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행정부의 첫 내각이 발표되기 전에, 전날의 노동부 식구들인 김원배, 박길상, 정병석, 최영기 씨등과 저녁을 함께 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나누던 끝에, 내가 재미로 하는 내기 놀음판에서 "초식(初食)은 불식(不食)"이란 말이 있듯이 첫 노동부장관은 일하기가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었습니다. 두 번째부터는 얼마간 수월할 것이란 뜻이지요. 그런데 그 첫 장관에 이 형이 선택되었습니다. 나는 대학 때 나와 같은 사회법학회란 동아리를 했고, 크리스천아카데미(나도 강원용 목사 때부터 관여했고 지금도 그 후신인 대화문화아카데미에 나가고 있지만)에서 노동문제를 담당했으며, 경실련 활동을 한 노동관계 대학교수 이 장관이 MB내각에서는 잘 된 인선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적격이랄 것입니다.
YS때 갑자기 노동부를 맡아 해본 나의 경험으로 볼 때 노동부장관 자리는 매우 까다로운 자리입니다. 정치적으로도 매우 센시티브합니다. 그때는 구시대의 잔재가 많이 남아있어서 예를 들어 민주노총(그때는 명칭이 달랐습니다)을 불온시하여 법적인 노조로 인정하는 것까지 거부하던 시대라, 나는 정부 정책방향과 현실적 요구와의 갈등 속에 "노동부 일은 한여름에 돼지고기 먹는 것처럼 잘해야 본전"이라고 농으로 말하기도 했고 그 말이 보도되기도 했습니다.
MB의 노선은 '기업 프렌들리'라고 하지만 국민들에 비추어지기는 '대기업(전경련) 프렌들리'로 보여 이 장관이 앞으로 일해 나가는 데 어려움이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청와대 보좌진을 포함하여 MB정부에 이 장관말고는 뚜렷한 노동전문가가 없어 이 장관의 책임이 무거운데 수석장관격인 기획재정부 장관의 무게가 너무나 압도적인 것 같아 노동정책이 성장정책에 아예 치일 것이 우려되기는 합니다. 여담으로 말하면 내각에 있어서의 실세 운운은 생각하기 나름이어서 옳은 주장을 놓고서의 논의에서는 실세가 허세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 정부에서 노사관계 법치화(法治化)란 말이 등장합니다만 한마디로 말하여 '법과 질서(law & order)'위주가 아닙니까. 최근 경찰보고에 사복체포조(백골단이라고도 부른답니다) 부활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법과 질서'란 세계 여러 나라에서 보수파들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다시피 되어 있는 것인데, 우선 이 문제를 숙고해 보는 일이 모든 논의의 전제로서 중요할 듯합니다.
노무현 씨는 대통령 재임시 '법과 질서'를 강행함에 있어서의 '경찰력의 한계'가 있음을 털어놓은 바 있는데 지금도 나는 그 말의 뜻을 음미해보기도 합니다. 내가 노동부에 있을 때 현대중공업의 장기 파업에 경찰을 투입하여 제압하자는 측이 득세하여 YS도 그렇게 기울어졌는데 내가 반대하여 수습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기억으로는 경찰을 최소한 5000명 이상 투입해야 하고 바다를 통한 상륙작전은 물론 헬기까지 동원하게 되니 문자 그대로 육해공의 작전을 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또한 바로 그 옆에서 조용히 조업을 하던 현대자동차의 노동자들을 자극하게 되면 그곳은 어셈블리 라인 일관작업이라 생산에 막대한 차질을 줄 위험이 있었던 것입니다(조선사업은 용접산업이라고도 하여 성격이 아주 다릅니다). 그만큼 경찰 동원이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법과 질서'를 말할 때 이른바 폴리스 라인(police line)이라는 것도 함께 생각하게 됩니다. 대개의 사태란 흑과 백으로 분명히 나누어 판단할 수 없는 회색의 상황입니다. 어느 쪽이 반드시 옳고 어느 쪽이 반드시 틀린 것이 아니고, 양쪽에 모두 일리가 있는 그런 가치판단의 회색지대지요. 물론 한쪽이 더욱 정당하고 다른 쪽이 더욱 부당하다는 상황도 더러 있지요.
우리가 '법과 질서'나 폴리스라인을 잘 지키는 나라로 흔히 미국을 예로 듭니다. "미국에서는 어림도 없는 소리. 폴리스 라인을 어기면 무자비하게 제압한다." 그러나 그렇게만 이야기할 수는 없습니다. 상황에 따라 다릅니다. 베트남전쟁 반대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학생들에 발포하여 사상자를 낸 켄트 주립대학 사건은 비극적 사건으로 지금도 기억되고 있습니다. 새로운 용어로 말하면 미크로-파시즘(micro-fascism)의 상황이었지요. 베트남전은 물론이고 흑인들이 차별에 항의하여 들고 일어난 민권운동에, 또는 근래의 이라크전 반대운동에 '법과 질서'를 말하고 폴리스 라인만을 말하겠습니까.
