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12월에 한국은 세계에서 134번째로 사형 폐지국이 되었다. 아직 사형제를 유지하는 나라는 64개국에 불과하다. 2004년에는 83개국이었다고 하니까, 3년 남짓 사이에 20개국이 사형 폐지에 동참한 것이다. 여기서 다시 3년이 지나면 몇 나라나 남을까? 대한민국을 선진국 만들어줄 거라던 2MB 정권. 선진국 법무부에서 제일 먼저 하는 일이 고작 법의식을 과거로 되돌리는 것이다.
김문수 경기도지사가 한 마디 거든다. 지방자치단체장이라면 자기 관내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 데에 대해 책임을 느끼고, 사건의 재발을 막기 위한 대책을 내놔야 한다. 실종 신고가 들어오면 바로 수사에 들어가는 시스템. 유괴에 대비하여 아동들에게 행동 요령을 가르친다든지. 행여나 책임론의 불똥이 튈세라 잽싸게 외치기를, "당장 사형을 집행하라!" 누가 운동권 출신 아니랄까봐 대중감각 하나는 더럽게 뛰어나다.
중국에 인권상을!
김문수 씨는 "사형수의 인권만 인권이냐"며 "피해자에게도 인권이 있다"고 말한다. 범죄자를 처형하는 게 과연 피해자의 인권을 존중하는 길일까? 만약 그의 말이 맞는다면, 전 세계에서 가장 인권을 존중해주는 국가는 아마도 중국이리라. 거기서는 아예 스타디움에서 공개처형을 하지 않던가. 그런데 왜 세계는 중국에 인권상을 수여하지는 않고 외려 비난을 해대는 것일까?
그 스타디움에서 처형당하는 사람들 중에는 마약으로 수많은 이를 죽음을 내 몬 이들도 있을 것이고, 인신을 매매하여 수많은 여성을 인간보다 못한 삶으로 내 몬 이들도 있을 것이고, 흉악 범죄를 저질러 귀중한 인명을 끔찍하게 살해한 금수만도 못한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 정의의 심판을 내려 널리 경계를 삼자는데, 왜 세계는 그 모습에 경악을 하면서 비난을 퍼붓는 걸까?
사형이 범죄를 막아준다면, 예방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라도 처형 장면을 공개해야 마땅하다. 뭐가 문제인가. 범죄자의 인권? 범죄자만 인권이 있고, 피해자는 인권이 없는가? 중국인들은 아마 자신들의 공개 처형을 '야만'이라 부르는 미국인들이 이해가 되지 않을 게다. 하지만 그러는 미국인들도 자신들의 전기의자 관행을 '야만'이라 부르는 다른 나라 사람들이 이해가 안 될 것이다.
이것은 사회적 감성의 문제다. 어떤 사회에서는 당연하게 느끼는 것을 다른 사회에서는 잔혹하고 야만적이라 느낀다. 혹은 사회적 합의의 문제다. 어떤 나라는 질서를 유지하려면 '경우에 따라서는 사람을 죽여야 한다'는 원칙을 고집하고, 다른 사회는 '어떤 경우에도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원칙으로 질서를 잡는다. 세계의 133개 나라에서는 이미 후자를 사회운영의 원리로 채택했다. 한국은 왜 거꾸로 가는가?
사형제 존치의 논리들
사형제로 흉악 범죄를 막을 수 있다고 한다. 그 주장은 전혀 근거가 없음이 이미 밝혀져 있다. 처벌의 강도와 범죄의 빈도 사이에 유의미한 인과관계는 확인되지 않는다. 연구들은 외려 사형제가 있는 나라일수록 범죄율도 높다는 것을 보여 준다. 절도마저도 사형으로 처벌하던 17세기, 가장 많은 절도가 벌어지던 곳이 역설적이게도 바로 군중들 모아놓고 절도범을 잔혹하게 처형하던 바로 그 현장이었다.
이것이 근대적 '예방론'이라면, 지금 우리 사회에서 뜨겁게 타오르는 주장은 그 이전의 법 감정, 즉 아득한 고대에서 중세까지 이어졌던 '보복론'에 가깝다. 한 마디로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공동체에 위해를 가한 자에게 공동체는 같은 방법으로 복수를 해야 한다는 것. 보복론이 근대에 들어와 예방론으로 바뀐 것은, 그것이 앞으로 일어날 일의 예방보다는 과거에 일어난 사건의 보복에 집착한다는 퇴행적 성격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피해자 가족의 한을 말한다. 하지만 설사 가해자를 찢어 죽인들, 가족의 한이 풀리겠는가? 물론 피해자의 가족 중에는 가해자의 처형 소식을 듣고서야 두 다리를 뻗을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 심정은 충분히 이해가 된다. 어쩌면 내 자신도 그럴지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는 또한 피해자의 가족이 가해자로부터 진심어린 참회를 듣고서야 비로소 한을 풀었다는 소식을 종종 듣지 않는가.
