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못을 움직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돌멩이 하나를 집어 수면 위에 던지면 된다. 하지만 그렇게 만들어진 동심원이 홀로 넓게 퍼져나가던 시대는 지나갔으며, 작은 파장들이 여기저기에서 끝없이 만들어지고 사라지길 반복하고 있다.
'깊이에의 강요'에서 벗어나 행위 자체를 즐기며 완전한 결과물로서의 작품이 아닌 과정과 행위에 의미를 두는 음악인들이 많아졌다. 노이즈와 소리 자체만으로 음악을 만들어내는 것도 이미 생소하지 않은 일이 되었다. 이처럼 저마다의 손짓들이 섞여 또 다른 형태의 파장을 그려낸 다양한 양식들은 '나눠짐'이 아닌 '합쳐짐'의 결과라 해야 옳다. 이러한 기준에서 볼 때 공식에 충실한, 또는 공식을 만들어낸 이영훈의 곡들은 '헌 방식'으로 태어났을지 모른다. 그러나 당시 그는 계단을 놓거나 바통을 넘겨주고 있었고, 다른 단계였다면 또 다른 역을 맡았을 것이다.
한국 대중음악의 정석이 된 이영훈과 이문세
<이문세 3>부터 <이문세 5>까지 연이어 성공하면서 이영훈과 이문세는 하나의 정석이 되었다. 가뜩이나 천편일률적이었던 대중음악의 소재에 대한 책임을 그들에게 묻는 것도 어쩌면 자연스럽다. 기실 정태춘을 중심으로 한 투쟁이 결실을 맺은 1996년 이전까지는 정권의 자의적인 단속과 음반사전심의와 같은 제도적 검열이 대중음악의 고리는 수시로 끊어놓았다. 음악인 스스로 소재와 표현을 제한하도록 만든 자기검열의 내면화는 여전히 잔영을 드리우고 있다. 서구의 대중음악에서는 때로 한국의 민중음악보다도 직설적이고 저항적인 노랫말을 찾아볼 수 있다. 멜로디가 좋아 흥얼거리곤 했던 팝송과 록의 명곡들 중 상당수는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의 절망이거나 살기 위해 창녀가 된 여인의 탄식이곤 했다.
이전과는 음악적으로 다른 분위기였을 뿐만 아니라 소재에서도 사랑과 이별을 벗어나고자 한 <이문세 6>(1989)은 새로운 시도였다. 이문세가 건너편 건물의 태권도장 아이들을 바라보며 부러워했을 정도로 힘들게 제작했다는 이 앨범에는 군인정치인을 빗댄 '장군의 동상'을 비롯하여 '생각하는 사람들' 등에 이전과는 다른 내용이 담긴다. '그게 나였어'와 '이 세상 살아가다 보면'은 비교적 성공적이었고, '해바라기'는 그들의 대표곡 리스트에 자리를 마련하기도 했다. 그러나 계몽가요로 들릴 정도의 거친 어법은 세상이 이영훈에게 원했던 것과 달랐다. 앨범 안에서 곡마다 성격을 배분하는 패턴도 계속되었다. '붉은 노을'(5집)은 '이 세상 살아가다 보면'으로, '사랑이 지나가면'(4집)은 '시를 위한 시'(5집)를 거쳐 '해바라기'로, '휘파람'(3집)은 '그녀의 웃음소리뿐'(4집)을 지나 '다시 만나리'로 이어지고 있었다.
새로운 단계에 진입했음을 증명한 <이문세7>
성급한 이들이 시선을 돌릴 즈음, 그리고 이영훈과 이문세의 생물학적 나이가 서른을 넘길 즈음, 오래된 팝과 재즈 등을 성공적으로 융화시킨 <이문세 7>(1991)은 한계를 극복하고 새로운 단계로 성공적으로 진입했음을 증명했다. 그것은 고급가요의 완성이었다. 6집에서 고음에 집착하여 다소 버거운 듯 했던 이문세의 보컬이 안정적인 음역대를 찾은 것처럼 이영훈 역시 '성숙'에 걸맞는 옷을 입었다. 두 사람의 음악작업이 더 이상 하나의 '사건'이 되지 못함으로써 상대적으로 주목을 덜 받았지만, 7집은 한국에 완성도 높은 '어덜트 컨템포러리 뮤직'(adult-contemporary music)을 제시한 앨범이었으며, 이후의 행보를 위한 이정표가 된다. 분명히 알면서도 설명하기 힘든 것들이 생기게 된, 나이를 먹기 시작한 남자들의 굽이가 새겨졌다.
