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은 절반 이상의 국민들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의 연내 체결에 대해 반대함에도 불구하고 한미FTA 타결을 강행했다. 노 대통령의 이 같은 '독단'은 우리사회에 '민주주의란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던진 셈이 됐다.
한미FTA 체결로 한나라당과 보수언론이 노 대통령의 리더십을 극찬하고 나선 반면, 진보진영은 이를 '통상 쿠테타'라고 규정하면서 강한 분노와 배신감을 표출하고 있다.
한미FTA를 체결하는 과정에서 노무현정권이 무너뜨린 민주주의를 어떻게 복원할 것인가? 한미FTA저지 범국민운동본부(범국본)을 포함한 반대 진영은 '국민투표 실시'를 당장의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국민투표를 통해 FTA에 대한 찬반 의견을 묻자는 것이다.
이에 대해 '박정희 시대'가 전공인 김보현 성공회대 민주자료관 연구교수는 "노무현 대통령은 국민투표를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못 하는 것"이라면서 "국민투표 하나에 목매는 일은 정치적으로 위험하다"고 주장했다.
김 교수는 "국민투표란 방식을 최종적으로 선택할 수 있지만 사태 반전의 길들은 다르게도 열려 있다"며 "지금 중요한 것은 노무현이 우려하는 바, 즉 제도 안팎을 넘나드는 정치와 민주주의의 다층적 활성화를, 국민투표 실시 여부와 상관없이 조성하고 확대시키는 일"이라고 말했다.
이 글은 지난 4일 게재된 우석훈 교수의 글에 대한 반론 성격의 글이기도 하다. <편집자>
지난 4일 우석훈 교수의 기고문이 <프레시안>에 실렸다. 제목이 무척 도발적이었다. "노 대통령, 박정희 수준은 돼야 하지 않는가?" 얼른 읽고 싶은 마음에 클릭했다. 평소 재기발랄한 문체로 부지런한 글쓰기를 하더니만 이번엔 대체 무슨 발언을 하려나 무척 궁금했다. 우석훈 교수의 논지는 현 시기 FTA정세 속에서 '국민투표'를 요구하고 관철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 논지를 개진하기 위해 '비교방법'을 택한 까닭에 '박정희시대'와 '민주주의'에 대한 인식의 오류를 보여줄 수밖에 없었다. 전문을 읽고 난 후 몇 가지 생각들이 떠올랐다. 중요한 사안들이니만큼 의미 있는 토론의 계기가 되길 바라며 글을 쓴다.
비교방법이 언제나 타당한 것은 아니다
'비교'는 역사와 현실에 대한 유용한 성찰 방법이다. 아, 저 사람들은 저랬는데 우리는 이랬구나…. 어, 저 사람들이나 우리나 비슷하네! 이러면서 지난날들과 현재를 반성하고 좀 더 바람직한 삶의 내용, 선택은 무엇일까 숙고할 수 있다. 동시기의 서로 다른 지역들을 비교할 수 있고 동일지역의 상이한 시기들을 비교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나 비교가 언제나 '좋은 것'은 아니다. 비교의 의의는 그 구체적 조건들 별로 상당히 달라진다. 비교 대상이 무엇/누구인지, 비교 대상이 놓여 있는/있던 정황에 대해 고려를 했는지, 비교 이면에 깔아둔 전제는 무엇인지 등에 따라 심한 경우는 차라리 비교를 하지 않느니만 못할 수조차 있다.
국민투표, 파시스트들의 애용물
우 교수는 '노무현'이란 이름이 상징하는 정치집단의 문제점을 좀 더 극적으로, 호소력 있게 지적하고자 '박정희'를 끌어들인 듯하다. 우 교수의 비교는 간단하다. 박정희가 유신체제를 만들면서 가부를 국민투표에 부쳤다는 사실과, 노무현이 한미FTA 협상안에 대해 국민투표를 통해 유권자들의 의사를 묻지 않았다는 사실을 대비시킨다. 박정희가 최소한 노무현보다 낫다는 것이고 노무현은 박정희만큼만이라도 행동하라는 것이다.
근대사회들에서 국민투표란 제도 하나만으로 현실의 정치체제, 그리고 민주주의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들은 별반 없다. 한 정치체제가 국민투표를 제도적으로 보장하고 또 실시한다고 해서 곧바로 그 체제를 민주적이라고 평가할 수는 없다. 국민투표를 실시하는 체제라면 당연히 그러지 않는 체제보다 더 민주적이라고 단정할 수도 없다. 민주주의든 권위주의든, 혹은 파시즘이든 정치체제는 서로 연관돼 있으면서 어느 하나로 환원되지 않는 '복수의 제도들, 문화들, 행위들'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특정한 제도나 법률의 이행 여부 하나로 해당 체제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
유신체제 시기 한국사회에서 정당정치는 제거됐다. 심지어 집권당 내부의 정치마저 소거됐다. 표현의 자유도 없었다. 노동조합을 비롯한 자율적 결사체들이 온전히 활동·존립할 수 없었다. '긴급조치'가 미친 영향은 다만 직접적 탄압대상들에게 국한되지 않았다. 사회구성원들 다수가 유신체제의 각종 금압장치들, 훈육기제들 하에서 공식적 정치의 주체가 되는 길은 '조국근대화' 기획에 참여한다는 의미의 그것 뿐이었다.
