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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진실화해위, 정권 바뀌면 어떻게 될지…"

'현장'에서 확인한 진실화해위의 숙제

지난 28일 오후 5시 전라남도 영암군 군청 상황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송기인 위원장은 6.25 전쟁으로 가족을 잃은 영암 지역 유가족 대표 30여 명의 간담회를 가졌다. 이날 '현장'에서 터져나온 유족들의 한 섞인 눈물과 호소는 진실화해위의 험난한 여정을 그대로 보여줬다.

되살리는 과거사, 되살아나는 악몽

인간은 망각의 동물. 과거의 아픈 기억들을 잊으며 살아간다. 이를 두고 '가슴 속에 묻고 산다'고 한다. 결코 잊혀지지 않는 기억도 재조직의 과정을 통해 왜곡해 기억하기도 한다. 그런 측면에서 6.25의 기억을 되살린다는 것은 결코 반가운 일이 아니다.

이날 간담회에서 70대의 한 노파는 "다 잊어불고 사는데 왜 이런 거 들쑤셔서 사람들 심란하게 맹그요? 이제 와서 말혀 뭣할 것이요?"라며 원망의 표정을 지었다. 50대의 한 가장은 "울 어무니는 '내 살아 생전에는 절대 말 안 하겠다'고 말하며 돌아가셨는데, 아버지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알고 싶다"며 진실화해위에 진실규명 신청을 한 이유를 말했다.
▲ 영암지역 유족 대표들과 간담회를 갖고 있는 진실화해위원회 송기인 위원장. ⓒ프레시안

그는 "나라에 대통령이 없으면 다시 뽑아부럼 되지만서도, 죽은 애비는 다시 살릴 수 없잖소. 애비 없이 지금까지 살아온 연유라도 알아야 하겄습니다"라며 눈물을 훔쳤다.

과거사 진상규명 작업은 기억의 복원이라는 작업이기 때문에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6.25 전쟁 통에 많은 문서가 사라졌고, 용케 남아 있는 문서도 55년이 넘는 세월 사이에 남은 것이 별로 없다. 과거 재적증명서와 같은 신분증명서도 전산화돼 있지 않아 '실존 여부'를 가리는 데만도 상당한 품이 든다.

그렇기 때문에 작업은 생존자들의 '증언'에 의할 수밖에 없는데, '끔찍한' 기억을 되살리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지방과 같이 토착민들이 서로 원한을 품고서 55년 여를 입 다물고 살아온 상황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정권 바뀌면…"

한 유족이 송기인 위원장에게 '당당하게' 따졌다. "그래도 노무현 정권 동안에 조사를 끝내야 하지 않겄습니까?" 송기인 위원장은 "이번 정부 하에서 끝내는 것은 조사 분량의 방대함을 고려했을 때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며 "진실화해위는 법률에 의해 임기가 보장된 기구인 만큼 정부가 바뀐다고 해서 끝이 나지 않는다는 점을 알아 달라"고 답했다.

송 위원장은 "진실화해위는 진보와 보수의 지향과는 상관없이 과거의 진실을 밝혀내는 일을 하는 곳이기 때문에 정부의 성향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과거사 진상규명에 부정적인 한라당이 집권하면 진실화해위의 수명이 끝나는 것 아니냐'는 세간의 근심은 여전하다. 진실화해위가 법률에 의해 임기가 보장된 것은 사실이지만, 정부의 예산과 인력 등의 지원을 받지 못하면 활동의 폭은 크게 줄어들 수밖에 없기 때문.

그래서 유족단체들은 진실화해위의 조사 역량 강화를 골자로 한 과거사정리기본법 시행령 개정안이 반드시 통과돼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무덤 속에 묻히는 역사

진실화해위가 작업을 서둘러야 하는 것은 '정권교체설'보다 더 급한 이유가 있다. 과거사를 고스란히 머릿 속에 간직한 '어르신'들이 하나둘 이 세상을 떠나고 있는 것. 간담회에서는 "그 때 상황 아는 노인네들 다 죽어 증언할 사람이 사라지고 있는데 언제 조사를 시작한당가요?"라는 불만이 터져나왔다.

실제 진실화해위에 진실규명을 신청한 뒤 숨진 사람만 18명. 6.25 당시 20대 청년들은 지금 80대 전후이다. 그런데 진실규명 신청 건수만 1만여 건. 갈 길은 먼데 손발은 모자라고 마음만 급한 상태인 것은 당연지사. 특히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증언'이 중요한 사건의 경우 목격자들이 모두 숨질 경우 영영 '사라진 역사'로 남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화해가 될까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진실규명작업은 '화해'를 위한 것. 그러나 역사적 사실을 밝혀내는 진실규명 작업보다 더 힘든 것은 '화해' 작업이다.

전남 영암지역은 점령 세력이 바뀔 때마다 수많은 민간인들이 희생됐다. 공산군이 염암에 입성하기 직전 보도연맹에 대한 학살이 있었고, 공산군이 입성한 직후에는 경찰과 우익세력에 대한 숙청이 자행됐다. 다시 국군이 수복했을 때는 공산세력에 동조한 민간인들에 대한 보복이 있었고, 전쟁이 게릴라전으로 장기화된 이후에는 빨치산과 국군·경찰이 번갈아 영암을 점령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민간인들이 희생됐다.

