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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복지가 곧 경쟁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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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사회복지가 곧 경쟁력이다"

[민주화 20년, 한국사회 어디로?③] 장하준 케임브리지대 교수

<프레시안>과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이사장 함세웅)가 공동으로 개최하는 '민주화 20년, 한국사회 어디로 가나?' 연속강연 세 번째 순서는 장하준 케임브리지대 교수가 맡았다. 지난달 22일 서울 정동 사회복지공동모금회 강당에서 진행된 강연에서 장교수는 '민주화, 경제민주주의, 그리고 사회적 대타협'이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했다.

장교수는 이번 강연에서 한국 경제의 상황을 신자유주의적 국제 금융자본의 공세에 의해 국내 산업자본의 생산활동이 위축돼 있는 위기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장교수는 특히 위기의 원인에 대해, 지난 20년 동안 정치적 민주화를 이뤘지만 민주정부는 국가의 시장에 대한 개입과 통제를 줄이고 마치 시장만능주의가 경제민주화인 것으로 착각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민주정부가 신자유주의적 경제질서 재편을 부추겼다는 의미이다.

장교수는 또 "민주정부 못지 않게 진보진영에서도 소액주주운동 등의 주주민주주의 강화가 경제민주화인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재벌개혁 운동의 일환으로 벌어지고 있는 주주민주주의에 관한 활동이 오히려 국내 산업자본을 약화시키고 시장 환경을 외국 금융자본들에게 유리하게 만들었다는 의미이다.

이에 장교수는 국내 산업자본, 즉 재벌들에게 안정적으로 경영권을 유지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해주고, 대신 투자 확대와 고용창출 및 복지국가에 대한 투자를 재벌에게 받아낼 수 있도록 '사회적 대타협'을 해야 한다고 해법을 제시하고 있다. 아울러 장교수는 사회적 대타협의 주체로 재벌과 국민이 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장교수의 주장 중 가장 논쟁적인 이 부분에 대해, 장교수는 상당한 비판을 받고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때라고 강조했다. 장교수는 이와 함께 우리 사회의 지향점을 북유럽식 복지국가 체제로 둬야 한다고 강조했다.

토론자로 나선 정성진 경상대 교수는 장교수의 이러한 주장이 '재벌 체제 옹호'로 비춰질 수 있다며 장교수를 비판했다. 특히 정 교수는 현 한국경제의 신자유주의적 재편 원인에 대해서도 "국제 금융자본이 아니라 국내 재벌들이 주도한 것"이라고 장교수와는 다른 해석을 하는 한편, "장교수가 국내자본/외국자본, 금융자본/산업자본 등으로 지나치게 이분법적으로 나눠서 보고 있다"고 비판했다. 정 교수는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대안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반면 역시 토론자로 나선 김용기 삼성경제연구소 연구원은 장교수의 지적에 대부분 공감하는 편이었다. 김 연구원은 특히 "1주1표 방식의 주주민주주의는 세계에서 러시아와 한국만 갖고 있는 제도"라며 "1주1표가 1인1표의 민주주의인 것으로 오해되고 있으며, 대부분의 선진국에서는 차등의결권 등을 인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번 연속강연 두 번째 순서에서는 최영기 한국노동연구원장이 강연자로 나서 재벌 및 대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며 "재계가 새로운 패러다임과 발전전략을 주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세 번째 강연에서도 장교수가 재벌과 국민의 사회적 대타협을 통한 복지국가 건설을 강조했다. 한국사회에서 '재벌'을 두고 벌이는 평가와 논쟁은 경제뿐 아니라 사회 전분야에서 치열하게 이뤄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음은 장하준 교수의 강연 및 정성진 교수, 김용기 연구원이 참여한 토론 전문이다. 이날 토론의 사회는 정관용 <프레시안> 이사가 맡았다. <편집자>

"독재 경험 때문에 시장 자유화를 경제민주화로 오해"

▲ 장하준 교수. ⓒ프레시안

장하준 :
1986년 영국으로 유학을 갔다. 그 때는 민주화 전이었다. 사실 나는 민주화가 이뤄진 1987년 이후 우리나라에 살았던 기간이 군대 때문에 귀국했던 때와 2003~2004년 1년 반 정도 들어와 있던 기간 빼고는 별로 되지 않는다. 나로서는 민주화가 안 됐던 한국 사회가 더 익숙하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참 우리나라가 좋아진 점이 많다고 생각한다. 지금 우리가 당연시 하는 여러 가지 일들이 그 때는 상상조차 힘들던 것들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하고 싶은 말도 마음대로 못 하고 읽고 싶은 책도 마음대로 읽지 못 했다. 지금도 기억나는 일이 있는데, 처음 유학 갔을 때 말레이시아인 친구가 있었다. 그 당시 한국 정도는 아니지만 말레이시아도 반공주의가 강했던 나라여서 마르크스의 서적이 금서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 친구가 영국 유학을 하다가 마르크스 책을 사서 귀국하는 길에 공항 세관에서 마르크스 책이 걸렸다고 한다. 그래서 그 친구는 그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세관원에게 "잘 몰라서 그러는데 이 책을 쓴 마르크스는 독일 사람이고, 공산주의자 마르크스는 러시아 사람"이라고 둘러대 세관원이 그 친구를 보내줬다고 하더라.

우리도 그 시절에 마르크스의 자본론만 갖고 있어도 잡혀갔었다. 지금은 읽으라고 해도 안 읽는 책이 돼버렸는지 몰라도 사상의 자유와 언론의 자유 등이 자유롭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한나라당도 대선후보 선출 과정에서 국민경선을 도입하고 있다. 과거에는 환경운동 한다고 하면 공산당이라고 잡아갔는데, 이제 환경이니 소수자 인권이니 이런 문제들이 사회적 아젠다에 포함됐고 환경은 핵심부에 들어갔다고 할 수 있다. 옛날로서는 상상도 하기 힘든 발전이 이뤄졌다. 나는 민주화의 성과를 과소평가하는 사람이 전혀 아니다.

그런데 경제적 측면에서 보면 경제민주화가 이뤄졌는지 굉장한 의문이 든다. 경제민주화가 처음 시작된 때가 김영삼 정부 때부터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노태우 정부 때도 그런 움직임이 있었다.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우리나라 민주화의 특수한 역사적 조건 때문에 시장 자유화가 민주화의 일부로 해석되면서 민주 정부들이 사장 자유화에 박차를 가했다고 볼 수 있다.

내 해석으로는 이 뿐만은 아니지만 어설픈 자본시장 자유화가 주원인이 돼 외환위기가 일어났고, 외환위기 이후에는 우리 경제가 완전히 구조적으로 변화를 했다. 우선 제일 큰 변화는 기업들이 투자를 안 한다는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지금 이게 굉장히 역설적인 현상이다. 한 편으로는 우리나라 기업들이 사상 최대의 건전 경영을 하고 있다. 옛날에는 이윤율도 낮았고 부채비율도 높았다. 그 해석 자체가 사실 잘못됐다는 주장을 했는데, 어쨌거나 그런 기준으로 볼 때 지금 기업이 사상 최대의 이윤을 올리고 부채비율도 한 번 하라니까 화끈하게 해서 지금은 미국보다도 더 낮아졌다.

그 결과 대기업들이 현금을 엄청나게 쌓아두고 있고 건전 경영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민경제에 대한 투자는 예전의 절반 수준에 불과하다. 1980년대 중반부터 외환위기 때까지 보면 우리나라의 기계나 설비투자 비율이 국민소득 대비 13~14%였는데, 지금은 6~7% 수준까지 떨어졌다.

일단 투자가 줄어드니까 일자리가 잘 안 생기고, 그나마 생기는 일자리도 비정규직 비율이 크게 늘어났다.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아도 비정규직 비율이 높았는데, 최근 거의 60%까지 비율이 높아졌다. OECD 국가들 중 최고 수준이다.

기업들이 비정규직을 늘리기도 했지만, 정규직 고용도 불안하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내가 보기에 가장 큰 원인은 이렇다. 주식시장 개방과 자유화에 의해 기업들에 대한 적대적 인수합병 위험이 늘어났고, 기업들이 그걸 막기 위해 단기 위주의 경영으로 이윤을 높였다. 그 다음에 이익의 큰 부분을 주주들에게 배당하고, 하청기업과 종업원들을 쥐어짜는 구조가 강화됐다. 그렇게 되면서 '사오정', '오륙도'라는 말처럼 정규직도 고용이 불안하게 된 것이다.

내가 63년생으로 40대 중반이 됐는데, 벌써 친구들이 퇴직 걱정하며 불안해하고 있다. 고용이 불안해지니 사람들이 소비를 줄이고 저축을 늘리면서 내수부진이 이어졌다. 내수가 부진하다 보니 기업들이 투자 의욕을 잃게 되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민주화 이후 복지제도가 확대되기는 했지만, 사회 관념적으로는 민주화 이전보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가 덜한 잔인한 사회가 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든다. 옛날에는 독재 정치권력이 강제적으로 사회의 많은 부분을 움직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사회적인 현상에 대해서 정당성을 의심했는데, 민주화 이후에는 도리어 시장이 아무리 부정적 결과를 가져와도 독재권력에 의해 강제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받아들여야 하는 것 아니냐는 시장주의 논리가 더 심하게 관철되고 있다.

"한미FTA, 노동유연화정의롭다는 정부가 약자들에게 더 양보하라는 기이한 현상"
▲ ⓒ프레시안

역사를 바로잡는다면서 친일파 후손들의 재산을 환수하는 정의로운 정부가 당장 지금 힘들게 살고 있는 약자들에 대해서는 '자유무역협정(FTA)'이니 '노동시장 유연화'니 하면서 약자들에게 더 양보하라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도대체 100년 전 약한 사람들에게서 빼앗은 재산은 되찾겠다는 정부가 지금 자기들을 뽑아준 약한 사람들한테 더 내놓으라는 것은 무엇인가.

이는 시장에서 결정된 것이니까 잘못이 아니라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일부 보수 언론이 '좌파정권'이라고 부르는 정부가 과거 독재정권보다 불평등에 대해 더 둔감한 상황이다. 과거 군부정권들이 사회적 위화감을 조성한다는 이유로 지나친 임금격차를 억제하고, 사치품 수입, 조기 유학을 억제하고 그랬는데, 도리어 민주화 정부는 우리가 무슨 상관이냐며 이런 것들에 대해 더 관대하다. 물론 사회적 위화감이라는 것은 미국식 사회과학에서는 성립하지 않는 개념일지 몰라도 분명히 실재하는 것이고, 과거에는 그런 규제들이 권력의 정당성이 없기 때문이었을지 몰라도, 요즘은 그런 것들이 거의 없다.

지금 보면 소위 민주정부가 불평등을 강화시키는 정책들을 자본시장 개방이니, 한미FTA이니, 노동시장 유연화니 하는 이런 언설을 사용하는 것에서 대한 비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과연 민주정부가 이런 불평등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건지에 대해서도 의문이 든다. 말로는 양극화 해소 얘기를 많이 하지만, 그걸 심각하게 받아들인다면 왜 그런 행동을 하는가.

이해하기 힘든 것이 왜 민주화 이후 보통 사람들은 더 살기 힘들어졌는가이다. 원래 민주주의라는 것이 다수결의 원칙에 기반한 것이다. 그렇게 때문에 시장주의와는 배치가 된다. 시장이라는 곳은 '1원 1표'이고 민주주의는 '1인 1표'이다. 19세기에는 자유주의자들이 민주주의를 노골적으로 반대했다. 민주주의를 허용하면 재산이 없는 다수가 권력을 탈취해 재산이 있는 소수를 착취하고, 그렇게 되면 부의 축적 동기를 파괴시켜 경제가 망한다고 생각했다. 일부 서구 선진국들은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여자와 유색인종은 물론, 가난한 자들에게도 투표권을 주지 않았다. 미국에서는 독립전쟁 당시 '대표 없는 과세는 없다'는 얘기를 하지 않았나. 우리에게서 세금을 걷어갔으면 참정권을 달라는 얘기이다. 뒤집어 보면 세금을 내지 않는 자들에게는 참정권을 주지 않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19세기 논리로 보면 다수를 탄압하는 독재를 타도했는데 왜 사회는 더 불평등해지고, 사람들은 이 불평등에 더 둔감해졌을까. 내가 해석하기로는 민주화에도 불구하고 보통 사람들의 생활이 더 어려워진 것은 우리 민주화 과정의 역사적 특수성에서 이해해야 한다. 당장 하루아침에 이뤄진 것은 아니지만 유럽은 민주화가 되면서 사회가 더 평등해졌다. 민주화가 이뤄지면서 투표권이 확대되고 소득세가 생기며 복지국가 개념이 생겼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서구의 역사적 패턴과 반대로 가고 있다.

