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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축구는 '발'로 하는 농구…8mm 필름이 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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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축구는 '발'로 하는 농구…8mm 필름이 코치"

[인터뷰]66년 월드컵 유일한 현장기자 장행훈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이 열리기 전 북한 축구가 8강에 오르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당시 잉글랜드 도박사들은 북한에 참가 팀 중 가장 낮은 우승확률 1%를 책정했을 정도다.

하지만 라오스의 감독 장 뱅상은 북한 돌풍을 직감한다. 1965년 북한과 호주의 경기를 지켜봤던 뱅상 감독은 북한을 일컬어 "내가 대표로 뛰었던 프랑스의 전성시대보다 우수한 능력을 가졌다"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FIFA(국제축구연맹) 스탠리 라우스 경도 "북한은 결코 얕잡아 볼 수 없는 팀"이라고 경계의 눈초리를 보냈다.

평균신장 165cm의 단신 팀이었지만 3년 간 지옥같은 훈련을 해 주력과 체력에 관한 한 세계 최강이었던 1966년 북한 축구의 황금시대를 거론할 때 빼놓아서는 안 될 사람이 있다. 바로 장행훈 신문발전위원회 위원장이다. 장 위원장은 국내 기자로는 유일하게 66년 월드컵 현장을 취재했던 주인공이다.

중정요원이 "북한 정보 캐오라"고 지시하기도

장 위원장은 66년 월드컵 취재를 하게 된 배경을 설명했다. "영국 정부 장학생 자격으로 웨일스에서 국제정치학 공부가 거의 끝날 무렵이라 월드컵 취재 신청을 낼 수 있었지. 그런데 막상 회사(동아일보)에서 취재하라는 지시가 조금 늦게 떨어져서 숙박시설을 구하는 데 애를 먹었어. 겨우 정부관리로 영국에서 공부하고 있던 다른 한국 친구과 방을 같이 쓰게 됐는데 그 친구는 매트리스를 바닥에 깔고 자고, 나는 매트리스가 없는 침대에서 잤지. 쇠 스프링 위에서 자려니 어찌나 허리가 아프던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해".

"한국 기자로는 유일하게 현장을 보신 거죠?"라고 묻자 그는 "나 말고 한 명이 더 있었을 거야. 그런데 그 친구는 기자가 아니라 사실 남산 중앙정보부 요원이었지. 북한을 취재할 때 난 모른척 해줬지만 말야. 실제로 남산에서 꽤 많은 사람들이 왔었어. 그 중 한 명은 나보고 '북한 정보를 캐오라'는 말까지 하더구만"이라고 했다. 실제로 냉전시대의 치러진 1966년 월드컵에 북한이 출전하는 것은 한국으로서는 막아야 했던 일 가운데 하나였다. 한국 정부는 영국에 로비를 해 북한의 출전불허까지 요청했었다. 이런 상황에서 중정 요원들이 월드컵 현장에 파견된 것은 그의 말처럼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북한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당시 북한 김기수 단장도 "남산에서 많이들 오셨다면서요"라는 게 첫 그에게 던진 첫 인사였단다.

그는 북한이 외부와의 접촉을 피하기 위해 숙소도 미들스버러 외곽에 떨어진 곳에 정했다고 했다. "미들스버러 공항 옆에 있는 미완성 호텔을 숙소로 썼었지. 조직위원회가 지정해 준 호텔을 북한이 아마 4번이나 보이코트 했을 거야. 북한은 선수들의 외출도 철저하게 금지시켰고, 연습도 공개적으로 하지 않았어".
▲ 한국기자로는 유일하게 66년 북한의 월드컵 8강 돌풍을 지켜 본 장행훈 현 신문발전위원회 위원장ⓒ프레시안

'피는 물보다 진하다'

"북한을 취재하는데 힘들지 않았냐"는 질문에 그는 "특별히 힘든 건 없었어. 북한도 내게 적대감을 보이지 않았지. 소련하고 북한이 경기할 때 소련 선수들이 너무 거칠게 플레이를 했어. 그때 내가 '소련 선수들 가만히 놔둬서는 안되겠어'라고 응원하니까 북한 임원들도 동조했지"라고 밝혔다. 실제로 소련과 북한의 경기는 소련이 무려 29개의 반칙을 했을 만큼 격투기를 방불케 한 경기로 월드컵 역사에 기록돼 있다.