우선 사회가 공정하다는 인식이 있어야 합니다. 사회정의가 어느 정도 구현된 사회여야 합니다. 폴리스 라인의 저쪽에 있는 사람들이 그래도 이 사회는 어느 정도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라고 공감할 때 '법과 질서', 폴리스 라인은 강행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가 미국 사회처럼 그렇게 어느 정도나마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입니까. 법 집행에 있어서 신축성의 공간이나 여유가 더 커야만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미국의 폴리스 라인 강력집행만을 예로 든다는 것은 상황 인식의 착오라 할 것입니다. 정부가 '법과 질서'에 집착하게 될 때 우선은 본보기로 운이 없는 사람들이 심하게 당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노사관계에 있어서 노와 사와 정의 3자를 생각해봅시다.
사용자란 주로 대기업을 말하겠습니다. 요즘 삼성특검 사태가 보여주고 있는 그 불법상속과정이나 비자금형성과정, 문어발식 로비(이권운동) 등등, 떳떳한 대기업이 과연 몇이나 있겠습니까. 또한 사용자의 부당노동행위도 부지기수로 깔려있다고 봅니다. 손쉬운 자료로 신문(<한겨레> 3월 18일자)을 보면 지난해 중앙노동위원회에 접수된 부당해고 구제신청사건은 7824건에 이른다고 합니다. 언론이 노동쟁의는 크게 보도하면서 기업의 잘못에 대해서는 소홀히 하는 편향을 갖고 있어서 일반 국민이 잘 몰라서 입니다. 그러한 편향은 소유구조 때문도 있고 광고에 목멘 사정 때문도 있고 여러가지 까닭이 있겠지요.
또한 역대의 정부는 국민 가운데 약자나 낙오자를 위한 사회안전망을 제대로 구축해 주었습니까. 땅 투기와 땅값폭등에 따른 주택비 부담의 증가, 그리고 교육비의 불균형한 과중으로 대다수 국민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고 그 국민의 다수가 노동자층인 게 아닙니까. 참, 이 정부 고위층에는 왜 그리 땅 등 부동산 투기와 관련된 사람이 많은지. 유명 연예인의 이름을 따서 언론이 예명을 지어주기까지 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노동자 측의 문제를 봅시다. 조직노동자들은 한국노총 측과 민주노총 측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한국노총측은 한나라당과 정책연대(공천연대라고 비꼬는 측도 있지만)를 하는 등 별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문제는 전이나 지금이나 민주노총측입니다. 이들이 우리나라 대기업의 거의 모두에 조직돼 있고 따라서 쟁의가 문제되는 곳은 바로 그곳이기 때문입니다.
노사관계의 합리화나 선진화를 이야기한다면 따라서 민주노총과의 이야기입니다. 최근 신문(<서울신문> 3월11일자)에 보니 신은종 교수가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투쟁의 시대를 끝내고 동반의 시대를 열어야 함은 지당한 말씀이고 상생을 위해 노사 모두 한 발짝씩 양보하라는 주문은 식상하기까지 한다. 외려 기업엔 규제완화와 같은 손에 잡히는 약속을 하면서도 노동자에게만 양보하란 말로 들리기 십상이다." 옛날 표현으로는 '수신(修身)'교과서 같은 이야기'란 것이 있습니다. 그럴듯 하기만 하지 먹혀들지 못하고 공전만 하는 그런 훈계를 말합니다. 노사관계의 합리화나 선진화 운운도 비슷합니다. 신 교수의 말처럼 '식상(食傷)'한다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민주노총측 일부에 남아있는 '계급투쟁적' 관점이나 태도는 이제 극복할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상생, 공생을 생각해야 합니다. (최근 외지에 보니 프랑스에서는 인터넷을 통해 고충이나 분규를 해결하기도 한답니다.) 물론 대부분에 있어서는 변화가 되었고 일부에만 남아있는 문제점이라는 것을 거듭 말해야 하겠습니다. 세계화가 급속히 진행되고 기업들이 낮은 임금의 노동력을 찾아 이동하는 등의 상황에서 일반적으로 노조가 약화되었다는 점도 있지요.
유럽의 경우도 그렇습니다만 가까운 일본을 보면 총평(總評·쇼오효오)이란 노동조직은 1960~70년대에 그 전투성으로 하여 세계적으로 명성이 자자했었습니다. 그러나 그 총평도 시대의 변화에 따라 그 계급투쟁적 성격을 말끔히 탈피했고 지금의 일본 노조들은 노사상생의 매우 협력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직도 그 전투적인 총평의 말기 단계라고나 할까요.
