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 20년의 경험에서 무엇을 생각하게 되었나'라는 주제로 강연에 나선 최장집 교수는 "나는 오늘의 한국 정치에서 가장 큰 문제가 견제되지 않은 대통령 권력이라고 생각한다"며 "그 결과로 나타난 대통령 권력의 팽창은 민주주의를 피폐화하는 근원적 문제가 된다"고 밝혔다.
최 교수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결정은 정당, 의회, 이해당사자의 참여, 심의 없이 대통령과 소수 관료들에 의해 폐쇄적으로 이뤄졌으며 반대자의 시위는 권위적으로 탄압했다"며 노무현 대통령의 실정(失政)은 대통령 권력이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전형적인 예라고 지적했다.
최 교수는 "국가와 대통령 권력은 견제되고 축소돼야 하며 시장은 민주적으로 조율돼야 하고 시민사회는 자율적 집단의 조직망이 강해져야 한다"며 "결국 정당이 중심이 된 정치를 통해 이를 추구하는 것 이외에는 다른 수단을 발견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이날 토론자로 나섰던 최태욱 한림대 교수와 이대근 <경향신문> 편집부국장 역시 최장집 교수의 발제에 대해 대부분 전적으로 동감을 표시했다.
이번 연속강연회는 오는 10월까지 모두 7차례에 걸쳐 진행될 예정이며 2회 강연은 오는 11일 서울 정동 사회복지공동모금회 강당에서 최영기 노동연구원장의 발제로 진행된다. (프레시안 홈페이지참조)
다음은 이날 진행됐던 최장집 교수의 강연 및 토론 전문이다. <편집자>
최장집: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와 프레시안이 공동 주관으로 '민주화 20년, 한국 사회 어디로 가나'란 주제를 가지고 연속 강연을 개최하는데, 저에게도 강연 기회를 준 주최 측에 감사드린다. 사회를 맡은 정관용 씨는 개인적으로 가까운 사이고 최근 언론에서 많은 활약을 하고 있다. 우리나라 정치 문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좋은 프로그램들을 운영하고 있다. 이런 기회에 만나볼 수 있고, 이런 주제를 가지고 토론할 수 있게 되어 감사하게 생각한다. 토론을 맡아준 이대근 부국장과 최태욱 교수에게도 감사드린다.
제가 말씀드릴 주제는 민주화 20년의 경험을 통해 제가 생각하게 된 내용이다. 지난 20년을 토대로 민주주의를 반성적으로 회고하고 현재 상황의 특징을 짚어보고 가능하면 앞으로의 전망은 어떤 것인가에 대해 말해보고자 한다. 더구나 금년 12월에는 대통령 선거가 있어 그 어느 때보다 정치에 관심이 높다. 그런데 투표라는 것이 언제나 그렇지만, 특히 대통령 선거는 많은 사람들이 이를 통해 우리나라 정치와 민주주의 발전에 큰 계기가 되길 기대하고 있다. 이번 선거도 그런 기대를 할 수밖에 없는데, 과연 이번 선거가 그런 기대에 부응할지에 대해 저는 상당히 회의적이다.
견제되지 않는 대통령 권력, 민주주의의 피폐화
2002년 12월 대선을 앞두고 출간한 책에서 저는 '한국 민주주의가 나빠졌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후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되고 지금의 정부가 들어섰다. 당시 '나빠졌다'고 한 부분에 대해서 상당히 논란이 있었다. 민주주의는 단계별로 한발자국씩 진전하고 있는데, 더군다나 민주화운동 세력이 진출하고 개혁적 정부가 들어섰는데 이 말 자체가 너무 어두운 얘기가 아니냐는 비판을 받은 적도 있다. 그러나 오늘의 시점에서 반성적으로 볼 때 한국의 민주주의가 좋아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한국 민주주의가 위기라는 데에는 동의하지 않을지 몰라도 심각한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는 데에는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리라 본다.
5년 전 상황과 비교해 지금의 상황이 과연 나아졌는가. 이번 대통령 선거를 민주주의 발전의 전기로 규정할 수 있는가에 대해 자신있게 말할 수 없는 것이 저의 솔직한 심정이다. 언론에서는 저를 진보적인 학자라고 평하는데, 따지고 보면 진보·보수라는 말 자체가 일상적으로 사용되기는 하나 그리 간단한 말은 아니다. 나 스스로도 진보인가에 대해 자문해볼 때, 이를 부정하는 건 아니지만 우리 사회에서 진보, 보수를 가를 수 있는 기준이 어떤 건지 확실하게 얘기하기 어려운 형편이다.
더구나 지금 한국 민주주의에서, 그리고 이번 대선에서 과연 민주/반민주, 진보/보수 등이 중요한 대립축이 될 만한 내용을 갖고 있는지에 대해 긍정하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겠지만, 저로서는 민주/반민주 구도가 오늘의 시점에서 별다른 의미를 갖고 있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 정치에 대해서 문제가 있다고 얘기할 때 여러 가지 요인과 요소가 있을 것이다. 그 모든 것을 다 얘기할 수는 없고, 제일 중요한 걸 얘기하자면 그것은 '견제되지 않은 대통령 권력'이다.
제가 보는 관점에서 다른 나라와 비교해볼 때, 한국의 대통령직은 중요한 측면에서 법이나 제도를 통해 견제되지 않고 있다. 대통령의 권력은 막강하고, 대통령직에 있는 정치 지도자의 행위나 리더십이 우리나라의 운명이나 민주주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데 이것이 견제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대통령 권력이 팽창하고 비대해졌을 때 나타나는 문제점이 크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저는 이 문제가 우리나라 민주주의가 기대한 만큼 발전하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한국의 민주주의가 피폐화되고 있다'고 진단하는 현실에 있어 중요한 원인을 제공하고 있다고 본다.
강력한 국가기구와 취약한 정당체제…권위주의의 유산
민주화 이후 20년이 지났다. 처음에는 많은 사람들이 대통령 권력을 매우 긍정적으로 생각하면서 개혁의 조타수, 개혁을 추진하는 리더로서 인정했다. 그래서 권력을 제한하는 문제에는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저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최근 개인적으로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과거에는 대통령이 민주주의의 대의와 가치를 실현함에 있어 강력한 역할을 수행해주길 기대했으나, 지금 현재로서는 비대해진 대통령 권력을 제도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제한하는 것이 우리 앞에 놓인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그만큼 한국 사회와 정치의 성격이 변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우리나라는 과거 권위주의를 경험했고, 그 과정에서 굉장히 잘 발달된 국가기구를 성장시켰다. 민주화 이후에도 이와 같은 국가의 성격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그런데 이런 강력한 국가기구를 관할하고 통솔하는 대통령의 권한은 막강하게 보장되는 데 비해 이 권력을 제한할 수 있는 제도 내에서의 견제력이나 사회에서의 견제세력을 위한 제도는 상대적으로 굉장히 취약하다. 특히 민주주의에서는 정당체제가 중요한데 우리나라에서는 이것의 허약함이 중요한 특징이다.
강력한 국가기구와 취약한 정당체제의 구조 속에서 대통령은 민주화 운동을 통해 인민 권력을 창출하고 이를 상징적으로 대변하는 인물로 인식되었고, 대통령의 강력한 권한은 이것을 정당화하는 기제로 작용했다고 본다. 결과적으로 민주주의 하에서 대통령은 '강력함'에 있어서는 권위주의 시절과 크게 다르지 않은 상황에 놓이게 됐다. 민주주의 하에서도 한국의 대통령은 구조적으로 권위주의화 할 수 있는 모든 조건을 구비하게 된 것이다. '이 비대한 권력을 누가 견제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현재 우리의 민주주의가 대면하고 있고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닌가.
대표 선출하고 책임 묻지 않으면 왕과 뭐가 다른가?
대통령이 강력하다는 것과 국가기구, 행정관료 체제가 강력하다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다. 그러나 두 강력함이 융합하면서 강력한 대통령을 만들어내는 것이 우리나라의 상황이다. 1960~70년대 박정희 시대를 통해 권위주의 산업화를 하는 동안 한국의 국가는 강력한 국가, 발전국가, 박정희식 발전모델로 평가되었고, 이러한 권위주의 발전모델은 동구 사회주의가 붕괴된 이후 하나의 모델로 인식되기도 했다. 그런데 민주화 이후 민주정부들이 이렇게 권위주의 산업화를 통해 형성된 국가를 물려받았을 때, 과연 이 방대한 국가를 어떻게 관리하고 통솔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대면하게 됐고, 이를 다루는 문제는 무엇보다도 민주정부에 있어 중요한 사안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제대로 통제되지 않을 때, 그로부터 굉장히 심각한 문제들이 발생한다.
보통 민주정부는 부패가 없다고들 말한다. 민주화 이후 정부에는 분명 권위주의 시대에 비해 부패가 없어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얘기지 부패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방대한 국가기구가 민주적으로 통제되지 않고 많은 경우 베일에 싸여 있을 때, 이것은 선출된 정부와 관리들의 부패의 온상이 되기 때문이다. 국가가 관장하는 엄청난 재정적인 자원이 있고, 국가가 담당하는 여러 규제와 관련하여 지대추구행위가 나타날 수도 있다. 여기에서 발생하는 불법적인 비리는 굉장히 많다. 이는 일일이 지적될 수 없기 때문에 부패가 없다고도 볼 수 있지만 대체로 보다 큰 부패는 일대일 관계에서 발생하는 것보다는 보이지 않는 거대한 국가기구의 행위와 이를 운영하는 관료, 정치인들 사이에서 발생한다고 할 수 있다.
