 아니라 마음속에 생겨난 이미지의 표현이다. 사실 가사를 읽는다고 해서, 그것이 한국어라 해도 완전한 이해는 불가능하다. 예를 들어 '너의 눈으로 나를 본다'는 한국어임에도 불구하고 가사를 쓴 사람의 자의식에 대한 표현 정도로 생각할 뿐 의미를 파악하려고 들진 않을 것이다. 자연스레 느낌이 묻어나는 것, 즉 의미라기보다는 이미지라고 생각한다.
"영혼이 점점 침잠해서 이러저러하게 되고…"
나도원 : 앨범의 흐름과 감정의 높낮이가 증폭되거나 침잠하기보단 일정한 선을 유지한다.
이종석 : 그렇게 끌고 가는 느낌을 좋아한다. 구성이 다르게 흐르다가, 아찔한 느낌이라고 할까, 완전히 다른 느낌이 나오고 하는 흐름 말이다. 그런 쪽에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흐름이 막히는 것 같다. 어떤 특정한 기타를 넣은 부분을 작업하다가 계현이에게 "영혼이 점점 침잠해서 이러저러하게 되고, 결국 여기까지 오게 된 어떤 모습과 상태", 이런 식으로 어떤 소리를 요구한 적이 있다. (웃으며) 그 친구가 멍한 얼굴로 쳐다보더라. 그렇게 어떤 풍경이 만들어지는 것을 좋아한다.
나도원 : 곡들의 배치가 이어지는 흐름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종석 : 앨범 앞쪽의 폭발적인 에너지를 가진 곡들과 뒤쪽의 모던한 곡들이 대조를 이룬다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앞에 있는 'Siren'이나 '너의 눈으로 나를 본다'에 그런 느낌이 있고, 뒤에는 드라마틱하게 점점 벌려가는 느낌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원했다. 뒤편에 있는 'I Might Be You'도 약간 모던한 코드들이 반복되긴 하지만 역시 사이키델릭한 정서를 가지고 있다. 지혜의 하모닉스 기타가 반복적으로 나오면서 곡을 끌고 가다가 끝나야 될 것 같은 시점에서 광포한 노이즈가 만들어지고, 그 속에서 드라마틱하게 'Even Freedom'이 흘러나오는 장면을 생각해왔다. 그래서 공연에서 그 두 곡이 붙어 다녔고, 곡을 배치할 때에도 그런 느낌이 만들어지기를 원했다. 모던하다기보다는 사이키델릭과 드라마의 연장이라고 생각한다.
나도원 : '신데렐라'와 비슷한 얘기들이 세계 도처에 있는 것도 보편성과 차이를 보여주는 사례다. 역시 방법은 달라도 보편적인 공감대를 형성하는 음악이 있다. 기술보다는 정서를 중시하는 듯한 비둘기우유도 사람들에게 낯설지 않을 것이다.
이종석 : 그럴 수 있다. 대중성을 기피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진 않다. 공감을 얻을 수 있으며 이런 식으로 다가가는 음악이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다. 아스피린이 대중적인 약이지만 모든 병을 아스피린으로 치료할 수는 없다. 이런 느낌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런 정서로 나름의 상처를 치유하거나 공감을 나눌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귀로 보는 음악…그래서 마음이 중요하다"
나도원 : 인디밴드로서 활동반경에 대한 고민은 없는가?
이종석 : (웃으며) 앨범을 내고나서 활동반경이 너무 넓어졌다. 전에는 우리 음악에 매니아적인 면이 있어서 공연을 해도 늘 오는 사람들만 왔는데, 앨범을 내고나니 못 보던 사람들이 온다. 전에는 '살롱 바다비'를 중심으로 활동했지만 요즘에는 여기저기에서 불러줘서 공연을 많이 하고 있다. 김민규 씨(레이블 '일렉트릭 뮤즈'의 대표)에게는 자제를 하면서 반경을 줄이라는 충고도 듣는다. 사실 우리나라는 씬이 한정되어 있어서 반경을 따진다는 게 큰 의미는 없지 않나 싶다.
이용준 : 아는 애가 음반을 냈다면서 주위사람들이 먼저 관심을 보인다. 우리 공연을 한 번도 보지 않은 사람들까지 음반을 산다. 문제는 그 후다. '이런 음악을 하는구나'가 아니라 '이게 무슨 음악이냐'는 경우가 있다. 아예 음악을 모르는 것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반경을 넓힌다는 것 자체가 상상하기 힘들다. 인디밴드들이 설 수 있는 무대도 한정되어 있는 현실이다. 그래서 '스페이스 공감'에 출연하는 것(비둘기우유는 EBS의 음악프로그램 '스페이스 공감'의 신인발굴프로젝트에서 '헬로 루키'로 선정되었다. *필자주)도 부담되는 부분이 있다.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니까. 개인적으로 음악생활에 대한 큰 환상은 없다. 지금 비둘기우유 한 팀으로 대중에게 파고드는 것도 힘들고, 이러저러한 상황들이 있음을 다 이해하고 있다.
나도원 : "악보로 적어 넣을 수 없는 음의 영역을 탐구한다"는 평을 받는다. 음악으로 그리고자 하는 풍경은 무엇인가?
이종석 : 비둘기우유의 음악을 위한 감상법이 따로 있는가라는 말을 들을 적이 있다. 이 쪽 음악계에 보편적인 말일 수도 있는데, 귀로 보는 음악이라는 얘기가 있다. 결국 이미지적인 것이다. 그래서 마음이 중요하다. 멜로디의 구체적인 흐름도 없고, 나타나고 증폭되었다가 사라지는 소리들의 연속이지만, 그것이 마음의 표현이다. 그걸 보고 눈물을 흘릴 수도 있고 잠에 빠질 수도 있다. 그러면서 표현하는 마음과 받아들이는 마음이 공감대를 형성하기를 바란다.
멈춰있음에도 생명이 담긴 정물화처럼 어떤 순간을 잡아채는 비둘기우유는 우리 음악에 대한 기댓값 하나를 충족시킨다. 이들의 노이즈가 감싸 안는 서정은 실험성과 전형성을 함께 지녔기에 낯설지 않은 정경을 펼쳐낸다. 돈으로 돈을 사는 시대에서 순수한 음악과의 만남은 스스로 찾아 나선 이름 없는 여행지에서야 맞닥뜨릴 수 있는 비경과 같다. 아직은 헐거운 틈새가 언뜻 엿보이는 첫걸음임에도 다음을 기대하게 한다면, 그리고 대개의 좋은 음악이 그러하듯 또 다른 음악을 찾아듣고 싶어지도록 만든다면, 이미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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