노동쟁의를 하지 말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아니, 노동쟁의가 부도덕하다고 보는 관점이 잘못이며 아직도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그런 편견은 시정되어야 마땅합니다. 노동쟁의는 노동자들이 그들의 권익을 옹호하고 고충을 처리하는, 있을 수 있는 정상적인 절차입니다. 자주 있어서 좋다는 말이 아니고 없을 수는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계급투쟁적'인 것의 극복은 목표와 방법 모두에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국민의 공감을 얻는 위에서의 쟁의일 때만이 그 쟁의는 성공하기가 쉬울 것입니다. 이때 국민의 공감은 매스미디어의 공감과는 얼마간 다릅니다. 많은 경우 우리의 주류 언론은 대기업에 편향되어 있어 노동자 측에 결코 호의적이라 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국민 가운데 알 만한 사람은 그런 정황을 짐작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더군다나 국제사회에 있어서의 경쟁에서 살아남고 발전하기 위해서는 노사간의 상생, 공생이 꼭 필요한데 이때 중요한 제도로 검토되어야 할 것이 노사정위원회입니다. 노사정위원회는 YS때 원초적 형태로 있다가 IMF사태 후 DJ정부 초입에 그럴 듯하게 출발했으나 곧바로 정체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민주노총측이 탈퇴한 것이 가장 큰 이유겠지요. 정부나 사용자 측의 열의가 식은 때문도 있고요. 그래서 노사정위원회의 무용론, 해체론이 오래 전부터 정당이나 기업 일각에서 나오고 있는 현실입니다.
나는 노사정위원회에 큰 기대를 걸었었고 지금도 걸고 있습니다. 그 문제에 관해 언론을 통해 아직 이 장관의 견해를 들을 기회가 없었군요. 그 방식을 흔히 조합주의(코포라티즘·corporatism)라고 하지요. 네덜란드 등 북유럽국가들에서 성공사례를 보였다고 참고로 합니다. 북유럽의 경우와 우리는 사정이 매우 달라 그대로 따를 수 있을지에는 의문이 없지 않을 수가 없을 듯도 합니다. 우선 바탕이 되는 문화(정치문화, 대화문화)가 다를 것입니다. 또한 아주 구체적으로는 그들 나라에서는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이 중요 정당으로 자리잡고 있어 노사정합의를 정치권력적으로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이 장관이 전문가라 잘 알고 있어 아마추어적 언급은 줄이겠습니다. 그러나 아무튼 노사정위원회와 같은 대화의 창구는 꼭 필요하다고 봅니다. 내가 기억하는 협상의 원칙에 "Keep options open(선택지를 열어 두어라)"라는 게 있습니다. 길을 열어두는 것이지요. 민노총 소속의 극히 일부지만 전국공무원노동조합(전공노)이 들어왔다는 최근 보도인데 민노총 자체가 복귀하도록 설득에 노력하십시오. 결국 민노총도 돌아오게 될 줄 압니다.
노사관계란 역학관계지요. 노사의 이해관계는 우선은 대립할 수밖에 없고 힘겨루기를 통해 타협하게 되는 것이지요. 정부는 공정한 조정자입니다. 그 '공정' 운운도 하기는 식상한 이야기입니다. 노동부장관으로서는 당면한 정당정치적 차원의 정치적 판단만이 아니라 그 밑바탕을 이루는 더 근본적인 정치적 판단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볼 때 노동부장관은 차원이 다른 정치인입니다.
재임 시의 경험을 하나 더 말하면 당시 철도기관사들이 불법파업을 하여 '법과 질서'가 강제될 때 그들의 고충을 충분히 검토하여 임금인상 등 들어줄 것은 들어주는 동시에 '법과 질서'의 집행을 하도록 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에게도 퇴각의 명분을 준 것이지요. 나는 그때 "커텐을 쳐준다"는 표현을 썼습니다. 당시의 정재석 경제부총리와 최훈 철도청장이 함께 애를 썼습니다.
MB도 '법과 질서'를 우선 앞세우고는 있지만 총체적인 노사관계는 그에게도 새로운 도전일 것입니다. 현대건설에서 익숙해진 강압적 자세나 노조파괴적 술수가 지금의 많이 민주화된 사회에서는 통하지 않는 것은 자명합니다. 이 장관은 물론 그러리라고 봅니다만, 버릇을 고치겠다는 검찰이나 경찰이 항용 갖는 태도는 행여라도 갖지 말고, 사회적 약자인 노동자들에 대하여 측은지심을 바탕에 깔고 대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임할 때 노동자들도 당장은 몰라도 시일이 지나면 그러한 정부측의 자세에 마음속으로 감동을 느끼거나 최소한 어떤 공감을 하게 될 줄로 압니다.
내가 끝으로 조언하고 싶은 것은, 너무 거창한 논리구조(메타-논리라 할까요)의 천명을 아꼈으면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결국 자기구속적이 되고 사안의 해결에 별로 도움이 안될 것입니다. "말로서 말이 많으니…"하는 격이 될 것 같습니다. 오히려 구체적 사례 하나 하나를, 그러니까 케이스 하나 하나를, 냉정히 과학적으로 검토하여 성실히 해결해나가는, 그러한 축적이 쌓여나갈 때 지나놓고 보면 그게 훌륭한 길이 될 것입니다. 자주 쓰는 말대로 왕도(王道)가 없는 게 아닙니까. 그렇게 하다 보면 MB의 시각(視角)도 점차로 결국은 바뀌게 될 것이라고 내다보는 것입니다.
이영희 장관, 마치 그 자리를 위하여 노력해온 듯한 평생의 축적을 유감없이 발휘해주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다음에 노동부의 OB로서 유쾌하게 담소하는 기회를 갖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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