최근 신도시 개발, 주택정책, 행정복합도시, 기업도시, 혁신도시 등 '메가 프로젝트' 들이 많이 진행되고 있다. 대선에서는 운하건설 같은 제안까지 나온다. 이는 엄청난 국가 재원을 투자하는 일이고 여기에서 발생하는 여러 가지 비리나 부정부패는 우리가 일일이 알 수는 없으나 주택정책의 실패, 재정낭비, 환경훼손으로 나타나고 있다.
중요한 것은 대통령이란 국가기구의 최정점에 있는 수반인데 그렇기 때문에 대통령의 권력이 강하고 국가 권력이 방대할수록 이를 견제할 수 있는 민주적인 책임성의 원리가 중요하다. 이를 통제할 수 있는 대안은 오로지 민주적 책임성 외엔 없다. 민주주의의 핵심은 대표와 책임의 원리다. 선거를 통해 대표를 선정하고 정부의 공적 행위를 그에게 위임한다. 대규모의 인구를 갖는 근대국가에서 민주주의는 일반 대중들이 스스로 직접 통치할 수 없기 때문에 대표를 통해 간접적으로 통치할 수밖에 없고,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대표인 통치자와 이를 선출한 대중들 사이에서는 간극이 있을 수밖에 없다. 완전히 없앨 수 없지만 이 간극을 메우는 일이 책임성의 원리다. 우리가 만약 선거를 통해 대표만 선출하고 책임을 묻지 않는다면 이는 왕을 선출한 다음 마음대로 하게 한 뒤 몇 년 뒤 다음 지도자를 뽑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다시 말해, 민주주의는 일상적인 시기에도 항상 책임성의 메커니즘이 작동하고, 작동해야 하는 체제이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중요 정책이나 주요 인사문제 등에서 대통령이나 정부는 자신을 선출해준 국민들에게 선거가 아닌 평시에도 항상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한다.
한미 FTA와 프랑스 대선, '책임 지는 정치'의 선명한 비교
최근 가장 중요한 정책 사안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다. 이 결정과정에는 정당과 의회, 이해당사자들이 참여하지 못했다. 대통령은 소수 기술관료들과 더불어 대단히 폐쇄적인 방식으로 협상을 결정했고 협상 내용은 철저한 비밀주의에 부쳐졌으며 여기에 많은 사람들이 반대할 때 이들의 시위에 대해서는 권위주의적 방법으로 탄압했다. 대통령과 정책결정자들이 생각하는 방식은 이런식이다. 국가의 통치자로서 나는 진정한 국가이익이 무엇이고, 국민들이 잘 살 수 있게 하는것이 무엇인지 안다. 내가 아는 것은 진정한 국가이익이고, 국민들이 (또는 국민의 일부가) 아는 것은 잘못된 국가이익이고, 그들은 진정으로 그들 스스로 잘 살 수 있는 경제가 무엇인지 모른다. "나는 그들 스스로를 잘 살 수 있게 하기위해 그들을 강제할 수 있다"는 것이 정책결정자들이 FTA를 둘러싸고 문제를 이해하는 방식이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고,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 과연 책임을 지는 대통령의 모습일까.
저는 FTA의 내용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정책결정 방식의 문제점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이렇게 한 국가의 중요한 사안, 장시간에 걸쳐 앞으로 경제생활에 심대한 영향을 미칠 사안을 소수의 기술관료들과 대통령이 결정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할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적인 방법도 아니라는 말이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보겠다. 지난 5월 프랑스 대선에서 니콜라 사르코지가 선출됐다. 이로부터 한 달 뒤 총선이 있었다. 정부 여당인 대중운동연합이 다수를 점하긴 했지만, 예상과 달리 압도적인 다수를 차지하지는 못했고 사회당이 의외로 많은 표를 얻어 견제세력을 구축할 수 있었다. 사르코지는 대통령 당선 직후 내각을 구성했음에도 불구하고, 총선 결과에 따라 조각한 지 한 달 만에 다시 재정부 장관부터 중요한 장관들을 교체하며 재조각을 단행했다. 아무리 다수의 지지를 통해 대통령이 당선됐다 하더라도, 임기 중 선거를 통해 나타난 민의는 반영될 수 있어야 한다.
총선에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야당을 지지했다면 이렇듯 국민의 평결이 조각 등에 반영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민주주의의 책임성의 원리를 표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2005년 이래 여러차례의 보궐선거와 지방자치단체장 선거 등이 있었고, 이를 통해 현 정부에 대한 국민의 평가가 표출됐다. 민주주의는 투표자들이 그들이 선출한 정부에 대해 언제나 책임을 묻고 책임을 지도록 강제하는 정치체제이다. 선거결과에 대해 국민이 선출한 대표는 국민의 평결에 책임지는 태도를 보이는 것이 의무이다. 대통령이라고 하더라도 선거에 당선됐기 때문에 내 마음대로 한다는 자세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더구나 우리나라의 대통령은 단순다수제로 선거를 해서 한 표라도 많이 얻으면 당선된다. 대체로 득표율이 40% 대인데, 절반도 안 되는 득표를 하고도 국가 전체, 국민의 이익을 대표하게 된다. 정부가 성립된 이후 대통령이 책임을 지지 않고 견제되지 않을 때, 이는 잘 될 수도 있지만 보다 많은 경우에 잘못될 수 있고, 이때 나타나는 문제점은 상당히 심각한 결과를 야기한다. 말하자면 우리가 권위주의를 붕괴시킨 이후 민주적인 대통령 권력을 선출한 것은 좋은데, 이 권력이 구조적으로 권위주의화 할 수 있는 취약한 정치구조에 놓여있다는 것이다.
민주화와 '노동 없는 민주주의'가 강력한 대통령체제 낳았다
대통령 권력은 어떻게 '초강력한 대통령체제' (hyperpresidentialism)가 됐나? 몇 가지 이유가 있을 텐데 첫째로는 민주화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민주화 이후 사람들은 대통령은 국민이 직접 자기 손으로 뽑는 대통령을 민중권력의 체현으로 이해하게 됐다. 2002년 대선을 앞두고 정당에서 처음 국민참여경선제를 도입했고 현재 대통령은 이를 통해 당선됐다. 즉 국민참여경선을 통해 선출된 대통령 후보, 국민들이 직접 뽑은 대통령, 이것은 그 말이 표현하고 있듯 국민이 직접 대표를 선출했다는 의미를 갖는다.
이것은 민중권력을 실현하는 것으로 이해되기 쉽다. 그런데 민주주의에서는 물론 민중권력의 실현도 중요한 내용이지만, 국민 혹은 인민주권의 대표기구는 대통령보다는 일차적으로 의회에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초기 자유주의적인 원리를 따른 민주주의 국가, 이를테면 미국에서 헌법을 만들 때 그들은 가장 중요한 인민주권의 소재지를 의회로 삼았다. 즉 의회가 대의제 민주주의를 제도화해서 직접민주주의와 달리 대표와 책임성의 원리를 통해 민주주의를 실현하도록 하는 것이 현재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가 됐다.
그런데 대표성의 원리를 뛰어넘거나 국민들에게 직접 다가가는 것은 상당히 포퓰리즘적 요소를 많이 갖게 된다고 생각한다. 이는 민중성과 직접 닿아있다. 민중성은 민주주의에 민중적 동력과 에너지를 제공하지만, 무매개적으로 그 힘이 드러날 때 그것은 헤게모니에 의한 휩쓸림에 취약하고, 다른 선동 또는 집단적 충동에 의해 휩쓸리거나 동원되기 쉽기 때문에 그것은 민주적 요소를 강화시킬수 있지만, 충돌할 수도 있는 관계를 갖는다. 민주화 이후 대통령이 국민의 일반이익을 대표하고, 국가 전체의 이익을 대표하는 개혁의 조타수로서 이해되고 이것이 포퓰리즘과 결합하면서 한국의 민주주의는 포퓰리즘적인 민주주의 요소를 많이 갖게 됐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강력한 대통령을 만들게 된 중요한 동력이 됐다고 본다.
그 다음 중요한 원인 중 하나는 '노동 없는 민주주의'의 결과다. 왜 그런가? 대통령 권력이 비대해졌다는 사실은 정당에 의해 제어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이는 선출된 대통령의 권력이 사회 세력에 의해 제어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강력한 반대 역할을 할 수 있는 세력은 노동자들이고, 조직된 노동운동이라고 본다. 노동운동이 허약하고 정치의 장에서 중요한 행위자로 역할하지 못했을 때, 기존 선거를 통해 선출된 대통령의 권한을 제어할 수 있는 사회세력이 존재하지 않게 돼 버린다.
우리나라의 민주화는 두 사회세력의 결합에 의해 가능했다고 본다. 하나는 6월 항쟁의 주축이었던 대학생과 도시의 교육받은 중산층으로 대표되는 세력이다. 다른 하나는 7~9월 노동자대투쟁의 주역이었던 노동자 세력이었다.
한국의 민주주의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이 두 중심축이 정치세력으로 제도화되고, 이는 정당의 형태로 조직되고 대표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국 민주주의가 제도화되었던 지난 20년은 노동운동이 배제되고 약화되는 과정이었다. 남은 것은 도시의 교육받은 중산층이었고 이들이 민주주의를 대표하고 실현하는 과업을 떠맡는 것으로 귀결됐다.
