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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훈과 이문세, 80년대 복판서 만난 두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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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이영훈과 이문세, 80년대 복판서 만난 두 사람

[나도원의 '대중음악을 보다'] 故 이영훈을 말하다 (上)

대중음악은 대중문화 장르 중에서도 가장 보편적인 장르이다. 1990년대 국내 문화혁명을 주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1990년대 후반 이후 급속히 진행된 대중음악의 상업화와 불법 다운로드의 성행으로 산업 전체가 흔들거릴 정도로 타격을 받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여전히 많은 음악인들은 여전히 보이는 곳, 보이지 않는 곳에서 도약을 모색하고 있다.

비평은 문화를 성장케 하는 영양제와도 같다. 대중음악에 관해 활발한 비평이 이뤄질 때 대중음악이 다시 살아나는 속도도 그만큼 빨라질 수 있을 것이다. <프레시안>은 대중음악 평론가 나도원 씨의 칼럼 '나도원의 대중음악을 보다'를 오늘부터 주 1회 연재한다.

나도원 씨는 음악비평모임 '보다' 기획위원,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한국대중음악평론가협의회 회원, <컬처뉴스> 대중음악전문기자,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민중음악채록연구원 등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는 대중음악 웹진 <가슴> 편집인(2004~2007년)과 광명음악밸리축제 프로그래머·매체팀장·진행감독(2005~2006년)을 역임하기도 했다.

나도원 씨는 이 연재를 통해 동시대 음악 창작자를 재발견하고 현재 한국 대중음악의 지형을 탐색할 예정이다. 또
그는 대중음악의 내용적·산업적 문제를 제기하고 일반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인디음악이 지닌 가치를 드러내는 글을 쓰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나도원 씨는 지난 3일로 49제를 맞은 작곡가 고 이영훈 씨의 삶과 음악을 되돌아보는 글을 첫 번째로 보내왔다. <편집자>

손때 묻은 음반들을 남기고 훌쩍 떠난 이가 있다. 공교롭게도 그가 투병 중이던 지난 2007년에 어느 일간지와 문화예술신문에 이문세의 앨범에 대한 글을 연이어 썼고, 어느 시상식을 위한 회의에서는 공로상을 그에게 주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2008년 2월 14일 이후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전파와 지면에 그의 이름이 오르내리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을 뿐이다. 부음에 맞춰 글 한 줄과 말 한마디를 보태기가 어딘지 불편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49일이 지난 오늘에야 이 글을 쓴다. 그동안 봄이 왔다. 죽음 위에 생명이 자라는 봄은 얼마나 잔인한 계절인지. 또 얼마나 경건한 계절인지, 죽음이 생명을 키우는 봄은.

이영훈은 이문세가 발표한 대부분의 곡들을 쓴 작곡·작사가로 <이문세 4>(1987), <이문세 5>(1988) 그리고 <이문세 7>(1991)과 같은 수작을 낳은 장본인이다. 일관된 흐름 안에 다양성을 녹여낸 '앨범'을 지향하여 '웰-메이드'의 교과서를 제시한 이 음반은 주류와 비주류를 막론하고 다수의 후배 음악인에게 지대한 영향을 남겼다. 가수만큼이나 작곡가가 주목받는 풍토를 재현했으며, 상업적으로 성공함으로써 대중성과 예술성을 겸한 앨범이 그에 상응하는 성과까지 얻어낸 사례가 되었다. 흔한 말로 음악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성취한 이영훈은 1980년대에 달성된 대중음악의 질적 성장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이름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제 그 이야기는 2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1980년대 중후반, 대중음악의 전성기
▲ 이문세 4집.

1980년대 중·후반은 공권력이라는 이름의 국가폭력이 절정에 달한 시기였던 한편 한국 대중음악의 전성기이기도 했다. 두터운 언더그라운드가 존재했고, 기획사와 방송 권력이 결탁하는 1990년대 중반 이전까지 라디오와 TV가 제 역할을 하고 있었다. 1985년과 1986년 두 해 사이에만 들국화, 어떤날, 시인과 촌장, 김현식, 부활, 시나위 등의 대표작들이 쏟아져 나왔으며, 짧은 터울을 두고 봄여름가을겨울과 신촌블루스 그리고 동물원이 뒤를 이었다. 그들은 저마다 추구하는 장르가 다른 음악인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하나의 향으로 기억된다. 세세히 구분된 장르 명칭이나 영향 받은 해외 뮤지션들의 나열은 필요치 않다. 그저 그 이름들, 그리고 함께 해온 시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하다.

