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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부차기 없어 다행… 北주장과의 일화 못잊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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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부차기 없어 다행… 北주장과의 일화 못잊어"

[인터뷰]첫 남북 A매치 '시상대 해프닝'의 주인공 김호곤

78년 방콕 아시안게임 축구 결승전. 분단 이후 남과 북의 첫 축구 A매치가 열렸다. 피말리는 연장승부까지 펼친 끝에 결과는 0-0 무승부. 남북한 주장은 시상대 제일 윗 자리에 서야 했다. 당시 김호곤 주장(현 대한축구협회 전무이사)은 북한 김종민 주장에게 시상대에 먼저 올라가라고 양보했다. 시상대에 먼저 자리잡은 김종민은 김호곤 에게 자리를 내주지 않았다. 김호곤은 겨우 비집고 올라가 자리를 잡았지만 뒤에서 북한 골키퍼 김광일이 미는 바람에 시상대에서 떨어졌다. 첨예한 '체제 경쟁'을 하던 남북한의 긴장관계를 여실히 보여주는 부분이었다.

아시안게임 폐막식을 앞두고 준비에 분주했던 태국의 대회 관계자들도 얼굴을 찡그렸다. 다시 시상대에 선 김호곤은 김종민의 어깨에 자연스럽게 손을 올리며 "다른 사람들이 다 우리를 주시하고 있는데 웃으면서 포즈나 취해 주자"고 제안했다. 조금 뒤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자 두 선수는 웃음을 보였다. 위험천만했던 남북 축구 대결은 이렇게 마무리 됐다.

北 GK가 뒤에서 밀어 시상대 아래로 떨어진 김호곤

서울 신문로 축구회관 6층 집무실에서 만난 김호곤 전무는 거침없이 이 역사적 남북대결에 관한 얘기를 했다. "그 때만 해도 북한 축구가 상당히 강했어. 동구권 축구와 자주 접해서 그런지 실력이 상당했지. 북한과 경기를 한다고 해서 상당히 긴장할 수밖에 없었어. 4년 전 테헤란 아시안게임 때는 우리가 북한을 피하기 위해 쿠웨이트에 일부러 졌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였어. 난 당시 선수였으니까 정확히는 모르지만 말야".

78년 남북대결 때 주장 완장을 차고 있던 김 전무는 경기 전 선수들에게 당부를 했다고 했다. "절대로 우리는 페어 플레이를 해야 한다. 북한 선수가 넘어지면 일으켜 세워 줘라". 김 전무는 "시상대 해프닝이 있었지만 남북이 공동우승을 한 게 좋았어. 승부차기까지 가서 1,2위를 가렸으면 이 경기가 그렇게 내 기억에 오래 남아 있지 못했을지도 몰라". 아직까지도 김 전무는 자택에 시상대에서 김종민 주장과 같이 웃고 있는 사진을 모셔 두고 있다고 했다.
▲ 시상대에 올라 웃으며 포즈를 취한 김호곤(왼쪽)과 김종민(오른쪽)ⓒ연합뉴스

"사진에서 보면 북한 김종민 주장은 해맑게 웃고 있던데요"라고 기자가 묻자, 김 전무는 "다행스럽게도 내 제안을 잘 받아 들였지. 그런데 그 친구는 북한이 이길 줄 알았을 거야. 경기 전후에 북한 선수들에게 카메라 들이대면 육두문자를 섞어가며 "카메라 깨부순다"고 윽박지르기도 했어"라고 말했다.

"얘기 들어보니 김종민 씨는 이미 돌아가셨다고 하더군. 한 번 다시 만나 봤어야 했는데 아쉬워". 김 전무는 김종민 씨가 팀을 이끌고 일본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만나려고 했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아 못만났다고 했다.

통영중 특별반 출신의 '생각하는 수비수'

경남 통영에서 태어난 김호곤 전무는 통영중 특별반에 있었다고 했다. "특별반이 6반이었을 거야. 거긴 경남고, 진주고, 부산고 이런 명문고로 갈 만한 학생들이 있었지. 나도 공부를 곧잘 했었어. 그런데 아버지가 우체국장을 하셨는데, 6남매를 다 타지에 보내 공부시킬 형편이 안됐지. 결국 나는 통영고에 갔어. 그때 좀 공부를 게을리 했지".

