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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필리핀 총선 투표소가 세워진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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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필리핀 총선 투표소가 세워진 이유는?"

"'정치적 살해' 계속하는 아로요를 막아라"

매주 일요일 오후, 서울 혜화동 동성고등학교 앞길에는 낯선 풍경이 펼쳐진다. 줄지어 세워진 작은 트럭 앞에서 물건을 사고파는 수백여 명의 필리핀 이주민들이 모여드는 것. 근처 성당에서 필리핀어로 진행되는 미사에 참석하기 위해 오가는 이주민들 사이에서 형성된 '주말 시장'이다.

그런데 지난 15일엔 이 곳에 작은 임시 투표소가 들어섰다. 어깨띠를 두른 필리핀인들은 지나가는 이들을 붙잡고 '투표용지'를 한장씩 나눠줬다. 국내 필리핀 이주노동자 단체인 '카사만코'에서 주최한 이 행사는 오는 5월 14일 필리핀에서 열리는 총선을 위한 모의 투표였다.

카사만코의 교육부장 마크 씨는 "이번 총선은 아로요 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도를 가늠하는 중요한 자리이기 때문에 이 모의 투표는 홍콩, 일본, 호주, 미국, 이탈리아, 영국 등지에서 동시에 진행된다"고 밝혔다. 이들은 왜 본국이 아닌 해외에서 이 같은 캠페인을 벌이고 있는 것일까?

'테러와의 전쟁' 이후 살해되는 진보운동가들
▲ ⓒ프레시안

"아로요 정권은 살인을 멈추시오."

지난 2001년 이후 필리핀에서는 '정치적 살해'가 계속되고 있다. 오토바이를 탄 2인1조의 무장괴한이 총으로 저격한 뒤 도주하는 동일한 수법이 반복되고 있는 이 같은 살해로 희생된 이는 이미 1000명이 넘었다.

지난 2000년 당선된 아로요 대통령은 9.11 테러 이후 미국 부시 정부의 '테러와의 전쟁'에 동참하겠다고 선포했다. 자국 내 공산당 세력 및 이슬람 단체를 테러 세력으로 간주한 아로요 정권은 테러세력을 색출한다는 명목을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그 뒤 인권운동가, 농민 활동가를 중심으로 '정치적 살해'가 잇따르고 있으며 그 대상은 종교인, 학생, 노동자들로까지 범위가 확대되고 있다.

국내외에서 비난이 빗발치자 필리핀 정부는 지난해 '멜로위원회'라는 진상조사위원회를 꾸렸다. 정치적 독립성이 미약하다는 평을 들었던 위원회지만 지난해 발표된 보고서에는 '정치적 살해'에 필리핀 정부군이 연관돼 있다는 사실이 포함돼 있었다.

그러나 필리핀 정부는 군부를 제어할 만한 힘과 권리가 없다는 이유로 발뺌하고 있다. 오히려 5월 총선을 앞두고 '정치적 살해'는 더욱 기승을 부리는 추세다. 필리핀 내 진보 정당으로 분류되는 바얀무나(BAYANMUNA), 아낙빠위스(ANAKPAWIS), 가브리엘라(GABRIELA) 등이 등록 가능한 후보자 숫자의 3배에 달하는 후보를 내정한 것도 이 같은 이유 때문이다.

"총선 통해 국민의 의지 보여줘야 한다"

마크 씨는 "우리는 '모의 투표'를 통해 한국 내 필리핀인들이 총선에 관심을 기울이고, '정치적 살해'를 자행하는 아로요 정권에 반대하는 의원과 정당을 지지하라고 설득한다"고 밝혔다. 이번 총선에서는 24명의 상원 의원 중 절반인 12명을 교체하는 상원 중간선거 및 정당 명부제로 실시되는 하원 선거가 동시에 진행된다.

지난 2004년 대선에 이어 두번째로 실시되는 '해외 거주자 투표'는 800만 명에 달하는 해외 필리핀 이주민들의 정치 참여도를 높이고 있다. 한국에 거주하고 있는 4만5000여 명의 필리핀 이주노동자들 역시 자국 정치 상황에 관심을 갖고 투표에 참여할 수 있는 계기가 생긴 것이다.

'카사만코'를 비롯해 세계 각지 필리핀 이주노동자 단체로 구성된 '필리핀 이주노동자 연합(migrant international)'은 이날 실시한 모의 투표 결과를 모아 필리핀 내에서 여론 공세를 펼칠 예정이다.

마크 씨는 "우리는 지금 아로요 대통령이 매우 불안해하고 있다고 확신한다"며 "그를 반대하는 이들이 매우 조직적으로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진보단체 운동가로 지난 2000년부터 한국과 필리핀을 오가며 활동하고 있는 그 역시 필리핀 정부 내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올라가 있어 '정치적 살해' 위험에 노출돼 있는 인물 중 하나다.

그는 "필리핀 군부 내 비밀문서에는 '아로요 대통령에 반대하는 기초시설(infrastructure)을 파괴하라'고 적혀 있다"며 "그 기초시설이란 바로 활동가들을 이르는 말"이라고 주장했다.

"아시아의 민주화는 '별나라'의 문제가 아니다"

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 역시 이번 총선 결과에 주목하고 있다. 최근 유엔 특별조사관으로 파견됐던 필립 알스톤(Philip Alston) 씨는 "지금까지 발생한 비사법적 살해가 필리핀 군인들과 경찰들에 의해 저질러졌다는 근거들이 존재한다"며 "만약 내가 면담했던 활동가들이 살해될 경우 이는 확실한 증거"라고 밝혔다. 알스톤 씨의 발표 2주 후 그가 만났던 면담자 중 한 명이 또 사망했다.

미 상원에서도 최근 필리핀 군부에 대한 미국의 군사적 지원을 중단해야 한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 상태다.

국내에서도 지난해 9월부터 국제민주연대, 환경운동연합 , 참여연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경계를 넘어 등 일부 시민사회단체들이 '카사만코'와 결합해 '정치적 살해 중단 캠페인'을 펼치고 있다. 지난 15일 모의투표 현장 바로 옆에서는 국내 활동가들의 '아로요 정권에 항의 엽서 보내기' 캠페인이 펼쳐졌다.

'경계를 넘어' 활동가 수진 씨는 "국제적인 이슈로 떠오른 이 문제에 대해 한국인들의 관심은 지나치게 낮다"며 "한국에서는 아시아, 아프리카를 별나라로 취급하고 자신과 상관 없는 문제라고 받아들이는 듯 하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는 "'피플파워' 등으로 알려지며 아시아 내에서 민주주의 체제를 앞서 가진 것으로 평가받던 필리핀에서도 이런 일은 계속 벌어지고 있다"며 "한국 역시 더 나은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다른 국가의 비인권적, 반민주적인 상황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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