역시 우리 민주화의 역사적 특수성에서 이해해야 한다.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과거 독재정권이 경제 분야에서 지극히 개입주의적이었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정부가 경제에 대한 개입을 하는 것이 죄악시됐고, 정부개입의 제한이 말하자면 민주주의적이고 심지어는 진보적이라는 생각이 퍼지게 됐다.

가장 좋은 예가 중앙은행(한국은행)의 독립성에 대한 논란이다. 유럽에서 보면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주장하는 쪽은 우파이고, 중앙은행을 정치적으로 통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쪽은 좌파들이다. 좌파들이 중앙은행의 통제를 주장하는 이유는 중앙은행은 금융산업의 이익을 대변하게 돼 있기 때문에 중앙은행을 정치적으로 통제해서 민주제도로 다수 이익에 봉사하게 하지 않으면 고용이나 성장보다 물가 잡는 데만 치중하게 되고, 결국 보통사람보다 금리 생활자에게 유리하게 된다는 논리다. 그래서 유럽의 좌파는 중앙은행의 독립에 반대한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소위 진보적인 사람들이 중앙은행의 독립을 찬성한다. 그 맥락을 이해한다. 1985~1995년이라는 특정 시점에서 보면 재경부와 한국은행을 비교해 볼 때 어디에 힘을 실어주는게 좋겠냐고 하면 한국은행이라고 말할 사람이 상당히 많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논쟁을 하는 데 있어서 구조적으로 금융산업에게 거시정책의 통제권을 넘겨준다고 생각해본 사람은 없는 것 같다. 왜냐면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보장해주지 않은 게 독재정부이기 때문에 독립성을 주는 것이 민주화고 진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재벌 문제도 기업의 소액주주권 강화 주장을 기업 의사결정의 민주화라고 표현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대통령마저 권력이 시장으로 넘어갔다고 하니..."

그러다보니 진보를 자처하는 노무현 대통령이 '권력은 이미 시장으로 넘어갔다'고 선언한 것이다. 하지만 권력이 시장으로 넘어갔다고 하는 정치권력은 사표를 내야 한다. 권력을 정치인에게 준 것은 사회적 이익을 위해 시장을 통제하라고 준 것인데, 자기가 나서서 권력이 시장으로 넘어갔다고 하는 것은 직무유기이다. 그렇다고 해서 노 대통령이 특별히 이상한 사람이기 때문인 것은 아니고, 우리나라의 담론 구조 자체가 그렇게 형성됐기 때문에 이런 발언이 나온 것이다. 시장을 풀어주는 것이 독재 반대이자 민주화라고 돼버린 것이다.
▲ ⓒ프레시안

역사적 특수성을 살펴보면, 신자유주의가 기세를 떨치기 시작한 시점은 1980년대 말~1990년대이다. 한 문제에 대해 해결책이 여러 가지일 수 있는데 주된 조류가 된 신자유주의에 대해 별 성찰 없이 시장에서 해결하는 것이 정답이라고 받아들여버린 것이다. 제일 좋은 예가 재벌 문제다. 재벌을 비롯한 대기업들을 사회적 필요에 따라 규제하는 것이 경제민주화의 하나라는 대원칙에 대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의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나라 민주화 시대의 재벌 문제라는 것이 신자유주의의 영향으로 주주자본주의적 시작에서 재벌총수 가족들에 대한 소액주주의 권한 강화로 규정이 돼버렸다.

그런데 소액주주 강화는 1원 1표의 시장논리이다. 1인 1표가 아니다. 1원 1표는 1인 1표의 민주주의 원리가 아니다. 이것을 민주화라고 말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진짜로 기업 의사결정의 민주화를 얘기하고 싶으면 기업 이해당사자 전체적 시각에서 종업원, 지역사회, 하청업체, 국민 전체가 그 기업의 의사결정에 관여할 필요가 있는데 그런 권리가 있나. 주주가 아닌 이해당사자들한테 투표권을 주느냐는 얘기를 해야 된다.

또 한 발 나아가서 재벌 문제라는 것이 단순히 주주간의 싸움이 아니라 이 기업들이 대다수 국민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논의하는 것이 진보적인 민주주의의 재벌 문제에 대한 의제 설정이 돼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재벌 문제가 단순히 소액주주가 대주주에 대한 대항의 힘을 키우는 것으로 규정이 돼버렸다.

그렇게 되다보니 정확한 돈의 출처도 알 길이 없는 사모펀드들이 들어와서 우리나라 기업들한테 너희들은 투명성도 없고 도덕성도 없다고 하면 소위 진보세력이 사모펀드들의 지적을 응원하고 있다. 대부분의 사모펀드들은 조세 도피처에 있다. 이 사람들은 세금을 안 내는 사람들이고, 상장된 회사가 아니기 때문에 투명성이라는게 전혀 없다. 우리나라에 많이 들어온 론스타니 소버린이니 누가 어떻게 소유하고 있는지도 잘 알 수가 없다. 그런 상황에서 사모펀드들이 재벌들에게 더 도덕적으로 경영하라고 주문하는데 그 옆에서 민주 진보세력들이 박수를 치고 있다. 굉장히 이상한 일이다.

지금까지 한 얘기를 정리해보면, 우리나라 민주화가 대다수 사람들에게 경제적 실망을 안겨주게 된 것은 민주화가 단순히 독재시대에 강한 권한을 가졌던 재벌 총수 가족이나 행정부 권력을 약화시키기만 하면 되는 것으로 여겨졌던게 아닌가 한다. 또 우리나라의 민주화가 신자유주의 시대에 일어났기 때문에 이들의 권력을 약화시키는 방법으로 채택된 것이 대항세력의 강화라는 민주적 방식이 아니라, 주주권 강화와 정부개입 축소라는 지극히 시장적이고 신자유주의적인 방식으로 일어났다. 정치적 자유는 군부독재 때보다 비교가 안 되게 늘어났지만, 대다수 국민들의 경제적 생활이 불안해지고 사회는 더 불평등해지면서 사회가 잔인해지는 역설적 결과가 나온 것이다.

"제 입맛대로 시장원리"

더 극화시켜서 얘기해보면, 반목하는 집단들이 서로 자신의 영역에서는 시장 논리를 제약해 자신들을 보호해줄 것을 요구하면서 상대방에게는 시장논리를 최대한 적용해서 상대의 힘을 약화시키고 싶어한다. 자본가들은 시장논리를 수정해 경영권 방어장치를 만들어달라고 요구하면서 농산물 시장 개방을 반대하는 농민들이나 노동자의 권익 보호를 원하는 노조에게는 시장 원리를 해친다면서 비난하고 있다.
▲ ⓒ프레시안

반대 쪽에서는 일반 국민들이 자기 생계가 걸린 문제에서는 시장 원리 확대를 반대하면서 보호무역을 지속해 달라, 정부의 규제를 지속해 달라고 요구하면서 금융자본가들이 시장원리에 따라 재벌 총수들을 압박하는 것은 좋아하고, 더 하라고 한다. 그 결과는 서로 힘을 약화시켜 공멸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서 1원1표의 시장원리가 극단적으로 관철되면, 결국 우리나라는 제일 돈 많은 국제 금융자본의 뜻대로 개조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미 그런 조짐들이 보이고 있다. 특히 이 과정이 진척되면서 우리 자본가들이 생산적 투자를 포기하고 자기들도 금융자본화 하게 되면 일반 국민들은 더 큰 피해를 보게 된다는 것이 내 주장이다. 그래서 지금 우리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반목하는 집단들이 서로의 존재 가치를 인정하고, 서로의 힘을 강화시켜주면서 균형을 맞추는 사회적 대타협이다. 시장원리의 한계를 인정하고 서로 일정 정도 시장의 논리에서 보호를 받을 권리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타협을 하지 않으면 특히 보통사람들의 미래는 암울할 것이다. 나는 그렇게 본다.

이런 사회적 대타협의 한 축에는 우리나라 상황상 재벌그룹들이 서야 할 것이고, 다른 한 축에는 국민들이라고 요약할 수밖에 없는 여러 다른 집단들이 서야 한다. 물론 노동운동이 우리나라보다 발달한 나라라면 그 한 축이 노조가 되겠지만, 우리나라 노조는 조직율과 정당성이 약하기 때문에 한계가 있다고 본다. 그래서 국민이라는 두루뭉술한 범주가 나오는데, 아주 말이 안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보면 새마을운동과 같은 강제적 동원과 외환위기 직후 금모으기 같은 자발적 동원을 한 경험이 있다. 다른 나라와 달리 우리나라는 '국민'이라는 범주가 충분히 현실성과 정치적 정당성을 가진다고 생각해 내놓은 개념이다.

사회적 대타협의 기본적 줄기는 재벌들의 경영권을 안정시켜주고, 그 대가로 국민들은 재벌기업들에게 더 많은 투자를 하고 고용을 창출하며 노사관계에서 전향적인 모습을 보이도록 요구할 수 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복지국가를 요구해야 한다. 반대로 재벌들은 경영권 안정을 찾고 노사관계에 있어 더 협조적 관계를 이끌어내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주장해오던 사회적 대타협의 요지이다.

그런데 이런 얘기를 하면 상당한 불만을 표시하는 사람들이 많다. 몇 년 전 삼성 에버랜드 문제에 대해 모 일간지에 정기기고를 하던 때 이런 주장을 담은 글을 썼었다. 우리나라 재벌기업들은 단시간에 급속히 덩치가 커져 총수 가족의 지분이 매우 적고, 따라서 상속세를 제대로 내면서 2~3세 경영 승계가 힘든 구조가 돼 있다. 옛날에는 주식시장에서 적대적 M&A가 불가능했기 때문에 괜찮았는데, 이제 그게 안 된다.

"재벌문제 유연하게 생각해보자"

그래서 세금을 제대로 내면서 상속을 하면 그룹의 지배구조가 와해될 수 있기 때문에 편법을 쓰는 것이다. 내 생각에는 기업들이 그룹의 구조를 갖추는 것에서 오는 장점들이 상당히 많다. 이런 그룹 구조의 효용성을 인정한다면 그룹 구조가 와해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그렇다고 탈세를 인정해줘서도 안 된다. 이런 상황에서 국민연금이나 국영은행들이 소위 국민주주로 그룹에 참여해 그룹 구조를 유지해주고 재벌 2~3세들에게 10~15년 정도 경영능력을 인정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다. 기회를 너무 짧게 주면 단기위주의 경영을 할 것이기 때문에 10~15년 정도 기회를 주고 평가해서 잘 한다고 생각한다면 계속 지지해주고, 잘 못하면 경영진을 갈아치우면 된다고 당시 칼럼에 썼다. 이것이 하나의 방법이지만 정답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이런 얘기를 한 것은 경영권과 소유권의 문제를 이런 방식으로 분리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유연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의도에서 한 얘기다.