영암군 금정면 사건의 한 생존자는 "1950년 8월부터 5개월 동안 낮에는 경찰 세상, 밤에는 빨치산·인민군 세상이었다"며 "그 때 죄 없는 민간인들이 숱하게 죽어나갔다"고 말했다. "아버지 형제가 11명이었는데, 고모 한 분을 빼놓고 그 때 다 죽었다"는 유족도 끝내 눈물을 참지 못 했다.

원한 켜켜이 쌓인 경찰 보복 사건

특히 영암 지역은 대부분의 민간인 희생 사건이 경찰과 관련된 사건이라는 측면에서 서려 있는 '한'이 더 크기 때문에 '화해'가 더 힘든 지역일 수 있다.

군부대의 경우 계속 전선을 따라 이동하기 때문에 '원한'보다 '작전'에 의한 학살을 자행한 경우가 많다. 반면 경찰과 관련된 사건은 토착 주민들 간에 벌어진 사건이 대부분이어서 보복의 보복이 거듭되며 사적 원한으로 쌓이고, 경찰은 전선을 따라 이동하지 않고 그 지역에서 토착 세력이 된 신분적·지리적 특수성을 감안할 때 그 원한들이 전쟁 후에도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

전쟁 후 아버지를 죽인 경찰관이 지서장이 됐고, 죽임을 당한 유족은 '빨갱이' 자식이라는 굴레 속에 입을 꾹 다물고 살던가, 타향으로 이사를 갈 수밖에 없었다. 반대로 학살의 죄책감에 지역에서 버티지 못하고 타향으로 떠나는 경찰관도 있었다.

한 유족은 "우리 삼촌은 국군으로 참전해 전사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가 경찰에 의해 죽었는데, 빨치산과 아무런 관련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경찰에 의해 죽었다는 이유만으로 '빨갱이'라는 낙인이 찍혔다"며 "빨치산에게 죽은 경찰의 유족들이야 모두 국가에서 유공자로 대접해 왔으니, 나처럼 억울한 사람들 원한부터 풀어줘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그런 측면에서 화해의 핵심이자 가장 큰 걸림돌은 경찰과 관련된 사건이라는 지적이다. 전국적인 6.25 희생자에 대한 위령제를 준비했던 한 종교계 인사는 "재향군인회를 찾아가 협조를 구할 때는 '나도 전쟁의 피해자'라며 협조하고자 하는 의지가 보였는데, (대한민국재향)경우회(퇴직경찰모임)를 찾아갔을 때는 여러 번에 걸쳐 문전박대를 당했다"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민간에서의 화해 없이는…
▲ 28일 전남 영암 구림마을을 방문해 순절비를 둘러보고 있는 송기인 위원장. ⓒ프레시안

사실 정부차원에서 '화해' 작업을 주도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것으로 평가받는다. 당사자들이 원한을 풀지 않는 이상, 정부가 아무리 근사한 상을 차려놔도 원한의 당사자들이 한 자리에 앉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진실화해위 관계자는 "진실화해위는 과거사 사건에 대해 진실규명을 한 뒤, 정부에 위령비 설치 지원, 평화 교육 등의 화해사업에 대한 권고를 하는 역할에 그친다"며 "중요한 것은 당사자들이 스스로 원을 푸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 측면에서 영암 군서면 구림마을은 화해사업을 이끌고 있는 대표적인 모범케이스에 해당한다. 구림마을도 6.25 당시 좌·우익에 대한 희생이 모두 있었던 곳으로 우익의 위령비와 좌익의 위령비가 따로따로 있는 곳이다.

그러나 구림마을은 주민들 자체적으로 마을의 역사를 담은 <호남명촌 구림지>라는 책을 발간하는가 하면, 그 역량을 바탕으로 '진혼제'를 마련해 구체적인 화해작업을 실시했고, 현재 위령탑 건설을 추진하고 있다. 이 바탕에는 500년이 넘게 내려온 4대 성씨의 '대동계' 등 공동체 정신이 바탕에 있기 때문에 가능했다. 역으로 '화해' 작업을 통해 무너진 공동체 정신을 되살릴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우리끼리도 화해 못하는데 북한과 어떻게 화해하나"

한 과거사 관련 단체 인사는 "솔직히 세대가 세 번 바뀌기 전까지는 화해라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할 것 같다"고 말했다. 6.25라는 끔찍한 경험이 완전히 기억 속에서 사라지기 이전까지는 화해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그는 그러나 "우리 안에서의 화해도 이루지 못 하고 있는데, 북한과는 어떻게 화해를 하겠는가"라며 "그렇기 때문에 통일을 위해서 우리가 반드시 먼저 해결해야 하고 연습해야 하는 것은 우리 안에서의 '화해'"라고 강조했다.

진실화해위는 지난 27일 전남 구례에서 여순사건 관련 민간인 희생자가 묻힌 지역에 대한 '개토제'(開土祭)를 열고 전국적인 유골 발굴 작업에 본격 착수했다. 2007년 여름, 55년여 간 닫혀 있던 땅이 열리며 이제 본격적으로 원혼(怨魂)들이 되살아나고 있다. 후손들은 이 원혼들에게 어떤 대답을 들려줄 것인지…. 삽은 이미 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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