우 교수는 유신헌법에 대한 찬반을 물은 국민투표의 공식적 결과, '찬성 91.5%'를 중요시한다. 이 같은 논법은 공교롭게도 당시 박정희정권의 이데올로그들이 설파했던 '한국적 민주주의론'의 한 단면이다. 유신헌법은 계엄령이 선포된 상황에서 공고되고 홍보됐다. 국민투표가 행해진 날도 계엄령이 발효 중이었다. 그래서 이미 의회가 강제로 해산된 상태였다. 정치활동들이 금지됐다. 헌법의 기능은 정지됐고 그 권한은 박정희가 좌지우지하는 비상국무회의에 넘겨졌다. 신문들과 방송들은 사전검열을 받았으며 대학들이 폐쇄됐다. 사실상 일체의 공개적 토론과 반론, 재고 등이 허용되지 않았다. 또 당시 국민투표를 치르면서 중앙정보부, 공화당, 말단 공무원들 등등이 저지른 각종 부정행위들을 간과할 수 없다. 불과 한 해 전에 치러진 대통령선거 결과(김대중 후보 45.3% 득표)와 국회의원선거 결과(신민당 43.5% 득표)를 감안하더라도, '91.5%'라는 최종 공식집계에서 '사회적 합의'를 찾는 것은 타당해보이지 않는다.
우 교수는 "헌법개정 없이 유신체계의 출범이 불가능했을까? 법으로도 가능하고 하다못해 대통령 지시사항만으로도 73년 체계를 만들어 중화학공업 육성을 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정희는 굳이 헌법개정이란 절차를 밟았고 그리하여 "최소한의 민주주의적 절차"인 국민투표를 실시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평가는 당시 박정희정권이 했던 정세판단의 내용과 박정희 특유의 정치방식을 잘 모르기에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박정희정권이 시행한 국민투표의 민주적 가치를 인정해야 한다면, 바로 그 국민투표가 처음부터 의도했던 '민주적 가치들의 일소, 공공연한 독재체제의 구축'에 대해서는 어찌 봐야 하는지 당혹스럽다.
1970년대 초반 박정희정권은 최소한 주관적 위기상태에 빠져 있었다. 특히 권력의 핵이었던 '박정희-청와대비서실'은 자신들이 직면한 대내외 정세와 관련해 상당한 위기의식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위기돌파책으로 특단의 비상조치들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고 '유신헌법'과 '국민투표'를 선택한 것이다. 당시 박정희의 대통령 임기가 아직 2년도 더 남았는데 말이다. 또 곧이어 '중화학공업화선언'을 했다. '무엇인가 커다란 비전을 함께 제시하자!' 이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필자는 당시 청와대비서실 비서관이었던 한 사람과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그는 이렇게 진술했다. "아무튼 '더 이상 이대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박정희의 독특한 정치방식들 중 하나는 자신(들)의 과제를 '조국과 민족의 명운이 걸린 중대 사안'으로 기획하는 것이다. 그렇게 긴장감과 비장감을 고조시킨 후 공식적 선택을 사회에 맡겨버린다. 일종의 협박이다. '잘 생각해 봐. 여차하면 당신들의 잘못된 선택으로 국가 성원들 모두의 앞날이 끝장날 수 있어.' 1960년대 후반기 이후 실시된 국민투표들은 바로 이런 유형이었다.
지역을 불문하고 역사상 등장한 근대 독재체제들 가운데 국민투표를 입법화하고 또 실시한 사례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너무나 잘 알려진 히틀러, 피노체트, 이광요 등의 이름들이 따라 붙었던 체제들이 다 그랬다. 물론 단편적인 '교과서'를 펴보면 국민투표는 분명히 직접민주주의 제도들 중 하나로 꼽힌다. 맞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확인되는 바 국민투표제는 유수한 독재자들의 무기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국민투표제를 구비했고 시행하였다 해서 그들의 정치체제가 민주주의의 한 형태로 분류되지는 않았다.
1972년과 2007년, 콘텍스트가 다르다
파시스트 박정희마저 실시했던 국민투표를 '민주화 이후'의 대통령 노무현이 하지 못하는 연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우석훈 교수는 노무현이 '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그러나 나는 '하지 못한다'고 본다.
