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노대통령, 그 입으로 진보를 말하지 말라"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노대통령, 그 입으로 진보를 말하지 말라"

[한미FTA 뜯어보기 441 : 기고]"진정 이념에 눈 먼 자는 누구인가"

한미FTA가 양국 정부에 의해 체결됐다. 물론 아직 비준된 것은 아니다. 체결 이후에도 전문가들 사이에 손익을 둘러싼 논의와 상호 비판이 제기되고 있으며 이를 반영해 각 사회정치세력으로부터도 상반된 평가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런데 이 와중에 노무현 대통령이 방한 중인 오스트리아 대통령과 가진 합동 기자회견과 청와대에서 열린 '한미FTA와 한국경제 워크숍' 등에서 행한 발언들이 눈에 도드라진다. 노 대통령은 공동기자회견에서 "한미FTA가 체결된 만큼 그 동안 반대했던 많은 사람들이 이에 협력하거나 반대를 중단할 것"이라면서 "이제 '이념적 반대자들'만이 그 대열에 남을 것"이라 전망했다. 그리고 워크숍에서는 "한미FTA의 사실과 논리가 왜곡되지 않도록 철저히 방어해나가라"고 지시했다.

'FTA대연정'은 이미 작동되고 있었다

아마도 노 대통령의 이런 발언들은 한미FTA 반대운동을 '반대를 위한 반대운동'으로 낙인 찍거나, 과거 냉전시대의 그 어떤 음습한 이미지로 채색된 특정이념을 지닌 세력들이 자신의 정치적 이해를 위해 이를 도구화하고 있음을 부각시키는 한편, 자신을 미래지향적 실용주의자로, 아니 더 나아가 '시대의 징표'를 읽는 예지자로 보아줄 것을 기대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진정 그런가. 모두가 알다시피 이념이라고 하는 것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특정 사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이 맺고 있는 사회관계들의 모순, 긴장과 갈등을 반영하는 것이고 그렇기에 그 이념은 항상 복수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한미 FTA협정을 둘러싼 찬성과 반대의 논란도 결코 이로부터 자유스러울 수 없다.
▲ 한미FTA체결 이후 대국민담화를 발표하고 있는 노 대통령. 한미FTA를 통해 노 대통령은 '신자유주의 동맹'의 정치적 대표자로서 지배이념을 대변하고 있다는 것이확인됐다 ⓒNEWSIS

그 이념들 가운데 노 대통령은 국내외 거대 글로벌자본, 보수사회정치세력, 신자유주의 국가관료, 그 이데올로그들로 구성된 힘 '신자유주의 동맹'의 정치적 대표자로서 글로벌 신자유주의라는 근대 자본주의 역사상 가장 반동적인 지배이념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사회주의 블록의 붕괴 이후 대항헤게모니의 부재 속에서 그 탐욕의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확장되고 있다.

따라서 무엇으로 포장되건 노 대통령의 시야에는 무한경쟁의 시장주의, 결국 그 게임의 장에서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존재로 군림하는 글로벌 자본만이 가치판단의 유일 척도로 포착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발상 속에는 무소불위의 시장과 자본이 강제하는 '삶의 무게'에 눌린 대중들의 존재, 지난 일 년 여 동안 삶의 현장과 거리에서 그들이 외친 그 어떤 의미 있는 아우성도 들어설 여지가 없다.

사정이 이러해서 노 대통령의 일거수일투족을 꼬투리 잡던 수구사회정치세력들과 언론들이 지지, 환호하는 것은 결코 '의아한 것'이 아니다. 이를 새삼스럽게 부각시키는 다수 언론들의 부산한 행태는 그들과 노무현 정권이 여전히 상이한 이념의 정치세력이라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기에, 그 인식이나 의도 여부를 떠나 이미 사산된 노무현 정권의 '개혁성'을 복권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FTA 반대투쟁으로 지친 양식 있는 대중을 다시 우롱하는 병 주고 약 주는 행태다.

지난 해 그가 한나라당에 '대연정'을 제안한 것은 실제 그들 사이에 작동하고 있는 '신자유주의 보수연합의 정치'를 법, 제도적으로 확인하기 위한 것에 다름 아니라고 지적한 바 있었지만, 그 뒤에도 이런 밀월정치는 '노사관계 로드맵'의 통과에서 보이듯 지속되어 왔다. 지금 FTA정치는 이를 재확인시켜주는 것이다. 사실이 이렇기에 그가 아무리 'FTA 대연정'을 부정한다 해도 이 객관적 현실을 없앨 수는 없는 것이다.