심지어 어떤 노래에서는 종교성마저 발견된다. 1991년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한 이문세는 '옛사랑'이 세속적인 사랑이야기가 아니라고 했다. 진행자가 쉬이 넘겨버린 그 말은 이영훈의 내밀한 사연을 염두에 둔 것일 수도 있다. 세상을 떠나기 전에 가스펠 음반을 만들고 싶어 했다는 이영훈의 '옛사랑'에는 절대자에 대한 신앙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겹쳐진다. 그것은 CCM 음반에 수록되어도 어색하지 않을 '겨울의 미소'에 보다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민중음악의 경직성을 해학으로 넘어선 연영석은 그의 노래 '죽은 시인'에서 예술지상주의를 "시를 위한 시를 쓰고 시를 알게 되면서 죽어갔네"라고 질타한 바 있다. 정형화된 형식과 감상적 개인주의, 그리고 종교성까지 입혀진다면 이영훈의 음악은 더욱 보수화된 셈이다. 하지만 비기독교인들이 교회 음악가였던 바흐를 아낀다는 것에 굳이 변호가 필요치 않은 것과 같은 주름은 존재한다.
오늘날 대중음악에 동기를 부여하는 그 이름, 이영훈
현재의 대중음악에 시사하는 바가 있는 이영훈이라는 이름은 단지 추모나 향수의 대상으로 머무르지 않고 모종의 동기를 부여한다. 이영훈과 이문세는 유능한 음악인이 기회를 얻고, 충실한 앨범제작을 위해 자본이 투입되며, 라디오와 공연만으로도 모종의 성과를 달성할 수 있었던 시대를 살았다. 극단적인 상업주의가 음악의 공정화를 요구하는 지금으로서는 기대하기 힘든 일이다. 음악적 핏기를 간직한 인디음악을 조명하면 차별적 지지를 한다는 오해를 사게 되는 현실이다. 인디에 대한 안티마저 생겨나는 것은 그만큼 역량과 영향력이 커졌다는 반증이겠으나, 자극이 있어야 창조가 가능하고 아마추어리즘 뮤지션과 아마추어 뮤지션은 다름에도 몰이해와 편견은 강력하다. 가지와 뿌리 중 하나만 택할 수는 없는 것이다.
간혹 TV에서 캐릭터사업을 지나치게 의식하여 매력을 반감시켜버린 만화들을 보게 된다. 그와 비슷했기에 외면 받았던 아이돌시스템이 지난 2007년 몇 건의 성공을 거두자 시장에 긍정적으로 작용하리라는 전망이 제기되었다. 믿었다기보다는 믿고 싶었을 것이다. 긴박한 상황에서는 상황을 극단적으로 판단하기 마련이지만, 그 아이돌 스타들이 실제로 거둔 성과과 영향은 초라하기만 했다. 1990년대부터 성장해오며 고정 지지자들을 포섭해놓은 싱어송라이터들의 음반들이 더 팔려나가고 공연들은 성황을 이룬 것과도 대조를 이루었다. 증상치료와 원인치료가 혼동되는 상태에서 기획은 투기적일 수밖에 없다. 질서와 탈주 그리고 정통과 전위가 공존하는 음악계야말로 건강함에도 지금 '대중가수' 이문세와 '가요작곡가' 이영훈의 보편적인 공감대를 논하는 것은 사치에 가까울지 모른다.
대중친화성과 함께 스타일이 중시되는 주류 대중음악계에서는 시장의 요구에 부응한 '쉽게 하기'가 더 어렵다고들 한다. 그러나 어렵다고 해서 훌륭한 것은 아니다. 대중이라는 말이 타자화된 채로, 또는 대변자를 자처하기 위한 용법으로 쓰이는 논리는 외울 정도로 들어왔다. 이 속에서는 덜 나이 들고 덜 알았을 때 더 훌륭했던 음악인들이 양산된다. 소통을 거부한 일방성에도 문제가 있겠지만, 남들이 원할 것 같은 음악과 자신이 하고 싶은 음악 사이에서 표류하는 것 역시 불우하긴 마찬가지다. 어느 배우는 전라장면에서 자신이 아닌 대역이 연기했다며 웃었지만, 관객이 그 배우의 벗은 몸으로 알았고 보았고 기억한다면 도대체 무엇을 지켜낸 것일까. 병에 꽂힌 채로도 꽃은 피울 수 있지만 뿌리를 내릴 수는 없다.