지금의 한국사회는 1970년대의 한국사회가 아니다. 당시는 박정희가 국민투표를 '편의적 환경' 안에서 실시함으로써, 일면 자신과 정권의 절차적 정당성을 보완하고 또 한편으로는 사회구성원들 사이에서 주권자라는 자의식을 유포할 수 있는 때였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지금은 박정희와 박정희정권이 향유하였던 '편의적 환경'이 허용되지 않는다. 만약 1972년 박정희정권이 향유한 우호적 조건들을 현 정권에게도 제공한다면, 노무현이 까짓 국민투표를 실시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더욱이 노무현의 퍼스낼리티, 다시 말해 줄기차게 과시해온 파퓰리스트 기질을 염두에 두면, 주어진 환경이 당시와 흡사하다 할 때 그는 벌써 누구보다 선창하여 한미FTA 협상안을 국민투표에 부쳤을 것이다.
현 시기 한국사회의 민주주의가 '충분하다'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1970년대와는 많이 달라진 것이 한국사회 정치의 엄연한 현실이다. 1972년이라면 대통령에게 '막말하는' 사람들, 정권이 추진하는 중대사에 이러니저러니 불만을 토로하는 사람들, 다 어찌 됐을까? 현재 우리사회에는 언론의 자유가 있다. 여전히 제약된 부분들이 실재하나 과거에 비하면 표현의 자유들이 많이 확장되었다. 각종 자율적 결사체들, 사회운동단체들, 정당들이 있다. 골치 아픈 <조·중·동>이 있지만 <한겨레>, <경향신문>, <한국일보>도 있다. <프레시안>, <레디앙>, <참세상>도 있다. KBS의 보도태도가 달라졌다. 공중파TV 3사 어느 곳들을 통해서도 '반대'의 주장들을 들을 수 있다. 사회구성원들은 여전히 보수적인 편이지만 결코 예전 같지만은 않다. 박정희의 든든한 버팀목이었던 '호시탐탐 남침을 노리는 북괴'란 변수도 이유야 어쨌든 그전 같지 않다. 문제투성이의 전모를 정확히 간파하지 못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과거 어느 때보다 '국가사' 추진에 대한 사람들의 우려와 비판이 높다. 여기에 정계개편, 대통령선거라는 일정이 코앞에 닥쳐 있다.
작금의 실정은 국민투표란 카드를 섣불리 꺼내들 계제가 아니다. 국민투표를 실시한다 치면 정국은 정말 어찌 돌아갈지 알 수 없다. 노무현정권은 도저히 관리·통제가 불가능한 사태에 직면할 수 있다. 토론과 논쟁은 더욱 활발해질 것이다. 정보의 교류 및 공유는 더욱 넓고 깊이 이루어질 공산이 크다. 그러면서 한미FTA의 현황이 한층 투명하게 폭로되고 논박 당할지 모른다. 어찌 보면 이러한 정황은 특정 제도로 환원될 수 없는 민주주의의 진면목에 한발 더 접근하는 것이다.
노무현은 자칫 거침없이 활성화될지 모를 민주주의의 가능성에 대해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국민투표를 실시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못 하였고 또 못 하고 있다. 우리가 정작 주목해야 할 측면은 국민투표 실시 자체라기보다 국민투표가 실시되었던/실시될 구체적 조건들이다.
'노무현'은 이미 '박정희'를 닮아 있다
FTA협상 타결 이후 한나라당과 조·중·동은 노무현을 칭찬한다. 이게 무슨 변고일까? 이른바 민주화세력이 집권한 이래 경제성장고가 계속 하강해 왔다고, 무엇보다 예전 그 때 그 시절 박정희 같은 '추진력'을 갖춘 지도자가 부재한 실정이야말로 사태의 결정적 원인이라고 떠들어 왔던 이들이 바로 그들 아니던가? 그런 이들이 노무현을 칭찬하고 나선 것은 노무현이 '박정희 따라 하기'를 한다는 데에 있다. (관련기사 : 노무현 대통령, '박정희 대통령' 되다)
'박정희 리더십'은 김정렴이나 오원철 등 당시 박정희의 측근들로 맹활약한 이들의 진술들에서 쉽게 확인된다. 박정희는 '조국근대화' 기획을 선도하고 지휘하는 '사령관', 자신들은 충직하게 사령관을 보좌하고 받드는 '작전 참모들'로 묘사된다. 생각해보라. 그 같은 발상의 연장선상에 서면 일반 '국민'은 무엇이 되나? 박정희 리더십의 핵심적 특징은 세세한 면모들을 추상할 때 일사분란한 '명령-복종 체계'였다. 당대에 실현된 '발전'과 이를 밑받침한 '생산성'은 현저하게 비대칭적인 사회-정치적 관계들이란 지형 위에서 작동한 바로 그 명령-복종 체계의 귀결이었다. 요컨대 아래로부터 제기되는 사회구성원들의 목소리들은 위로부터의 명령에 흡수되는 한에서만 인정받고 보호됐다.
