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 격전지에 대한 에세이 글 부탁 전화를 받고 무척 곤혹스러웠다. 왜냐하면 개강 후 학교일에 에너지를 뺏겨서 정치학자로서의 의무를 게을리해왔기 때문이다. 더구나 내성적 성격 탓에 기자들처럼 특정 지역구를 발로 누비며 취재한다는 일은 생각하기만 해도 거북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결국 거절을 못하고 전화를 내려놓은 것은 '노회찬 대 홍정욱' 이란 대결이 주는 호기심 때문이었다. 특히 평소 존경하는 조국 교수의 3월 21일자 <한겨레> 기사는 이러한 호기심에 불을 댕겼다. 그는 노원병 지역에서의 두 후보 간 대결은 단지 지역의 대결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미래가 잔인한 '정글자본주의'로 가느냐 아니면 '인간의 얼굴을 가진 자본주의'로 가느냐의 시금석이라고 예리하게 진단한 바 있다.
전화를 내려놓은 나에게 스쳐지나가는 생각은 두 후보 간의 대결이 혹시 대한민국 최초의 쿨한 진보와 보수의 탄생 가능성을 확인해보는 장이 아닐까 하는 점이다. 여기서 쿨이란 냉정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딕 파운틴 등의 문화학자가 과거 지적했던 것처럼 기존의 워싱턴 정치 방식이 가진 음험함과 칙칙함, 대중 소통력의 결여 등의 감수성과의 단절을 말한다.
물론 이미 개혁 진영 내 강금실 장관이나 보수진영 내 오세훈 시장 같은 경우가 그러한 쿨한 정치인의 선구적 세대에 해당된다. 하지만 아직까지 국회의 장에서 그러한 쿨한 의원들을 찾기란 어렵다. 더구나 통합민주당보다 더 선명하게 진보적인 정당 정치인들과 쿨한 정치인은 잘 어울리는 느낌이 오질 않는다. 과연 노회찬과 홍정욱은 내용과 스타일에서 쿨한 진보와 보수 지역구 의원의 탄생일수 있을까?
노회찬 : 그의 고뇌 속에서 희망을 보다
그런 의문을 가지고 노 후보의 사무실을 방문한 나는 오재영 상황실장의 따듯한 환대를 받으면서 인터뷰를 시작했다. 사무실 중간에 놓여있는 저명한 배우 박중훈과 노 후보의 다정한 사진에 먼저 시선이 갔다. 박중훈은 노 후보의 진정성과 정치스타일을 사랑하는 열렬한 팬이다.
나는 살인적 일정 속에서도 반가이 맞이해준 노 후보에게 예의를 벗어나 생뚱맞고 공격적인 질문부터 던졌다. "진보적 정당의 우군들인 박중훈이나 문소리, 봉준호 등은 대중적이면서도 진보적 문화활동이나 진보 영화를 만들어 내는데 왜 같은 이념을 가지고 있는 진보 정당들은 유독 정치영역에서는 대중적 정치활동을 못 만들어냅니까?"
나의 힐난성 질문에 대해 노 후보는 특유의 따듯하면서도 통찰력 있는 미소를 머금고 친절하게 답해주었다. 그는 그의 사무실을 방문한 박중훈 씨의 진정성과 프로페셔녈리즘에 당원들이 깊은 인상을 받은 에피소드를 공개하였다. 당원들은 시민들의 심리에 대한 면밀한 분석에 근거한 박중훈 씨의 활동을 옆에서 보면서 오늘날 쿨한 대한민국 최고의 배우가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절실히 깨달은 것이다.
물론 나의 질문의 대상 선정은 다소 부적절하다고 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노회찬 후보는 진보의 그 누구보다도 대중성을 확보한 일인자이기 때문이다. 노 후보를 아는 사람이라면 그의 촌철살인의 멘트가 마치 케네디의 탁월한 담론이 그러하듯이 오랜 지혜의 축적과 시민에 대한 공감의 산물임을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진보의 대중 심리학을 심화시키지 않고는 절대로 진보 정치의 미래가 없다고 확신하는 사람이기에 그의 문제의식이 얼마나 절실한지를 알고 싶었다. 나는 짧은 시간이지만 그의 고뇌 속에서 희망의 씨앗을 보았다.
그간 진보파가 칙칙했던 것은 많은 경우 자신들의 이념적인 고정관념의 눈가리개가 시민들과의 소통을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인터뷰에서 흥미로웠던 것은 노 후보의 자기 성찰의 태도였다. 그는 진보진영 내에 평등을 강조하는 진영과 자주를 강조하는 진영들의 흥미로운 단점을 지적하였다.