그랬더니 독자 댓글에 어떤 분이 장교수가 외국에 오래 살다보니 한국 물정을 모르나보다고 썼다. 사카린을 밀수해서 판 나쁜 삼성놈들을 어떻게 국민연금으로 도와주냐고 썼다. 그 때는 오해가 심각하다 싶어 다음 번에는 이런 얘기를 썼다. 물론 우리나라 재벌들 나쁜 짓을 많이 했고 아직도 하고 있다. 사카린 밀수를 몰라서 하는게 아니라 재벌들이 밉다고 재벌들을 옥죄 망하게 한 뒤 해체해 외국자본이 인수하게 한다면 그 외국자본은 더 도덕적인가 말이다. 1960년대까지 선진국 자본들은 식민지 수탈의 이익을 봐 왔다. 19세기 중반까지 담배, 설탕, 면화를 판 기업들은 다 죄인들이나 다름없다. 삼성이 사카린을 밀수했다고 욕하지만 영국의 HSBC는 아편전쟁할 때 돈을 댄 은행이다. 사카린 정도가 아니라 중국이 아편을 금지하니까 전쟁을 일으킨 영국을 도운 것이다. 미국 기업들도 1970년대까지만 해도 중남미에 진출해 노골적으로 쿠데타 세력을 지원해 정권을 뒤집었고, 사설탐정을 동원해 파업 노동자들을 쏴 죽이던 데가 미국이다.

이런 얘기를 하는 이유는 우리나라 자본이 외국보다 더 도덕적이라거나 덜 도덕적이다는 얘기를 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재벌문제를 소위 도덕성 기준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깨끗한 자본은 없다. 깨끗한 자본을 원한다면 자본주의부터 부정해야 한다. 지금 우리 상황에서 자본주의를 폐기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자본주의를 수정해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게 하는 것이 최선이지 않겠나.

우리 재벌들은 그래도 우리 사회에 뿌리가 있고 국민들에게 빚이 있다. 과거 관세장벽을 높게 만들어 국민들이 후진 차를 타고 후진 물건을 써서 재벌들을 도왔다. 순수하게 자본과 투쟁한 입장에서만 보면 이 씨 재벌, 정 씨 재벌들 구체적 실체가 있고, 그들은 국민들에게 빚이 있고, 과거 나쁜 짓을 한 전과가 있기 때문에 싸우기 쉽겠지만, 국제 금융자본이 우리나라를 장악하게 되면 누구랑 싸울 것인가. 월스트리트에 가서 펀드 매니저를 붙들고 싸울 것인가.

재벌 기업이라는 데가 총수 가족들만의 것은 아니다. 주주들의 것만도 아니다. 우리나라 재벌은 국민기업이다. 국민들이 옛날에 세금을 내고 보호해줘서 큰 기업들이다. 그만큼 재벌들은 국민들에게 빚을 갚아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좁은 시각에서 벗어나 국민경제적 시각에서 이런 기업들이 국민경제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는 방법에 대해 접근해야 한다. 그냥 '탈세했으니까', '소액주주 권한 무시했으니까'라는 차원에서 접근해서는 안 된다.

재벌 기업을 안정시켜주고 그 대신에 얻어내는 게 있어야 한다. 그 핵심에는 투자나 고용창출 등 여러 가지가 있지만 꼭 내걸어야 하는 것이 복지국가 건설이다. 그리고 내가 주장하는 것은 미국식 선별적 복지국가가 아니라 유럽식의 '모두가 참가하는' 복지국가이다. 미국도 너무 가난하거나 늙은 사람에 대해 정부가 의료보험도 해주고 한다. 유럽식 복지국가는 다르다. 육아부터 질병, 실업, 노령화 등에 대비해 능력있을 때 돈을 모았다가 필요할 때 찾아쓰는 방식이다. 더 능력 있는 사람은 더 많이 내고, 장애인 등은 더 많이 도움을 받는, 기본적으로 모든 사람이 복지혜택을 받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중산층의 반복지 정서가 강해진다.

"미국식 복지모델은 반복지 정서 유발. 북유럽식 복지모델로"

예를 들면, 유럽에서는 모든 국민이 세금을 많이 내기 때문에 모든 국민은 대학에 무료로 다닐 수 있다. 그러나 미국은 가난한 학생들에게는 장학금을 잘 주지만 가난하지 않은 학생들은 돈을 많이 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중산층에서는 내가 세금을 내는데도 불구하고 자기는 아무런 혜택을 못 받는 구조이다. 미국 중상류층에서는 흑인 빈민가나 미혼모에게 돈을 준다는 것에 대한 반감이 강하다. 반면 유럽은 모든 국민이 부유하건 가난하건 기본적으로 받는 혜택이 있다. 그래서 저항감이 약하다.
▲ ⓒ프레시안

나는 복지에 대해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아마추어 수준이지만, 유럽과 같은 원칙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에서 복지국가를 얘기하면 사람들이 '독일은 복지병에 걸려 경제가 비실거린다', '스웨덴은 우파정부 집권해 복지국가를 포기했다고 한다'는 둥 굉장히 잘못 알고 하는 얘기들이 많다.

처음 영국에 유학을 갔을 때 스웨덴 친구가 한 명 있었는데, 그 친구가 고민하는 것이 스웨덴의 좌파정부와 우파정부가 80%인 실업수당을 70%로 낮출 것이냐 말 것이냐를 두고 싸운다는 것이었다. 우파 정부라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좌우의 판 자체가 다른 것이다. '유럽 국가들이 복지병에 걸려 경제성장률이 낮다'는 얘기도 거짓말이다. 상대적으로 복지수준이 낮은 미국이 유럽보다 성장률이 낮다. 핀란드, 노르웨이, 네덜란드 등 유럽에서도 특히 복지가 발달한 나라들은 미국보다 더 빠른 성장을 하고 있다. 독일이 90년대에 경제성장률이 둔화된 것도 복지 때문이 아니라, 통일비용 때문이었다. 복지병은 과장된 면이 많다.

'우리나라가 복지 걱정할 처지가 아니다'라고도 하는데, 우리나라는 GDP 대비 복지에 투여하는 예산의 비율이 6% 수준이다. 그런데 OECD 평균은 24%에 달한다. 남미의 칠레나 브라질 같은 나라들도 11~13%에 이른다. 우리나라에서 '복지병 걱정해 복지 예산 줄여야 한다'는 주장은 것은 미국에서 체중 300kg 나가는 사람에게 생명에 지장이 있으니 살을 빼라는 얘기를 우리나라에 그대로 하는 꼴이다. 우리나라는 300kg은커녕 영양실조 상태인데, 살이 쪄 생명에 지장이 있으니 밟을 굶으라는 것과 같은 얘기다.

복지제도를 만들 때 복지제도 디자인에 대해 잘 생각해볼 문제가 있다. 제일 강조하고 싶은 것은 노동자의 재교육과 복지를 잘 연결해서 복지제도의 생산적 효과를 극대화해야 하는 것이다. 복지는 다 같이 인간적인 삶을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자는 것이지만, 생산적 효과를 극대화하는 것도 중요하다.

"스웨덴 복지는 오히려 고용유연화 도움"

스웨덴이 제일 좋은 예이다. 실업자가 되면 실업수당을 80% 정도 받는다. 그 기간에 정부가 알선하는 재교육을 받고 정부가 직장까지 알선해준다. 3~4회 정도 알선해주고 당사자가 직장을 거부하면 실업수당을 최저생계비 수준으로 줄인다. 다른 나라들은 실업자가 되면 기차역사의 쓰레기로 사라지는데 스웨덴과 핀란드에서는 계속 노동 현장으로 돌아온다. 스웨덴, 핀란드는 우리나라 보수언론들이 보면 나라 망할 짓만 하고 있다. 복지비가 GDP 대비 50% 가까이 되고 세금은 높다. 그런데 스웨덴, 핀란드는 미국보다도 경제성장률이 높다.

스웨덴이나 핀란드가 미국보다 경제성장률이 높은 이유는 복지가 잘 돼 있기 때문에 오히려 기업들이 기업 구조조정을 더 자유롭게 할 수 있다. 해고를 당해도 먹고 살 수 있고, 재교육에 의한 취업이 잘 되기 때문에 해고에 대한 두려움이 크지 않다. 미국과 같은 나라에서 해고에 대한 저항이 더 심한 이유는 해고당하면 끝이기 때문이다.

이를 입증하는 또 다른 통계가 있는데 스웨덴의 노동자 1인당 산업로봇의 숫자가 일본과 함께 세계 최고 수준이다. 스웨덴은 공정 자동화가 제일 잘 돼 있는 나라이다. 이 역시 스웨덴이 복지국가이기 때문에 노동자들이 공정 자동화를 거부하지 않는 것이다. 일본은 기업 차원에서 핵심 노동자의 종신고용을 보장하기 때문에 저항이 덜하다. 그러나 일본의 시스템이 스웨덴보다 덜 공평하다. 일본에서는 좋은 대기업에 들어가면 일생을 보장 받을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일생이 팍팍하다. 스웨덴처럼 모든 사람들의 일생을 보장해줄 수 있는 나라가 복지국가다.
▲ ⓒ프레시안

복지국가는 왜곡된 인적자원의 배분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최근 이공계 기피현상이 있다고 한다. 전국의 이과생들 1등부터 1000등까지 의대에 가고 그 다음부터 다른 이공계 학과를 간다고 한다. 경제학적으로 설명이 안 되는 현상이다. 과거에 비해 의사의 공급이 늘어나면 보수가 상대적으로 줄어들어야 한다. 그런데 외환위기 이후 의사 선호도가 무척 높아졌다. 이대로 계속가면 전국민이 자기 주치의를 둘 수 있을 정도일 것 같다. 굉장히 병리적인 현상이다. 고용이 불안해서 생기는 현상이다. 아이들이 부모들에게 고용불안에 대한 얘기를 한다. 공대 나와서 삼성, 현대 갔어도 정년 채우지 못하고 나와야만 하는 이모부들 얘기를 듣고 자랐다. 마흔한 살에 잘리지 말고 일흔까지 의사하라는 얘기를 한다. 문과에선 변호사다.

브레이크가 있기 때문에 속도를 내서 운전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브레이크가 없는 차는 시속 30~40km 이상 운전을 할 수 없다. 브레이크가 있고 에어백과 안전벨트가 있기 때문에 100~120km로 달릴 수 있다. 개인이 직업을 선택할 때 자신이 잘린다 해도 세상이 끝나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을 때 더 진취적인 직업을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모두 의사 하겠다는 병리적 사회"

내가 대학에 다닐 때만해도 서울대 물리학과에 가서 세계 과학 발전에 공헌하겠다는 얘기들을 했었다. 이제는 그런 얘기 안 한다. 그래봐야 직장은 불안하고 먹고 살기 힘들다는 인식이 박혀있다.

복지국가 하면 이공계 기피 현상이 무조건 해소된다는 것은 아니지만 제조업 부활 등을 예상할 수 있다. 지금 우리 사회에 팽배해 있는 고용 불안이 우리 사회를 왜곡시키고 있다. 공부 잘하는 애들이 의대만 가는 나라 어디에 있겠나. 병적인 현상이다. 재경부에서는 이런 의료인력을 바탕으로 '의료 허브'를 만든다고 하는데, 거기에 대해 결코 좋은 소린 못 하겠다.

스웨덴도 1920년대 초반 파업률이 제일 높았던 나라다. 너무 싸워서 이러다가는 1930년대 되면 다 망하겠다는 인식이 퍼져 사회적 협약을 한 것이다. 스웨덴에서 조세저항도 높았다. 조세저항이 강했기 때문에 19세기 중반 소득세가 도입된 영국보다 훨씬 늦게 1930년대에야 소득세를 도입했다. 미국도 스웨덴보다 먼저 소득세를 도입했었다. 그러나 스웨덴 자본가들은 소득세를 용납 못하겠다고 버텼던 것이다. 스웨덴도 소득세를 걷어 잘 쓰니까 받아들이게 된 것이지, 처음부터 소득세 내는 것을 좋아했던 것은 아니다.