노 대통령에게 대중의 고통은 '도박판의 판돈'?

그렇다면 '긴 흐름의 역사'를 강조하며 한미 FTA를 정당화했던 노 대통령은 그 속에서 무엇을 발견하였기에 이런 '확신에 찬 선지자적 혜안'을 지니게 되었을까. 무엇보다 지금 신자유주의자로 전향한 그에게 대중의 고통은 모양만 다를 뿐 역사에서 늘 반복되어 온, 아주 일상적이고 익숙한 것들로 인식되고 있음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그 고통은 '한강의 기적'을 내세웠던 개발독재의 시기에는 청계천 의류봉제공장의 시다공들로, 노 대통령 자신 또한 민주화라는 대의에 공감하며 한쪽 끝에서 신군부 파시스트들과 싸운 적이 있었던 '88올림픽, 선진조국 창조'의 80년대에는 상계동의 빈민들로, 그리고 지금 그 자신이 수장으로 있는 신자유주의 지구화시대 '참여정부'의 시기에는 비정규직 노동자와 '노동자 이하의 존재'로 취급받고 있는 이주노동자들로 상징되며 끊임없이 재생산되어 왔다. 즉 역사 속에서 대중의 고통은 그 형태를 달리하며 존재해 왔던 것이다.

그런데 지난 신군부 파시스트시대에 '인권변호사'로서 그 대중의 고통에 잠시 주목하던 노 대통령의 시야는 87년 이후 정치적 자유화의 진전, 사회주의 붕괴와 맞물리며 확장된 글로벌 신자유주의에 심취되면서 그 동안 보지 못했던 것을 발견하게 됐다. 무한경쟁의 생산력주의가 유일 평가준거가 된 바로 이 시대에 그가 지난 역사로부터 새삼 끄집어 낸 사실은 그런 대중의 일상적 고통에도 불구하고 이 사회가 자랑스러운 '성공의 신화'를 계속 써내려 왔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 신화는 억압과 고통, 착취당한 대중의 입장에서는 결코 신화일 수 없지만, 그들의 이런 실상은 문제시되지 않거나, 그 후미에 에피소드와 같은 회고조의 장식품으로 기술돼 있을 뿐이다.

이와 달리 미래를 내다보는 지도자 박정희의 결단 이후 수출중심의 성장지상주의 전략 속에서 이루어진 100억, 1000억을 넘어선 수출, 1만 달러, 2만 달러를 넘어 선 국민소득 등의 업적을 기록한 자랑스러운 성장의 목록들은 전가의 보도가 되어 거기에 전시돼 있다. 그리고 그는 그 목록의 행간에서 자유주의 정치세력의 수장들이었던 그의 전임자들이 이미 수용한 내용, 즉 개발독재시대 박정희와 그 이데올로그들이 설파했고 지금 박정희를 신봉하는 정치세력, 이데올로그들의 신조인, '대중들의 억압과 고통이 성장과 발전을 보증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 없이는 그 과실을 딸 수 없다'는 내용을 새삼 발견, 신봉하게 됐다.

이 지점에 이르자 그에게 성장, 발전의 성공과 실패 여부를 떠나 역사 속에서 나타나는 대중의 고통 그 자체는 어찌할 수 없는 불가피한 것으로 다가왔다. 즉 그에게 대중이 겪는 고통은 항상적인 존재라는 점에서 더 이상 넘어야 할 고통이 아니라 받아들여야 할 숙명인 것이다. 어차피 역사가 이런 것이라면, 그 고통은 미래의 번영을 위해 불가피하게 치러야 할 역사적 비용으로 생각하면 그만인 것이다. 거기에서 왜 그것이 숙명이어야 하는가라는 문제제기는 동어반복에 불과할 뿐이다. 이렇게 하여 과거 국가주도의 성장지상주의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이제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통해 일확천금을 노리는 글로벌 신자유주의 동맹자들에게도 대중의 고통은 도박판의 판돈쯤으로 인식되기에 이른 것이다.

