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문화는 삶이고, 그래서 문화는 경제이며, 그래서 문화는 커뮤니케이션이다. 최대한 넓게 퍼질 때 아름답고, 또한 차이를 준중하면서 동시에 공통된 것을 찾아보는 게 옳은 우리의 일상생활, 그게 바로 문화다. '공(公)'과 '공(共)' 자는 문화의 '필수 구성요소'다. 요컨대 사회성과 민주성이 문화의 핵심이다.
문화에 대한 시각은 인간에 대한 예의, 민주주의 함량을 보여준다
이렇기 때문에, 문화를 일자리 창출을 위한 경쟁력 있는 미래 산업 정도로 인식하는 후보에게 '문화대통령'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기는 어렵다. 연예인이나 '문화예술인'들의 지지를 끌어 모으는 데 혈안인 후보에게 과연 문화에 관한 기본 개념, 기초적 이해의 틀이 있는지 의심해 볼 만하다.
정말 그건 아니다. 문화란 인˙민의 생활 그 자체이고, 인˙민의 생존 바로 그것이며, 인˙민의 언론이다. 그러한 문화에 대한 시선은 결국 인˙민을 대하는 후보자들의 시선을 드러내고, 어느 영역보다도 인간과 사회에 대한 예의를 말해주며, 민주주의에 대한 의식의 함량을 보여준다. 이런 점에서 따져봐야 한다. 정확히 이런 관점에서 대선 후보들의 미디어 관련 정책을 비교해 볼 것이다. 미디어는 사회적 교통관계의 요로로서, 커뮤니케이션 즉 문화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외모와 걸맞지 않게 '깜찍'한 경제공화당 허경영 후보가 미디어 분야에서 또 어떤 신선한 아이디어를 내놓았는지는 잘 모르겠다. 며칠 남지는 않았지만, 그 짧은 시간에 모두의 상상을 초월한 비장의 발상, 대중의 허를 찌르는 돌발적 구호를 미디어 분야에서도 내놓을지 누가 알겠는가? 민주노동당을 낡은 진보라 비판하는 금민 사회당 후보도 마찬가지다. 진보 사회, 사회 진보를 꿈꾸는 그가 어찌 그 결정적 채널인 미디어에 관해 아무런 정책 프로그램도 준비해두지 않았겠는가? 제대로 말해주지 않으니 제대로 알 길 없고, 그래서 소개하지 못하는 결례를 양해해주기 바랄 따름이다.
한편 주제별로 볼 때, 한미자유무역협정 체결 당시 논란이 많았던 국정홍보처 폐지 문제, 기자실 통폐합 문제 등도 대단히 중요하지만, 이 글은 신문·방송·통신 등 주요 매체와 연관된 쟁점에 집중할 것이다.
권영길…미디어 공공성 확립에 가장 적극적
좌에서 우로 옮겨가 보자. 주요 대선후보로 좁혀서 보면, 예상대로 민노당 권영길 후보가 가장 왼쪽에 서 있다. 여론 다양성과 언론 공공성, 방송 공영성이 미디어 분야 정책 슬로건의 주안점이다. 우선 신문시장 내 여론 독과점 문제나 재벌신문/신문재벌의 여론독점 문제를 고려해 신문과 방송의 교차소유가 결코 허용돼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취한다.
이는 대선미디어연대 등 미디어운동진영이 내놓은 신문방송 겸영금지의 개혁의제와 맥을 같이 한다. 늘 지적되어 왔던 수구신문에 의한 여론 왜곡, 그리고 최근 삼성 X파일 사건이나 <피디수첩>, <시사저널> 사태 등으로 부각된 자본권력에 의한 여론통제의 위기 정세를 반영한 정책 판단이라고 하겠다. 조중동의 방송 소유는 자연스럽게 재벌의 지상파 TV 소유로 귀결될 것이라는 비판적 의식을 따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텔레비전 수신료 인상 문제에 관해 권 후보는 시청자와의 소통 및 시민사회와의 합의를 전제로, KBS가 아닌 공영방송체제 전체의 기반강화라는 대승적 이해를 전제로 일찌감치 지지를 표시한 바 있다. 이 또한 '조건부 인상 지지'의 의사를 표시한 문화연대를 비롯한 시민사회의 입장과 원칙적으로 일치한다.