사형제의 문제는 사적인 복수의 문제가 아니라, 범죄에 대한 공적인 대책의 문제다. 그것은 뜨거운 감정적 흥분이 아니라 차가운 이성적 논의로 접근해야 할 문제다. 왜 세계의 134개국에서는 사형제를 폐지했는가? 피해자 가족의 한을 무시해서인가? 김문수 씨의 말대로 범죄자의 인권만 존중하고, 피해자의 인권을 존중해서? 물론 아닐 게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인지 한번 들어볼 필요는 있지 않은가?
사회적 인성의 문제
오래 전의 일이지만, 나도 태어나서 딱 한 번 '사람을 죽이고 싶다'는 생각을 가져 본 적이 있다. 자기에게 가까운 이가 범죄의 피해자가 되면, 누구나 자연스레(?) 그런 생각을 가질 것이다. 당시에는 정말 '그 놈'을 만나면, 날이 시퍼렇게 벼린 '사시미' 칼로 배를 푹푹 찔러놓고 '그 놈'이 내 앞에서 눈을 허옇게 뜨고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귀에다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 놈'이 왜 죽어야 하는지 말해 주고 싶었다.
칼로 '그 놈' 목의 동맥을 그어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는 것을 보면 속이 시원할까? 펄펄 끓는 기름 가마 속에 발가락 끝부터 머리끝까지 천천히 담그면 속이 시원할까? 시너를 뿌린 '그 놈' 몸에 라이터로 불을 붙여 놓고 그 놈이 사방 팔자로 길길이 날뛰며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면 속이 시원할까? 아니면 불쌍한 새끼돼지처럼 사지에 줄을 달아 차량에 매달아 팔 다리를 몸에서 떼어내면 속이 다 시원할까?
말들은 참 쉽게 한다. <추적자>에 나오는 그 흉악범을 잡아다가 묶어서 당신 앞의 바닥에 눕혀 놓았다. 자, 당신에게 정과 망치를 주겠다. 그 자의 머리에 정을 갖다 대고 망치를 내려쳐라. 그리하여 뇌수가 터져서 사방으로 튈 것이다. 너무 잔인하다고? 그러면 정과 망치 대신에 교수대를 사용하자. 당신 앞에 버튼이 있으니, 지그시 누르라. 그러면 정의가 회복되고 당신의 속도 풀릴 것이다.
버튼을 누르면 발판이 꺼지면서 '그 놈'이 허공에서 버둥댈 거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면, 마치 모가지를 비튼 닭처럼, 놈의 두 다리가 최후로 한 번 퍼덕인 후 축 늘어질 게다. 자, 이제 직접 버튼을 눌러 보라. 못 하겠다고? 그렇다면 사람을 사서 하자. 누가 돈 받고 그런 짓 하냐고? 그러면 국가에 맡기자. 세금을 내서 공무원에게 버튼을 누르게 하는 거다. 자, 여기서 도대체 어디부터 야만이고, 어디까지 잔혹일까?
자녀를 위한 두 개의 옵션
누군가를 향해 "쳐 죽일 놈!"이라 욕하는 것과, 그 자를 데려다가 정말 쳐 죽이는 것은 전혀 다른 일. 쳐 죽일 놈을 데려다 놔도 차마 쳐 죽이지 못하는 것이, 그 놈이 쳐 죽일 놈이 아니라고 변명해주는 것인가? 쳐 죽일 놈을 데려다 놔도 차마 쳐 죽이지 못하는 것이, 그 놈의 인권까지 챙겨줄 정도로 인권의식이 섬세해서 그런 걸까? 쳐 죽일 놈을 차마 쳐 죽이지 못하는 게 심지어 그 놈이 예뻐서일까?
사회를 두 종류로 나누어 보자. 한 사회는 흉악범을 허공에 매다는 교수대의 버튼을 누를 준비가 되어 있다. 버튼이 내려가는 순간, 성원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올린다. 또 다른 사회는 교수대의 버튼을 누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그 사회의 성원들은 아무리 흉악범이라도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일을 잔혹하고 야만적이라 느낀다. 전자에 속하는 나라는 63개국, 후자에 속하는 나라는 134개국이다.
주위를 둘러보라. 한 사회에도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당신은 어떤 인간과 더불어 살고 싶은가? 기회만 닿으면 기꺼이 교수대의 버튼을 누를 사람들 틈에 살고 싶은가? 아니면 차마 교수대의 버튼을 누르지 못하는 사람들 틈에 살고 싶은가? 교수대에 버둥거리는 사람을 보며 환호하는 사람과 이웃하고 싶은가? 아니면 그 장면에 고개를 돌려버리는 사람과 이웃하고 싶은가? 아니, 그 이전에 당신은 어떤 이웃인가?
당신에게도 자녀가 있을 게다. 걔들을 위해 선택할 '사회적 인성'의 두 가지 옵션이 있다. 당신은 그 아이들을 '경우에 따라서는 사람을 죽여야 한다.'고 말하는 인간들 틈에서 키우겠는가? 아니면 당신의 자녀를 '어떤 경우든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 틈에서 키우겠는가? 당신의 자녀는 어떤 인간들 틈에서 살아야 할까? 남의 목숨을 빼앗은 자의 목숨을 빼앗는 데서 쾌감을 느끼는 사람들 틈에서? 아니면 남의 목숨을 빼앗는 일체의 행위에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들 틈에서?
