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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뜨거운 피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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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뜨거운 피가 필요하다"

[나도원의 '대중음악을 보다'] 민중가요에서 시민음악으로 (中)

트럼펫이 아련히 울리고 차분한 목소리가 들린다. "한번쯤은 뜨거웠던/ 혼자보다 여럿이 함께/ 우리의 힘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던/ 오월이면 피가 끓는." 이렇게 시작하는 '386'은 '오래된 정원'으로 연결되고, 문익환 목사의 육성으로 마무리되는 '강물은 똑바로 가지는 않지만 언제나 바다로 흐른다'로 내리 이어진다. 이 때 마음이 움직이는 것은 단지 가사의 진정성 때문만은 아니다. 심화된 음악적 고민과 밴드 '프리다칼로'의 문건식(기타) 등 함께한 음악인들과의 호흡이 적정선에서 만나 발화하기 때문이다. 이 곡들은 6월항쟁 20주년을 맞은 지난해에 발표된 손병휘의 네 번째 앨범 <삶86>(2007)에 담겨있다.

그의 목소리는 낙관적이고 따스하다
▲ 손병휘 ⓒ손병휘 홈페이지

순수하게 음악을 좋아하던 학생에서 '조국과 청춘'과 '노래마을'을 거치며 보편성과 동시대성을 추구하는 민중음악인으로 나이 들어온 손병휘 안에는 음악적 가치를 지향하는 포크 록 뮤지션과 의무를 다하고자 하는 시민이 공존해왔다. '나란히 가지 않아도 촛불의 바다를 만들 수 있다'고 노래하고, 각자의 삶에서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것을 긍정하는 시선을 잃지 않았다. 어느 작은 모임에서 "무엇에 대한 반대가 아닌 긍정적 가치를 지향하고 싶다"고 말하기도 한 손병휘의 목소리는 낙관적이고 따스하다. 그가 민중·시민음악의 유연한 표정을 보여주는 <삶86>은 싱어송라이터로서의 자기증명임과 동시에 개인과 세상을 함께 노래하며 변화해온 민중음악의 성취로 기록되어도 좋을 앨범이다.

노래운동의 전력을 가진 이들에게도 자족적인 수준이 아니라 소통이 가능한 균형감각과 결과물에 대한 책임이 요구된다. 민중음악을 다른 관점에서 보라고 할 수는 있을지라도 다른 관점에서 들으라고 요구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포크 록과 프로그레시브 록을 수용한 '386', '오래된 정원', '강물은 똑바로 가지는 않지만 언제나 바다로 흐른다' 연작은 의미 있는 순간이다. 2007년 12월 7일에 불교역사문화관에서 열린 공연에서 20분 동안 한 몸처럼 계속된 세 곡의 라이브는 음반에서보다 훨씬 강한 힘을 발휘했다. 그것이 연주의 힘이다. 그리고 이 날 게스트로 무대를 채워준 두 음악인이 있었다. 안치환과 연영석이다.

그에게 대중과 민중은 다르지 않다

사회의식과 대중적 감성을 겸한 대중음악인으로 음악적 완성도를 중시해온 안치환도 <안치환9>(2007)를 내놓았다. '울림터'와 '새벽', 그리고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일원으로 활동할 때의 안치환은 현장에 선 청년 민중가수였지만, 음악 자체를 꿈꾸는 젊은이기도 했다. 솔로 활동을 시작하고 조동익의 조력이 낳은 <Confession>(1993)과 록을 본격화한 <The Reason of Love You>(1995)부터 뮤지션으로서의 입지를 다진 안치환은 <Desire>(1997)에 이르러 앨범의 주도권까지 장악한다. 그리고 대중가요로 많이 알려진 곡들 이외에 '자유'와 '수풀을 헤치며', 그리고 '귀뚜라미'와 '물 속 반딧불이 정원'처럼 치열하고 처연한 노래들을 불러왔다. 이 과정에서 민중가수를 넘어 포크/록 음악인으로, 운동권 가수에서 의식 있는 대중음악인으로 변모한다.
▲ 안치환 ⓒ참꽃