권 후보는 말 그대로 오랜 공영방송론자다. 방송의 공적인 경영이 방송의 공익적 서비스를 가능케 할 것이며, 거꾸로 방송의 사적인 경영은 방송의 상업적 서비스로 귀결될 것이라는 논리다. 이러한 관점은 최근 불거진 KBS-2TV와 MBC의 '민영화', 정확히 말해 사영화 논의에 대한 원천적인 반대로 이어진다. 방송의 '자유화', 탈규제화는 민주적 공적영역의 소멸, 합리적 언론사회의 위기를 초래할 것이라는 게 권 후보의 결정적 문제의식이기 때문이다.
미디어 공공성을 민주수호 및 사회진보의 초석으로 간주하는 권 후보가 방송통신융합기구 구성에 있어 '무소속 순수합의제' 모델을 고수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선택이라고 하겠다. <미디어스>에 보낸 답변서에서 그는 "미디어 독립성과 공공성 확립, 시청자 주권 보장이라는 원칙이 제대로 구현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통합기구법안의 핵심"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일반 부처와 같은 이른바 '독임제'로는 자본으로부터 방송통신 관련 정책 및 규제 기능을 자율적으로 독립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문국현·정동영…어정쩡한 철학, 헷갈리는 논리
사실 진흥 업무는 정부부처가 맡고 정책과 규제는 민간 합의제 위원회가 담당해야 한다는 큰 틀에 창조한국당 문국현 후보, 그리고 통합신당 정동영 후보도 원칙적으로 동의를 표한다. 산업논리 혹은 시장논리로 기울어지지 않도록 보편적 서비스의 공공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각론을 들여다보면, 미디어 분야 문 후보와 정 후보의 입장은 오른쪽으로 약간, 또는 크게 옮겨가 있다. 여러 가지 이유로 공약 개발이 부진한 문 후보가 그래도 공영론자에 가깝다면, 거대 여당의 정 후보는 오히려 시장론자와 절합해 있다.
예컨대 공영방송의 사영화 문제에 관해 문 후보는 공식적인 반대의견을 내놓았다. '시청각서비스 개방'을 전제로 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찬성한 것에 비춰보면 좀 의외다. 반면 정 후보는 '시기상조'라는 애매한 뉘앙스를 남긴다. 적절한 시기에는 가능하거나 필요하다는 뜻인가? '국민적 합의'를 강조하는 것도 수상쩍다. 당장은 아니지만 적절한 시기 논의를 시작하지 않을 수 없다는 의지로 읽히며, 이는 시장개방과 탈규제, 사영화의 신자유주의 대세를 주도해 온 현 정권과 여당 그리고 후보자의 이념 성향에 비춰볼 때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신문방송 겸업에 대해서도 정 후보는 '시기상조'론인 듯하다. "신문 독점이 철폐되고 다양성이 보장된 이후에 방송 겸영을 허용해야 한다"는 정청래 의원의 발언이 이를 대변한다. 허용과 금지의 선택지로부터 빠져있다. 현 정권의 미디어 정책이 바로 이런 어정쩡한 철학, 복잡한 심경, 헷갈리는 논리 때문에 색깔 난잡하게 꼬이고 결과적으로 실패한 것 아닌가?
그런데 갈라지던 입장은 수신료 인상 문제에서 다시 하나로 수렴된다. 정, 문 후보 모두 권 후보와 같이 인상을 지지한다. 그런데 더욱 흥미로운 것은 민주당 이인제 후보를 빼고 한나라당 이명박이나 무소속 이회창 후보도 인상에 동의한다는 점이다. 다만 앞선 세 사람이 '사회적 합의'를 강조한다면, 뒤 두 후보는 'KBS 공정성'과 '경영 합리화'를 내세우는 게 틀린다. 전제가 틀린 셈이며, 그 전제가 기댄 방송 철학과 이념 또한 결정적으로 어긋나고 있다.
이명박…주저없이 명확한 미디어 시장개방, 그래도 정책권은 정부가?
맞다. 미디어와 언론을 바라보는 시선은 후보자의 이념적 성향을 정직하게 드러낸다. 방송 공공성, 언론 자유, 문화 다양성의 화두를 피해 갈 수 없고, 이 지점에서 각 진영은 위장할 수 없는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노정하게 된다.