말하자면 한 축이 빠져버리는 형국이 된 것이다. 우리가 지난 5월부터 민주화를 기념하는 행사들을 여러 차례 보아왔지만, 87년 6월 항쟁의 중심이 된 사회세력을 대표하는 말이었던 민중이라는 말은 더 이상 들을 수 없게 됐다. 민중적인 문제의식, 요구, 이해관계는 정치의 제도권 안에서 대표되지 못했고 억압됐으며 배제됐다. 정당이 일반 사회의 이익을 대표하지 못하는 경우 정부가 이를 대변할 수밖에 없다. 사회는 급속하게 변하고 여기에서 발생하는 문제는 폭증하고 있는데 이를 다룰 수 있는 것은 행정관리기구밖에 없다. 정부에 사회적 요구가 집중될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이는 "정부의 과부하(過負荷)"라고 말할 수 있다.
게다가 우리나라는 해방 후 북쪽 공산주의 세력과 싸우면서 냉전반공주의에 기반해 국가를 건설했고 1960~70년대에는 급속한 산업화를 이룩하면서, 국가가 모든 사회적 자원과 이념적 정당성을 독점해왔다. 이런 측면에서도 한국의 대통령은 강한 대통령이 만들어졌던 권위주의의 유산을 갖고 있다. 그런데 민주화 이후 대통령에 대한 신화, 강력한 지도자를 선호하는 요건은 더욱 커졌다. 남북관계 등 한국이 가진 특수사항에 대응해야 하기 때문에 강력한 권력이 필요하다는 인식도 강했다. 이처럼 "대통령직에 대한 숭배" (the cult of presidentialism) 는 대통령 권력을 강화시키는 또 하나의 중요한 원인이 됐다.
또한 우리나라 헌법은 강력한 대통력권력을 제도화하고 있다. 이는 추후에 보다 더 자세히 말하겠다.
포퓰리즘적 민주주의와 시장 포퓰리즘의 결합
앞에서 한국 민주주의는 포퓰리즘적 민주주의의 성격이 강하다고 얘기했다. 최근 이것과 시장 포퓰리즘이 결합하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시장 포퓰리즘이란 신자유주의의 시장관을 대변하는 이념이다. 이 원리에 따르면, 시장은 인간이 만든 사회적 제도 중 가장 자연스런 제도이며, 시장은 자율적으로 움직이는 사회체제라서 조율자가 필요 없다. 때문에 국가나 특정한 공적 권위가 시장에 개입할 필요가 없고, 그렇게 되면 오히려 시장은 왜곡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시장 포퓰리즘은 시장과 인민을 동일시한다. 민주주의라는 형식과 제도(선거, 입법부, 정부)는 기본적으로 선거를 통해 선출된 대표들에 의해 민주주의를 실천하기 때문에 국민들의 이익과 괴리될 수밖에 없고, 오히려 인민들의 이익에 더 밀착돼 있는 것은 민주주의의 정치제도가 아니라 시장이라는 주장이 도출된다. 여기서 시장 포퓰리즘의 핵심 주역은 기업이나 기업인이라 할 수 있겠다.
과거엔 공적 영역의 대표인 관료들이 사적 영역이 부패했다고 질타하는 말을 하곤 했다. 그러나 시장 포퓰리즘에서는 이제 거꾸로 기업이나 기업인들이 국가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다. 그리고 기업이나 기업인들이 인민의 대변자로 부상했다. 시장경쟁을 통해 획득하지 않은 것을 물려받은 엘리트들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면서 그들을 도덕적인 적으로 규정하기도 한다. 오늘날 시장 포퓰리즘은 매우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이데올로기가 됐다.
민주화 이후 가장 주목할 만한 정치현상 중 하나는 이런 시장 포퓰리즘, 신자유주의적인 관점에서 정당, 정치행위를 비판적으로 보는 견해가 광범위하게 퍼져있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는 민주주의 역시 긍정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사회 내 갈등과 이익의 차이를 정당이 대표하고, 정당의 수준에서 타협하고, 정부가 이를 통해 정책을 펴 사회통합을 이루는 정치와 민주주의의 과정 자체를 부정적으로 본다. 정치를 굉장히 시장주의적인 관점에서 보기 때문에 대중정치, 대중의 정치참여, 선거 경쟁 등을 소모적인 낭비로 간주한다. 노 대통령은 개헌이슈를 제기할 때, 한국에서는 선거가 너무 많아 선거를 줄이면 예산절약 효과를 갖는다고 말한 바 있다. 이는 시장 포퓰리즘의 관점에서 민주주의를 접근하는 대표적인 관점이다. 따라서 정치개혁은 회계학의 원리에 따라 이뤄지게 됐고, 그 결과 돈 쓰는 정치만 없앤 것이 아니라 정치와 대중의 결합을 해체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민주주의는 정치와 권력을 통해서, 정당을 수단으로 해서 사회구성원의 삶의 조건을 개선하는 정치체제이고 정당은 이를 실현하는 정치의 중심 기제이다. 이와는 반대로 시장 포퓰리즘은 반정치, 반정당의 태도를 갖는다. 시장이 이 문제를 다 해결해준다는 생각이다.
민주화 이후 여러 가지 정치개혁이 있었지만 이들 대부분이 이런 관점을 통해 이뤄졌다. 깨끗한 정치(반부패, 투명성), 시장효율성의 가치, 원내정당화, 당내민주화, 국민참여경선제, 주민소환제 등의 개혁사안은 대체로 시장 포퓰리즘적 관점을 통해 만들어졌다. 기본적으로 정치와 정당이 대중과 만나는 접촉점을 축소하는 방향이었다. 부패가 이 접촉점에서 발생한다는 인식에 기반을 둔 것이다. 이는 정치란 비생산적이고 효율적이지 못하다는 인식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최근 정책정당이라는 개념이 발전됐다. 정당은 너무 비생산적, 비효율적이고 정치인들이 사익에 몰두하고 전문성이 없기 때문에, 또 정당 간 정책의 차이가 뚜렷하지 않고 정쟁과 이전투구만을 일삼기 때문에 국가발전, 사회발전, 민주주의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관점이 팽만해졌기 때문이다. 이 말 자체가 나쁠 것은 없다. 문제는 내용을 만드는 방식이다.
정책정당이 강조되면서 정책대안이 강조됐고, 이를 만드는 데 엘리트전문가들이나 지식인들이 참여하게 됐다. 중산층 엘리트 수준의 참여만이 대폭 확대되었다고 하겠다. 최근 벌어지는 매니페스토 운동에서는 이런 집단들이 정책 선택의 메뉴들을 만들어서 각 후보, 정당들에게 제시하고 있다. 이는 기본적으로 대중 참여를 대체하는 방법이라고 본다.
신자유주의가 '개혁' 돼버린 한국 민주화의 패러독스
현재 정치적인 포퓰리즘과 시장 포퓰리즘이 어떻게 결합되고 있는가? 과거 한국사회에는 국가주의적 이념과 가치가 강했다. 경제성장을 위해 국가가 견인차가 되는 경제적 민족주의를 바탕으로하는 발전국가 담론은 헤게모니를 가지고 강력한 힘을 발휘한 바 있다. 민주화 이후에도 발전주의에 대한 열망은 제어되지 않고 강하게 유지됐는데, 이것이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조건에서 두 포퓰리즘이 결합될 수 있는 매개고리로 작용했다고 생각한다.
민주화 이후 민주정부들은 신자유주의를 바탕으로 한 성장지상주의, 즉 노동과 사회복지, 분배의 정의 등을 정책으로 수용하지 않고, 경제의 양적 성장만을 추구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런 경향은 민주화 이후 오히려 더 강해지고 있다. 민주정부는 이것을 개혁으로 인식하고 사람들이 그렇게 알도록 하고 추구해왔는데, 실제로 민주정부의 개혁이란 말 속에는 신자유주의적인 개혁이라는 내용이 담겨 있는 것이다. 그것은 보수적 개혁을 뜻한다.
보통 신자유주의는 세계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보수적인 이념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민주정부를 보통 개혁적이라고 하는데 이 민주정부의 실제 정책 내용은 신자유주의적인, 시장 포퓰리즘적 원리와 가치, 비전을 그보다 더 잘 보여줄 수 없었다. 그것은 민주화 이후 중요한 패러독스이다.
이는 강력한 대통령이 자신을 선출한 지지기반과 투표자들의 요구로부터 풀려나 이후 선거결과에 반응하기보다는 '내 갈 길을 간다'는 자세로 시장 포률리즘을 전폭 수용하고, 시장 자율화, 성장주의를 추구한 결과이다.
그렇다면 비대한 대통령직의 권력을 견제할 수 있는 제도적인 대안들에는 무엇이 있을까. 지난해 개헌 이슈가 제기됐다. 이 문제의 핵심은 대통령 임기를 4년 중임으로 한다는 것과 대선과 총선 주기를 일치시키는 것이었다. 이는 제가 보기에 대통령직을 강화하고 비대화하는 제도개혁이다. '대통령직을 어떻게 민주주의 원리에 부합할 수 있는 제도로 만들 수 있을까'라는 문제가 중심에 있어야 하며 대통령 권력을 증대할 것이냐 축소할 것이냐 하는 문제가 중요한데, 이렇게 보다 중요한 문제를 제쳐두고, 즉 우리나라의 민주화를 위해 필요한 것보다 당장의 대통령 임기와 선거의 주기일치를 중요한 내용으로 삼은 것은 문제의 가정이 잘못됐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권분립의 원리가 견제와 균형을 제대로 이뤄내지 못하고 있다. 무엇보다 정당과 의회가 약하기 때문에 집행부를 견제할 수 없고, 사법부도 자율성이 약한 상황에서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단독적인 집행부 권력이 견제되지 않는 구조가 유지되고 있다. 기왕에 개헌을 이슈로 삼는다면 이런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미국도 현재 대통령직의 비대화에 대해 굉장히 심각한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우리나라는 그와 다른 내용과 방향에서 대통령직이 미국과 유사하게 제왕적 대통령의 성격으로 실현되고 있다.