스웨덴의 인구가 1000만이라 우리나라와는 사정이 다르다. 배울 게 없다고 한다. 그 말이 맞다면 우리보다 인구가 5분의 1인 스웨덴에서 못 배우는데 우리보다 인구가 5배인 미국은 어떻게 배우겠다는 것인가. 미국적인 것은 다 들여오면서 스웨덴은 인구가 적은 나라라 못 배운다고 하는가. 굳이 따지자면 스웨덴이 우리나라와 비슷한 면이 더 많다. 미국은 군사력과 기축통화의 힘이 있는 나라다. 미국은 금융시장에 위기가 오니 달러 가치가 더 올라간다. 우리나라는 위기가 닥치면 원화가치가 바로 떨어져버린다. 기축통화의 엄청난 힘이다. 미국은 국토도 광활하고 처음부터 정복과 이민으로 이뤄진 나라라 불평등에 대한 인내도도 높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평등에 대한 욕구가 강하다. 스웨덴에게서 못 배운다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 싫기 때문에 인구 핑계를 대는 것이다.

물론 역사적 조건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는 노조의 조직률이 취약하고 정당성이 약해 스웨덴의 노조와 같은 역할을 할 수 없다. 그러나 역사의 무게가 중요하다면 이 세상 모든 나라가 원시농경사회에 머물러 있어야 하지 않겠나. 그 역사적 과정에 의해 우리나라의 미래까지 규정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우리의 역사를 고를 수는 없지만, 우리의 미래를 고를 수는 있다. 특히 사회적 대타협은 의식적으로 대립틀을 깨고 새로운 합의를 찾자는 것이다. 그래서 역사의 그림자보다 미래의 비전이 더 중요한 것이다. 역사적 조건에 대한 고려는 필요하지만 거기에 묶여 패배적 사고를 하는 것은 곤란하다.

정성진 "스웨덴이 재벌체제 유지해서 스웨덴 모델 강조하는 듯"

정관용 :경상대 정성진 교수와 삼성경제연구소 김용기 박사 두 분의 패널을 모셨다. 장교수의 발제를 보면 진보가 어떤 목소리를 내고, 보수가 어떤 목소리를 내는지에 대한 논평도 있었다. '좌우'라는 구분 자체가 이제는 굉장히 애매모호해졌고, 또 세계화된 글로벌 경제 하에서는 특히 애매모호해질 수밖에 없는 지점들이다. 토론에 이에 대한 논평도 필요할 것 같다.

▲ 정성진 교수. ⓒ프레시안

정성진 :
장하준 교수는 사회자가 소개했듯이, 우리나라 사회과학 분야에서 몇 안 되는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석학이다. 오늘 발제는 경제민주화라는 주제로 했는데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 미국식 신고전파 주류경제학에 대한 비판, 그리고 지난 한국의 산업화 과정을 산업정책이라는 개념으로 연구한 점 등이 담겨져 있다.

특히 장교수가 많이 알려진 계기는 97~98년 동아시아 경제위기에 대한 독창적인 분석이다. 제도주의라는 경제학 흐름에서 쌓은 업적으로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우리나라 경제는 미국식의 주류 경제학이 독점을 하고 있다. 서울 주요 대학의 교수진을 보면 거의 미국 아이비리그 박사가 교수로 돼 있다. 지금 우리나라는 미국 경제학이 석권하고 있다고 얘기할 정도다. 그런데 장하준 교수는 영국 캠브리지 대학에 있지만 한국 경제학계에서 소금 같은 존재이다.

우리나라에도 <쾌도난마 한국경제> 등 장교수의 여러 책들이 번역돼 있다. 경제학이라는 분야가 어렵게 얘기하고 논문쓰기에는 쉬운데 에세이라든지 대중적 책을 쓰기에는 정말 어려운 학문이다. 그러나 장하준 교수는 쉽게 쓰는 쪽에도 재능을 갖고 있는 것 같다. 우리가 딱딱하고 어려운 학문으로 경제학을 얘기하는데, 장교수는 경제학을 대중화하는 데도 공헌을 했다. 장교수는 한국의 크루그먼과 같은 분이 아닐까 생각한다.

장교수의 제도주의적 입장에서의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 그리고 대안을 체계화하는 입장에 대해서 동의를 하느냐 하지 않느냐와 상관없이 그 자체로 기념비적 업적이고, 우리가 1970~1980년대 고 박현채 선생의 민족경제론이 그랬던 것처럼, 21세기 한국경제 사상에 오랫동안 영향을 끼칠 것으로 평가를 할 수 있겠다.

제가 토론 요청을 받았는데 제가 토론자로서 적합한지 느낌이 들었다. <쾌도난마 한국경제>를 보면, 장하준 교수가 오늘 비판하는 진보진영이라 일컬어지는 분들은 참여연대라 일컬어지는 그룹이다. 예를 들면 김상조 교수가 토론자로 나왔으면 재벌체제나 외국자본 평가라에 대해 보다 구체적이고 내용 있는 토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왜냐면 장하준 교수가 있는 그룹을 대안연대 그룹이라고 하는데, 대안연대 그룹과 참여연대 그룹의 재벌체제 문제, 외국자본 문제 평가 엇갈리지만 같이 공유하고 있는 게 있다. 영미식 자본주의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에 대해 다르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참여연대 쪽도 영미식 자본주의가 아니라 북구식 자본주의로 가자고 얘기하는 것 같다. 참여연대 그룹은 장하준 교수가 얘기하는 스웨덴 모델보다 네덜란드나 덴마크 모델을 얘기하고 있다.

아마 장하준 교수가 재벌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곳이 스웨덴 모델이어서 그렇지 않을까 한다. 아무튼 문제설정이 자본주의 안에서 잘해보자는 것이다. 맑스주의나 사회주의 입장과 같이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것 비현실적이라고 하는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탈자본주의와 비자본주의의 대안 실행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입장에서 비판하자면 외재적 비판을 할 수밖에 없어서 자본주의에 대한 주제, 좋은 자본주의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런 식으로 논의 된다면 좀 더 구체적이고 생산적 논의가 될 것 같은데, 나는 틀거리 자체에 비판적이어서 어떨지 모르겠다.

나는 발제문을 전체적으로 읽으면서 이 논의가 2년 전에 <쾌도난마 한국경제>를 조금 요약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뒤에 보면 한국경제가 급변하고 있고, 2007년 한미FTA 문제라든지. 담론 구조에서 보면 신자유주의 폐해가 양극화 극심해지면서 이런 대안을 진보진영에서 각양각색으로 추구하고 논의하고 있다. 한겨레신문 같은 데서 진보적인 대안을 만들어보자고 해서 많은 대안 내놨고, 민주노동당 대선 후보들도 한국경제의 21세기 진보적 대안 모델들을 많이 제시하고 있다. 오늘 논의가 한미FTA 이후 상황이나 최근 얘기되고 있는 진보진영 입장을 포함했으면 유익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정성진 "신자유주의는 국내 재벌들이 주도한 것"

일단 토론을 해야 되니까 몇 가지 주제를 갖고 얘기해보도록 하겠다. 우선 신자유주의 문제에 대해 얘기해보겠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은 장하준 교수의 가장 중요한 공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갖고 있는 맑스적 입장에서 보면 신자유주의 문제에 대한 장교수의 이해는 부족하고 불충분한 점이 있다고 생각된다. 장교수는 신자유주의를 국가와 시장의 관계, 산업자본과 금융자본의 관계, 무엇보다 주주자본주의의 원리, 그리고 민족적 상업자본과 국제 금융자본 대립관계의 한 축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와 같은 신자유주의 때문에 투자가 감소하고 성장이 둔화되면서 보통 사람들이 살기 힘들어지며 경제 민주화 후퇴했다고 주장한다. 또 신자유주의라는 것을 유럽식 자본주의와 구별되는 영미식 자본주의로서의 사회체제로 신자유주의를 이해하고 있다. 이에 대해 난 좀 다르게 이해하고 있다. 신자유주의는 사회체제라기보다는 자본의 이데올로기로, 자본의 전략으로 이해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왜냐면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지향하는 자유시장 지상주의라고 하는 것은 현실 역사에서는 사회경제체제로 존재한 적이 없다. 19세기 영국 자유주의, 자유무역은 실은 자유무역 제국주의였다. 20세기 부시의 미국 신자유주의는 사실은 미국 제국주의인 것이다. 현실에서는 시장인가 국가인가 이분법적으로 존재한 것이 아니라 시장과 국가의 결합체로 항상 존재해왔다. 앞으로 세계화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가 존속하는 한 자본주의는 시장과 국가의 결합체로 존속할 것이다.
▲ ⓒ프레시안

그래서 1980년대 이후 세계 자본주의가 케인즈주의적 국가자본주의에서 신자유주의적 시장자본주의로 이행됐다. 이런 진보진영의 통념은 조금 정정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이데올로기 영역에서도 신자유주의라는 것은 97~98년 세계경제 위기 이후 퇴조하고 있는 것 같다. 예를 들어 부시 대통령이 어떤 인터뷰에서 "당신은 신자유주의자냐"고 물으니 "내가 무슨 신자유주의자냐"고 얘기했다고 한다. 부시 그룹은 요즘 들어 서슴없이 "우리들은 제국주의자"라고 얘기한다.

그들은 제국주의자라고 할지언정 신자유주의자라고 하지 않는 것이다. 장하준 교수가 신자유주의자라고 비판한 노무현 대통령도 비판에 대해 한 번도 인정한 적이 없다. 노 대통령은 "나는 좌파신자유주의자다"라는 식으로 답을 했다. 노 대통령이 자신의 업적이라고 자랑하는 '비전2030'을 보면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와는 전혀 부합되지 않는 것을 알 수 있다.

'비전 2030'을 보면 선진 통상국가와 사회투자국가의 결합체라고 하는데 이건 일종의 국가주의인 것이다. 이번 서브프라임모기지 위기를 보면 FRB가 개입하고 있다. 신자유주의 중심국인 미국에서도 국가 개입이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증거다. 지배계급의 담론도 사실 97, 98년 신자유주의 즉 '워싱턴 컨센서스'였는데, 98년에 동아시아가 무너지고 세계 경제 위기가 오면서 '포스트 워싱턴 컨센서스'가 됐다. 국가도 시장도 같이 가자는 걸로 바뀌어 있다. 신자유주의에서 국가냐 시장이냐 산업자본이냐 금융자본이냐 혹은 민족자본이냐 외국자본이냐. 이런 이분법적으로 접근할 것이 아니고 이건 무엇보다도 위기에 몰린 자본이 바로 노동에 대한 대대적인 반격, 노동에 대한 착취 강화를 통해서 수익성을 회복하려는 전략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이해해야지만 양극화 문제라든지 비정규직 문제라든지 또 장하준 교수가 설명하려는 경제민주주의의 후퇴도 올바르게 이해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정성진 "현재 양극화는 자본의 노동 착취 극대화 과정"

장하준 교수는 또 신자유주의라고 하는 것을 외적 문제, 즉 국제금융자본의 논리로 환원하는 것 같다. 사실 우리나라에서 신자유주의 정책이라든지 이데올로기가 유행하게 된 것이 87~97년이다. 더 소급하면 80년 근처로 소급하는 사람들도 있다. IMF 이후 외국금융자본이 와서 판 칠 때도 아니고 국내 자본논리에 의해서 국내 지배계급 이해관계 의해서 기존의 국가 주도적인 발전 체계를 전환시키려는 시도들이 있었다.