이영훈과 이문세는 그 복판에서 만났다. 이들의 만남을 극적으로 포장하기 위하여 두 사람의 과거를 격하하는 건 온당치 않다. 이영훈은 이문세를 만나기 전에도 연극 등의 무대 음악을 비롯하여 다양한 음악 작업을 계속해오고 있었다. 이문세 역시 1집과 2집을 통하여 <나는 행복한 사람>과 <그대> 그리고 <파랑새>와 같은 노래들로 이미 꽤 알려져 있었다. 다만 이영훈은 장래가 촉망되는 미완성의 작곡가였고, 이문세는 록과 포크를 오가며 아직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한 가수였다. 아는 이들이 많진 않지만 이문세는 신중현의 <아름다운 강산>을 '그로테스크한' 어린이합창단과 부른 적도 있다. 그러나 신중현이 반어적 체제비판가라고 주장한 이 곡의 리메이크는 이선희의 목소리로 더 많이 들려졌고, 세계적 규모의 체육경기를 축하하기 위해 잠실 스타디움에서 불려지는 아이러니를 겪기도 했다.

서로에게 '절실한 존재'가 된 이영훈과 이문세

이영훈과 이문세가 만남으로써 새 페이지를 적어나가게 되었음은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 노래를 잘 하면 좋은 가수 될 수 있지만 단지 노래를 잘한다고 좋은 가수는 아니다. 많은 현을 가진 악기가 두어 개의 현을 가진 악기보다, 그리고 정교하게 세공된 악기가 투박하게 다듬어진 악기보다 우월하다고 할 수 없듯, 사람이라는 악기 즉 보컬리스트의 가치도 어떤 노래를 부르는가와 자신만의 힘을 얼마나 지니는가에 달려있다. 이문세는 뛰어난 가창력의 소유자는 아니었지만 좋은 작곡가와 빼어난 노래를 만남으로써 좋은 가수가 될 수 있었고, 이영훈 또한 자신의 페르소나를 얻었다. 가수와 작곡가의 이상적인 결합을 통하여 서로에게 후광을 된 것이다. 물론 후에는 그것이 스스로를 제한하는 어떤 틀로 작용했고, 두 사람의 관계가 한동안 소원해지는 일도 있었다. 후광은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우기도 한다.

그러나 1985년에 이들은 서로에게 절실한 존재였다. <이문세 3>(1985)부터 참여한 이영훈은 이문세를 인기가수로 만든 '난 아직 모르잖아요'와 어느덧 클래식이 된 '소녀'와 '빗속에서', 그리고 음악극 스타일의 '할말을 하지 못했죠' 등을 선보인다. 또한 1970년대 하드록의 영향을 수렴한 '휘파람'까지 <이문세 3>에 수록된 이영훈의 모든 곡들은 인상적이었다. 유재하의 '그대와 영원히'마저 보태어진 이 앨범만으로도 두 사람은 중요한 지점에 자취를 새기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단지 시작에 불과했다. 곧 대중과 음악이 만나는 표면적을 극대화한 수작이 이어진다. 이영훈이 모든 곡이 맡고 당대 최고의 세션 연주인들과 오케스트라를 동원한 완벽한 팝 앨범이 탄생한다. <이문세 4>(1987)이다.

자기연민과 감정과잉에 허우적대지 않는 담담함
▲ 이문세와 이영훈. ⓒ이영훈 홈페이지

한국은 유난히 발라드에 대한 집착이 강한 편이다. 예전에는 정치권력의 건전가요 강요가 음반에 상처를 남겼다면 요즘에는 시장권력을 의식한 발라드 타이틀곡의 강박이 흠결을 남기고 있을 정도이다. 서정가요의 발전을 추동한 이영훈과 이문세를 이러한 발라드 집착과 연결짓기도 한다. 하지만 정작 이들의 앨범은 다채로운 색을 지니고 있었고, <이문세 4> 역시 마찬가지다. '사랑이 지나가면'을 시작으로 고급스러운 현악연주가 수놓인 '밤이 머무는 곳에'와 '이별 이야기', 신스 팝과 록을 반영한 '그대 나를 보면'과 포크송 '가을이 오면'으로 채워진 A면은 물론, '깊은 밤을 날아서'와 '슬픈 미소', '굿바이'와 '그녀의 웃음소리뿐'으로 이어지는 B면까지의 모든 곡들이 저마다 다른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 이영훈은 첫 문장부터 마지막 문장까지 다듬어 써 내리듯 앨범을 만든 완벽주의자였다. 이들의 성공은 잔뜩 부푼 풍선에 바늘 끝을 갖다댐으로써 이루진 것이 아니었다.