대통령직을 견제하는 문제는 두 가지 수준에서 제도화가 필요하다. 하나는 수직적 책임성으로 여기서는 정당이 강화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이는 대통령이 일반 대중, 투표자, 시민에 대해 어떻게 책임을 지게 하는가에 대한 문제이기도 하다. 다른 하나는 수평적 책임성이다. 이는 집행부, 입법부, 사법부의 삼부가 어떻게 상호 견제와 균형을 통해 집행부의 권력을 제한하느냐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단순다수제를 통해 한 번에 선거를 하기 때문에 여기서 발생하는 위험성이 대단히 크다. 우리나라에서 막강한 권한을 가진 대통령이 한 번의 선거를 통해, 게다가 어떤 우연이나 당시의 여론, 무드에 따라 대통령에 당선되고 나면, 그 임기가 보장된다. 이러한 조건에서는 그 이후의 사태에 대해서 많은 비용을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된다. 최소한 대통령직을 택한 경우라면 프랑스식 준대통령제와 결선투표제 같은 보완장치가 필요하지 않나, 그렇게 되면 정당도 강화될 수 있는 지금보다는 나은 조건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대통령 권력은 견제되고 시장은 조율돼야 한다
결론적으로 '당신은 어떤 민주주의, 어떤 사회를 바라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 현재 신자유주의가 살 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대다수다. 헤게모니고 대세다. 다른 한편에서는 신자유주의는 국내경제와 산업구조를 약화시키기 때문에 기왕 재벌 중심의 대기업이 경쟁력을 갖는 우리나라에서는 국가-재벌을 바탕으로 새로운 발전모델을 만드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한다.
저는 이 두 가지 모두 올바른 방향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정치학자들이나 일부 철학자들은 공화주의나 공동체주의와 같은 기조나 개념을 통해 사회윤리적인, 특히 공동체적 가치를 강조하기도 한다. 지금 진보/보수, 개혁/보수를 구분할 때 어떤 것을 개혁인지 보수인지 나눌 수 있는 가치의 기준이 무엇인지, 현재 우리사회에서는 적어도 정치적 수준에서는 정립되어 있지 않다.
대통령 권력은 견제되고 축소돼야 한다고 본다. 시장은 자율에 맡겨두기보다는 민주적으로 조율돼야 한다고 본다. 시민사회는 자율적인 집단들이 대단히 약하고 연결망이 약하다. 우리나라는 국가가 강하기 때문에 여러 시민사회의 단위나 조직들이 거대한 국가에 편입되거나 수직적으로 연결돼서 일종의 고리를 만들다시피 하고 있다. 이것은 자율적인 시민사회의 모습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고 본다. 국가가 시민사회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겠지만 시민사회의 자율적인 발전, 중간집단의 강화는 대단히 필요하다고 본다. 조율된 시장은 시장 자체가 목표이고, 가치가 되는 신자유주의가 아닌, 평등주의적인 자유주의 가치가 실현될 수 있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보다 중요한 것은 가능의 예술로서의 정치의 역할이다. 정치의 중심적인 행위자는 정당이고, 정당이 제대로 조직되고 발전하고 기능할 때 그로부터 여러 가지 대안들이 창출될수 있다. 정당간의 경쟁을 통해 민주주의의 다양한 가치들이 발현될 수 있다고 본다.
헌법 119조 2항, 시장에 대한 조정 권한 명시해
최태욱: 선생님의 견해와 제 견해가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선생님이 내리신 결론을 제 용어로 재구성해보고 그다음 질문을 드리겠다. 선생님은 정치적 포퓰리즘과 시장 포퓰리즘의 결합을 말씀하시면서 평등주의적 자유주의에서 더욱 멀어질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 이런 주장에 동의한다. 국제정치경제를 전공하는 제 용어로 바꿔보면 핵심 문제는 한국 사회의 신자유주의화가 아닌가.
이 문제와 관련 우리 헌법 119조 2항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국가는 균형있는 국민경제의 성장 및 안정과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고,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주체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위하여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시장에 대한 국가의 조정 권한이 강조되고 있음에 주목해야한다.
자본주의는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나라마다 서로 다른 시장경제체제를 운영하고 있다. 대개 시장경제체제는 크게 둘로 분류된다. '자유 시장경제'와 '조정 시장경제'이다.
미국은 대표적인 자유 시장경제 국가다. 선생께서 말씀하신 시장 포퓰리즘에 해당된다. 반면 조정 시장경제체제는 국가나 사회에 의한 시장 조정 필요성을 강조한다. 정의 수호나 약자배려, 혹은 공공성 확보를 위해서이다. 그런데 어떤 조정기제를 가질 것인가 하는 부분은 나라마다 다르다.
지구상에서 미국 정도의 강력한 자유 시장경제는 찾아보기 힘들다. 유럽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국가는 그 형태는 다르지만 나름대로의 시장조정 기제를 갖고 있다. 국가는 시장에 대해 조정과 규제 권한이 있다고 명시한 헌법을 보더라도 우리나라 역시 조정시장경제체제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우리 헌법은 시장 조정을 통해 경제의 민주화를 꾀할 것을 국가에게 명령하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최근 민주화 20년 이후 절차적 민주주의는 어느 정도 이뤄졌지만 실질적 민주주의는 아직 한심한 수준이라는 한탄이 많이 나오고 있다. 실질적 민주주의의 핵심은 경제의 민주화이다. 헌법이 이미 오래전부터 당부하고 있는 이 과제가 이제야 비로소 얘기되고 있는 것이다. 민주화 이후 우리 정부들이 해온 것을 보면 경제의 민주화에 점차 가까워지기는커녕 오히려 멀어진 측면이 크다. 시장 만능주의, 개방과 경제성장 제일주의 등이 득세해왔다. 김영삼 정부는 물론, IMF 관리체제와 함께 들어선 김대중 정부, 그리고 현재의 노무현 정부 역시 마찬가지다. 이런 추세는 아마도 IMF 위기 10년만인 올해 타결된 한미 FTA가 발효되면 절정에 달할 것이다. 일이 이렇게 된 데에는 무엇보다 한국 사정에 맞는 시장 조정 기제를 아직 개발하지 못하거나 활용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결국 시장 조정 기제를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가 논의의 핵심이 된다. 개방이나 성장을 우선시하는 분들은 적하효과를 많이 얘기한다. 개방이나 경제성장이 이뤄지면 그로 인한 추가이익이 결국 그것을 직접 받은 부분에서 그렇지 않은 다른 부분으로 내려갈 것이며, 따라서 개방과 성장은 장기적으로 사회 전체의 이익이 되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조정기제가 없는 한 적하효과가 자동적으로 일어나지는 않는다. 누가 자신이 얻은 추가 이익을 자발적으로 내려 보내겠는가? 대기업과 중소기업, 그리고 교역부문과 비교역부문 간의 이익 분배 구조가 정립되고, 또한 소득재분배 효과가 분명한 조세 및 복지 정책 등이 마련돼야 비로소 그런 효과가 나타난다. 그런데 우린 이런 기제를 충분히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개방과 성장을 중요시한다고 해서 반드시 양극화나 분배 왜곡 등의 문제가 심각해지는 것은 아니다. 유럽, 특히 북유럽 국가들을 보라. 지속적인 성장을 구가하는 개방국가들이지만 형평성에 맞는 분배가 이루어져 같이 잘 사는 사회공동체가 유지되고 있다. 복지, 노동 등 사회정책에 의한 시장 조정이 잘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이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가? 나는 그것이 무엇보다 정당정치의 순기능 덕분이라고 본다. 사회경제적 약자들이 유력 정당을 자신들의 유능한 정치적 대리인으로 확보하고 있고, 이 정당들이 사회경제 집단들의 이익 표출과 집약이라는 제 기능을 잘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란 것이다.
지금 같은 정당 구조에선 앞으로도 '경제 민주화' 어려울 것
한국의 민주주의가 아직 적당한 시장 조정 기제를 작동시키지 못하고 있는 까닭은 그것을 가능케 할 이념 및 정책 정당들이 없거나 있더라도 충분한 힘을 갖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군소정당에 불과한 민주노동당 외에는 모두가 기본적으로 정책 및 이념적 차이가 분명히 나타나지 않는 인물 및 지역중심의 선거전문정당이다. 지역기반이 튼튼하거나 대중적 인기가 큰 인물을 확보하고 있으면 선거정치에서 충분히 유리하다고 믿는 이들 정당들이 사회경제적 약자들을 위한 시장 조정 기제 마련에 큰 노력을 기울일 인센티브는 애초부터 약하다. 지금과 같은 정당 구조 아래서는 우리나라의 경제 민주화는 앞으로도 어려울 것이다.