그들은 스스로를 마모시키지 않았다
해외의 트렌드 수입이 중시되면서 때론 문화선도자라는 거창한 칭호까지 부여받은 대중스타들이 나타나기도 한다. 책보다 신문에 실린 서평을 더 많이 읽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음식을 먹는 행위마저 그 안에 녹아든 시간을 먹는 것일진대, 단순조합과 성급한 전달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또한 근래의 복고 풍조 역시 비슷한 한계를 노출한다. 복고는 시장을 위한 과거의 차용이 아니라 현재 속에서 유의미한 재창조일 때 가치를 지니지만, 작금의 복고는 시장논리에 수동적이다. 물론 2008년 현재 복고바람은 대중음악계에만 불고 있진 않지만. 음악(음원·음반)시장의 규모가 급격히 팽창한 미술품유통시장의 규모와 같은 4000억 원대이면서도 위기로 진단받는 것은 수익분배의 비합리성과 함께 이처럼 내용적인 문제를 안고 있어서이다.
무수히 많은 작곡가들이 주문생산한 곡들 중에서 시장의 기호에 맞을법한 것을 골라 싣는 식으로 비슷비슷한 음반이 만들어지고, 공연은 방송출연과 행사보다 중시되지 않는 세태이기에 이영훈과 이문세는 더더욱 다시 상기된다. 그들은 스스로를 마모시키지 않았다. 이 시대가 '최고'와 '최대'를 구분하지 않음은 지금 플라스틱 자판을 두드리고 있는 것만큼이나 분명해 보인다. 물론 다른 시대에도 비슷한 일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재평가와 위상의 상승, 산업성장과 위기의 과정을 몇 해의 터울을 두고 비슷하게 밟아온 영화계와 마찬가지로 본질적인 문제는 결국 내용으로 귀결된다. 이를 외면한 채 아무리 둔중한 자극을 가한들, 젊은이로 변신하는 도술을 익히느라 젊음을 바쳐버리는 삶과 다르지 않다.
'의미 있는 대중성'의 모범 사례
20여 년 전 엄인호의 작업실에서 쭈뼛하게 인사를 나누었을 두 젊은이는 자연스레 대중성과 음악성을 화해시켜나간다. 타인이 갖고 싶은 것을 가지려 하고, 타인이 갖고 싶은 것이 되고자 하는 욕망은 음악에도 스며들어 있다. 그 안에서는 두려워할 줄 알아야 신뢰받을 수 있음을 알았던 이들 덕분에 우리는 '의미 있는 대중성'의 모범적인 사례 하나를 더 갖게 되었다. 또한 노랫말 쓰기에 더 힘을 들인 이영훈은 시적이고 회화적인 풍경을 그려냈으며, 가사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비, 꽃, 노을, 그리고 눈은 구체적인 경험의 잔상이었다. 자신을 살펴 세상을 보는 것이 공부이듯 구체적인 경험이야말로 외부와 소통하는 창을 만든다. 물리적 경험이 촉발한 정신적 경험까지 포함한 체험에서 건져진 매듭이 일생에 한번 스치고 헤어질 사람들과의 교감을 가능케 했다. 사실은 그 자체로 설득력을 지니지 않는가.
이영훈에게 그 공간은 광화문 거리와 덕수궁의 어느 벤치였다. 창작은 정신적 나신을 드러내는 발가벗음이라서 문인과 음악인은 자신의 추억과 아픔을 파는 행위에 죄책감을 떠안기도 한다. 어쩌면 벌써 잊혀졌는지 모르지만, 그의 사연을 알았던 유일한 사람은 이제 세상에 없다. 하지만 그의 음악은 화난 걸음들이 오가는 어둑한 거리의 저녁 냄새를 불러오고, 어느 날엔 작은 공원에서 어느 다리의 가로등 아래로 이어지는 골목으로 데려간다. 언젠가 그 거리는 나를 잊겠지만, 이영훈의 노래들은 또 다른 이의 기억과 장소로 옮겨 살아남으리라는 사실은 의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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