이 같은 리더십의 전형은 오늘날 재현될 수 없다. 박정희를 극찬해마지 않는 이명박이나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고 한나라당정권이 수립되어도 불가능하다. 변화한 환경을 고려하면, 노무현의 독단(獨斷)은 그 변화한 환경 속에서 실현된 박정희 리더십의 변용(變容)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박정희 리더십의 요체는 '나를 따르라'였다.
박정희 리더십의 지향에 주목하자면, 그것은 공업부문 대자본가들의 육성을 사고 및 판단의 최우선 순위에 놓았다는 점이다. 특히 그 지향은 197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추진된 6개 업종 '중화학공업화' 기획과 이를 밑받침한 '국민투자기금'의 운용 및 각종 제도적 편의들의 제공, 이들이 초래한 막대한 사회-정치적 비용들에서 절정의 국면을 확인할 수 있다. 현실적으로 '가장 힘(경쟁력) 있는' 세력들을 계속 집중적으로 지원하고 후원하면서 여타 '힘이 없는' 사회구성원들의 이익들과 요구들은 전자의 집단들이 성장하는 주변에서, 그리고 그 뒤 곁에서 해소되고 중립화되거나 배제되도록 배치한 것이다. '경제발전'이란 '국가이익'의 주요 실상은 바로 그것이었다.
노무현 정권이 '경쟁력'을 운위하면서 현재 강행하려 드는 한미FTA의 문제점을 요약하자면 역시 마찬가지이다. 즉 현실적으로 '가장 힘 있는' 세력들의 부양을 중심으로 사고한다는 것이다. '개방이냐 아니냐'는 도식은 사태의 핵심을 놓친, 혹은 의식적으로 누락시킨 이데올로기이다.
그러니 한나라당과 조·중·동이 칭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정확히 말해 한미FTA는 제2의 을사늑약이 아니다. 그로 인해 국민경제 전반이 파탄날 것도 아니다. 살아남을 사람들은 있다. 살아남을 뿐만 아니라 더욱 풍요와 자유를 구가할 사람들이 있다.
우석훈 교수는 말한다. "우리의 대통령이 최소한 박정희 수준의 민주주의 호민관이 되기를 바란다." 내가 아는 한 "최소한 박정희 수준"이 되라면…일단 계엄령 선포!? 우 교수는 또 이렇게 말한다. "지금 우리의 대통령은 제헌헌법의 건국정신과 87년 체계의 정신을 모두 부정하고 '구국의 결단'에 의해서 시스템을 운용하는 방식으로, 즉 최소한 73년 이전의 역사로 돌아가는 일을 하고 있다." 해방 이후 한국역사 속에서 이른바 헌법이념을 부인하고 "'구국의 결단'에 의해서 시스템을 운용하는 방식"을 온몸으로 실천한 사람을 꼽는다면 박정희를 빼놓을 수 있을까? 그리고 "87년 체계의 정신"이야말로 최소한 유신체제 이전의 헌정체제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발상이었다. 1970년대와 80년대 민주화운동 내의 지도그룹이 즐겨 사용한 '민주회복'이란 말이 괜히 그리 쓰인 것은 아니다. 우석훈 교수는 노무현의 방식을 "헌법의 정신에 어긋나는, 다 결정 해놓고 설명하는 것"이라고 표현한다. 그게 곧 박정희의 방식이었다.
하나의 제도에 집착해야 할 정세가 아니다
근대 민주주의 이념의 요체는 '자기 결정성(self-determination)'이다. 그리고 이 이념의 현실화는 다양한 경로들을 통해 가능하다. 마찬가지로 그 이념의 허구화도 다양한 경로들을 통해 가능하다.
국민투표는 우리의 선택지들 중 하나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그 전부는 아니다. 국민투표 하나에 목매는 일은 정치적으로 위험하다. 더욱이 민주주의의 지평은 국민투표란 제도로 환원될 수 없다. 국민투표란 방식을 최종적으로 선택할 수 있지만 사태 반전의 길들은 다르게도 열려 있다. 지금 중요한 것은 노무현이 우려하는 바를, 즉 국민투표 자체라기보다 그것의 실시를 전후로 동반될지 모를 정황(제도 안팎을 넘나드는 정치와 민주주의의 다층적 활성화)을, 국민투표 실시 여부와 상관없이 조성하고 확대시키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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