이러한 점에 보자면,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의 미디어 분야 공약은 매우 원론적으로 분명하고 또 일관된다. 주저 없고 정확하다. 규제완화와 시장개방, 자유화의 신자유주의 원칙을 미디어 분야에도 똑같이 적용할 태세다.
'문화 예외주의'란 없다. 미디어 공공성보다는 미디어의 상업적 가치가 인정받으며, 다양성이 아닌 경쟁력 강화가 정책의 목표점이 된다. 선한 시장이 악한 규제를 철폐할 것이고, '소비자 선택권'이 시민의 주권을 대체한다. 한마디로 개념이 다르다. 앞선 '공정성'이라는 것도, 예컨대 권 후보의 정의와는 한참 거리가 있는 것이다.
중간광고 도입을 적극 지지하는 것도 공영성 강화를 염두에 둔 진보적 미디어운동권의 고민의 결과와 전혀 다르다. '방송통신 정책권을 일원화해서 독임제 부처가 담담해야 한다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방송위원회와 같은 위원회 기구가 정책권을 갖는 것은 '기형'이라는 발상이 자리하고 있다.
정부부처가 미디어 관련 정책권을 갖는 게 정상이라는 논리인데, '작은 정부'를 내세우고 또 조직 통폐합을 기획하면서 왜 이 부문에서 유독 정부기능의 재강화를 꿈꾸는 것일까? 신자유주의 시대 국가의 역할이 자본의 지원에 있다고 할 때, 이러한 기능 확대는 결국 통신재벌과 전자재벌, 매체자본을 위한 서비스 확대가 아니겠는가? 정통 보수를 자처하는 이회창 후보가 사영화 논리에 설득력이 없다고 본 반면, 이명박 후보는 국공영 채널 수를 줄이는 '구조개편' 안 설계를 사실상 안팎의 전문가들에게 주문했다.
판단의 결과는 우리에게 돌아올 것이다
이명박 후보가 '21세기 미디어위원회'라는 곳에 구체적 방안 마련을 주문했고, 방송위원회 안에도 보수적 언론학자를 위원장으로 한 '미래의 방송' 특별위원회라는 게 공식 출범했다.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분위기가 참 묘하게 급변하고 있다. 판의 속성에 걸맞게, 득세하는 권력을 쫒는 기회주의적인 움직임들이 이곳저곳에서 포착된다.
참 민첩하다. 패러다임의 급격한 변화를 알리는, 새 판이 짜일 거라는 신호인가? 이미 모든 게 끝났다는 것인가? 실제 선거는 며칠 안 남았고, 최소한 여론조사가 말해주는 대세는 이미 기울어진 듯 보인다.
그래도 아직 채 결정하지 못한 분들에게 몇 가지 선택지를 정리해 제시코자 했다. 이들 갖고 성에 차지 않는다면, 허경영이나 금민 후보의 홈페이지를 들여다보고 더욱 선택지를 늘여 볼 일이다. 만족스러운 답이 있는가, 옳은 답을 찾았는가? 답을 정할 시간이다.
판단은 전적으로 우리의 몫이다. 결과는 정권이나 권력, 정치 연예인들이 아닌, 먹고 자고 싸면서 살아가고 또 살아남아야 할 평범한 우리 보통 사람들의 운명으로 고스란히 이어질 것이다. 미디어와 문화, 커뮤니케이션의 문제를 삶 즉 경제와 무관한 것으로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옳은 경제, 바른 경제는 진실발언의 보호, 자유언론의 보장, 민주여론의 작동 없이 불가능하다.
진실을 구속한 시장, 언론을 검열하는 자본, 여론을 왜곡하는 경쟁은 '경제, 즉 먹고 사는 일, 즉 문화'를 치명적으로 위해한다. 포탈, UCC 선거규제 등의 문제도 매우 중대한 사안임에 틀림없다.
PC방에서 글을 마무리하는 이 시점에 이명박 후보의 BBK 관련 강연 동영상이 새롭게 유출됐다는 소식을 접한다. 왜 새삼 '방송 독립', '언론 자유', '저널리즘 해방' 같은 단어가 떠오르는 걸까? 말하지 못한, 억압된 진실의 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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