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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쪽짜리 정규직' 비판에도 '직무급제' 옹호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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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쪽짜리 정규직' 비판에도 '직무급제' 옹호하는 이유

[일과 희망⑮]"기업 울타리 넘어선 임금 정책 마련이 관건"

"노동자도 사람이다"라는 선언과 함께 터져 나온 1987년 7~8월 노동자 대투쟁이 있은 지, 꼭 20년이 지났다. 지난 20년 동안 한국 노동자들을 둘러싼 환경 변화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을 꼽으라면 비정규직의 급격한 증가를 들 수 있다.

실제로 2007년 7월, 노동계의 최대 현안도 비정규직 문제다. 이랜드그룹 유통업체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이 대표적인 사례다. 지난 1일부터 시행된 비정규직법에 따라 이랜드 측이 이들을 대거 계약해지하고 기존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담당했던 업무를 외주화한 데 항의하는 투쟁이다.

이런 사례가 이랜드에서만 나타난 것은 아니다. 정규직과의 차별을 금지하고 2년 사용 후 무기계약근로자(고용 계약을 무기한 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로의 전환을 핵심 내용으로 하는 비정규직법 시행에 따라 각종 편법과 역효과들이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외주화를 통해 이같은 비정규직 '보호'의 책임에서 벗어나고자하는 기업의 시도 때문이다.

비정규직법이 '부족하다'고 외치는 노동계와 달리 기업 역시 '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며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이런 갈등은 앞으로도 상당 기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일각에서는 법시행 한 달도 채 안 된 지금부터 법개정 주장도 나온다.

이 가운데 주목받고 있는 것이 '직무급제'다. 저임금과 고용불안이라는 비정규직의 양대 고통 가운데 고용은 보장해 주되 정규직과는 별도의 직군으로 분류해 임금 및 기타 복지조건에서 차별을 두는 제도다. 우리은행이 처음으로 이 같은 방식으로 기존의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기로 결정하면서 '분리직군제', '직무급제'와 같은 낯선 단어들이 언론 지상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노동계는 이에 대해 여전히 '차별의 고착화'라며 비판하고 있지만 노사 모두 기존의 입장에서 한 발짝 양보해 타협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비정규직 해법이라는 분석도 있다. 바로 그런 점에서 노동계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직무급제는 상당 기간 우리 사회 고용과 비정규직 문제를 논할 때 빠지지 않는 주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번 주 <일과 희망>에서는 이 문제에 대한 전문가의 고민을 담는다. 정이환 서울산업대 교수는 이 제도를 둘러싼 수 많은 문제에도 불구하고 "긍정적으로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단순히 기업의 부담을 덜어주는 '실현 가능성'의 문제를 넘어 "이 제도가 사회적으로 공정한 노동시장 체제로 나아가는 출발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제도의 시행이 곧바로 공정한 노동시장 체제의 확립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다. 자칫하면 양극화의 심화 등의 격차만 벌리는 부작용도 우려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현재의 직무급제를 둘러싼 단순한 '찬반논란'을 벗어나야 한다고 정 교수는 지적하고 있다.

논란이 일 수 있는 주장이다. 하지만 <프레시안>은 1987년 7~8월 노동자 대투쟁 이후 20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빈곤하기만 한 노동 담론의 활성화를 위해서는 이런 '논란'이 좋은 약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런 '논란'을 기대하며, 노동계 입장에서 다소 '도발적으로' 들릴 수 있는 정 교수의 주장을 싣는다. <편집자>

비정규직 관련법이 시행되면서 과거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제도가 등장하여 논란거리가 되고 있다. 이 제도의 핵심은 기간제로 고용되었던 비정규직을 상용직으로 고용하되 대우는 기존 정규직과 다르게 한다는 것이다. 우리은행에서 처음 도입된 이 제도는 공공부문 비정규 대책에서도 중심적인 방안으로 제시됐다.

낯선 제도인 만큼 부르는 이름도 다양하다. 무기계약직, 분리직군제, 중규직, 반쪽짜리 정규직, 직무급제 등이 이 제도를 가리키는 명칭이다. 이 글에서는 일단 '직무급제', '무기계약직', '분리직군제' 등의 이름을 쓰기로 했다. 이 제도의 특징을 가장 잘 반영한 이름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이런 제도에 대해서는 현실적 대안이라는 평가도 있지만 비판의 목소리도 높다. 무엇보다 차별을 고착화한다는 점이 비판되고 있다. 하는 업무가 정규직과 크게 다르지 않은 사람들을 별도의 직군으로 나누고 차별적으로 대우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다.

나아가 무기계약직은 현행 비정규직 관련법의 차별금지 조항을 회피하기 위해 이용된다는 비판도 있다. 기간제 근로자는 차별금지 조항 적용대상이지만 상용직이 되면 적용대상에서 제외되기 때문이다.

수많은 문제에도 불구하고 직무급제 변명하는 까닭은…
▲ 최근 과거에는 없던 새로운 제도가 논란이 되고 있다. 분리직군제, 직무급제, 중규직 등 명칭도 다양한 이 제도에 대해 '차별을 고착화한다'는 점에서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프레시안

이런 문제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이 제도를 긍정적으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당장의 이유는 비정규직의 처지를 개선하는 실현가능성 높은 방안이기 때문이다.