이제 가슴에 손을 얹고 대답해 보라. 당신의 자녀는 과연 어떤 인성을 가진 사회에서 더 안전할까? 당신의 자녀의 영혼은 과연 어느 사회에서 더 아름다울까? 허투루 대답하지 말라. 이것은 당신 자녀의 안전과 영혼이 걸린 문제니까. 당신 자녀를 "죽여라, 죽여라" 고래고래 외치는 군중들 틈에 내보낼 것인가? 정말 그러고 싶은가? 이것이 세계 134개국에서 사형제를 폐지하고, 또 점점 더 많은 나라가 거기에 동참하는 이유다.
'슈퍼맨 리턴즈'
사형제 도입은 2MB의 철학이다. 그의 사고 자체가 자신이 공사판을 지휘하던 7, 80년대에 고착되어 있듯이, 인권에 관한 그의 철학도 정확히 그 시절에 머물러 있다. 후보 시절 사형제의 존치를 주장하는 그의 발언을 들으며 걱정을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가 집권하자마자 법무부에서 제일 먼저 추진하는 일이 바로 사형제의 존치와 집행. 미래로 달려도 션찮을 판에 10년을 거슬러 과거로 돌아간다. 이게 선진화인가?
또 하나 생각할 게 있다. 이번 사형제 재도입 캠페인은 이 정권이 내세우는 이른바 '법질서 회복' 캠페인의 일환이다. 궁금한 것은 대통령 자신은 그 동안 얼마나 법을 잘 지켜왔나 하는 것이다. 또 하나 궁금한 것은 대통령이 임명한 장관들, 지금 한나라당 의원들과 이번에 공천을 받은 후보들, 앞으로 낙하산 타고 공공기관장으로 내려 올 그 분들은 그 동안 법을 얼마나 잘 지켜왔나 하는 것이다.
이 모든 항목에서 이 분들이 국민들 평균치에 미달하는 점수를 받을 것이라고 나는 감히 추측한다. 그 동안 법 알기를 우습게 한 것이 정작 누구인지는 삼성의 예를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분들이 외려 '떼법' 운운하면서 외려 국민들에게 준법을 가르치려 든다. 그리하여 이 분들이 부활시킨 것이 백골단. 과격 시위는 해마다 줄어드는데, 그 동안 없었던 백골단은 도대체 왜 부활을 해야 할까?
눈앞에서 한국은 3공과 5공으로 돌아가고 있다. 수출을 통한 7% 고도성장, 대운하로 건설경기 살리기, 생필품 가격 통제. 사회적 갈등은 백골단으로 해결하고, 흉악범죄는 사형제로 다스리고. 임기제의 취지를 부정하고 코드에 따른 낙하산 인사로 회귀하는 것. 공무원들 만나 땍땍거리며 호통이나 치는 전근대적 리더십. 거기에 보수 언론에서 날마다 불러대는 낯 뜨거운 명비어천가까지.
증가하는 사회적 불안
빈부의 격차가 벌어지면 사회적 불안은 증가하는 법. 이 정권 5년 후에 의료보험증 들고 갈 수 있는 병원이 몇 개나 남을까? 이 정권 5년 후에 전체 노동인구 중에 정규직을 가진 이들은 얼마나 남을까? 가진 자들만이 들어가는 화려한 병원 앞에서 돈이 없어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야 하는 이들의 절망감은 어떻게 해야 하나? 세상을 포기한 사람들이 늘어날수록, 범죄율도 높아진다는 것은 사회학의 법칙이다.
사이코 패스에 의한 범죄는 어떨지 몰라도, 적어도 사회적 이유에 의한 범죄는 어느 정도 막을 수 있지 않나? 사회를 생존경쟁의 정글로 만들어 놓고는 범죄예방 한다고 사형제와 백골단을 부활시키는 것이나, 수출 늘린다고 환율 건드려 물가 올려놓고 박정희식 가격 통제의 부활로 물가를 잡겠다는 것이나, 도대체 뭐가 다를까? 국민들은 향후 5년 동안 홧김에 투표하면 어떻게 되는지, 몸으로 체험하게 될 것이다.
영국의 <파이낸셜타임스>던가? "한국에 필요한 것은 불도저가 아니라 뇌수술"이라고 했던 것이. 정말 대한민국에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브레이크 없는 불도저가 아니라 섬세한 뇌수술이다. 그 수술은 물론 청와대와 내각을 위한 것이겠으나, 특히 급한 것은 세계적 추세를 거슬러 나 홀로 사형제로 복귀하며 그것을 '선진'이라 착각하는 법무부로 보인다. 열어 보면 아예 뇌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PS.
선진국 되고 싶으면, 제발 생각 좀 하면서 살자. 5년 동안 잊지 말아야 할 것. 2MB 정권을 뽑은 것은 1MB 국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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