처음부터 안치환은 특정 범주 안에 머무르고 싶어하지 않은 포크싱어이자 로커였다. 오랜 세월 자신의 영역을 다져온 안치환을 대중과 거리가 있는 운동권 출신 가수로만 기억한다면 그에 대하여 모르는 것이나 다름없다. 동시에 과중한 기대를 전제로 방송친화적인 '내가 만일'이나 유순해진 노래들 때문에 비판의 대상으로 삼는 것도 부당하다. 전작인 <외침!!>(2004)이 보여주듯 여전히 민중과 사회를 고민하는 싱어송라이터이고, 그에게 대중과 민중은 다르지 않으며, 삶과 노래는 따로 있지 않다. 그가 밝힌 지향은 "진보적이면서 대중적인 노래, 대중적이면서 건강한 노래"였으며, 비교적 안정적인 결과물로 그에 답하고 있음은 인정할 만하다.

'담쟁이'처럼 아름다운 곡들이 실린 <안치환9> 역시 안정적인 음반이다. 유투(U2) 스타일의 '처음처럼'과 시원한 록 트랙인 '세상이 달라졌다'를 담았고, 북한풍의 선율도 시도했다. '내 안의 나', '안개 속에서 길을 잃다'에선 세상과 함께 달라진 자신을 반추하고, 누군가의 남편이며 아버지임을 숨기지 않는다. '너의 환상'에선 안치환만은 변하지 말아야한다던 이들에게 어떤 고민을 되돌려준다. 그는 수년 전 인터뷰에서 "내 나이에 맞는 내용을 삶의 깊이를 가지고 노래하고 싶다"고 말한 바 있다. 뭐 그리 대수로운 말이겠는가 싶을 수 있지만 자기 나이에 맞는 노래를 만들고 부른다는 건 생각만큼 쉽지 않다. 물론 프로를 지향한 매니지먼트 방식이 실망의 빌미를 제공한 사례들이 있었음은 사실이다. 그래도 안치환은 여전히 노래를 부르다가 지친 듯하면서도 희망을 버리지 못하겠다는 목소리로 말하곤 한다.

그의 음악은 삶 자체에 근접하고 있다
▲ 연영석 3집 <숨> ⓒ프레시안

묘한 인연은 계속된다. 1997년, 윤도현이 펑크를 낸 공연에 대타로 무대에 서게 되면서 데뷔한 사람이 있다. 서른이 넘어 "자신을 위로하기 위하여 노래를 만들기 시작했다"는 연영석이다. 그의 입을 통하여 비속어를 포함한 일상어는 거침없이 노래가 된다. 순대국 타령이라 할 '미련' 등의 해학미는 요즘에 흔치 않다. 아니, 해학이라는 말 자체가 교과서에서나 볼법한 세상이다. 또한 '공장'에서는 '다'로 끝나는 한국어의 난점을 각운으로 탁월하게 역이용하는 재기를 보여준다. "그저 밥만 먹고 살기도 힘드네요"라는 넋두리 '밥'은 처연하고 아름다운 락 음악이 되고, 쑥스러울 정도로 진솔한 '엄마 미안해'와 '구르는 돌' 그리고 '간절히'의 절박함은 감동으로 이어진다. 이처럼 연영석이 직설적으로 풀어내는 언어 풍경은 자유분방한 선율을 만나 삶 자체에 근접하고 있다.

