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는 정상에서 시작되고 기회는 바닥에서 찾아온다.
이명박의 위기는 지지율 50%대의 고공행진이 계속되면서 찾아왔고 정동영의 기회는 마의 20%대를 넘지 못하는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싹텄다
느닷없이 몰아닥친 위기를 극복하는 것도 정치요, 모처럼 찾아온 기회를 살려내는 것도 정치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주목해야 할 대목은 위기를 관리하는 이명박의 정치력과 기회를 포착하는 정동영의 정치력이다.
이명박은 정치력을 발휘해 박근혜를 껴안고 당 화합을 이루어 냄으로써 이회창을 제압해야하고 정동영은 정치력을 발휘해 당내외의 반발을 수습하고 후보 단일화를 이루어내야 한다.이명박의 당 화합도 정동영의 후보 단일화도 지지세력을 결집, 통합시켜 시너지를 만들어내는 것을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포지티브 정치다. 그러므로 두 사람은 지금 당 화합과 후보 단일화라는 당면 과제를 누가 더 세련되고 폭발력 있게 만들어 낼 것인가라는 포지티브 경쟁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여기까지는 두 사람이 같은 입장에 놓여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방법으로 지지 세력을 결집시키고 시너지를 만들어 낼 것인가라는 문제에 이르면 정동영과 이명박, 여권과 야권은 180도 상반된 길을 가게 된다.
이명박의 당 화합에 있어 핵심은 박근혜다. 그는 박근혜를 잡기 위해 당권 대권 분리론 수용과 당선 후 국정파트너라는 권력 분점을 제시함과 동시에 박근혜의 아버지인 박정희 전 대통령을 극진히 모시는 모습까지 연출하였다.
"매우 실용적 사고를 가진 박 전 대통령을 만나서 이분이야말로 가난한 나라를 무엇인가 먹고 살 수 있게 만들 수 있다고 매우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구미의 박정희 전 대통령 생가에 가서 '경제의 박정희'를 강조하며 한 말이다.
사실 꼭 선거가 아니더라도, 꼭 박근혜 변수가 아니더라도 이명박의 성향이나 평소 생각을 감안한다면 언제든 할 수 있는 말이기는 하다.
어디 이명박뿐이랴, 다수의 교수, 지식인, 언론인들이 박정희를 재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한지도 한참 됐고 정치권에서 박정희 흉내내기를 한 것도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번 이명박의 '박정희 찬가'는 지금까지의 학술적 찬반논쟁이나 박정희 흉내내기와는 차원을 달리하는, 말하자면 이른바 '진정성'이 있는 행동인 것 같다. 자신의 대표 공약인 한반도 대운하와 박정희를 연계시킨 다음의 발언에서 특히 그렇다.
"박 전 대통령은 경부 운하 사업에 타당성 있다는 보고서를 보고도 그 작업을 하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살아계셨으면 이미 한강과 낙동강이 운하로 돼 있을 것이다."
이 말에는 '박정희가 하려고 했다 -> 그것은 옳다 ->따라서 내가 내세운 한반도 운하 공약도 옳다'는 '의사 3단 논법'이 내재해 있다. 이 어법은 '최태민 목사에 대해 아버지가 직접 친국하셨다 -> 아버지가 어떤 분인데 최태민 목사가 문제가 있었다면 그냥 넘어갔겠느냐 -> 아버지가 그냥 넘어가셨으니 최태민 목사는 아무 문제가 없다'는 박근혜식 '의사 3단 논법'과 똑같은 어법 구조를 갖고 있다.
실적과 성과를 우선시하는 그의 기능주의적 사고방식과 어법이 민주적 과정과 절차를 무시하고 군사작전 식으로 돌진해 성과를 냄으로서 과정의 불법성을 은폐하곤 했던 박정희의 권위주의적 동원 독재와 뿌리가 같을 수 있다는 학술적 논쟁점과는 별도로, 박정희와 개발독재시기에 대한 이와 같은 정서와 어법의 공유 및 국정동반자라는 권력분점 약속을 통해 이명박은 일단 박근혜를 잡았고 그로써 흔들리고 있는 당을 추스르는데 성공했다. 위기 관리에 성공한 것이다. 따라서 이명박 측의 말대로 이제 BBK만 잘 넘으면 진짜 대통령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만약 정동영이 기회를 살려내는데 성공한다면, 그리고 이회창이 계속 버티고 완주한다면 게임은 그때부터가 아닐까?
이 실낱같은 가능성이 바닥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정동영에게 찾아온 기회의 싹이다. 그러므로 정동영-이인제 간 후보 단일화 합의와 대통합민주신당-민주당간 합당합의는 모처럼 찾아온 기회의 싹을 살려내려는 정동영식 정치의 시작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전격적으로 이루어진 후보 단일화와 합당 합의도 그렇지만 '삼성특검법'을 고리로, 그 못지않게 전격적으로 이루어진 정동영, 문국현, 권영길간 반부패연대 또한 몽골기병식 기동전이 이끌어 낸 성과라 할 만하다.
국면의 핵심이슈를 놓치지 않고 속도감 있게 이끌어가는 기동전은 이슈선점에서 위력을 발휘한다. 그러나 때로 기동전은 "나를 따르라"하고 앞서 나간 장수와 그를 채 따르지 못한 본대가 끊어져 자중지란이 벌어지는 치명적 약점을 노출하기도 한다.
'앞이 뒤가 되고 뒤가 앞이 되는 유연함과 집중력'으로 상대 진영을 헤집고 다녀야 할 기동대가 토막 나 상대진영에 뿔뿔이 흩어져 갇혀 버리게 되는 것이다. 이 경우 최선은 달려나간 속도를 살려 계속 앞으로 돌진하는 것이다. 본대를 돌아보고 주춤하는 순간 기동전의 생명인 속도를 놓치게 되기 때문이다. 후보 단일화와 합당합의에 대한 당내외의 반발은 달려 나온 속도로 돌파해야 할 정치적 문제이지 멈춰 서서 전열을 재정비해야 할 철학적 문제가 아니다. 이 점에서 후보 단일화와 합당에 정치생명을 걸겠다는 정동영의 결기는 기동전의 생명인 '속도'와 '기세'를 잘 보여주고 있다 하겠다.
그렇다고 장수가 본대와 계속 떨어져 다닐 수는 없는 법. 그래서야 전선이 만들어지지 않고 승부를 낼 수도 없지 않겠는가. 기동전에 있어 깃발이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뽀얀 먼지 사이로라도 깃발만 펄럭거린다면 비록 장수는 보이지 않아도 본대는 깃발을 중심으로 어떻게든 움직이는 것이다. 기동전과 전선운용에 대한 이와 같은 전략적 고려에서 볼 때, 범여권은 반부패연대를 후보 단일화와 합당의 정치적 당위성과 필요성을 설명할 깃발로 사용할 것을 진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을지 모르겠다.
외형적 성과를 중시하는 권위주의적 개발독재가 실상은 권,정,경,관,언 유착구조에 의해 작동되어왔으며 협소한 패거리 연줄망으로 이루어진 부패구조를 확대 재생산하는 정치체제였다는 점을 분명히 할 수만 있다면, 반부패연대는 이명박, 박근혜, 이회창의 연대와 갈등구조를 감싸고 있는 보수세력의 '박정희 신드롬'과 기득권 구조에 대해 공세적으로 전선을 만들어내는 위력적인 깃발이 될 수도 있을 것이며 후보단일화와 합당이라는 정치적 당위를 역사적 당위로 전화시켜낼 현실적 동력이 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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