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 후보들이 압도적 지지를 얻고 있다고 해서 국민들의 정치적 경향이 보수주의로 크게 기울어 있는 것은 아니다.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보수·중도·진보에 대한 국민의식은 나름대로 균형을 이루고 있다. 후보에 대한 지지와 이념에 대한 지지 사이의 부조응 내지 비대칭이 존재하는 셈이다. 왜일까. 자신의 이념적 성향이 중도 내지 진보임에도 불구하고 보수 후보를 지지하는 이유가 과연 뭘까.
한나라당의 '경제주의적 민중주의'
선거가 인물, 정당, 담론, 정책들이 경쟁하는 것이라면, 국민들의 시선에서 보면 한나라당의 두 후보는 인물과 정당에서 상대적 우위를 점하고 있다. 더불어 노무현 정부와 중도개혁 세력에 대한 실망이 일종의 반사이익을 더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철옹성과 같은 한나라당 두 후보의 지지율을 설명하기에 뭔가 부족한 감이 있다. 정책의 내용 및 쟁점이 아직 크게 공론화되지 않은 상황을 고려할 때 역시 담론과 정치적 전략에 나머지 2%가 있다고 봐야 한다.
나는 그것을 '경제주의적 민중주의'라 이름 짓고 싶다. 경제주의적 민중주의는 1970년대 후반 이후 영국 보수당을 이끌었던 대처의 선거 및 정치 전략을 사회학자 스튜어트 홀이 명명한 '권위주의적 민중주의'(authoritarian populism)를 변형한 것이다.
당시 대처는 복지국가의 신자유주의적 개혁을 정치 전략으로 내걸고, 영국사회를 일하는 영국 사람과 일하지 않은 영국 사람으로 나누는 이른바 '두 국민 전략'을 통해 지지 세력의 결집을 모색했다. 대처의 전략은 효과적이었다. 그것이 경쟁, 시장, 가족 등의 가치를 전면에 내세운 보수주의 전략임에도 불구하고 노동자계급을 포함한 민중의 동원에 상당한 성공을 가져 왔다.
이명박 후보의 대운하 프로젝트와 박근혜 후보의 '줄푸세' 전략의 이면에 놓여 있는 정치적 기획은 경제주의적 민중주의다.
경제주의적 민중주의는 경제, 성장, 발전에 대해 국민 다수에게 새로운 기대를 불러일으킴으로써, 다시 말해 국민 다수를 경제주의적 가치로 호명(呼名)함으로써 대중적 동원에 어느 정도 성공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현재의 상황은 이런 경제주의적 민중주의가 창출한 보수적 헤게모니가 정치적 우위를 점하고 있는 국면이다.
보수 세력의 양면성
주목할 것은 현재 우리 사회 보수 세력이 갖는 양면성이다. 보수 세력은 한편에서 여전히 구식 개발주의와 반공주의에 의존하고 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신자유주의, 공동체주의를 새로운 가치로 내세우고 있다.
이 양면적 특성은 세대를 달리해서 정치적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개발주의는 노장 세대를 중심으로 과거 박정희 시대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고, 신자유주의는 세계화의 충격에 대응한 경쟁, 효율성 담론을 부각시킴으로써 청년 세대에게 어필하고 있다.
보수적 지식인들의 역할 또한 주목해야 한다. 특히 박세일 교수의 '대한민국 선진화 전략'은 선진화 발전전략과 그 철학적 기초인 '공동체 자유주의'를 강조함으로써 적어도 지식사회 내에서 보수주의를 반공주의와 개발독재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데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
동아시아연구원과 <중앙일보>가 매년 조사하는 우리 사회 파워조직의 영향력 및 신뢰도 조사에서 뉴라이트가 진보적 시민단체들과 대등한 평가를 받은 것에서 볼 수 있듯이 한국 보수의 변화를 부정하기는 어렵다.
요컨대, 현재 우리 사회 보수는 구식 개발독재와 신식 신자유주의 사이의 어디엔가 위치해 있으며, 민주화 시대 이후에 경제, 성장, 발전을 자신의 가치로 전면에 내세우는 '경제주의적 민중주의'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더불어 그동안 추진한 국적법 개정이나 전자 팔찌 제도, 아파트 반값 정책 등은 그것들이 여전히 토론을 요청하는 이슈들이지만, 국민 다수의 삶과 정서에 작지 않은 공감을 일으켜 온 것으로 보인다.