장하준 교수는 신자유주의라는 것과 재벌체제에 대해 모순 관계, 상충 관계가 있는 것으로 설정하고 있는데, 재벌체제와 신자유주의가 모순 관계라는 것은 부차적이다. 오히려 공생관계로 봐야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재벌체제라는 것이 신자유주의를 추동한다고 볼 수 있다. 전두환 정권 때 보면 민간 주도 경제라는 것이 있었고, 김영삼 정권 때 세계화 담론이라든지 전경련이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를 전도한 것이다. 그리고 97년 이후 정리해고 자유화, 노동시장 유연화 공세가 대대적으로 있었다. 또한 노무현 정권에서도 신자유주의를 극단화하는 한미FTA가 나왔는데 삼성경제연구소 프로젝트다. 신자유주의와 재벌을 상충관계로 형성하는 것은 힘들지 않겠나 본다. 신자유주의를 산업자본과 금융자본의 관계로, 금융자본이 산업자본을 지배한다든지, 금융화라든지 이런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산업자본은 좋고 금융자본은 투기적이다'라고 이분법적으로 접근하는데, 맑스주의적 접근에서 보면 부당하다. 잉여가치를 착취하는 것은 산업자본이다. 산업자본에 기생하는 것이 금융자본이다. 그렇기 때문에 문제의 근원은 산업자본에 있다. 그래서 저는 금융화라는 것. 금융자본의 지배. 주주자본의 원리가 지배하는 것으로 신자유주의를 이해할 때 그런 이해가 현실하고 부합되는가 볼 때 현실과 부합되지 않는다고 본다.

과연 한국에서 보면 97년 이후에 산업자본에 대한 금융자본의 지배라는 것이 강화됐다고 볼 수 있는가를 보면 나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또한 노동자로부터 착취한 잉여가치를 금융자본이 더 뜯어가는 것을 금융화라고 이해한다면, 과연 그런 현상이 97년 이후 더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나를 보면 사실 그렇지 않다. 예를 들어 이자나 배당으로 나가는 부분을 보면 97년 이후 그 전보다 증가했다는 증거 전혀 없다. 또 제조업 부채 비율이 1997년에는 400% 가까이 됐는데 요새 100%로 떨어졌다. 미국이나 일본은 150% 정도 된다. 산업자본이 금융자본 의존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하고 있다. 자율성이 증대되고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요즘 보면 금산분리법 제정 논란을 봐도, 오히려 재벌을 중심으로 산업자본이 금융자본을 먹으려 하는 것이 최근의 현상이 아닌가 한다.

장교수는 주주자본주의 원리가 지배하면서 주식시장이라는 곳이 자금조달 기구가 아니라 자금을 뽑아가는 곳으로 전락했다고 하는데 사실 보면 97년 이후 주식시장을 통해 자금을 많이 조달하고 있다. 또한 신자유주의, 주주자본주의에 의해서 배당요구가 많아지고 경영권 위협 때문에 투자가 부진하다고 하는데, 이에 대한 반론 논문도 많이 나와 있다. 투자가 부진해졌다고 하는데 97년 이후에 투자비율이 낮아진 건 사실이다. 하지만 김영삼 정권 때 과잉투자 됐었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박정희 시대와 비교해 보면 요즘 GDP에서 투자가 차지하는 비중은 결코 낮지 않다. 투자 부진이라고 말하기 곤란하다.

장교수는 투자 부진이 배당을 많이 해서, 경영권이 위협 받아서 그렇다고 하는데 사실 배당도 많지 않다. 이자로 나간 돈이 많았는데 그것도 줄어들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저는 저투자라는 것은 재벌 경영권이 안정되지 않았기 때문이거나 신자유주의 때문이 아니고, 중소 자본의 투자부진 문제, 바로 양극화 때문이라고 본다. 바로 신자유주의가 자본의 노동에 대한 공격을 통해서 자기 수익성을 회복하려는 과정에서 노동 대중인 서민들의 기반이 무너지고 내수기반이 무너지면서 중소기업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고 투자의 양극화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 아닌가 한다.

재벌 문제에 대해서 말하자면, 장교수는 재벌과 신자유주의가 대립관계라고 하는데, 재벌이 신자유주의를 주도한다는 것이 먼저 강조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박정희 체제와 재벌체제를 다른 진보진영과 다르게 장하준 교수는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박정희 체제와 재벌체제가 반신자유주의적인 측면이 있다는 논거인 것 같다. 그러나 사실은 신자유주의와 박정희, 재벌 체제는 대단한 차별성이 있다고 본다. 박정희 체제를 계승하고 재벌체제 이익을 대변하고 있는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가 기업 CEO들의 신자유주의의 논리를 노무현 정부보다 더 강하게 신봉하고 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장교수는 또 97년 외환위기를 기점으로 재벌체제가 신자유주의, 주주자본주의에 의해서 약화되고 있다고 보는 것 같다. 그러나 재벌에의 경제력 집중이 97년 경제위기 이후에 약화되고 있다는 어떤 증거도 없는 것 같다.

정성진 "재벌 제멋대로 총수 자본주의 아직도 유지"

노무현 대통령이 '이미 권력이 시장에 넘어갔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 때 얘기한 권력이 시장으로 넘어갔다고 할 때 시장이 무엇인가. 아마 장하준 교수는 주주자본주의, 신자유주의 이렇게 말하는 것 같은데 여기서 말하는 시장이 무엇인가? 삼성이다. 권력이 재벌에 넘어간 것이다. '삼성 공화국'을 넘어 요즘은 '삼성 제국'이라고까지 그러는데 그런 문제가 사회적으로 쟁점이 되고 있고, 재벌 권력이 더 강화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나는 신자유주의, 시장주의, 주주자본주의 논리가 결코 우리나라 재벌의 자본축적에 장애가 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요즘 주주자본주의가 아니라 총수 제멋대로 하는 총수자본주의가 아직도 유지되고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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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하준 교수는 재벌총수의 '경영세습권을 인정해주자. 인정해줌으로써 사회적 대타협을 이루자'고 말하고 있다. 내가 보기엔 재벌총수의 경영권 세습을 인정해주는 것이, 나는 반자본주의론자이지만 일단 담론 구조 안에 들어가 본다 하더라도, 그것이 경제의 효율을 과연 향상시킬 수 있을 것인가 회의적이다. 어떤 의미에서 경제민주주의, 경제정의를 진전시킬 수 있겠는가. 난 정반대라고 생각한다. '소유권을 넘어서 경영권의 세습독점을 인정해줘야 한국 경제가 살아남고, 경제 효율성이 향상된다. 이를 위해 국민연금까지 투입을 해보자, 재벌 2,3세 경영능력을 검증 받을 수 있도록 10~15년 유예기간까지 주자'고 하는데, 무슨 한국경제가 재벌 2,3세의 시험장인가, 연습장인가? 이건 정말 진보하고는 거리가 먼 과거의 순재벌적 시장이 아닌가. 어떤 경제학 논리로도 입증될 수 없는 주장이 아닌가 생각된다.

나는 장하준 교수가 지지한 국민경제적 관점, 혹은 국민기업 관점에서라도 재벌의 탈세문제, 경영권의 불법세습독점의 문제는 바로잡아야 하는 것 아닌가 생각한다. 그리고 21세기 세계경제 조건에서 한국 자본주의의 발전 그 자체 관점에서 볼 때 과연 60~70년대식의 재벌 총수 체제, 황제식 경영, 문어발식 경영이 효율적이지 않다고 생각한다. 재벌을 해체하면 기업집단이 해체되는 것으로 장하준 교수는 암암리에 이해하는 것 같은데 내가 볼 때는 재벌 해체와 기업 집단 해체는 전혀 다른 문제다. 재벌이 해체돼도 기업집단은 살아남을 수 있다. 장하준 교수는 재벌의 국내적 뿌리를 강조하면서 외국 자본이나 국제 금융 투기 자본에 비해 나은 게 아니냐고 하는데, 사실 재벌들이 최근 얼마나 글로벌화 되고 있나. 그리고 재벌을 대상으로 삼아야 사회적 대타협을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 같은데, 그 근거가 재벌은 그래도 '이 씨도 있고 정 씨도 있고 해서 잘 아는 사람들이고 싸우기 쉬운 것 아니냐'고 하는데, 그래서 더 싸우기 힘들다고 생각한다. 외국 자본과 싸우면 싸움하기 쉬울 것이다. 민족주의 정서도 동원하고. 참여연대에서 발표한 게 있지 않나. 삼성하고 싸우면 삼성이 얼마나 인맥 학맥을 쫙 뿌려놨는지 한 다리 건너면 삼성 다 걸려 있는데 싸우기 정말 힘들다.

경제민주주의를 보통 사람의 생활수준의 문제로 환원하고 있는데 보통 사람들이 살기 힘든 문제는 민주주의의 문제를 너무 경제주의적으로 격하 환원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우리가 87년에 정치적 민주화를 이룩하고 향후 과제가 경제민주화라고 할 때 무엇보다도 산업민주주의, 작업장 민주주의, 일하는 사람들의 민주주의를 얘기해야 한다. 진정한 의미에서 경제민주주의 실현을 위해서는 작업장 민주주의 실현뿐만 아니라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와 사회적 생산, 인간의 필요에 의해 보통 사람들의 필요에 따른 생산이 이뤄져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참여계획 경제가 필수적이라고 생각한다.

정성진 "노조는 대타협의 당사자 왜 안 되나"

장하준 교수는 전혀 비현실적이고 백일몽과 같은 주장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내가 볼 때 경제민주주의를 지향한다면 결국 자본주의를 넘어서야 한다. 즉 시장경제 자체를 넘어서야 한다. 결국 자본주의 시장경제라는 것과 민주주의라는 것이 양립 가능한가의 문제가 진지하게 고민이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끝으로, 사회적 대타협을 주장하는데 그 내용이 추상적이고 모호한 것 같다. 재벌 경영권을 보장하고 그 대가로 복지를 하자는 주장인데, 이 때 투자 증대와 복지국가, 이런 것이 사회적 대타협의 협상의 대상이 될 수 있는지 불분명하다. 우리가 재벌로부터 받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대타협의 당사자가 누구인지에 대해 재벌과 국민을 설정하고 있다. 장하준 교수의 설정은 국민주의, 민족주의적이고 대단히 국익주의적인 것 같다. 사실 신자유주의의 효과라는 것이 이른바 국민을 20:80으로 쪼개 버리는 것 아니겠는가. 우리가 같은 대한민국에 살면서 같은 배를 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월드컵 때 빼고는 얼마나 많을지 의문이 간다.

대타협 당사자를 모호하게 국민이라고 설정하고 노조는 조직률이 낮다는 근거로 빼는데, 중심적 당사자에서 고려를 안 하는 것 같다. 재벌 양보를 받아야 하는데, 이 때 국민이나 정부가 어떤 것을 그냥 내놓을 리 있겠나. 협상 무기로 무얼 사용할지 애매하다고 생각한다. 사실 국민도 그렇고 국가 관료도 삼성에 포획돼 있는데. 과연 국민의 대리인으로 정부가 사회와 대타협한다고 할 때 정부가 완전히 재벌 사람들인데 타협이라는게 제대로 되겠는가.

장교수는 이해당사자 자본주의를 주장한다. 주주뿐만 아니라 지역 주민이라든지 관련 업계라든지 종업원이라든지 이해당사자들이 참여해 '1인1표'로 가자고 주장한다. 자본주의 틀 내에서는 일단 인정할 수 있다. 민주적 발전 복지국가로 묘사하기도 한다.

자본주의 유형을 보면 영미식 자본주의가 있고 이해당사자의 유럽식 자본주의 있고, 동아시아의 국가 주도적 자본주의가 있는데, 국가 주도적 자본주의와 이해당사자 자본주의를 결합시킨 것이 장하준 교수가 제안한 모델 아닌가 생각한다. 그런데 삼성과 같이 주주권리조차 인정하지 않는게 우리나라 재벌이다. 주주권리도 인정하지 않는데 재벌들에게 이해당사자 권리까지 인정해 달라고 기대를 하겠는가.

유럽식 자본주의, 이해당사자 자본주의 경험을 보면 노조가 가장 중요한 이해당사자다. 그런데 장하준 교수는 노조를 배제하고 국민이라는 모호한 개념으로 대치를 한다. 지난 87년 이후 한국자본주의 변동. 87년 노동체제의 변동을 보면 이해할 수 없다. 장하준 교수는 재벌의 경영권 세습독점을 인정하자고 주장하는데 결국 노조라든지 이해당사자가 다른 주장을 하면 자본주의랑 상충되지 않나. 이해당사자 자본주의는 이해당사자의 경영참여가 필수적인데, 경영권을 2,3세에게 세습독점을 인정해주고 진정한 의미에서의 이해당사자 자본주의라고 표현할 수 있겠나.