기업에 대한 설문조사 결과들을 보아도 비정규직의 완전한 정규직화는 당장 이루어지기 어려운 것에 비해 무기계약직으로의 전환은 훨씬 실현가능성이 높다.

비정규직이 무기계약직으로 전환되면 정규직과 대우의 차별은 있지만 고용안정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처지가 좋아진다. 게다가 계약직 신분으로 있을 때에 비해 마음 놓고 노동조합에 가입하고 점차 노동조건을 개선해갈 수 있다는 점도 중요하다.

며칠 전 언론 보도에 의하면 분리직군으로 운영되는 우리은행 창구직원 입사 경쟁률이 50 대 1이나 되었고 석사 이상 고학력자도 상당 수 지원했다고 한다. 이 일자리는 분명 '괜찮은 일자리'인 것이다.

직무급제, 공정한 노동시장 체제로 가는 출발점 될 수 있다

무기계약직이나 직무급제를 긍정적으로 보는 더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사회적으로 공정한 노동시장 체제로 나아가는 출발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동일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 유사한 일을 하더라도 고용형태나 기업규모에 따라 노동조건의 차이가 큰 것이 노동시장의 핵심 문제이다. 노동시장에 공정성의 원리가 관철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공정한 노동시장의 핵심 원리는 동일노동 동일임금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대기업 및 공공부문의 일반적 임금형태인 연공임금으로는 이 목표를 실현할 수 없다. 기업의 생존연한이 짧아 근로자의 근속연수도 짧은 중소영세기업, 그리고 산업구조상 노동이동이 많은 서비스업 근로자들에게는 연공임금이 별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연공임금이 공정성 원리에 부합하기 위해서는 대다수 근로자들이 한 기업에 장기 근속한다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일본 남성 근로자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그렇지 못하 다. 전체 임금근로자를 대상으로 할 때 평균 근속년수는 약 4년이며 남성에 국한하여 보아도 약 5년에 불과하다. 게다가 산업구조의 변화에 따라 이동성이 높은 근로자들이 점점 다수가 되고 있다. 사회적으로 공정한 노동시장 체제가 구축되기 위해서는 근속년수가 아니라 직무나 숙련을 중심으로 한 임금결정 기제가 필요하다.

찬반 논란 가운데 기업별 울타리에만 머물러서는 역효과만 커진다
▲ 물론 직무급 도입이 반드시 공정한 노동시장의 실현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현재의 찬반논란에 갇혀 기업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한다면 오히려 사회적 공공성을 높이는 데 별 도움이 안 된다. ⓒ프레시안

이런 시각에서 보면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차선책 또는 고육지책으로 도입되고 있는 분리직군제나 직무급은 임금체계 개편의 첫 걸음으로서 적극적으로 자리매김 될 수 있다.

첫 걸음을 이어가려면 분리직군제나 부분적 직무급제에 머물지 말고 기존 정규직의 임금체계까지 모두 개편하는 데에 까지 나아가야 한다.

지금처럼 정규직에게는 연공적 임금체계에 따라 호봉승급을 해주고 무기계약직에게는 직무급을 적용하여 호봉승급을 하지 않는 방식은 전혀 합리적 근거가 없는 차별이어서 장기간 지속될 수 있는지도 의문이다.

물론 직무급을 도입한다고 해서 반드시 공정한 노동시장이 실현되는 것은 아니다. 직무급은 얼마든지 차별을 고착화하고 합리화하는 방식으로 이용될 수 있다.

실제 직무 내용에 의해서 직무의 상대적 중요도가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기존에 좋은 대우를 받고 있던 직무는 중요한 것으로 분류되고 저임금을 받던 직무는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분류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직무 간 임금격차가 실제 직무 가치의 차이보다 훨씬 커질 우려도 있다. 여성 비율이 높은 직무가 덜 중요한 직무로 평가되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도 여러 나라의 경험을 통해 잘 알려져 있다. 직무급의 적용범위가 기업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면 이 역시 사회적 공정성을 높이는 데에는 별 도움이 안 된다.

게다가 전면적 임금체계 개편은 매우 어려운 과제이다. 혁명적 변화가 필요하다는 얘기도 있다. 그러나 회피할 수 없는 과제가 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임금체계 개편은 비정규직 관련법 상의 차별금지 조항의 실효성을 높이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정부도 말하듯 현행 비정규직 관련법이 가장 주안점을 두고 있는 것은 차별금지이다.

그런데 차별금지 조항은 사업장 내에 국한하여 적용되며 사업장 내에 비교 가능한 정규직이 없는 경우 법은 무력화된다. 이것은 법의 한계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우리나라 노동시장 구조에도 원인이 있다. 사업장을 넘어 산업이나 업종 수준에서 적용될 수 있는 임금표준이 없는 것이다. 직무급이나 숙련급은 이런 표준이 생길 수 있는 전제가 된다.

노동조합도 이제 산별노조 시대를 맞고 있다. 산별노조는 그 조직형태에 걸맞은 임금정책을 가져야 한다. 이 임금정책은 당연히 기업 울타리를 넘어 전체 산업에 적용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려면 최저생계비 이상의 임금은 직무나 숙련에 의해 결정되는 임금체계를 지향하지 않을 수 없다. 사회적 공정성을 구현할 수 있는 임금체계로 나아가기 위한 진지하고 활발한 토론이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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