세 번째 앨범인 <숨>(2005)에도 '나약해', '떼레비', '빵'처럼 시원하고 재미있고 무섭고 슬픈 곡들을 담아낸다. 한국 내 이주노동자들을 대변한 '코리안 드림'은 노동현실에 대한 고발이면서 '한국 속 외국인'과 '외국 속 한국인' 사이에서 작동하는 이중적인 잣대까지 상기시킨다. 유난히 신분상승욕구가 강한 이 사회에서, 그리고 중산층이 상대적 개념이 아닌 절대적 개념임을 인정하게 된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이 나라에서 자신이 '2진'임을 인정하는 용기는 아무에게나 가능하지 않다. 그런데 연영석은 그것을 고백하고, 듣는 이로 하여금 공명케 한다. 쑥스러움마저 두려워하지 않는 솔직함이 꾸밈보다 진한 감동을 준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그의 노래들은 음악의 본질에 대한 리포트이다.

어떤 면에서 노동음악작곡가 김호철과 '포장마차'를 연상시키기도 하지만, 연영석은 훨씬 자유분방하고 서정적이며 통쾌하다. 어쩌면 늦은 시기인 30대에 창작을 시작했기에 오히려 무수한 틀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을 테고, 그래서 정형화되지 않은 어법을 지니게 된 것일지 모른다. 노동가수로서 늘 현장에 서고 있는 성실함을 겸한 연영석은 민중가수로는 이례적으로 2006한국대중음악상에서 '특별상'을 수상함으로써 시대에 걸맞고 유효한 민중음악의 가능성을 열어온 공로를 인정받았다. 또한 홍대 앞에 위치한 인디클럽 '빵'에 종종 기타를 들고 나타나기도 하며, 지난해에 잔잔한 반향을 불러온 인디음악인들의 앨범 <빵 컴필레이션 3>(2007)에 젊은 친구들과 협연한 '현실'을 싣기도 했다.

'잃어서'가 아니라 '잊어서'였다

연영석이 자유로운 에너지로 내용을 채우고 형식을 세워 생활인(노동자)이 공감할 수 있는 락 음악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데에는 고명원의 역할이 컸다. 고명원은 민중가요와 헤비메틀의 결합이라는 독특한 방식으로 저항음악을 시도한 '메이데이'의 연주자였으며, 연영석은 메이데이의 '산 자를 위한 발라드', '전선은 있다', '동지에게'의 가사를 써준 인연이 있다. 고명원은 연영석의 앨범들에 프로듀서 겸 연주자로 참여하여 의미 있는 작품들의 탄생에 기여해왔고, 그래서 연영석의 공연 역시 고명원과 함께 할 때와 그렇지 않을 때의 음악적 풍경이 달라진다. 민중음악을 다소 폄하하던 어느 대중음악인마저 그들의 공연을 보고난 후에 고명원을 가리켜 "한국 최고의 기타리스트"라며 감탄하는 모습을 바로 옆에서 지켜본 바 있다.

이들이 모두 한 무대에 섰던 적이 또 있었다. 2005년 10월에 광명시에서 열린 대규모 공연에서 안치환과 손병휘, 그리고 연영석과 고명원이 노래하고 연주했다. 그 무대에는 '노래를 찾는 사람들'도 있었고, 비단 노동운동과 연관을 맺고 있는 이들뿐만 아니라 진솔한 노래의 울림을 아는 음악팬의 아낌을 받는 '꽃다지'도 있었다. 그 날 손병휘는 '촛불의 바다'를 부르며 수천 개의 휴대전화기가 공중에 들어올려지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연영석은 수천의 입들이 분명 그 날 처음 들었을 법한 '이씨 니가 시키는 대로 내가 다 할줄 아나'를 다함께 따라 부르는 장관을 그려냈다. 통쾌함이 관객들의 얼굴 곳곳을 누비고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유를 잃어서가 아니라 잊어서였던 것이다. 지난 10여 년간 '공장음악'을 제외한 다양한 음악이 대중과 만나지 못하게 된 것처럼, 이러한 노래들 역시 시민과 만나지 못해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 노래들이 귀한 이유는 그저 피가 뜨거웠던 시대를 회상케 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지금도 뜨거운 피가 필요한 시대임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서로가 서로를 만났을 때의 풍경은 마치 비갠 후의 달처럼 투명하고 맑았다. 이것은 새로운 가능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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