바로 이것이 한미FTA 체결 이후 그가 더욱 자신 있게 역설하는 발언들을 관통하는 핵심발상이다. 사정이 이렇기에 그의 시야에 한미FTA 체결 과정에서, 그리고 비준 이후 대중이 겪게 될 고통은 의미 있는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미래에 나타날 불확실한 병리현상을 침소봉대하는 것으로, 설혹 나타난다 하더라도 사후처방으로 충분히 해소될 수 있는 그런 일시적인 현상일 뿐인 것이다. 이 같은 그의 역사인식은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한데, 바로 이러한 인식 속에 대중들의 지지를 받고 극적으로 집권한 그가, 그리하여 침이 마를 정도로 대중의 역동성을 찬탄해 왔던 그가, 왜 그 대중들과 결별하게 될 수밖에 없는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역사적 비밀이 간직돼 있기 때문이다.

FTA전도사가 된 노 대통령의 '박정희 패러디'
▲ 박정희 정권으로부터 공공연한 역사의 비밀을 배운 노 대통령은 이것을 패러디해 한미FTA체결 막바지에 개방이 미래의 성공을 반드시 보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문을 걸어 잠근 나라치고 성공한 예가 없다고 설파했다.ⓒ연합뉴스

이렇게 하여 신자유주의의 화신이 된 노 대통령에게, 따라서 민주주의를 시장법칙의 관철과 동일시하게 된 그에게 대중의 문제제기는 일의 효율성을 떨어뜨리는, 단지 떡 하나 더 얻기 위해 우는 거추장스러운 어린아이의 몽니일 뿐이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한미 FTA를 반대하는 사회정치세력들, 지식인들은 그 어떤 이념에 근거해 그 내용을 왜곡하고 대중을 선동하는 정략가들, 야심가들일 뿐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그는 대중을 진정한 참여의 주체로서가 아니라 그때그때 정치적 동원대상으로 호명해 왔던, 그리고 그들과 함께 싸웠던 진보적인 사회정치세력을 시대착오적 이념을 지닌 세력으로 단죄해 왔던 그의 전임자들의 선지자적인 깊은 고뇌를 자기 것으로 삼게 됐다. 또 왜 전임자들이 민주주의를 기술적인 것으로 전락시킬 수밖에 없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하여 브레튼우즈체제 시대의 성장지상주의적 개발 국가의 모습은 신자유주의시대를 관통하며 신자유주의 경쟁국가로 새로이 탄생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처럼 '긴 흐름의 역사'로부터, 특히 박정희 정권으로부터 공공연한 역사의 비밀을 배운 그는 이것을 패러디하여 한미FTA 체결 막바지에 '개방이 미래의 성공을 반드시 보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문을 걸어 잠근 나라치고 성공한 예가 없다'고 설파했다. 수구언론들은 그의 이런 발언에 환호했고 역사의 도움을 받아 거추장스러운 대중의 굴레에서 벗어난 그는 이에 더욱 자극되어 중동 순방 중 한미FTA 체결을 넘어서 FTA 자체를 전파하는 전도사로 활약했다.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의 이러한 패러디는 그가 한미FTA 내용과 논리에 대한 왜곡을 우려하는 것이 무색하리만치 사실(fact)의 측면에서 오히려 한미FTA 반대운동을 왜곡하는 것이었다. 그 하나는 한미 FTA 반대론자들 가운데 거의 대다수는 이른바 개방, 지구화 자체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무장한 세계화와 맞물려 진행되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반대할 뿐이다. 따라서 노무현대통령이 '개방 대(對) 쇄국'의 이분법을 들이대며 반대론을 비판하는 것은 그 스스로가 관변 이데올로그들이 문제를 다루는 가장 전형적인 방법을 재현하는 것일 뿐이다. 아니 최고의 관변 이데올로그다운 '비판 아닌 비난'인 것이다.

다른 하나는 그 찬성과 반대의 입장을 불문하고 전문가들이 동의하고 있는 것처럼, 한국의 시장개방 폭과 깊이는 선진자본주의 국가 그 어느 나라들에도 뒤지지 않는 정도라는 것이다. 이런 왜곡은 이른바 국정의 최고책임자로서 학습시간이 부족한 그의 의도하지 않은 실수로 치부해 둘 수도 있다.