이해당사자 자본주의를 위해 사회적 대타협을 원한다면 재벌 총수의 경영권 독점 해체가 필수적이라고 생각한다. 투쟁하면 공멸하니까 타협을 하자고 하는데, 역사적으로 보면 사실 사회적 대타협이란 것이 거대한 계급투쟁의 도약을 배경으로 해서 이뤄졌다. 이런 사실이 환기가 돼야 할 것 이다. 북유럽 복지국가 수립 과정에서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 양대 세계대전쟁, 대공황, 혁명의 시대 등을 통해 계급투쟁 고양됐고, 이런 과정에서 핀란드, 스웨덴 모델도 형성된 것이다. 북유럽 국가도 제국주의적 지위를 갖고 있었다. 이런 계급적 역학관계나 그 나라들이 자본주의의 중심부에 위치한 지위를 고려하지 않고 우리 사회에 벤치마킹해보자 하는 것이 얼마나 실현가능할까 의문이다. 장교수의 주장이 내가 주장하는 참여계획경제, 사회주의보다 얼마나 현실성 있을지 의문이다.

장하준 "주주자본주의, SK의 부메랑"

장하준 : 말씀 감사하다. 내가 까마득한 후배인데 대꾸를 하는 것이 죄송할 정도다. 토론이니 말을 해야 할 것 같다. 말하신 부분 중 많은 부분은 사실 인식을 공유하는 것인데, 이번 발제에서는 얘기를 안 했던 것도 있고, 내가 워낙 희한한 얘기를 많이 하다 보니 근원적으로 오해를 받는 면도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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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 신자유주의를 들여온 게 재벌들이다'는 얘기는 정확히 맞는 얘기다. 주주자본주의 논리를 처음 들여온 것도 재벌들이다. 80년대 말 재벌들이 머리가 커지면서 정부에게 대들려고 하다 보니, 특히 SK 최종현 회장이 시카고 유학 많이 보내고 했는데 미국에서 들여온 이론이 주주자본주의론이다. 미국 이론에 의하면 기업의 주인은 주주라고 한다. 주식을 제일 많이 갖고 있는 재벌 자신들이 회사를 소유하고 있으니 정부는 사회적 책임이니 뭐니 간섭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96년 전경련 보고서가 발표 전에 유출됐었는데, 그 보고서에는 기업들이 못할 것은 외무부와 국방부밖에 없다고 했다. 공무원을 90% 줄이고 나머지 기업이 담당할 수 있다고 했다. 이게 SK에 부메랑 돼 돌아온 것이다. 장하성 교수가 '주주자본주의 논리대로라면 당신들이 주인 아니다'라고 나서면서 SK가 당하고 있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그 이론 들여온 데 앞장 선 최종현 회장 자손이 공격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단순화 시켜 설명하다보니 국제자본과 국내자본이 나뉜다고 설명했다. 내가 다른 나라 경제 발전론이 전공이다 보니 남미도 많이 들여다보는데 우리나라 자본가들 바보짓 한 것이다. 남미처럼 왕창 착취하고 옛날부터 BMW, 벤츠 사두고 외국에 별장 지어놓고 즐겁게 살 수 있는데 박정희 같은 사람에게 잘 못 걸려서 재벌들이 외제차도 잘 못타고 숨어서 놀러 다니고 그랬다. 지금은 그렇게 하고 싶어 한다. 그리고 그렇게 하고 있기도 하다.

그 다음에 새로운 금융자본 체제 들어오면서 이익을 보는 쪽이 법무법인이나 기업 컨설팅 하는 사람들이다. 득을 보는 사람들이 많다. 민족경제론 시각에서 '외국놈은 나쁜놈, 한국놈은 좋은 놈'이라고 얘기하는 게 아니라, 큰 균열점들 얘기한 것이다.

그런데 말씀 중 동의할 수 없는 것은 결국 신자유주의나 케인즈주의나 그게 그거 아니냐는 지적이다. 먼 시각에서 보면 다 비슷비슷해 보인다. 처음 영국에 갔을 때 듣기 싫은 게 영국애들이 나더러 '일본말을 쓰느냐, 중국말을 쓰느냐?'고 묻는 게 제일 싫었다. 그 사람들이 보기에 동양인은 다 똑같아 보인다. 우리도 서양 사람들 보면 일단 미국사람이라고 하지 않나. 영국애들은 미국 사람이라고 하면 '야만족과 똑같이 취급한다'고 기겁한다. 그런 식으로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입장에서 보면 신자유주의나 케인즈주의나 미국자본주의나 스웨덴자본주의나 다 같은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내 생각에는 다르다. 내가 고등학교 나오고 평범한 노동자이며 선택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미국에서 안 산다. 스웨덴에서 산다. 그 점에 있어서는 기본적 견해차이이기 때문에 그런 차이가 있다는 것만 지적하면 될 것 같다.

장하준 "싱가포르도 사회적 소유 강한 나라"

여러 가지 중요한 말씀 많이 했는데, 일일이 다 얘기하면 끝이 없을 것 같고, 몇 가지만 집어서 얘기하겠다.

우리나라 기업들의 투자행태라든가 소유구조 문제 등 여러 가지 면에서 나와는 다른 의견을 표시했는데, 어떤 것은 더 배워야 할 것도 있다. 그런데 시각차가 나오는 것은 이런 부분이다. 기업에서 배당이나 이자로 지출하는 비율이 예나 지금이나 비슷하다고 하는데, 지금 보면 이자에 비해 배당이 훨씬 늘었고, 주주들의 입김이 세졌다는 것이다. 포스코는 무조건 배당률을 50%로 정해놓고 기업을 경영한다. 그런데 세상에 어떤 기업도 이렇게 경영하지 않는다. 기업이 필요하면 몇 년 동안은 투자를 하면서 배당을 안 할 수 있는 거고, 돈을 많이 벌면 50%가 아니라 70%도 배당을 할 수 있다. 그런데 무조건 50% 배당 안 하면 주가 떨어지고, 외국 자본들이 철강회사 집어먹으려 돌아다니니까 겁이 나서 무조건 50%를 배당하는 것이다.

큰 그림에서는 정 교수 말이 맞지만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고려해야 할 문제가 있다. 경제민주화에서 작업장 민주주의가 중요하다는 것에 동의한다.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 나는 완전 사회주의적 소유, 즉 생산수단에 대한 전체 사회의 소유는 결국 지속가능하지 않다고 믿지만, 많은 부분에서 사회적 소유는 별 문제가 없다. 싱가포르는 우리나라에서 자유경제주의의 본보기로 맨날 얘기하고 있지만 싱가포르 토지가 다 나라의 소유이고, 주택의 85%를 정부가 공급하며, 국민소득의 30%를 공기업이 생산한다. 그런 식으로 상당히 많은 부분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가 이뤄져 있어도 자본주의가 굴러간다. 그런 면에서 사회적 소유에 대해 일부는 동의 하는데, 이걸 참여계획경제로 할 수 있을 것인가는 여기서 할 논의는 아니고 견해가 갈린다.

그리고 노조를 배제했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섭섭한 것 같다. 현재 노조가 약하고 정당성이 부족한 것은 인정해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국민이라는 두루뭉술한 집단이 뭘 할 수 있냐고 하는데, 맞는 말이지만 상대적인 얘기다. 우리나라는 아직도 계급분화가 진화되고 있지만 자본주의 역사가 오랜 나라보다 계급분화가 깊이 진행되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나라에 비해 국민이라는 카테고리가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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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 가서 영국이 계급분화가 심한 사회라는 것을 보고 놀랐다. 영국사회 계급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봤는데 어떤 은퇴 광부 부부의 인터뷰였다. 부부의 아들이 공부를 열심히 해 대학을 갔고, 고교 선생이 됐다. 우리나라 같으면 어머니 앞치마로 눈물을 훔치고 그럴 텐데 이 사람들 안 그랬다. '저 자식이 우리를 배반했다'고 하더라. '어떻게 노동자의 자식이 중산층이 될 수 있냐'라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더 예를 들자면, 축구가 요즘은 기업화 되면서 많은 영국사람들이 보지만 축구는 원래 노동계급의 운동이다. 상류층은 럭비를 한다. 영국 상류층은 축구 안 보는 사람 허다하다고 한다. 나보다 5~6살 많은 영국인이 있었는데, 이튼 같은 최고급 학교는 아니지만 보통 사람들은 돈이 많이 들어 잘 갈 수 없는 기숙학교를 다닌 사람이 있었다. 그는 자기가 학교 다닐 때 축구를 하면 선생님한테 혼났다고 한다. 상놈 운동한다고. 계급의 골 깊어서 그렇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그 정도는 안 됐으니까. 국민이라는 카테고리 상당히 의미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스웨덴처럼 노조 중심으로 사회적 대타협을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닌 것 같다. '노조가 세다'는 스웨덴도 자본주의를 폐지 못 했으니 우리가 할 수 있는 범위에서 뭘 할 수 있을까 생각을 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스웨덴 정부에서 돈 받은 것도 아닌데…, 언제 스웨덴 정부에 편지 보내서 연구비라도 타봐야겠다.(웃음) 스웨덴과 핀란드 등 북부 유럽 국가들이 제국주의 체제의 중심적 지위에 있었다고 얘기하는데, 스웨덴은 어느 정도 그 얘기 가능하지만 핀란드는 그렇지 않다. 핀란드는 700년 동안 식민지였고, 유럽에서 제일 가난한 나라였다. 유럽에서 최후의 기근을 겪은 나라이다. 핀란드에 그런 카테고리를 적용하는 것은 맞지 않다.

결국 제 시각이 제한이 돼 있기도 한데,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것이 별로 바람직하다고 보지도 않고 가능하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나마 우리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을 이런 시각에서 해보면 어떨까 하고 얘기하는 것이다. 물론 한계가 있다. 다만 그냥 이대로 놔두면 괜찮을까 항상 걱정하다보니, 그러면 '기존의 틀을 깨고 새로운 틀을 만들어볼 길이 없을까.' 그런 생각 때문에 이런 얘기를 한 것이다. 그렇게 이해를 하고 들어주면 좋겠다.

장하준 "재벌들에게 쓸 수 있는 국민의 무기 딱 하나…경영권"

정관용 :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것'에 대한 시각차는 진전시키기 어려운 주제인 것 같다. 그런데 마지막 부분에 얘기한 사회적 대타협에 대한 논의가 불분명하다. 사회적 대타협의 주체로 '국민'이라는 카테고리가 가능하다고 하는데, 재벌 당사자들에게 어떤 양보를, 어떤 무기를 통해 얻어낼 거냐 등의 구체적 방법론에 대해 보충 답변을 들었으면 좋겠다.

장하준 : 지금 재벌들에게 무기로 쓸 수 있는 것은 딱 하나 경영권 보호 장치이다. 그것이 특정 재벌의 세습을 인정해주냐 안 해주냐는 논의를 통해서 결정해야 할 일이다. 예전에 신문에 그런 칼럼을 쓴 것은 발상의 전환을 해보자는 것이지, 특별히 삼성의 경영권 세습을 인정해주자는 의미는 아니었다. 지금 국민들 입장에서 재벌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은 그것(경영권 보장) 딱 하나라는 의미다. 그래서 그걸 축으로 설정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 다음에 사회적 대타협의 당사자로 '국민'이라는 카테고리를 생각하는 것은 복지국가라는 틀이 있어야 모든 사람이 최소한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복지국가의 대상이 되는 것은 노조라는 좁은 개념이 아니라 전 국민이 커버돼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국민'이라는 개념을 더 강조하는 것이다. 또 한 가지는 우리나라에 계급정치가 발달이 안 돼 있고, 계급정치를 이끌어 나갈 수 있는 노조 세력이 숫자가 적을 뿐더러, 맞는 이유에서건 틀린 이유에서건 대중적 어필을 받지 못하고 있지 않나.

