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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희망을 버리지 말자

[2007 대선이야기] 안팎의 도전, 그리고 진보개혁세력의 과제

지난 봄부터 여기 <프레시안> '2007 대선이야기'에 여섯 번의 글을 썼다. 이번 대통령 선거가 주는 의미와 과제를 내가 공부하는 사회학에 바탕을 두고 다양한 시각에서 검토해 보고자 했다. 월요일에 글이 게재된 후 독자들의 댓글들을 읽어보곤 했는데, 그 가운데 가장 아픈 지적은, 내가 중도진보 또는 개혁 세력을 지지한다면, 그들의 전략을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라는 주문이었다. 전적으로 옳은 이야기다. 이제 대선을 16일 앞둔 현재 나로서는 그 숙제에 답할 차례가 된 듯하다.

'신자유주의적 발전주의'의 명암

지난 글(10월 29일자)에서 말한 바를 다시 한 번 되풀이하자면, 이번 대선에서 보수 세력이 제시한 담론은 '신자유주의적 발전주의'다. 국부(國富)를 겨냥하는 발전주의의 목표에 국가 역할의 축소, 민영화 및 탈규제, 노동시장의 유연화를 강조하는 신자유주의를 결합시키고자 하는 것이 보수 세력의 새로운 발전 전략이다. '신자유주의적 발전주의'는 발전국가론이라는 우리 산업화가 갖는 경로의존성을 고려한 것이지만, 기본적으로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한국적 변형이라 할 수 있다. 대북정책에 대한 차이를 접어둔다면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와 무소속 이회창 후보의 전략 모두 바로 이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자장(磁場) 안에 놓여 있을 것이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다른 국가들의 역사적 경험을 고려할 때, 그 명암이 분명한 전략이다. 한편에서 볼 때, 기업에 대해 규제완화를 단행하고 노동시장에 대해 유연성을 높이며 감세를 포함한 최소 국가를 지향한다면, 단기적으로는 일자리가 창출되고 경기가 다소 활성화되며 성장률은 어느 정도 높아질 수 있다. 1980년대의 대처 정부, 최근의 프랑스 사르코지 정부와 유사한 길을 걸어가게 될 가능성이 적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지금 우리 사회가 직면한 일자리 창출, 소득분배 개선, 사회통합 제고 등과 같은 문제들을 결국은 해소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고용을 다소 늘릴 수 있을지 몰라도 정규직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의 양극화는 더욱 강화될 것이고, 시민사회로 부담을 이전한다 하더라도 복지 수준은 정체하거나 후퇴할 것이며, 결과적으로 정부와 대기업을 한 축으로 하고 진보적 정치조직 및 사회운동조직들을 다른 축으로 하는 새로운 대립 구도 속에서 사회통합적 자원들은 고갈될 것으로 보인다.

대외적, 대내적 도전

이 기획에서 이미 말한 바 있듯이(9월 24일자), '낙오자 없는 세계화'는 보수 세력의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맞서는 중도진보의 전략이다. '낙오자 없는 세계화' 전략은 현재 우리 사회가 직면한 세 가지 대외적, 대내적 도전에 주목한다.
▲ 2007 대선에 쏠린 눈과 귀. 사진은 한 후보의 유세에 모인 유권자들. ⓒ뉴시스

대외적 도전으로 먼저 꼽을 수 있는 것은 세계화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우리 사회에서도 세계화 시대가 본격화됐지만 지구적으로 무한경쟁, 승자독식 구조가 더욱 두드러지고 있다. 둘째, 기술혁신과 인적자원이 갈수록 중요해지는 지식기반경제로의 전환이 빠른 속도로 이루어지고 있다. 셋째, 우리 사회는 최근 이른바 '샌드위치 위기'에 놓여 있다. 일본이 헤이세이 불황을 딛고 활력을 다시 찾고 있으며, 중국, 인도의 추격도 만만치 않다. 특히 중국은 우리에게 기회인 동시에 위협이기도 하다.

대내적 조건 역시 중대한 기로에 있다. 첫째, 세계화 시대에는 정보·기술발전으로 인해 '고용 없는 성장'이 불가피하기 때문에 고용을 동반한 신(新)성장동력, 무엇보다 일자리를 동반한 성장 전략이 요청된다. 둘째, 개방에 따른 사회갈등도 불가피한 것으로 보인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둘러싼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대외개방과 대내복지의 선순환을 마련하는 것은 갈수록 중대한 과제가 되고 있다. 셋째, 남북관계 변화도 예상할 수 있다. 정통 보수 세력이 집권하지 않는다면 우여곡절은 있겠으나 평화협정 체결 또는 남북경제공동체 단계로 진전될 것으로 보인다.