하지만 FTA 체결 이후 더욱 우려되는 것은 민주화운동의 적자임을 자처하고, 틈만 나면 민주주의의 대강이 완성됐다고 강조하면서도 그의 이런저런 발언 속에서 정치적 자유주의자의 모습은 볼 수 있을지언정 민주주의자다운 모습은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한미FTA 성공 여부와 무관하게 그것이 가져올 현실적 고통과 부담을 고스란히 짊어져야 하는 대중의 진정성 있는 문제제기에 대해 숙고하겠다는 일말의 의미 있는 몸짓도 보이지 않고 있다. 대중의 생존, 삶 그 자체를 담보로 글로벌 신자유주의라는 극단의 경쟁게임을 벌이면서도 정작 그들의 문제제기를 배제하는 '대범함'을 계속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그 혹독한 파시스트 시대 그의 전임자들은 비록 그것이 입바른 소리였다고 할지라도 국민 대중들에게 미래의 번영을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자'는 류(類)의 현재의 고통을 참아달라고 솔직하게 호소한 측면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너무 자신만만하여 미래의 장밋빛만을 역설할 뿐 예상 가능한 고통에 대한 대중의 호소는 사회정치적으로 공론화, 소통시키는 것 자체를 봉쇄하겠다는 의지만을 천명하고 있다. 청와대 워크숍에서 한미FTA의 내용과 논리가 왜곡되지 않도록 철저히 방지하라는 그의 지시는 이런 발상과 행태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후발의 선무당이 더 무서운 것이다.

대중의 삶과 무관한 이념적 자폐증에 걸린 건 누구인가

이것이 지금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화신, 한미FTA를 넘어 FTA 그 자체의 세계적 전도사가 된 노 대통령이, 노무현 정권이 보이고 있는 객관적인 모습이다. 그런데도 그는 마치 자신이 그 어떤 이념으로부터도 자유로운 존재인 양 발언하고 행동한다.

신자유주의 경쟁국가의 수장으로 최소한의 '국가의 중립성'마저 외면하고 '시장독재, 자본독재'를 구축하는 데 일조하는 최전방에 서 있으면서도 마치 자신이 그런 이념의 실현과는 무관한 제3자인 것처럼 행동하면서, '국가와 민족의 번영'을 위해 결단하는 선지자의 길을 걷고 있는 것처럼 당당히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더욱 고통스러운 것은 그가 이런 자기 확신에 그치지 않고 한미FTA 반대운동을 대중의 삶과는 무관한 그 어떤 이념적 자폐증에 걸린 소수에 의해 전개되는 운동인 양 딱지 붙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한미FTA 반대운동이 노 대통령이 말한 바대로 어떤 이념을 지닌 소수의 세력들에 의해 주도되는 운동으로 전락할 가능성을 선험적으로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분명히 기억해야 할, 노 대통령의 생각과 다른 근본적 차별성이 존재하는데, 그 하나는 반대운동을 추동하는 이념은 단수가 아니라 복수라는 것이다. 그 기저에는 사회민주주의, 근본생태주의, 사회생태주의, 생태사회주의, 급진적 페미니즘, 다양한 공동체주의를 포괄하는 코뮤니즘, 자율주의, 그들을 관통하는 급진민주주의 등 이 사회의 모순과 갈등을 해소, 극복하고자 하는 혹은 이질적이고 혹은 동질적인 모든 다양한 사유들, 발상들이 놓여 있다.

안타깝게도 글로벌 신자유주의를 가치판단의 유일한 준거로 생각하고 그 하위에 모든 발상을 규범적으로 위계화 시키는 것에 익숙한 노 대통령의 기대와 달리 어느 하나의 독단적 이념이 이 운동을 방향 짓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심지어 거기에는 신자유주의를 문제시하는 합리적인 정치적 자유주의, 다원주의마저 가세하고 있다. 이는 노무현 정권이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를 단적으로 반증해주는 증거다. 사정이 이러하기에 그들은 노 대통령처럼 유일독단의 글로벌 신자유주의 이념에 포획돼 있으면서도 마치 그렇지 않은 양 행동하지 않으며, 다른 행위주체들이 지닌 이념을 자기 것과 비교하여 무언가 결핍된, 시대에 뒤처진 것으로 비하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

진정 더욱 중요한 다른 하나의 차이는 그들의 눈은 노 대통령처럼 하나의 독단적 가치척도에 귀착돼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이념과 방법을 통해 포착하고 있는 바, 다양한 영역에 산재돼 있는 억압적이고 비대칭적인 사회관계들 그 자체에 정좌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그 어떤 이념을 선호하고 내세우든 그 이념을 절대화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기존의 사회관계들 속에서 배제, 억압, 착취당하는 대중의 고통이기 때문이다.