선생님이 "견제되지 않는 대통령권력의 비대화"를 크게 걱정하셨는데, 그것 역시 상당부분 정당정치의 실종 때문이라고 본다. 즉 대통령 문제는 한국 정당정치의 후진성과 구조적으로 연결돼 있다는 것이다. 정당정치가 제 기능을 못하는 상태에서 정당 및 의회의 대통령 견제기능을 기대하기는 구조적으로 어려운 일이다. 보다 실감나게 느낄 수 있는 우리나라 정당 정치의 수준은 대통령이 속한 정당 자체가 뚜렷하게 정체성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점이다. 대통령을 배출한 정당이 확실한 정책기조와 이념으로 승부하는 소위 제도적 지속성을 갖춘 '족보 있는' 정당이라면, 그 정당은 대통령이 자당의 이념 및 정책기조에서 벗어나는 정책을 수립·집행하는 것을 온 힘을 다해 방지하고 견제할 것이다. 대통령은 단임으로 끝날지라도 정당은 무한히 계속되는 선거정치에 임해야 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대통령의 수행능력에 대해서는 그가 속한 정당이 국민에 대하여 책임을 지는 구조가 된다. 이 경우 대통령의 정책은 실제로 그가 속한 '정당의 정책'에 해당한다. 이런 연계 구조, 즉 대통령은 자신이 속한 정당에 대해 책임을 지고 그 정당은 다시 국민에 대해 책임을 지는 구조가 돼 있으면 대통령의 권력 견제가 가능할 텐데 우리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것이 문제다.
그렇다면 한국 민주화 20년 이후에 여전히 남아있는 시장 조정 기제의 미비와 그에 따른 급격한 신자유주의화의 문제, 그리고 견제되지 않는 대통령권력의 비대화 문제는 상당 부분 정당정치의 미발전 때문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그렇다면 향후 우리 민주주의의 핵심 과제는 정당정치의 활성화일 텐데 그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선생님의 해법이 궁금하다.
두 번째 질문은 선생님은 현 대통령의 문제가 상당하다고 하면서도 권력구조 자체를 변화시키자고 말하지 않았다. 대통령제 내에서 풀어보자는 것이다. 한국 국민들이 여전히 대통령제를 선호하기 때문인지, 내각제나 다른 정치제도에 대한 사회적 여건이 조성되지 않았기 때문인지 묻고 싶다.
민주화 20년, 민주정부 10년의 결과는 '참담'
이대근: 최장집 선생님의 글을 읽으면 항상 깊은 통찰력을 얻을 수 있다. 87년 체제를 평가하고 민주정부 10년에 대한 평가, 곧 있을 대통령 선거를 민주화 20년의 성과와 한계와 연관해 말씀해 주셨다.
87년의 가장 큰 성과는 절차적 민주주의든 어떤 민주주의든 권위주의로 돌아갈 수 없는 선을 넘었다는 것이다. 한계는 민주화 이행과정의 절차는 순조로웠지만 내용적으로는 문제가 많았다는 점이다. 재야와 노동이 배제된 채 권위주의 기득권세력과 제도권 야당만의 협상을 통한 이행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한계라는 것이 집권한 민주세력이 개혁을 할 수 없을 정도로 한계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노무현 정부가 87년 체제의 한계 때문에 개혁할 수 없었다고 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
지금 와서 민주화 20년, 민주정부 10년의 결과를 보면 참담하다. 진보니, 개혁이니 민주주의라고 하는 용어 자체가 진부하고 촌스럽다는 느낌을 주게 된 게 민주화 20년의 결과이다. 대선 담론도 민주개혁평화세력 대연합 대 정권교체이다. 어느 것이 더 참신하게 들리는가 제 개인적으로 보면 '정권교체'가 더 참신하게 들리고 사람들 사이에 영향력을 갖고 있는 담론이다. 뭔가 바꿔보자는 데에 대한 사람들의 욕구가 있고 그 만큼 이 담론의 영향력이 있다는 점은 민주화 20년의 결과가 어떠한 것인지 잘 드러내고 있다.
작년 <경향신문>에서도 진보개혁 진영 내부로 들어가 위기를 분석하는 기획을 했다. 그때 진보개혁세력의 위기라는 것이 실재하고 있는 위기임을 확인했다. 외부에서 진보진영을 공격하기 위한 것이거나 조작된 이미지가 아니라 실상이라는 점이다. 민주화 20년에 대한 평가는 객관적으로 낮다.
김영삼 대통령 이후 3개의 정권을 보자. 김영삼 대통령은 민자당과 합당을 하고 외환위기를 불러왔다. 김대중 대통령은 신자유주의를 본격적으로 도입했고, 노무현 대통령은 이를 심화시켰다.
즉 시장주의를 민주정부가 도입한 것이다. 권위주의는 반-시장주의, 즉 반대(anti)란 의미도 있고 절반(half)이라는 의미도 있는 '반'-시장주의의 성격을 띠고 있었는데 민주정부는 이를 본격적으로 도입했다.
왜 이렇게 신자유주의가 한국사회를 지배하고 있는가. 그 주요 공은 민주정부에 있다. 87년 체제의 본질은 97년 체제 즉 외환위기 10년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본다. 외환위기를 계기로 한 신자유주의 본격 도입, 이것이 바로 민주정부가 한 일이다. 권위주의 정부가 시장주의를 도입했다면, 이렇게 성공적인 시장주의 헤게모니가 가능했겠는가? 권위주의 정부가 시장주의를 도입했다면, 시장주의 대항헤게모니가 형성돼 적어도 시장주의 대 반시장주의가 경쟁하는 관계는 유지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민주화 운동을 했다는 정통성을 배경으로 민주정부가 시장주의 드라이브를 하니 시장주의가 압도하는 신자유주의 헤게모니가 공고하게 형성될 수 있었다.
최 선생님께서 87년 노동자대투쟁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 이행과정에서 배제됐다고 하셨는데, 지금도 그런 노동의 배제는 계속되고 있다. 금속노조, 버스노조의 파업에 대한 사회 여론에서 알 수 있다. 하나는 불법이고 또 하나는 합법이라고 하지만, 불법 합법을 따질 것 없이 무조건 파업은 안된다, 시민을 불편하게 한다, 시민의 발을 묶는다면서 반대한다. 노동에 대한 법, 제도적 배제 뿐 아니라 정서적, 문화적 배제도 있다. 이런 현실에서 노동3권이 과연 지금 한국에서 보장되고 있다고 볼 수 있는지 의문이다. 파업할 수 없는 법 제도적, 문화적 구조가 형성되어 있다. 이것이 민주정부가 가져온 가장 큰 결과다.
그러면 남는 것은 무엇인가. 범여권은 대선을 통해 제3의 민주정부로 계승하자고 한다. 그러나 민주화운동 세력 자체가 지난 10년간 기득권 세력이 됐다. 정부의 각종 주요 자리는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맡았다. 대통령, 수 명의 총리, 수없이 많은 장관과 각종 위원장, 공공기관 이사장, 감사 자리를 차지했다. 그들은 과도한 보상을 받았다고 본다. 정권이 교체되면 이 자리들을 내놔야 하니까 무조건 연합해서 버티자는 게 대통합론 아닌가. 그것은 자기들의 기득권을 지키자는 것일 뿐, 일반 시민들의 관심사는 아니다. 결국 민주정부 10년 간 유일하게 남아있는 것은 '기득권을 지켜야 한다'는 적나라한 주장이다.
과제와 성과간의 골 깊은 것이 현 정부의 '무능'
특히 노무현 정부는 가장 큰 문제를 발생시켰다. 지지부진했던 DJ 정부 말기의 위기를 딛고 다시 등장한 민주정권으로서 개혁의 불을 다시 댕길 수 있는 기회를 얻었는데 스스로 이를 포기하고 무너뜨렸다. 가장 큰 과오 아닌가. 자신들 앞에 개혁의 기회가 주어졌는데 발로 찼다. 왜 그런가. 우선 무능했기 때문이다. 집권하면서 국가통치술도 없었고 전문가에게만 의존하는 '위원회 정부'가 등장했다. 기술 관료들에게 맡기는 것이 익숙해져버린, 관료에 의해 지배되는, 시민의 요구와는 동떨어진 정부가 됐다. 재벌이 던져주는 '2만, 3만 불 시대로 가자'는 캐치프레이즈를 그대로 수용해버렸다. 개혁적 수사로 덧칠된 보수정권이란 괴물이 탄생한 것이다.
또 노무현정부는 민주주의의 위기를 초래했다. 2005년 국회 여론조사를 보면, 압도적으로 응답자의 90% 가까이가 '경제성장이 민주주의보다 중요하다'고 답했다. 유신 때도 같은 내용의 여론 조사를 했었는데 하나도 달라지지 않은 것이다. 어떻게 민주화 20년을 지내고 나서도 똑같은 결과가 나올 수 있나. 민주주의를 통해서는 재분배가 안 된다는 불신을 갖게 된 것이다. 민주주의로는 해결하지 못하고 성장을 통해서만 보상받을 수 있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사회로 돌아선 것 같다. 노무현대통령은 민주주의를 중우정치와 동일시했다. 참여정부에서 시민참여를 배제하고, 정치를 철인정치, 엘리트주의, 귀족 정치로 바꿔놨다. 당정분리를 한다고 하며 정당의 책임정치를 실종시켰다.
얼마 전 노 대통령은 그런 비판을 받고, 또 한나라당이 민주세력 무능론을 들고 나오자 '한나라당의 무능론은 모략'이라며 군사정권 혹은 한나라당은 유능했느냐고 반문했다. 그러나 비교대상이 잘못된 거다. 문제는 민주세력에 부과된 과제를 얼마나 실현됐느냐는 거다. 민주세력이 자기에게 부과된 과제를 얼마나 수행했는가, 즉 과제와 성과간의 갭(gap)이 큰 것을 무능이라고 한 것이다.