장 위원장은 '피는 물보다 진하다'라는 말을 북한 팀 취재를 하면서 실감했단다. "북한 팀 임원인가 한 명이 성곡 김성곤 씨의 보성전문학교 동창이라는 거야. 그래서 남한에 대해 관심이 상당히 많더구만. 내게 이것저것 많이 물어봤지. 정치적 얘기만 안하면 우리는 사실 같은 민족이니까 말은 잘 통했어. 한 번은 내가 북한 팀 임원보고 '김일성 비슷하게 잘 생겼다'라고 하자 북한 팀 전원이 일제히 굳어져 버리는 거야. 어떻게 해야 하나 걱정했는데 한 북한 팀 관계자가 '장 형은 영국서 공부해서 단수가 높아 얘기를 잘 못하겠어'하고 우스갯 소리를 해서 그냥 넘어갔지".

장 위원장은 몇몇 기억나는 북한 팀 임원들을 설명해 줬다. "북한 팀 통역은 한국 사람인데 독립운동하다가 2차대전 때 영국 해군에 입대해 영국 출신 부인을 얻었던 조남해라는 분이 해줬어. 아 그리고 말야 대구출신의 유명한 씨름선수 나윤출도 있었는데, 대구 10.1 폭동 때 순경 몇 명 때려 눕히고 북으로 갔던 친구야. 그 친구가 북한 팀 임원으로 월드컵에 왔더라구. 한 가지 재밌는 건 경기장에서 보면 북한 임원들은 다 하나같이 바바리 코트 차림이었다는 거야. 그래서 내가 '요즘 이게 평양 유행입니까?'라고 했더니만 그냥 웃더라구".

북한 임원들과 친해진 장 위원장은 북한 팀이 연습하는 광경을 지켜 본 적도 있다고 했다. "일사불란하게 훈련을 하더라구. 골키퍼 한 명은 두 시간 동안 뒤로 드러 누웠다가 일어나는 훈련을 정말 한 번도 쉬지 않고 하는 걸 봤어. 우리나라 선수라면 사실 10분도 이렇게 못했을 거라고 같이 온 한국 축구인들이 혀를 내두르더군. 다른 선수들도 지친 모습도 보이지 않고 부지런히 뛰어 다니더라구. 북한이 월드컵에서 보여 준 체력과 스피드는 사실 엄청난 연습에서 나온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지".

北, 8mm 필름 만들어 전략까지 세워한봉진의 돌파와 크로스 잊지 못해

하지만 장 위원장은 체력과 스피드가 북한의 8강 돌풍의 전부는 아니였다고 했다. "정말 깜짝 놀란건데 북한은 경기장면을 8mm 영화로 만들어서 다음 시합하기 전에 상대 팀 분석도 하고 자체 전략을 짤 때 쓰는 걸 봤어. 이처럼 북한은 잉글랜드 월드컵을 위해 모든 걸 다 쏟아 부었어. 북한이 이탈리아를 꺾고 8강에 오른 뒤에 이 필름이 어떻게 유통됐는지는 모르지만 웸블리 구장인가 그 앞에서 팔고 있는 것도 봤어. BBC에서 2시간짜리 북한 특집 방송을 할 정도로 북한 축구는 인기가 좋았지. 축구에 환장하는 영국 사람들은 이 필름을 많이 샀을 거야".

"가장 기억나는 북한 선수가 있냐"고 물었더니, 장 위원장은 "다들 이탈리아 전에서 결승골을 넣은 박두익을 꼽지만 나는 오른쪽 윙인 한봉진이 가장 인상적이었어. 어찌나 빠르고 저돌적이었던지 수비수가 몇 명 따라 붙건 간에 어떻게든 크로스를 올려 줬지. 그의 정교한 크로스와 북한의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패턴 플레이를 보면서 난 '축구는 발로 하는 농구'라는 생각을 하게 됐어. 사실 박두익이 골을 잘 뽑기도 했지만 한봉진의 기관차같은 측면돌파가 없었다면 북한 8강 돌풍은 요원했을거야"라고 했다.