김용기 "경제적 불평등 심화는 정치적 민주주주의를 위협"

정관용 : 사회적 대타협의 모델을 설정하고 발상의 전환을 통한 새로운 그림을 그리는 것과 구체적 실천 방법론은 다를 수 있는데, 구체적 실천 방법론은 남겨져 있는 얘기인 것 같다. 삼성경제연구소 김용기 박사의 의견을 들어보겠다.

▲ 김용기 연구원. ⓒ프레시안

김용기 :
논의를 위해 경제민주주의가 무엇인가 정의를 하는 것이 좋겠다. 인류가 발전해 오면서 두 가지 제도가 발달해왔다. 하나는 민주주의이고 하나는 시장이다. 양자 사이에서 민주주의는 사회적 정의, 경제에서는 효율성 등 개인의 재산이나 사회 재산권을 강조하는데, 두 가지 개념이 부딪히기도 하고 일정하게 타협하기도 한 것이 19세기 말~20세기 역사다. 경제민주주의도 20세기 초반 미국을 중심으로 경제민주주의 사고가 나온 배경 자체가 경제적 불평등이 일정수준 넘어서게 되면 정치적 민주주의를 위협하게 되는 것 아닌가 하는 배경에서 나온 것으로 알고 있다.

실제로 19세기 말이나 20세기 초반으로 오면 미국에서 재벌이나 대기업의 노조 탄압 사례가 나타났다. 상당수 기업들의 자본주의적 성향이 강화되면서 그 결과가 파괴적으로 나타났다. 최종적으로 그 원인에 대해서는 많은 얘기를 하고 있지만, 1920년대 공황을 맞게 되는 파괴적 결과를 통해 다수 대중들 어려움 겪게 된 것을 얘기할 수 있다. 경제적 불평등이 일정 수준을 넘어서게 하는 과도한 시장 자유의 확대는 파괴적 결과를 나타내는 것 아닌가 얘기할 수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런 경제적 불평등을 조정하는 움직임이 여러 나라에 있었다. 우리나라 헌법에도 그러한 조항이 많이 있다. 무상교육, 주거, 근로의 권리. 주택 등 다양한 조항이 있다. 분야에 따라서는 개인의 자유도 일정하게 공공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을 경우에는 법에 의해 제약하는 내용이 있다. 보편적으로 경제민주주의는 각국의 헌법을 통해 각 나라에서 일정한 부분 타협을 통해 나타난 결과인 것 같다. 그 중 하나가 정 교수 얘기한 산업 민주주의도 세계적으로 노동3권이라는 것이 과거에는 보장이 안 되다가 전면적으로 보장된 것이 미국에서 와그너 헌법이라는 것에 의해 보장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후에 노동3권이 너무 강화되고 노동자들에게 노동3권 이외의 많은 권한들이 보장 되면서 임금 문제가 정치화되기도 했고, 국민경제에 파괴적 결과를 나타내는 양상이 됐다. 그러면서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정부는 노동3권은 보장하되 나머지 권한에 제약을 가하게 되는 양태가 나타났다. 이것 또한 변화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사회적 형태라고 본다.

장하준 교수는 외환위기 이후 생존권적 기본권이 경제민주주의의 요체라고 생각하는데 이게 정치의 민주화 이후 개선되지 않고 상당부분 약화된 것 아니냐고 지적하고 있다. 경제민주주의가 엉뚱하게 주주권 강화를 통해 주주민주주의를 강화시켰다는 지적에 동의한다. 기업 내에서 주주의 권한 강화는 넓게 보면 경제민주주의의 하나라고 얘기할 수 있다. 소비자 민주주의 강화라든가 산업 민주주의도 경제 민주주의의 하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주주민주주의도 기본적으로 국민경제 다수의 이익에 부합할 때만 정당성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주주민주주의가 나온 배경은 1930년대 미국이었다. 당시 주주는 대부분 개인투자자였다. 특히 한국과 같이 외국자본이 집중돼 있거나. 개인으로서 남의 위임 받는 기관 투자자가 아니라 대부분 실질적으로 주식을 갖고 있었다. 우리나라나 유럽과 달리 미국은 단일한 대주주가 존재하고 있지 않은 상황에서 주주민주주의가 정당성을 가졌지만, 이후에 들어와 정당성이 없어졌다고 생각한다.

바로 투자 부진이나 고용의 불안정. 외국자본 중심 주주권한 강화. 결과적으로 합의를 할 수 있고, 합의를 해왔던 경제민주주의를 약화시킨 것 아니냐고 요약을 할 수 있다.

김용기 "1주1표는 글로벌 스탠다드 아니다"

기본적으로 장하준 교수의 주장에 동의하면서 두 가지 사항에 대해 말씀드리겠다. 하나는 1주1표주의이다. 정성진 교수도 주주권한에 대해 얘기했는데, 주주권한조차 보장되지 않으면 어떤 것이 보장되겠느냐 한다. 그러나 현 상황에서 그런 주장은 대단히 옳지 않다. 주주민주주의는 민주주의에 부합하지도 않는다고 지적하고 싶다.

첫 번째로 우리가 일부에서 상당수 사람들이 당연시 하고 있는 1주1표주의라는 것은 세계적으로 보편화 되고 있는 제도가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상법상의 1주1표주의를 지적하고 있는 곳은 러시아와 한국뿐이다. 러시아는 공산권 붕괴 이후 철저하게 신자유주의적 공세에 의해 만들어진 나라이다.

기업은 기본적으로 개인에 의해 출발을 한다. 기본적으로 기업은 가족기업으로 출발해서 성장을 하면 판단의 순간에 직면하게 된다. 투자와 고용을 촉진하고 더 성장하기 위해서는 외부자금을 수혈 받아야 한다. 은행 돈을 빌리거나 주식시장 상장을 통해 외부자금을 받는데, 어쩔 수 없이 맞이하는 딜레마가 있다. 기업을 공개하면 기존 오너의 주식지분이 옅어지게 된다. 그러기 때문에 많은 기업들이, 우리라도 70년대 재벌들이 기업공개를 원하지 않았다. 미국이나 유럽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나라는 정부가 긴급명령 발동하고 다양한 강압적 조치를 내렸다. 미국 유럽은 증권거래소가 기업과의 타협을 통해, 차등의결권 등 다양한 형태의 기존 오너의 보호 장치를 만들었다. 소유 지분이 옅어져도 지배권을 행사할 수 있게 하는 타협을 한 것이다. 타협의 결과는 사회적 고용의 확대와 투자 확대를 통한 국민경제의 성장이었다. 타협의 결과가 소유와 지배권의 간격으로 나타났다. 차등의결권이 될 수도 있고, 상호출자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한국은 차등의결권이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상호출자 형태로 80년대말까지 진행돼 오다가 80년대 상호출자를 공정거래법 개정으로 금지를 했기 때문에 순환출자가 발전된 형태를 나타내고 있다. 사회적 타협의 결과라는 말씀으로 드리고 싶다.

기본적으로 1주1표주의의라고 말할 수 있는 소유권과 지배권 간격 줄이기를 최근 EU 쪽에서도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다. EU집행위원회도 신자유주의에 가까운 곳이다. 19개 선진국의 회사제도를 연구한 자료가 있다. 그런데 19개국 어디서도 소유권과 지배권을 일치화하는 제도를 갖춘 나라 한 곳도 없다. 464개 기업을 조사한 결과 44%가 차등의결권과 피라미드 의결구조를 갖고 있고, 상호출자 등의 제도가 존재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제도가 기업의 가치를 파괴하는가? 아무런 증거를 찾아볼 수 없다. 주가와 실제 가치가 일치한다고 믿기가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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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재벌개혁, 경제민주주의를 주장하며 대표적으로 나오는 얘기가 소유권과 지배권의 괴리 현상을 일치시키려는 노력이 올바른 것인가인데, 소유와 지배권의 일치가 전세계적으로 받아들여지는 타당한 논리인가를 따져봐야 한다.

1주1표의 주주민주주의와 정치 민주주의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정치적 민주주의는 보통, 평등. 직접, 비밀 선거의 원칙에 의해 진행된다.

하지만 1주1표의 주주민주주의는 주총에서 공개적으로 찬반 의사 표명이 되고 위임투표가 허용되며, 주식의 권리에 따라 투표 권리가 형성된다. 주주가 잔여 청구권자다. 종업원은 월급을 받고 은행은 이자를 받고, 하청업체는 제품에 대한 보수를 받고 있으니까 그들이 대가를 받은 이후에 남은 것은 주주가 가질 수밖에 없으니 주주들이 잔여청구권자이고 기업 경영의 리스크를 그들이 지기 때문에 기업의 주인이라는 주장은 대단히 타당하지 않다.

주식시장에 의해 하루에도 몇 번씩 주주가 바뀐다. 그들이 회사의 종업원과 국민경제에 대해 무슨 책임을 지고 있나. 주주는 유한한 책임을 지지만 기업의 종업원이나 하청업체, 채권은행은 계약을 해지하기 어렵다. 오히려 이들이 기업과 운명을 같이 하고 국민경제에 대해 오히려 가깝게 고민 할 수 있는 주체인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 기본적으로 현재 재벌개혁의 방향으로 잡고 있는 소유와 지배권 간격 좁히려는 노력이 기본적으로 타당하지 않다.

김용기 "개방화·경쟁 불가피, 재교육시켜 개방과 경쟁의 장에 돌려보낼 인프라 구축해야"

두 번째 사회적 대타협에 대해 말씀 드리겠다. 사회적 대타협은 기본적으로 시장경제 원리가 철저히 적용돼야 한다. 그렇지만 민주주의적이라는 가치를 훼손할 수 없다. 어려운 생활 속에 왜곡되는 자신의 존엄성이 훼손되는 것을 막는 것이 경제적 민주주의이다. 일정하게 시장 경제의 효율성만을 사회의 모든 영역, 경제 외적 영역까지 확장시키는 것에 제약을 가하는 것이 경제민주주의이고, 이것을 실현시키는 수단이 사회적 대타협이라고 생각한다.

역사적으로 보면 공황의 시기에 그러한 일들이 분명히 목격이 됐다. 1930년대에 미국과 스웨덴에 많은 고민이 있었다는 것 알게 된다. 대다수 사람들이 고통을 받게 된다는 것에 대한 어려움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고민했고, 이것을 타개하기 위해 어떤 세력들이 연합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 고민했다.

프랭클린 루즈벨트도 초기에는 과거 자유주의적 주장을 답습했다. 그러나 이후 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변화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 한국 경제 어려움의 본질이 어디서 비롯되는 것인지 분명하게 판단할 필요가 있다. 그것을 해쳐나가기 위해 이해관계자들 대타협이 필요하다는 것이 장하준 교수의 사회적 대타협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이 장교수 지적처럼 어떻게 타협을 할지, 누구랑 타협을 할지,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인지. 그것을 선택하는 것이 미래에 대한 선택이라는 것에 동의한다. 여기서 나는 결론적으로 과연 현재 다수 국민들의 삶을 어렵게 만드는 것이 대기업 집단의 소유권과 지배권 간의 괴리에서 비롯되는 것이냐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줄이려고 노력을 하고, 소위 지배구조 개선을 통해 주가 올리는 것이 국민경제 어려움을 해소하는 최선의 길인가에 대해서 생각을 해 봐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고용의 불안, 개방화 속에서의 경쟁 가속화 등에 대비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이런 추세에 적응하기 위한 준비를 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다수 존재한다. 그들을 재교육 시켜 다시 개방과 경쟁의 장에 다시 돌아가게 할 수 있는 사회적 인프라가 부족하고 그러한 사회적 인프라를 갖출 수 있는 재원이 부족하다. 그것을 준비하는 것이 경제 민주주의에 부합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정성진 교수가 '한미FTA는 삼성경제연구소의 프로젝트'라고 하는데, 근거 없는 문제의식으로 대단히 잘못됐다고 생각한다. 삼성경제연구소 연구원이 120명이다. 한미FTA를 담당하는 연구원은 딱 한 명이다. 그리고 그 분이 파견 가 있는 동안 다른 연구원이 보고서를 쓰기도 했다. 오히려 한미FTA 타결 이후에도 우리 연구소에서 보고서가 별로 나오지 않아 항의를 들어야 할 정도였다. 그런데 어떻게 한미FTA가 삼성경제연구소의 프로젝트라고 말할 수 있나.