이를 교정할 시기가 없었나? 그렇지 않다. 탄핵 이후 집권세력이 절대적 지지를 받은 적이 있었고, 지난 5.31 선거에서 열린우리당이 완패를 했을 때 만회할 기회는 충분했다. 그러나 1년이 지난 지금까지 허송세월했고, 이제 열린우리당은 문 닫을 상황에 처해있다. 아무리 기회를 줘도 그 기회를 허송세월로 보내는 상황을 되풀이하는 꼴이다.
이른바 범여권의 대통합론은 '무조건 뭉치자'는 것이다. 김근태 의원이 손학규 전 지사에게 가서 같이 뭉치자고 설득한다. 몇 달 전 목숨 걸고 한미 FTA를 반대하며 단식을 했던 분이 FTA에 찬성하는 분에게 같이 가자고 한다. 국가보안법, 사학법, 재벌개혁 등 쟁점현안들에 대해 제 각각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데 어떻게 하나로 뭉칠 수 있다는 말인가?
아무 준비 없이 청와대만 장악하면 세상이 달라질까
그렇게 해서 집권한들 무엇을 할 수 있나? 제2의 노무현 정권밖에 안 된다. 왜 국민들이 그런 정부를 만들기 위해 성원해줘야 하나? 그 대통합은 무슨 의미가 있고 누굴 위한 건가? 자기들의 기득권을 지키고, 또 다른 보상을 받기 위해 만든 허구가 대통합 아닌가. 아무 준비 없이 청와대만 장악하면 세상이 달라지나? 우리는 지금 고민 없는 상태에서 대통합에 관한 논의가 이뤄지는 참담한 현실을 목도하고 있다.
'한나라당은 아니지 않냐'는 말, 20년간 민주화하고, 민주주의를 기다린 결과가 결국 그 말인가? 얼마나 기가 막히고 황당한가. 이것이 바로 20년의 가장 큰 절망이 아닐까.
6월 혁명은 배반당한 혁명이고 지금도 그 배반은 계속되고 있다. 누가 어떻게 할 것인지, 아무런 반성도 없다. 선거와 정당에서는 6월 항쟁, 그리고 민주화에 관한 논의가 완전히 배제되고 있다.
최장집 선생님에게 두 가지 질문을 드린다. 하나는 노 대통령의 권력남용에 관한 것이다. 지금 한국은 대통령의 퍼스낼리티(개인의 성격)가 국민에게 바로 침투되는 시스템의 문제가 있다고 본다. 현재 대통령은 갖고 있는 권한을 넘어서 이를 사용하고 있다. 한 사람을 잘 뽑으면 확 바뀌는 이런 구조를 바꿔야 하지 않겠냐고 보는 것은 아닌가. 그러나 제도보다도 역시 사람의 문제는 아닌가. 노 대통령 독특한 퍼스낼리티에 대한 견제장치가 없는 것이 문제라고 볼 수 없는가.
두 번째는 정당개혁이 문제인데 이건 열린우리당이 제일 많이 했다. 대표적인 개혁이라는게 오픈프라이머리다. 당 밖의 사람도 선거에 참여할 수 있게 해서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 옛날에는 당원이 시민을 대표하지 못했기 때문에 개방시키자고 했고, 이것이 상당히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 한나라당은 그것이 좋은 것인 줄 알고 자꾸 따라가려고 하고 있다.
당원 중심 당운영이 시민의 의사와 무관하게 이루어진 데 대한 반작용으로 오픈 프라이머리를 도입하고 이것이 정당개혁이라고 지지를 받고 있다. 그러나 오픈 프라이머리는 정당의 정체성을 훼손한다. 정당 개혁이라는 현실과 정당의 원칙이 충돌한다. 이 현실과 원칙의 충돌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정관용: 저도 진행자이긴 하지만 질문을 드리겠다. 최 교수님은 '과거에는 권력을 통한 적극적인 개혁 실현에 더 큰 관심을 가졌다'고 했는데 개인적 입장에서 매우 큰 관점의 변화를 겪었다고 고백하신 셈이다. 대통령이란 권력을 통해 변화를 달성시킬 수 있겠다는 기대가 시대적으로 많이 있었지만 이제는 오히려 그 권력을 견제하는 체계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셨는데 그 이유가 구조적으로 한국 정치가 그럴 수밖에 없기 때문인지 아니면 대통령 개인의 행태 때문인지 궁금하다.
그리고 현실에 있어서도 노무현 대통령식으로 '언론의 비판은 언론에 문제가 있고 의회의 견제는 의회가 잘못됐기 때문이다'라는 행태를 보일 수도 있다. 정당정치가 가장 큰 문제를 안고 있지만 그 수준에서 적절히 타협해나가자는 주장으로 보일 수 있는데, 그런 타협적인 것이 오히려 옳다는 것인가라는 반문도 가능할 것 같다.
아무리 기대 못 미치는 정당이라도 그 속에서 대안 만들어질 수 있다
최장집: 먼저 정관용 사회자에 대해 답하고, 답은 역순으로 하겠다. 명사회자의 명성에 걸맞게 역시 질문은 날카롭다. 민주주의에 대해 글을 계속 쓰고 현실 정치를 관찰하면서 나름대로 중요한 변화를 겪었다. 그 중 하나가 대통령 권력에 대한 문제인데, 처음에는 긍정적으로 개혁의 리더로서 기대를 했지만 지금은 이를 견제해야 한다는 관점의 변화를 겪게 된 것이다. 개인적으로 중요한 지적이자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저도 우리나라의 민주화를 지지했고 때에 따라서는 민주화운동과 민주정부에 참여도 하면서, 민주정부가 우리 역사에 어떤 큰 변화의 계기를 가져올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민주정부의 경험에서 느끼게 된 것은 다른 나라에서 중요한 이론가들, 존 로크, 몽테스키외, 제임스 매디슨 등이 민주주의 제도에 대해 얘기하고, 권력의 견제에 대해 얘기했던 이론들이 그저 단순한 이론이 아니라는 느낌을 갖게 됐다는 사실이다. 정치학은 우리가 경험하지 않은 것을 미리 얘기할 수 없는 현실구속성의 성격을 갖는 학문이라 그런 건지 제가 둔해서 꼭 경험해봐야 알 수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민주정부의 경험을 통해 중요한 사고의 변화를 겪게 됐다.
질문은 '구조적인 문제나 제약 때문에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인가, 아니면 현 노무현 정부에 국한된 결과물인가'라는 것이었다. 현 정부에 대해서는 이대근 부국장이 이미 평소 글을 통해 말했던것과 같이 날카롭게 분석해 주었다.
현 정부 5년 동안 정치학을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다른 정부에 비해 두세 배 정도로 더 많은 것을 배웠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주장은 현 정부의 경험 때문만은 아니다. 87년 민주화 이후 여러 정부를 거치면서 통틀어 관찰할 때, 그리고 금년 말 대선을 앞두고 들어설 정부를 예상할 때도 저는 이 정도 밖에는 말할 수 없지 않나 생각한다. 말하자면 제가 생각하는 것은 '보다 더 나쁜 것을 어떻게 통제할 수 있나'라는 문제의식으로서 다소 소극적이고 비관적인 문제접근을 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나라에는 해방 이후 지금까지 누적된 역사적, 구조적 환경과 조건도 있고, 또 87년 이후 일정하게 틀이 잡혀진 구조와 이를 지속시키는 조건들을 고려해볼 때, 전환의 계기가 가능할 수 있느냐에 대해 비관적인 생각을 한 결과로 이런 얘기를 했다.
그 다음 대통령 권력의 문제, 즉 현재 대통령이 의회와 정당으로부터 견제받지 않은 채 대표와 책임의 민주적 원리로부터 방면된 자의적 리더십을 보여주는 문제와 관련해 개인적으로는 정치에 대해서 이상적, 낭만적으로 생각하기보다는 현실적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고 본다. 그리고 그것이 정치학의 중요한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현실 의회나 정당이 아무리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권력 문제에서는 그 내용보다는 물리학적인 힘의 구조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
즉 아무리 내용이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 하더라도 정당과 의회는 사회를 대표하는 정치적 권력 내지 힘이고, 새로운 대안은 이들의 개별적 수준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들 권력간 힘의 관계 속에서 창출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우리나라의 정당정치는 퇴행해왔다. 노무현 정부 때보다는 김대중 정부 때나, 김영삼 정부 때가 나았다. 그때만 해도 정당이 작동했고, 비록 구태의연한 구식정치라는 평가를 피할 순 없겠지만 정당이 존재했다. 그러나 현재는 정당이 존재하는가? 별로 그런것 같지 않다. 민주주의의 관점에서는 최악의 상태에 봉착해 있는 것이다.
이대근 부국장의 질문에 대한 답에 앞서 민주와 반민주, 개혁과 보수의 갈등축은 이제 해체되었다고 본다. 현재 정치인들이나 정책 엘리트, 언론들은 다 좌우나 진보/보수의 기준으로 정치를 이해한다. 저로서는 이러한 기준이 상당히 불분명한 것으로 생각된다. 적어도 경제 정책에 관해서는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의 차이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들 모두 노동을 플레이어로 수용치 않는 순수한 시장경제를 찬성하면서 그것을 어떻게 잘 할 것인가를 고민하기 때문에, 남는 건 남북한 관계, 민주화, 평화라고 하겠는데 그것도 레토릭(rhetoric)일 수밖에 없다. 한나라당이 집권한다고 해도 평화를 거부할 수 있겠는가? 평화의 반대는 전쟁인데 그들이 전쟁하려 하겠나?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레토릭일 수밖에 없다.