김호곤 전무가 축구를 시작한 건 고등학교 2학년 때다. 초등학교에서만 정식으로 축구를 했던 김 전무는 주위의 권유도 있었고, 또 본인도 축구를 하고 싶어 동래고등학교로 전학을 갔다. 하지만 계속 축구를 해 온 다른 동료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는 역부족이었다. "아버지께 다시 전학간다고 했었지. 달리기는 내가 1등이었는데 축구 실력은 다른 선수들과 하늘과 땅차이 였어. 그런데 정사용 당시 동래고 교장 선생님께서 아버지를 설득하셨지. "호곤이는 머리가 좋으니 충분히 축구도 잘 해낼 수 있다"는 말을 하셨다고 들었어".

"그 때부터는 정말 축구에 푹 빠졌지. 경기 중에 누가 교체됐는지도 기억을 못 할 정도로 말야". 뒤늦게 축구를 시작했지만 이 같은 노력으로 그는 청소년 대표를 거쳐 대표팀 수비의 핵으로 진화했다.

김 전무는 선수시절 '생각하는 수비수'라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수비수는 수동적일 수밖에 없자나. 근데 내가 볼 위치 예측 능력이 좀 괜찮아서 그런 얘기도 들었나봐. 준비를 안 하고 공격수에 끌려가면 이미 그 싸움은 진거야".

태극마크를 달았던 초년병 시절을 제외하면 김호곤 전무는 항상 주전이었다. 그런데 이스라엘과의 78년 월드컵 예선전 때 감독의 부름을 받지 못했다. "내가 주장인데 명단에 없는 걸 보고 낙심했어. 조금 뒤에 이렇게 흔들리면 안되겠다는 생각을 하고 다른 선수들 볼도 주워 주고 했어. 지금도 왜 최정민 감독이 나를 기용 안 했는지 모르겠어.한 가지 이유가 있다면 내가 새벽에 딱딱한 바닥에서 줄넘기를 하는 연습을 안 해서 그랬을지도 몰라. 발목이 좀 안 좋다는 느낌이 있었거든". 하지만 김 전무는 "그 뒤에 일본과의 홈 경기에서 다시 대표팀의 주장으로 복귀했다"고 했다.

"내가 가진 추억 지금 선수들도 만들 수 있는 기회였는데..."

"대표팀에서 제일 아쉬운 경기가 어떤 경기셨습니까"라는 질문에 김 전무는 호주와의 74년 서독 월드컵 예선 경기를 주저 없이 꼽았다. "원정가서 0-0으로 비겨 한국의 본선 진출 가능성이 높았어. 우리나라에서 경기를 할 때 두 골을 먼저 넣어 이긴 줄 알았는데 두 골을 내줘 결국 비겼지. 운명의 한 판을 홍콩에서 해야 했어. 그런데 이미 경기 전부터 우리의 사기가 너무 떨어졌어. 공항에서 우리는 머리를 푹 숙이고 있었지. "누가 잘 했네, 잘 못했네"같은 그런 얘기까지 나왔어. 반면에 호주 선수들은 노래까지 부르며 사기가 충천했지. 그 때 월드컵에 나갔으면 한국 축구가 더 일찍 발전했을 텐데말야."
▲ 첫 남북 A매치 '시상대 해프닝'의 주인공 김호곤 대한축구협회 전무ⓒ프레시안

그는 "한국 축구가 명품 수비수를 키우는 데 좀 더 노력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2002년 월드컵 때 후보라도 젊은 수비수가 있어야 했는데 말야. 다 베테랑 선수들만 나갔으니 공백이 생길 수밖에 없었지. 홍명보 같은 대형 수비수가 나와야 국제대회에서 성적을 낼 수 있어. 다들 공격수가 되기를 원하는 게 문제지. 이런 풍토를 하루 아침에 바꾸지는 못하겠지만 꾸준히 개선해야 해".

오는 26일 펼쳐지는 남북 축구 대결에 대해 김 전무는 이렇게 말했다. "사실 인조잔디 구장이라는 문제때문에 걱정했지만 북한과의 월드컵 예선전이 중국 상하이에서 열리게 돼서 안타까워. 평양 김일성 경기장 인조잔디가 독일거라고 하더라구. 비슷한 인조잔디가 여기도 당진과 통영에 있다고는 하지만 대표팀 훈련은 어쩔 수없이 파주에서 해야 하니까. 부상위험이 큰 것도 문제였지. 그래도 대국적 측면에서는 평양에서 했어야 했어. 평양에서 남북한이 공식 A매치를 갖기가 쉽지도 않잖아. 물론 내가 뛰던 시대와는 남북한의 긴장감이 달라지기는 했지만 내가 가진 추억을 지금 선수들도 만들 수 있는 기회였는데...". 김호곤 전무는 30년 전 추억을 떠올리는 듯 말끝을 흐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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