그에 따르면 전자는 자주의 이슈에서는 유연성을 가지는데 정작 평등에서는 때로는 지나친 경직성을 보이고 후자는 그 반대라는 것이다. 난 그의 이러한 자기성찰의 태도가 앞으로 새로운 진보를 구성하는 것에 중요한 자양분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무엇보다도 반가웠던 것은 그의 새로운 진보 활동의 방식에 대한 고민이었다. 그는 이번에 당선되면 중앙 정치와 지역시민들의 소통의 일상화를 통해 진보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있었다. 그의 말을 들으며 나는 미국의 저명한 진보 상원의원이었던 폴 웰스턴이 떠올랐다. 그는 바로 이 노 후보가 하고자 하는 소통의 실험을 성공하면서 미국 풀뿌리 신진보운동의 선구적 모범을 보인바 있다.
사무실을 나오기 전에 나는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노 후보를 고문(?) 하고 싶었다. 난 생뚱맞게 "스스로 애국적인 사람이라고 평가하느냐"고 물었다. 나의 황당한 질문에 대한 그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그는 애국심이란 그간 군사통치 시절 왜곡된 이미지를 가져왔지만 사실은 곧 "공동체에 대한 사랑이다"고 정의하였다. "바로 그러한 공동체에 대한 사랑, 공익에 대한 의무감이 있기에 진보정치운동을 한다"고 그는 밝힌다.
내가 놀랐던 것은 그의 정의가 바로 최근 일부 학자들 사이에 고민하는 '공화주의적 애국관'이기 때문이다. 공공성을 향한 진보와 애국, 그것이 물과 기름이 아니라 오히려 가장 어울릴 수 있음을 그는 갈파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농담을 던지며 본인은 자유총연맹 노인분들과도 친하다고 미소 지었다. 나는 인터뷰 때는 몰랐지만 나중에 온라인을 통해 그가 피우진 중령을 진보신당에 스카웃한 주역임을 알았다. 애국, 국가안보와도 어우러질 수 있는 대중적 진보의 가능성을 그는 꿈꾸고 있는 것이다.
나는 노 후보에 대한 기대에도 불구하고 아직 한국의 진보정당 운동에 대해 쿨하다고 신뢰하고 있지 않다. 선거 이후에 진보신당이 얼마나 환골탈태할지도 아직은 다소 의문이다. 하지만 최소한 노 후보의 지역구에서는 새로운 진보의 전형이 조금씩 생길 수 있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기대해본다.
인생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통합민주당으로 대표되는 개혁진영의 퇴락과 위기가 아니라면 진보정치의 무덤인 서울에서 노 후보의 당선 가능성은 적었을 것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 이러한 심각한 위기 속에서 서울에서 새로운 진보의 싹이 돋아나고 있는 것이다.
홍정욱 : 케네디를 꿈꾸는 보수 엘리트
노 후보 사무실을 나와 한나라당 홍정욱 후보의 사무실까지는 단 10분 거리이지만 그 정치적 의미의 거리는 무척이나 멀어보였다. 누가 옳은 선택이냐의 호불호를 떠나서 조국 교수가 말한 것처럼 그는 모든 점에서 노회찬 후보와 반대의 극에 있었다.
노 후보는 고대 엘리트라는 특권층에서 벗어나 위장취업을 통해 노동의 세계로 '유학'을 가고 '현장으로' 의 붐을 일으킨 주역이다. 반면에 홍 후보는 하버드라는 엘리트세계의 정점을 향해 치열한 노력 속에서 조기유학을 가고, 한국에 조기유학의 붐을 확산시킨 주역이다.
노 후보가 삼성 재벌 공격의 선두에 있을 때 홍 후보는 리먼 브러더스라는 투기 은행의 첨병에서 미국식 M&A를 실천했다. 노 후보가 매일노동뉴스라는 비주류세계에서 창조적인 노동운동 미디어의 전형을 창출했다면 홍 후보는 헤럴드 미디어의 인수를 통해 순식간에 주류 미디어의 스타로 부상하였다. 그리고 지금 노 후보는 과거 진보당의 맥을 잇는 한국적 진보의 상징으로 떠올랐고 홍 후보는 미국 케네디의 신화를 한국에 꽃피우며 한국의 미국화를 시도하고 있다.