좌-우, 진보-보수 구분이 가능하려면 경제정책 영역에서 시장자유나 성장정책과 그에 반하는 분배나 노동 참여에 대한 대안을 두고 스펙트럼이 구분돼야 한다. 그런데 이 스펙트럼에서 비교하면 두 정당은 내용적 차이가 없다. 그다음 민주화 운동세력이라 함은 적어도 정부에 참여한 세력은 이대근 부국장의 지적했듯이 권력화, 기득권화 됐다고 본다.
저는 '나쁘게 돌아갈 수 있는 것'을 어떻게 제도를 통해 통제할 수 있는가에 대해 얘기하고 싶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정치는 제도로 되는 것이 아니라, 마키아벨리가 말하듯, 포르투나(fortuna)와 비르투(virtu), 즉 앞의 것이 운명 또는 행운, 좋은 환경과 조건이 도래했다는 뜻이라면, 뒤의 것은 의지, 결단력, 용기, 비젼등을 말하는 것으로, 한사람의 지도자가 위의 두 조건 가운데 하나만 있어도 안되고, 두 조건을 모두 갖출 때 한나라의 운명을 바꿀수 있다는 이론도 있다.
이 문제는 법의 지배냐, 인간의 지배냐 라는 문제로 요약될 수 있다. 인간의 지배는 카리스마의 지배, 위대한 지도자의 등장을 통해 한 사회나 정치가 도약의 계기를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이런 방법을 통해 중요한 변화가 이뤄진 경우도 많다. 그러나 나는 인간의 지배가 바람직하다고 얘기할 수는 없다. 민주주의는 철저히 법의 지배로 운영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이는 법이 허락하는 한정된 범위에서 훌륭한 리더십이 나오면 좋고, 나쁜 리더십이 나오면 이를 통제할 수 있는 제도를 발전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이다.
열린우리당의 개혁, 어떤 개혁보다 정치 축소·시장효율성 중시
두 번째로 정당 개혁과 관련해서 열린우리당의 정치개혁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그 앞에 김대중 정부까지 포함해서 민주정부를 통해 정당개혁이 지속적으로 이뤄져 왔다. 이 개혁의 내용, 이를테면 지구당 폐지, 중앙당 축소, 원내정당화, 예비선거제도입 등이 있었다. 이런 방식으로 제도개혁이 이뤄져왔는데 이는 기본적으로 정당이 대중에 뿌리내리는 것과 반대되는 효과를 갖는 것으로 나타났다. 신자유주의적 가치와 시장 포퓰리즘의 원리가 정치를 바라보는 기준이 돼서 정치를 축소하고 민주주의를 다운사이징(downsizing)하는 방식으로 제도개혁이 이뤄진 것이다. 이런 식의 정치개혁은 미국정치를 모델로 하고 있다. 정치학자들이 정치권 안팎에서 이런 개혁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이를테면, 예비선거제도(primary election)라고 하는 것이 19세기 말 20세기 초 미국에서 '진보주의'시대 정치개혁의 일환으로 실시되었다. 그때 선거제도 개혁의 일환으로 투표자격요건으로 영어읽기 테스트, 투표자등록제, 예비선거제등이 도입됐지만, 개혁이후 미국정치는 민중의 정치참여보다 엘리트와 전문가들의 영향력이 훨씬 강화되는 것으로 귀결됐다. 보스중심의 정당정치, 도시이민자투표 동원을 위한 이민자후원-동원조직등이 부패하고 비능률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제도개혁을 시도했지만 이는 투표율을 30%나 떨어뜨리는 결과를 낳았고, 그로부터 미국의 투표율은 선진국 가운데 가장 낮은 투표율을 계속 갖게 됐다. 이 시기 제도개혁은 기본적으로 엘리트중심적인 것으로, 흑인, 이민자와 같은 사회적 약자를 포함하는 일반민중의 정치참여를 떨어트리는 효과를 가져왔다. 이런 제도개혁은 민주주의를 강화하기보다 약화하는 데 더 기여했다고 할수있다.
우리나라에서 오픈프라이머리(국민참여경선제)는 기본적으로 정치인 혹은 정치활동가들이 정당을 중심으로 결집하고 정당을 통해 민중과 접촉하는 걸 약화시키고, 미국에서도 그랬듯이 정당중심의 정치를 강화하지 않고, 후보자중심정치를 강화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일반인들이 들어와서 직접 후보를 선출한다고 하지만, 실제로 이 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들은 중산층 이상의 지위와 자원을 가진 이들이고 그마저도 언론의 선정적인 후보경쟁보도에 휘둘릴 가능성이 높다. 이번 대선 후보선출에서도 경선제를 도입하자고 한다. 그런데 당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후보를 선출하는 것이 무슨 의미를 가지나? 경선제가 굉장히 민주적인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일반인들이 정당의 매개없이 직접 참여해서 만드는 것은 포퓰리즘일 뿐이다.
그래서 민주정부들이 모두 그랬지만, 특히 열린우리당이 해온 그간의 정치개혁은 결과적으로 어떤 보수정당이 정치했을 때보다 더 정치를 축소하고 폄하하며, 시장효율성을 중시한 개혁이었다고 생각한다.
급진적인 신자유주의 수용은 한국 민주화의 미스테리
최태욱 교수의 논평도 중요한 지적이다. 저는 우리나라의 민주화를 보면서 하나의 미스테리 같은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민주정부가 민주화된 이후 신자유주의적인 정책을 수용했는데 그걸 왜 했느냐고 질문하기보다는, 수용했는데 왜 이렇게 급진적이고 과격하게 했을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나의 수수께끼다.
이후 노동을 억압하게 된 것은 자동적으로 따라 나올 수밖에 없다. 이는 김대중정부 이후 노무현 정부에서 더욱 완성된 형태로 나타났다. 노동자를 배제한다는 얘기는 민주주의의 공간을 아주 원천적으로 좁히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에 대단히 심각한 문제다. 노동자만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영역과 생산체제 모두에서 억압적인 분위기가 만연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전사회적으로 민주주의적이고 자유주의적인 공간, 즉 이념의 자유라든가 문화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다양성을 만들어내는 데 굉장히 심각한 장애요인이 되고 있다. 민주정부가 이런 상황을 더 강화했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는 것이다. 우리가 보수, 진보를 얘기할 때, 프랑스를 예로 들어 말한다면, 사르코지는 보수적인 정당 출신이니 보수고 루아얄은 사회당에서 나와 진보라며 우리나라에서 통용되는 개념으로 이들을 위치시킨다. 그렇다면 사르코지는 한나라당, 루아얄은 민노당인가? 내 판단으로 사르코지는 민노당 못지않게 진보적이다. 그는 대통령선거 캠페인때 가장 많이 공장을 찾아가고 작업복을 입고 헬멧을 쓴 노동자들에 둘러싸여 있기를 가장 즐겨했다. 공장이 없으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고 주장했고, 시장경쟁이 이데올로기가 되고 도그마 되는 것을 반대했다. 그는 한국의 이른바 "진보적"임을 자임하는 대통령과는 달리 신자유주의를 급진적으로 수용하지 않고 있다. 프랑스의 정당체제를 감안하면 급진적으로 수용할 수 없다는 말이 더 정확할 수도 있겠다. 어떻게 시장을 감독하고 규제할 수 있느냐는 문제는 나라마다 다르다. 그 정도와 내용을 보면 유럽에서는 기본적으로 정치가 만들어내는 콘센서스(consensus)가 우리와는 굉장히 다르다. 이에 비해 우리의 정당정치는 아직 '원시적인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질문으로 돌아가서 정당정치가 발전되지 않는 것이 문제의 근원인데, 그렇다면 어떻게 발전할 수 있는가? 정치를 직접 하는 사람도 아니고 뭐라고 한마디로 얘기할 수는 없다. 정치의 변화라고 하는 것은 이론적으로 말하기보다는 실천의 영역에서 발전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치학자로서 말하는 것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음악을 작곡하는것은 음악이론가가 아니라 작곡가인 것처럼, 정치도 이와 마찬가지라고 본다.
정당이 제도화되지 않은 상황에선 의회중심제도 힘들어
현재 우리나라의 정치는 기본적으로 실질적인 문제보다는 허구적이거나 이데올로기적인 갈등이슈에 집착하고 있다. 보다 중요한 문제는 놔두고 덜 중요한 문제를 가지고 치열한 이데올로기 대립을 하는 것이 한국 정치의 현실이다. 이데올로기나 정서적인 문제가 대두되면 대립은 치열해질 수밖에 없는데, 이는 현실 대중의 생활과는 관계없는 문제들이다. 대중의 삶과 직접 관련되는 것은 사회경제적인 문제다. 한미 FTA처럼 중요한 사회경제적 문제가 정당 간 쟁점이 돼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이 우리나라 정당정치의 핵심적인 문제다. 민노당도 여전히 남북문제 등 이데올로기 문제에 치중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문제는 정당체제는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한번 패턴이 만들어지면 수요와 공급의 구조가 맞물려 돌아가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정당정치는 사회경제적 문제를 풀지 못하는 한계점에 도달했고, 그나마 한나라당이 가장 정당 같은 정당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물론 정당의 변화에 대해 말한다면, 대중적인 요소를 갖는 정당이 물꼬를 터서 외부로부터 충격을 가해 기존의 체제가 파열될 수 있는 가능성을 배제하진 않는다. 20세기 초 노동자 계급정당이 생기면서 나타난 유럽 정치의 변화는 여전히 주요한 참조사례다.