이영훈은 화성적인 안정성과 구조적인 완결성을 중시했으며, 대중성을 획득하면서 품격을 유지하는 대중음악의 조형방식을 제시했다. 어렵지 않으면서 틀이 잡힌 곡들의 저변에는 바흐의 숨결이 남은 클래식과 팝의 새로운 조류를 수용한 감각이 흐른다. 또한 사랑과 평화에서 활동한 김명곤이 편곡을 맡아 이영훈 못잖은 비중으로 기여했기에 이문세 전성기의 앨범들은 이문세·이영훈·김명곤의 합작품이랄 수 있다. 보통 <이문세 5>(1988)는 이러한 요인들이 극대화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사실 당시 이문세 5집을 기다렸던 골수팬들은 4집에 비하면 느슨해진 개별 곡들의 완성도와 집중도 때문에 다소 아쉬워하는 분위기였다. 그럼에도 '시를 위한 시'와 '가로수 그늘 아래 서면'이 있었고, '붉은 노을'과 '안개꽃 추억으로'가 있었다. 당혹스러울 정도로 진부했던 '광화문연가'마저 대중적 호소력을 발휘한 5집은 이영훈과 이문세가 스스로 가장 만족해하는 앨범이기도 하다.

노래들의 주된 테마인 헤어짐을 통하여 대중과의 만남이 극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그 문장만으로는 다소 묘한 구석을 내포하고 있다. 이영훈은 일련의 작업들을 통하여 통속적이라거나 상업적이라는 말로 격하되지 않을 '격이 있는 사랑노래'를 썼다. 과장과 위악과 오만 없이 상실과 그리움의 정서를 풍성한 선율과 혼잣말과 같은 가사에 저며 냈다. 그러면서도 자기연민과 감정과잉 속에 허우적대지 않는 담담함이 잃지 않았다. 이를 테면 이런 것이다. 살다보면 다른 가능성이 두려워 문이 닫힐 때까지 기다리곤 한다. 그리고선 '그래 차라리 잘됐어'라고 중얼거린다. 삶의 어느 한 부분이 베어져 저만치 떠내려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이들의 음악에 녹아있는 이러한 정서가 공감을 불러왔다. 흥미롭게도 앨범에 따라 그 거리는 변하여 이문세 3집과 4집이 헤어짐의 순간과 직후의 심상을 그렸다면 5집은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른 후를 담아내게 된다. 그리고 뒤에서 다시 말하게 될 <이문세 7>(1991)에 이르러 담담한 회상과 '아무렇지 않음'의 상태에 이르게 된다. '옛사랑'과 '풋잠 속에 문득'은 그 완성이다.

남는 것은 단지 향수만이 아니다

지금 그 시절을 돌아볼 때 남는 것은 단지 아련한 향수만이 아니다. 20년이 지난 지금, 우리 사회는 1980년대라는 공간 속에서 이루어진 행위에 저항 또는 순응이라는 항을 대입하고 평가를 요구하는 계단에 서 있기 때문이다. 어느 예술가와 철학자가 특별히 불우한 시대를 산다는 것은 간혹 불행이다. 훗날 사회적·역사적으로 과잉된 해석을 개입시켜 20세기의 한국 대중음악의 주된 소재가 '이별'이었음을 "분단현실의 반영"이라 분석한다면 얼마나 우스운 일일까. 하지만 이러한 수준 이전에 그들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마음 한 구석을 편치 않게 만들어버린다. 그런 차원에서라면 나쓰메 소세키가 1916년에 죽어 이후의 일본에서 살지 않았던 것은 어쩌면 다행이고, 마르틴 하이데거가 나치 독일에서 살아야했던 것은 또한 어쩌면 불행이다.

그러나, 너무나 당연하게도, 그 때에도 사랑이 있었고 삶은 계속되었다. 매운 최루탄 냄새를 툭툭 털고 하숙집에 돌아온 대학생의 주머니에도, 얼굴 모르는 집단을 위해 거리에 서야했던 전투경찰의 고향집 방에도, 교복을 입지 않았던 시절의 어린 학생의 가방에도 이영훈과 이문세의 음반이 있었다. 그리고 여기 그 때부터 손때를 입기 시작한 테이프와 음반이 탁자 위에 놓여있다.

('故 이영훈을 말하다 (下) 지금 그를 말하는 이유'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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