기본적으로 재벌을 해체하는 것은 전혀 진보적이지 않다. 그것을 알게 하는 역사적 경험이 있다. 1912년 미국 대통령 선거를 보면 알 수 있다. 1880년부터 1920년대까지가 미국에서 양극화가 굉장히 심화됐던 시기였다. 대기업에 의한 복지조차 존재하지 않던 사회였다. 굉장히 심한 자유주의적 이데올로기가 난무했던 시기였다. 그 시기에 쟁점이 됐던 것이 기업의 득세와 각 사회 부문이 어떻게 대응을 해야 할 것이냐였다. 시장의 과다한 파괴적 행위에 대해서 어떻게 하는 것이 민주주의를 지속하고 국민경제 발전시킬 수 있느냐는 것이 1912년 미국 대선의 쟁점이었다. 당시 민주당 후보였던 우드로 윌슨이 선거에서 이겼다. 2등을 한 후보가 진보당의 시어도어 루즈벨트였다. 시어도어 루즈벨트는 미국 역사상 가장 인기 있는 대통령 중 하나인데 1900년대 초반 공화당 대통령이었다. 공화당 대통령으로 있으면서 대기업의 파괴적 행위에 대해 오히려 억제를 하는 데 서슴없이 나섰던 인물이다. 개인의 자유나 민주주의 보호에도 노력했던 대통령이다. 1912년에는 태프트가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자 루즈벨트가 '이 사람 안 된다'며 진보당 후보로 나와 2등을 했던 것이다. 그 당시 진보당의 시어도어 루즈벨트 후보가 주장한 것이 '재벌은 우리 국민경제의 자산'이라는 것이다. 이들에 대해 일정하게 필요한 부분 규제를 가하고 자산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 중요하다는 얘기다. 이런 역사적 경험에 우리가 참고해야 할 내용이 있지 않은가 생각한다.

장하준 "삼성은 전근대적 무노조주의 하루 빨리 없애야"

장하준 : 김용기 박사의 말에 많은 부분 동의를 하기 때문에 한두 가지만 말씀드리겠다. 하나는 삼성 같은 기업이 워낙 중요하기 때문에 할 일이 많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삼성의 무노조주의라든지 하는 것은 굉장히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라고 보고, 하루 빨리 없애야 한다. 재밌는 일이 뭐가 있었냐면 삼성이 삼성중기계를 볼보에 팔아 볼보중기계가 됐는데, 들리는 얘기가 볼보중기계에서 직원들에게 제발 노조 좀 만들어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스웨덴에서는 모든 일을 노조를 통해서 하기 때문에 노조가 없는 회사 경영이 상상이 안 됐던 것이다. 글로벌화한다고 하는데 전근대적인 제도다.
▲ ⓒ프레시안

또 정성진 교수 지적에 따르면 삼성이 인맥 학맥 등을 통해 주요인사들을 관리한다고 하는데, 이런 행태도 빨리 버리고 모범적인 모습을 보여줘야 되는 것 아니냐는 얘기를 삼성그룹에게 얘기하고 싶다.

김 박사 말씀 중에는 1주1표는 세계 보편이 아니라고 하는데 좋은 지적이다. 이 문제를 보면 우리나라에서 유행하는 '글로벌 스탠다드론', 이것이 저급화되면 '대세론'과 같은 것들이 나타나는데 여기에 대해 몇 마디 하겠다.

우선 대세론에 대해서. 그건 정말 안 되는 것이다. 대세론 내새우려면 친일파도 처벌해선 안 된다. 그들도 그 때는 그게 대세였다. 100년이 지나면서 잘못된 일이라며 재산까지 환수하는데, 지금은 FTA가 대세라며 밀어 붙이나. 대세론에서 고급화된 것이 '글로벌 스탠다드론'이다. 잘난 나라들 하는 거면 우리도 거기 맞춰야 하는 것 아니냐는 얘기다. 김 박사가 잘 지적했듯. 글로벌 스탠다드라고 믿고 있는 것 중에 글로벌 스탠다드가 아닌 것이 엄청나게 많다. 1주1표가 글로벌 스탠다드라고 하는데 아니다. 좋은 기업 지배구조 얘기하고 그러는데, 글로벌 스탠다드에서 좋은 기업 지배구조라는 것이 가족이나 지배적인 주주 없고, 국가 소유 없고, 이사진은 다 사외이사고 등의 식으로 얘기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것들을 글로벌스탠드라고 믿는다.

그런데 좀 살펴보면 그렇지 않다. 예를 들어 보면, 자동차 세계 10대 업체 중 그런 기업 지배 구조 갖추고 있는 기업은 제네럴 모터스 딱 하나 밖에 없다. 일본기업들은 사외이사가 하나도 없다. 독일은 노사 공동의사결정제라 주주권이 보장 안 된다. 프랑스 르노는 국영기업이었고, 민영화된 지금도 정부가 최대 주주이다. 폭스바겐도 독일식의 노사 공동의사결정제를 갖고 있고, 여기에 더해 폭스바겐이 위치한 니더작센 주정부가 20%의 의결권을 갖고 있다. 프랑스 푸조는 가족 소유이다. BMW는 10등 안에 못 들지만 역시 가족 소유이다. GM과 같은 미국 회사라도 포드는 차등 의결권이 있어서 포드가 사람들의 동의가 없으면 인수합병 등 중요한 결정을 할 수 없다. 왜 우리만 하려 하는가. 다른 나라들이 안 하는 이유가 다 있다.

기업과 떨어진 얘기지만 산업정책 얘기하면 촌스럽다고 한다. 미국도 안 하는 것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미국이 왜 산업정책을 안 하나. 우리나라 산업에서 R&D 비율이 20% 정도 되는데 미국은 50% 이상 된다. 최근 몇 년새 40%대 떨어졌는데, 6,70년대에만 해도 70%까지 됐다. 미국은 산업정책을 가장 세게 하는 나라다. 미국이 기술 우위를 갖고 있는 것 중 정부 지원을 받지 않는게 없다. 자동차, 비행기, 생명공학, 반도체 등. 그런데 우리는 미국은 산업정책 안 한다고 순진하게 믿고 있다.

과연 이런 식의 대세론이나 글로벌 스탠다드론을 따르며 정책을 윽박지르듯 몰아가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봐야 한다는 말씀 드리고 끝을 맺겠다.

정성진 "일본도 전후 재벌 해체"

정관용 : 사회적 논의 통해서 같이 키워나가자.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천해나갈 수 있는지. 꽤 나갈 과정 남아 있는 것 같다.

정성진 : 김용기 박사께서 장하준 교수에 대한 코멘트뿐만 아니라 저에 대한 코멘트를 하셨기 때문에 다시 답을 드리겠다. 우리나라 재벌체제 문제를 소유권과 지배권 괴리 문제로 파악을 하고 참여연대 주장이 괴리 좁히는 것으로 파악하는 것 같다. 나는 이 논의 안에서 얘기하는 것 관심이 없다. 김상조 교수가 나왔으면 더 분명하게 반론을 펼쳤을 거라 생각하지만, 몇 가지 더 얘기를 해보면 이렇다.

지분이 1% 밖에 안 되는데 엄청난 선단을 경영하느냐의 문제도 있지만, 경영권 보장한다는 것, 경영권을 세습하고 경영권을 독점적으로 재벌 일가가 유지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가 재벌개혁론에서 많이 주장이 돼 왔던 것이라 생각한다. 그 과정에서 소액주주 권한 보장해 달라는 것이다. EU의 사례를 들었는데, 소액주주 권한은 유럽에서도 인정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차등의결권 전혀 인정 안 된다고 하는데. 의결권은 보통주와 우선주의 차이가 있지 않나. 그리고 외국자본과 소액주주가 단결해서 삼성의 경영권을 탈취한다고 설정한 상황 자체가 비현실적이다. 재벌개혁론에서는 이재용이 탈세하며 세습하는 것을 문제 삼는 것이다.

재벌 해체라는 것이 전혀 진보적이 아니라고 말하지만 일본은 전후에 재벌 해체했다. 일본이 경제 망했나. 전문화된 기업가 집단으로 체질개선해 미국에 버금갈 정도로 효율성 높아졌다. 내가 한미FTA를 재벌의 프로젝트라고 한 것에 대해 '삼성연의 프로젝트가 아니'라고 하니 더 밝혀봐야 할 문제지만, 분명한 것은 논평의 취지는 소위 신자유주의 개혁 추진하는 데 있어서 삼성을 비롯한 재벌들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김용기 "공정거래법은 전두환 정권의 가격 안정책일 뿐"

김용기 : 일본의 재벌해체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경제민주주의 과정에서 예를 들자면 일본을 들 수 있다. 그러나 경우가 다르다. 맥아더 장군이 전쟁 원흉으로 일본의 재벌을 지목했기 때문에 재벌을 해체하게 된 것이다. 그것과 한국의 상황은 대단히 다르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한국에서 재벌개혁 얘기가 나오게 된 것은 70년대 말이고 다수 조치가 나왔지만 법적 근거가 없었다. 1980년 공정거래법 처음 만들어졌는데 나는 공정거래법도 불법이라고 생각한다. 전두환이 정권을 잡은 뒤 국가보위입법회의를 만들어 국민의 대표로 선출되지 않은 자들이 의회 권한을 행사해 만든 것이다. 공정거래법의 등장 배경은 경제민주주의와 다르다. 1970년대 말 가격 안정화 정책이 득세하고, 국가가 가격을 통제하기 위해 만든 법이다. 경제민주주의가 아니라 정권에 의한 가격 통제이다.

정관용 : 우리 사회에서 재벌 문제가 중요하게 부각돼 있어서 어떤 논란이더라도 논란의 중심이 된다. 재벌 비판할 점은 많지만 살릴 건 살리자고 하다 보니 협공을 받고 양쪽 반반씩의 지지만 받게 되는 것 같다. 장하준 교수가 전경련 등에서 이런 강연을 하면 어떤 반응인가.

장하준 "내가 답을 갖고 있지는 않다. 다르게 바라보자"

장하준 : 내 주장이 워낙 기존의 담론 틀을 벗어나있다 보니 다들 자기 편한 대로 해석을 한다. 어떤 사람들은 일부만 보고 나랑 다름에도 불구하고 내 주장을 좋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생각이 비슷한데 특정 주장 하나가 마음에 안 든다면서 나를 이상한 사람이라 욕하곤 한다. 내가 애매한 입장에 있는데, 내가 생각한게 꼭 맞다는 생각을 갖고 있지 않다.

그래도 한 가지 아쉬운 게 이런 논의할 때 과거의 이데올로기에 묶여가지고 행동하는게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또 정말 정성진 교수처럼 과감하게 (자본주의의) 틀을 깨고 다시 해야 한다고 얘기하는 것도 아니다. 진보적 재벌개혁을 하려면, 재벌들이 범법행위 했을 때 국유화 해버리면 된다고도 한다. 그러나 나는 문제 많다고 생각한다. 그런 것이 진보적 해결책이라면 어정쩡하게 재벌은 미운데 그렇게 까지 말을 못하니 주주자본주의의 논리를 빌어 국제금융자본이 와서 혼내줬으면 하는게 문제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내가 답을 갖고 있지 않다. 다른 사람들 듣기 싫은 소리 많이 하는데, '이게 진보다'라는 것 중에 잘못된 것도 많고, 사실이 틀린 것도 많은데, 다른 의미로 보자는 취지에서 얘기하는 것이다. 장시간 얘기 들어주셔서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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