정치개혁이 이뤄지면서 오히려 결과가 나빠졌다고 말했는데, 우리나라는 다시 한 번 대중정당화의 계기가 있어야 한다고 본다. 그간 그런 계기를 활용하지 못했다. 저는 87년 체제의 구조적 한계를 지적하는 관점에는 동의하지 않는 편이다. 어차피 당시 체제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그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정당발전의 계기가 있었는데 그런 계기를 통해 대중정당이 만들어지지 못했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권력구조 개혁 문제와 관련해서, 기왕에 개헌문제가 제기되어 이 문제가 논의될 때는 다 풀어놓고 얘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헌법을 바꾸는 것은 매우 중요하고 이에 대해 논의할 때는 많은 사람들의 의견이 들어올 수 있게 한 뒤 제도를 바꾸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는 대통령제 말고 의회중심제도 생각해볼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의회중심제가 대통령제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선뜻 이것을 선택하자고 말하기 어려운 이유는, 정당이 제도화되지 않고서는 이 제도의 장점이 살아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처럼 정당이 전혀 제도화되지 않은 상황에서 의회중심제를 제대로 운영할 수 있을까? 만약 이런 조건에서 의회중심제가 되면 정부도 구성하지 못하고 몇 달 만에 한 번씩 정부가 바뀌는 상황이 만들어질 수도 있다. 그래서 그나마 대통령 중심제는 헌법으로 임기를 5년으로 정해놓았으니 다소간 우여곡절이 있더라도 정부는 유지될 수 있지 않나 생각하게 된다.
대통령 중심제를 생각할 때는 개인적으로 프랑스의 준대통령제를 선호한다. 의회중심제의 장점을 많이 포괄하고 있기 때문이다. 동거정부라는 것은 총리는 의회 다수당이 의회에서 선출하고 대통령과 총리가 다른 정당에서 나올 때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 경우 총리는 행정 수반의 역할을 맡고 대통령은 외교, 국방 등의 이슈에 대해 책임을 지는 노동 분업이 이뤄진다. 여기에서 제도는 '의회내 다수당이 총리를 선출한다'는 것밖에 없다. 결선투표가 이뤄질 때의 한 가지 장점은 정당들이 전부 대통령 후보에 출마해 1차 투표에서 표를 획득한 수만큼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후 2차 투표에서 표를 결합할 때 정당간 연합의 성격을 갖게 돼 인물중심이 아닌 정당중심적 대표성을 높일 수 있다. 우리나라 같은 단순다수제는 승자독식의 제도이며 이는 대통령제를 비민주적으로 만드는 결과를 초래한다. 30~40%의 지지를 받은 대통령이 얼마든지 대표가 되는 것이다.
제도개혁에서 유의할 점은, 외국에서 이런 효과를 가졌기 때문에 그것을 한국에 들여온다고 해도 똑같은 결과를 가져오리란 보장이 없다는 것이다. 정치제도도 결국 사람과 정당을 통해 작동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새로운 제도를 실행할 때에는 사람들이 제도 적응의 비용을 치러야 한다. 제도개혁에 대해 개인적으로는 보수적인 관점을 갖고 있다.
비례대표제로의 전환, 하나의 제도적 처방 될 수 있어
최태욱: 선생께서는 정당정치의 발전 문제에 대해 그것은 정치인의 영역이라 하고 제도의 변화는 부정적이라고 했다. 그러나 학자의 영역에서도 어느 정도의 처방 제시는 가능하지 않을까한다. 우리나라는 지역주의가 소선거구 1위대표제와 결합돼서 신당의 출현을 어렵게 하고 있다. 지역주의가 팽배한 상태에서는 지역 기반이 약한 신생 정당 후보가 1등할 가능성이 매우 낮고, 따라서 이념과 정책을 강조하는 정당들이 국회에 진출하기가 구조적으로 어렵다. 그렇다면, 신당이 새로운 정치지형으로 이어질 수 있을 거라고 말씀하셨지만, 현실적으로는 신당의 부상조차 어려운 상황이다. 말하자면 심각한 '진입장벽'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제도적 처방이 필요하다.
예컨대, 대선거구 비례대표제 혹은 그에 근접한 선거제도로 바뀌면, 유권자들은 인물이 아닌 정당에 대해 투표를 하게 되고, 이것은 정당들로 하여금 개인적 인기나 지역감정이 아닌 정당의 정책기조와 이념으로 승부하도록 유인한다. 선거정치가 정당 간의 정책게임으로 발전하면서 정책과 이념을 가진 신생정당의 입지가 충분히 마련될 수 있다는 것이다. 더구나 비례대표제에서는 사표가 발생하지 않으므로 유권자는 자신의 정책 및 이념선호에 충실하게 정당 투표를 한다. 따라서 1위대표제에서와 같은 거대 정당의 과도대표 현상은 사라지고, 신생 이념 정당일지라도 자신에 대한 지지만큼의 의석은 고스란히 차지할 수 있게 되어 제도권 진입이 용이케 된다.
정관용: 기존 정당의 분화, 신생정당 진입 문제를 '다당제화'라는 아주 구체적인 방안으로 제시했다고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번 대선을 대중정당화의 계기로 삼아야
이대근: 이번 대선은 대중정당화를 할 수 있는 좋은 계기라고 생각된다. 선생님께서 세력중심, 후보중심의 정치가 둘 다 가능한 것처럼 얘기했는데 지금은 후보중심이다. 정당도 없고 그냥 사람들이 만나는게 정당을 대신하고 있다. 정당의 정책이 무엇이며 그 후보는 그 정책을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를 두고 경쟁할 수 있는가가 문제가 돼야 하는데 정당은 없는 상태로 후보들이 저녁에 만나서 밥을 먹고…이것이 대한민국에서 정치하는 가장 중요한 활동이 돼 버렸다.
정당의 지속성을 보면 한나라당이 가장 안정적이다. 집권당이 오히려 끝없이 이합집산을 한다. 범여권이란 기준도 없다. 지금 한나라당에 속하지 않는 사람은 모두 대통합의 대상이 된다. 몇 달전 한나라당 당원이었느냐도 문제 삼지 않고, 현 시점에서 한나라당 소속만 아니면 다 모이자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대선이 정당정치를 활성화할 수 있는 계기가 될까. 경선 자체를 쇼로 만들기로 하는 등 테크닉만 개발하고 있는 현실이다. 이상 시인이 말한 것처럼 절망이 기교를 낳고 그 기교 때문에 절망하는 상황이 돼 버리지 않았나.
지금이라도 시민들이 나서서, 정치 안팎에서 제대로 된 정당정치가 이뤄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얼마 전 대통합론에 대해 '정치적 다수파가 돼야 한다'고 쓴 논문을 읽은 적이 있다. FTA 찬반으로 뭉치면 소수가 되니까 FTA문제는 빼자며 그럴듯한 개념을 동원했는데, 그럼 왜 다수가 되어야 하는지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청중 A: 지금 정당은 공천만을 위한 정당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2006년 12월 15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사회기관에 대한 신뢰도에서 정당에 대한 신뢰도가 '처음 본 사람'에 대한 신뢰보다 더 낮다. 정당에서는 원내대표만 선출하니 자기들 싸움에만 정신없는 것 아닌가.
청중 B: 정치학을 공부하는 학생이다. 지금은 시장이 강력한 헤게모니를 가진 상황이다. 사회에는 잘 조직될 수 있는 이익도 있고 그렇지 않은 이익도 있는데 정당제도는 지나치게 잘 조직될 수 있는 이익만 대표하게 되는 것은 아닌가?
최장집: 여론조사는 특정 조직이나 기관의 역할에 대한 일반인들의 기대와 실망의 정도를 평가한 결과라고 본다. 참고는 할 수 있지만 그것이 민주주의의 현실에서 그 조직들의 역할을 그대로 평가하고 있다고 볼 수는 없다. 정당 역시 마찬가지다.
현실적으로 정당을 개혁할 때 조직이나 리더를 어떻게 기술적으로 세울 것이냐는 하는 문제 역시 복잡하다. 원내/원외대표의 이중구조를 갖는 리더십은 부정적으로 본다.
두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이익집단을 중심으로 한 자율적인 조직과 정당은 다른 역할과 성격을 갖는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이익집단들의 이익은 선거를 통한 정권획득이 아니라 로비를 통해 관철되는 것이다.
정당은 두 가지 패턴이 있다. 미국같이 여러 이익집단들의 결합으로 나타나는 정당구조도 있고 유럽같이 계급기반을 중심으로 한 정당구조가 발전하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잘 조직된 노동조합이 특정정당과 연대하는 미국식 구조에 대해 그렇게 부정적으로 보지 않고, 한국의 현실에서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미국의 경우 노동이 정당과 연대할수 있었던 것은 뉴딜 정책의 결과물이었다.
이익집단은 한 사회 내에서 제한된 범위의 특수이익을 대표하며 그것도 조직에 참여할 만큼 시간과 자원을 가진 사람들을 중심으로 활동이 전개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운동 또한 다수의 이익을 대표하거나 하나의 조직으로 유지되는 데는 큰 어려움을 가질 수밖에 없다. 게다가 운동은 개인에게 큰 희생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다. 이익집단이나 운동에 이런 문제점이 있기 때문에, 바로 그것이 정당의 중요한 존재 이유가 된다. 정당의 중심 무대가 되는 선거는 다수 지지의 확보를 목표로 경쟁이 이뤄진다. 가난한 다수를 대표할 수 있는 조직은 현실적으로 정당 밖에 없다. 제도화된 영역에서 가장 안정적으로 사회적 약자를 대변하고 그들의 이익을 정책화해서 관철시킬 수 있는 조직은 정당밖에 없기 때문에 나는 정당을 통한 정치를 지지한다.
정관용: 긴 시간 좋은 말씀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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