미국 최초의 쿨한 대통령인 케네디를 닮고자 한 홍 후보가 난 무척 궁금했다. 왜냐하면 미국 정치를 전공하는 나로서는 케네디를 무척 좋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타깝게 노 후보와 달리 홍 후보를 인터뷰하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여론조사에서도 뒤지고 3달이나 선거운동이 노 후보에게 뒤진 홍 후보로서는 사무실에 들어올 틈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여론조사나 선거운동일정에서 다소 여유 있는 진보정당의 후보 대 쫒기는 집권여당의 후보라는 구도를 태어난 이래 서울에서 볼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난 새로운 쿨한 보수의 가능성을 관찰하기 위한 나의 의도가 좌절한 화풀이를 김현태 홍보실장에게 하였다. 하지만 그의 친절하고 진정성 있는 태도에 마음이 풀려버렸다. 그는 이미 언론이 서민의 대변자 노 후보 대 강남특권층의 대변자 홍 후보라는 프레임으로 규정해버렸다는 것에 무척 억울해하고 있었다.
이미 신문을 통해 널리 소개되었지만 밤무대까지 출입하며 아들의 유학비를 댄 아버지 남궁원의 에피소드를 그는 내세웠지만 언론은 요지부동인 모양이었다. 사실 홍 후보로서는 이번 선거가 이명박 정부의 이어지는 실책 속에서 뜻하지 않게 매우 불리한 시대정신 속에서 포위될 수밖에 없었다.
홍 후보 측의 억울함을 이해하면서도 아직은 그가 케네디가 그러하듯이 스스로 망가지는 여유나 중산층에의 어필을 발전시키고 있지는 못한 것으로 보였다. 그가 꿈꾸는 케네디는 아버지의 금권, 부패한 연줄에 조종 받는 자신을 비하하는 유머들로 유명하기도 하다. 그리고 기성 워싱턴 정치인과 다른 솔직하고 개방적 태도는 누구나 매료시킨 바 있다. 하지만 기존 언론에 나온 홍 후보의 모든 인터뷰들은 모든 것이 모범 답안뿐이었다. 그 자체로만 본다면 인간적 체취나 쿨한 정치인의 면모를 느끼기 어려웠다.
보다 더 중요하고 앞으로 보다 검증되어야 할 것은 두 가지이다. 첫째는 과연 새로운 보수의 콘텐츠를 구축했는가이다. 그는 수차례 인터뷰에서 자신은 이념에 관심이 없는 실용주의자라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그가 잘 아는 케네디는 실용주의자이면서 새로운 진보의 이념을 앞서 고민한 정치인이다. 무조건 단기적으로 돈이 되면 다 용서되는 이명박식 실용과 달리 한 차원 높은 실용의 이념을 그가 과연 가지고 있는지가 중요하다.
둘째는 공직에 대한 그의 지도자 덕성의 검증이다. 그는 케네디의 공직에 대한 열정에 매료되어 정치의 길을 선택했다고 한다. 사실 케네디는 공적 봉사와 노블리제 오블리주의 자세에 있어서 경탄할 만한 태도를 가지고 있다. 반면에 그간 한국의 보수는 공익보다는 사익, 책임감보다는 이권, 무임승차에 혈안이 된 어두운 과거를 가지고 있다.
미국의 보수 대통령 후보 존 매케인 상원의원이 금권선거자금 개혁을 통해 공공성의 강화를 추구할 때 대부분 한국의 보수 정치인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홍 후보가 진정으로 케네디의 영혼을 벤치마킹하고자 한다면 바로 그러한 공익에의 무한한 덕성이 핵심일 것이다. 그 공익에의 명성은 명사들의 우아한 도덕 캠페인으로 달성되지 않는다. 보수진영으로부터 왕따를 당해가며 금권선거개혁을 추구한 매케인을 미국인들이 사랑하는 것은 그가 단지 세련된 명사가 아니라 전사이고자 했기 때문이다.
홍 후보는 중앙선데이와의 2월 10일자 인터뷰에서 어머니가 주신 좌우명을 인용하고 있다. "길이 있는 곳으로 나아가지 말라. 대신 길이 없는 곳으로 나아가 네 발자취를 남겨라." 과연 그가 길이 없는 새로운 보수의 길로 나아갈 지 궁금하다.
노원병의 흥미로운 실험
다가오는 총선에서 노회찬 대 홍정욱의 대결의 결과는 지역구를 넘어 이후 한국 정치 구도에서 새로운 변화의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 결과가 새로운 쿨한 진보가 될지 보수가 될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미 흥미로운 실험은 시작된 것만은 분명하다. 앞으로 총선까지 노원병 지역을 통해 대한민국의 미래의 일단을 미리 엿보는 흥미로운 장에 여러분을 초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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