성장주의, 생산력주의의 화신인 노 대통령이 한미FTA 반대운동에 다양한 이념과 정치적 태도, 정책을 지닌 사회정치세력들, 개인들이 참여하고 있는 현실, 그것이 대중을 호도하는 소수의 이념분자들에 의해 주도될 수 없는 이유를 알 수 없는 까닭도 그가 더 이상 이 점을 보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한미 FTA가 체결된 이후 그가 투쟁하고자 한 수구 사회정치세력들이 그를 열렬히 환호하는 반면 그와 정치적 이념을 함께 하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그의 양식을 믿었던 많은 사람들을 포함한 진보, 개혁주의자들이 그의 곁으로부터 완전히 이탈하는 것을 '의외로 현상'으로 보는 얕은 인식 또한 바로 이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그는 알지 못한다.

따라서 단언하건대, 한미FTA 체결 이후 노무현정권이 내놓고 있는 대중위무적 대책들 또한 그것의 효과 여부 이전에 진정성이 의문시되는 이유는 노 대통령이 이런 사회관계들을 외면하는 한, 그리하여 그 고통을 어찌 할 수 없는 불가피한 역사의 한 측면으로 보는 한, 그 대책들이 이 사회를 '더불어 사는 사회'로 진전시키는 데 단 한 치의 기여도 하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다. 인간의 삶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에 근거하지 않는 대책들은 결국 '악어의 눈물'로 기능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노 대통령, 더 이상 민주주의를 희화화 하지 말라

이제 다소 긴 글을 마무리 하자. 노무현정권이, 아니 노 대통령이 어떤 이념, 정치적 태도, 정책을 지니건 그것 자체를 부정할 필요도, 또 부정할 수도 없다. 이것은 이 땅에 존재하는 진보, 민주주의자들이 지녀야 할, 또 소중히 지켜야 할 최소한의 덕목이다.

하지만 여전히 진보와 민주주의라는 담론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싶어 하는 노 대통령에게 마지막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낮은 수준의 논리와 발상으로 더 이상 진보와 민주주의를 희화화 하지 말아 달라는 것이다. 억압 받고 고통 받는 사람들의 편에 서 있다는 의미에서의 진보, 민주주의는 역사가 종말을 고하지 않는 한, 그런 비대칭적, 억압적 관계들이 지속되는 한, 그 수에 관계없이 세대를 이어 계속 재구성될 것이고 그런 맥락에서 그들은 '소수자'로 남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진보와 민주주의를 아무리 가벼운 언어로 말하려 해도 결코 가볍게 다가오지 않는 핵심적인 이유다. 과거 '인권변호사'로서의 그를 기억하는 것도, 지난 대선에서 그가 흘렸던 '눈물'에 대중이 호응했던 것도 그가 이 쉽지 않은 길을 걸었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이제 노무현 정권, 그 수장으로서의 노 대통령은 기존의 지배적 사회관계, 권력관계들을 옹호하고 재생산하고자 하는 길을 걷고 있기에 과거와 달리 진보, 민주주의라는 대의의 공간에서 단 한 치의 공간도 차지할 수 없는 존재가 됐다. 이것은 한미FTA 체결에 대해 지난 일 년 여 동안 문제제기하고 저항해 왔던 고통 받는 대중의 단 한마디 외침이 그의 발상 어디에도 의미 있게 자리 잡지 못한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의미에서 노 대통령은 더 이상 진보의 의미 있는 경쟁상대가 아니며, 경쟁자가 될 수도 없다. 그럼에도 이를 부인하면서 계속 진보와 민주주의를, 그것을 위한 대중의 문제제기와 항의를 왜곡, 희화화 한다면 과거 그 대의의 한 편에서 숨 쉬었던 그 자신의 객관적 흔적조차 부정하는 것이 될 뿐이다. 물론 그에게 그 흔적이 더 이상 의미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면 할 수 없지만 말이다.

이제 '긴 호흡의 역사'에 진정으로 머리 숙이는 진보, 민주주의자들에게 노무현 정권, 그 상징으로서의 노 대통령은 현존하는 비대칭적, 억압적 사회관계들 및 그에 내재한 다양한 형태의 위계적 권력관계들, 나아가 그것들을 매개로 더욱 단절, 파편화되고 있는 인간과 자연의 소통관계를 숙고, 성찰하는 반면교사로서의 존재 의미만을 지닐 뿐이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