'낙오자 없는 세계화'의 발전 전략

이런 대내외의 도전들을 고려할 때, 중도진보가 선택할 수 있는 새로운 발전전략은 앞서 지적한 '낙오자 없는 세계화' 또는 '지속가능한 세계화'다. 이 '낙오자 없는 세계화'의 핵심은 무엇보다 '이중의 선순환'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 성장과 분배의 선순환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대외개방과 대내복지의 선순환이다. 우리의 인구 및 경제 규모는 덴마크, 네덜란드, 스웨덴 같은 강소국(强小國)보다 오히려 영국, 프랑스, 독일과 같은 강중국(强中國)에 가깝다. 강중국들은 대기업과 중소기업을 동시에 발전시켜야 하며, 해외시장과 내수시장 또한 동시에 겨냥해야 한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성장과 분배의 선순환을 넘어서 대외개방의 이익을 대내복지의 투자로 선순환시켜야 하는 또 하나의 과제를 우리 사회는 안고 있는 셈이다.

'이중의 선순환'은 양대 전략으로 구체화할 수 있다. 첫째는 일자리 창출의 성장 전략이다. 세계화와 정보 시대에 '고용 없는 성장'이 불가피하지만, 그래도 역시 좋은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는 일차적인 수단은 성장에 있다. 현재 우리 사회 고용률은 외환위기 이전 수준인 64% 정도를 회복한 상태이며, 따라서 소재부품산업, 기업 및 사회서비스업을 활성화하는 동시에 여성·청년·노인 친화적 일자리를 적극적으로 창출해 고용률을 선진국 수준인 70% 이상으로 올려야 한다. 더불어 외주용역 규제 등을 통해 비정규직 비율을 경제개발기구(OECD) 평균인 25% 정도까지는 줄여야 한다.

둘째는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상생 전략이다. 앞서 지적했듯이 우리 사회의 현재적 조건은 두 세 개의 대기업이 경제를 주도하는 강소국 모델로는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는 데 있다. 대기업은 대기업대로 글로벌 경쟁력을 강화해야 하며, 중소기업은 중소기업대로 혁신과 투자를 통해 경쟁력을 높이는 강중국 모델을 적극적으로 수용할 필요가 있다.

투명성 강화를 조건으로 부분적인 규제완화를 추진해 대기업의 경쟁력을 강화하는 동시에, 중소기업은 물론 중견기업에 연구개발(R&D)를 포함한 다각적인 지원을 강화해야 한다. 현재 우리 중소기업이 전체 고용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90%에 가까운 점을 고려할 때, 기술혁신과 투자, 하도급 비리 척결 등을 통해 중소기업의 경쟁력을 더욱 높여야 하는 것은 매우 시급한 과제다.

개방과 복지의 선순환

요컨대 세계화의 충격이 불가피한다면 능동적인 개방을 모색하되, 그 개방의 성과를 바탕으로 복지를 확충함으로써 사회양극화를 해소해야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증세를 추진하고 세출구조를 개혁하며, 교육혁신 및 직업훈련을 위한 적극적 복지정책과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안전망을 강화해야 한다. 그리고 이런 이중의 선순환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사회적 합의, 다시 말해 사회 협약을 적극적으로 모색해야 한다.

'낙오자 없는 세계화'의 과제가 물론 이것 뿐만은 아니다. '진보와 개혁을 위한 의제 27'이 강조한 바 있는 부패청산을 위한 투명사회의 실현, 교육개혁 등 사람 투자의 강화,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주거 복지의 실현, 남북한 평화공존체제의 모색, 그리고 고령화 사회의 적극적인 대응 등 현재 중도진보 세력에게 부여된 시대적 과제들은 결코 가볍지 않다. 세계화가 피할 수 없는 호랑이라면, 그 호랑이의 등에 용기 있게 올라타서 실현가능하고 지속가능한 발전전략 및 정책대안을 적극적으로 제시하고 또 과감하게 추진해야 한다.

비전 및 정책에 표를 던지자

많은 이들은 이번 대선이 정책대결이 사라진 최악의 대선이라는 평가에 주저하지 않는다. 나 역시 이런 주장에 대체적으로 동의한다. 정당정치의 기본을 뒤흔드는 이번 대선은 앞으로 우리 정치사회의 새로운 시험대가 될 것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지난 1년을 돌아보면 정치적 공방들이 난무했던 속에서도 비전과 정책은 꾸준히 발표돼 왔다. 그 동안 언론에 보도된 내용을 비교해 보면 이번 선거에서 비전과 정책이 완전히 실종된 것은 아니다.

그 결과가 어떠하든 이번 대선은 우리 사회 발전의 새로운 분지(分枝)의 지점이 될 가능성이 높다. 민주화 시대를 넘어선 그 새로운 길을 어떤 시대정신이 이끌 것인가는 이제 16일이 지나면 결정될 것이다. 혼돈스러운 지난 1년이었지만 중도진보 세력이 기회를 완전히 상실했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선거를 눈앞에 두고 누구나 하는 원론적인 이야기지만, 그래도 이제 서서히 인간다운 삶과 미래를 위한 비전 및 정책에 표를 던질 준비를 하자. 시인 김광규 선생이 노래하듯, 희망은 결코 휴지에 싸서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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