해방 60년의 냉전분단체제 안에서 냉전과 분단이 주는 정치적 반사이익이 사라져 가는 빈 공간을 새로운 보수적 담론 및 정책으로 채우는데 보수 세력 일각은 나름 노력해 왔다고 봐야 한다.
물론 이런 보수의 정치적 기획이 과연 성공으로 귀결될지는 미지수다. 보수 정치권이 보여준 일련의 모습들, 최연희 의원 사건에서 사학법 재개정 시도에 이르기까지 과거의 모습들이 그대로 반복되는 것 또한 적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잖은 국민들의 시선에는 최근의 한나라당이 과거 민정당 내지 민자당과는 사뭇 다른 정당으로 비쳐지고 있다. 현재 한나라당 유력 두 후보가 갖는 정치적 상징은 앞서 지적한 보수의 변화들이 결합돼 있으며, 개혁 세력에 대한 실망이 가져온 반사 이익 이상의 플러스 알파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개혁 세력의 전략적 선택
무릇 정치 세력의 전략은 그 사회가 놓인 '구조적 강제', 국민국가의 '경로 의존성'과 밀접히 관련돼 있다. 현재 우리 사회가 놓인 구조적 강제는 다름 아닌 세계화의 충격이다. 점증하는 국제 금융자본의 영향력, 우울한 '고용 없는 성장', 쉽게 줄어들지 않는 비정규직 노동자, 해법을 찾기 어려운 중소기업 및 자영업자 대책 등은 세계화의 충격을 웅변한다.
이 조건 속에서 국민국가의 경로 의존성은 건국과 산업화를 거쳐 민주화 시대의 한 전환점에 도달해 있으며, 이 와중에 분단체제 극복이라는 일진일퇴의 평화 정착 프로세스 속에 우리 한반도가 놓여 있다고 볼 수 있다.
정치적 전략은 이런 구조적 강제와 경로 의존성에 적극 대처하면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일종의 '전략적 선택'이다. 이 전략적 선택으로 보수 세력은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경제주의적 민중주의를 전파하고, 대중적 동원에 어느 정도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한나라당 두 후보 중 한 후보에 대한 검증이 지난 몇 개월 동안 다각도로 이뤄져 왔음에도 불구하고 지지율이 쉽게 하락하지 않는 것은 경제주의적 민중주의가 나름 효과를 발휘하고 있기 때문이다. 경제만 잘 하면 다른 것들은 모두 용인될 수 있다는 납득하기 쉽지 않은 논리가 무서운 뒷심을 발휘하고 있는 셈이다.
문제는 중도개혁 세력이다. 세계화의 충격과 그것이 낳은 사회 양극화의 확대로 우리 사회가 질적인 변환을 경험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중도개혁 세력은 이에 대해 효과적으로 대응할 정치적 담론 또는 전략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오랜 여정 끝에 민주신당이란 새로운 기항지에 정박했건만, 개혁 세력에 대한 국민 다수의 관심은 여전히 싸늘하다. 민주화 시대 정치적 전략으로 자리매김했던 민주개혁도, 민생개혁도 더 이상 과거처럼 국민들의 이목을 사로잡지 못하며 한반도 평화정착 이외의 새로운 전략의 목록이 눈에 띠는 것도 아니다. 정치권 재편을 통해 구도의 복원을 모색하고 있지만, 새로운 담론과 전략이 부재하는 한 보수 대 개혁의 팽팽한 경쟁구도가 복원될지는 미지수다.
선거는 결국 선택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우리 사회는 오는 12월 19일 새로운 역사적 선택 또는 전환 앞에 서 있을 수밖에 없다. 그 선택으로 가는 길에는 여러 결절점이 존재한다. 오는 19일 한나라당 후보 선출은 그 첫 번째 분기점이다. 과연 한나라당은 누구를 대선 후보로 선택할 것인가. 그 후보에 대한 국민 다수의 반응은 어떠할까. 경제주의적 민중주의는 서서히 새로운 시험대 위에 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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