그는 포르투갈과의 경기가 너무 아쉽다고 했다. "경기시작 채 1분도 안 돼서 박두익이 중거리 슛으로 골 망을 흔들었어. 북한 팀 임원들은 몇 번이나 펄쩍펄쩍 뛰었고, 팬들은 의외의 경기흐름에 어리둥절 했지. 그 때는 박두익의 슛이 너무 빨라 대체 속도가 얼마나 될까 다른 나라 기자들도 그렇고 많이 궁금해 했어. 한 번 공을 잡으면 선수들이 포지션에 상관없이 문자 그대로 파상공격을 펼치는 북한이 참 잘 했는데 말야. 에우제비오를 전담 마크하지 못하고 풀어 놓은 게 화근이 됐지. 북한이 그렇게 자랑하는 체력도 점점 떨어지고. 에우제비오에게 4골이나 먹어 3-5로 졌지만 에버튼의 구디슨 파크를 찾았던 영국 팬들은 북한 선수들에게 뜨거운 박수를 보내줬어".

한국과 이탈리아의 축구를 바꿔 놓은 북한

북한의 월드컵 8강 진출은 한국과 이탈리아 축구를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한국은 북한의 대활약에 자극 받아 당시 김형욱 중앙정보부장 주도로 양지팀을 만들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처조카인 장덕진 씨가 대한축구협회장이 된 것도 이런 이유에서 였다. 66년 북한의 월드컵 8강 돌풍이 있기 전 한국에서는 김기수가 이탈리아의 니노 벤베누티를 꺾고 한국 최초의 세계 타이틀을 획득했었다. 당시 국민들이 김기수의 쾌거에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박정희 대통령은 '스포츠 육성'에 힘쓰게 됐다. 한 마디로 한국형 스포츠 국가주의의 탄생이었다. 이런 과정에서 북한의 월드컵 8강은 '반공 애국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박정희 정권이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었다.

이탈리아는 무명의 북한에게 패하자 국내리그의 외국인 선수 철폐령을 내렸다. 외국인 선수가 많아 이탈리아 축구의 전력이 떨어졌다는 이유에서 였다. 이같은 외국인 선수 철폐령은 사실상 1980년 세리아 A가 한 팀당 한 명의 외국인 선수보유를 제도화 시키면서 역사 속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1966년 월드컵에서 이탈리아 대표팀을 이끌었던 에드문도 파브리 감독은 입국할 때 팬들의 토마토 세례를 당했다. 그는 이탈리아의 골든보이 지안니 리베라와 '골 넣는 수비수' 지아친토 파케티를 데리고도 북한에 패한 '비운의 감독'이라는 꼬리표를 달게 됐다.

장 위원장은 북한 축구가 바꿔 놓은 게 이런 것 말고도 또 있다고 했다. "66년 월드컵 취재를 마치고 내가 한 동안 인기가 매우 좋았지. 만나는 사람마다 북한 축구를 물어 보는 거야. 시대가 시대인지라 신문에는 그리 비중있게 나지는 않았지만 꽤 많은 사람들이 단파방송으로 북한 축구의 활약을 잘 알고 있더라구. 더군다나 북한 축구가 이탈리아를 이긴 장면이 담긴 필름이 서울에서도 유통됐다더군. 북한 축구의 돌풍 때문이었던지 그 뒤에 내가 신문사 외신부 소속으로 일하게 됐는데 시간이 날 때 동료들과 자주 축구를 했어. 회사에서도 지원해주고 해서 다른 부서와 시합도 자주 했지. 다른 신문사들도 이걸 보고 팀을 만들었고, 이렇게 만들어 진 게 기자협회 축구대회야".

장 위원장이 66년 월드컵에서 북한을 취재한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영국의 한 일간지에서는 "한국의 한 기자가 북한 축구를 취재하느라 애를 먹고 있다"는 기사를 내보내기도 했다.

그는 인터뷰를 마칠 때 쯤 오래된 봉투 속에서 1966년 월드컵 취재증을 찾아 꺼내 보여주기도 했다. 남들에겐 별 것 아닐지 모르는 취재증이겠지만 북한과 북한 축구에 대한 소중한 추억을 만들었던 그에겐 기억에서 지울 수 없는 보물같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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