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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찾을 '우리의 고향'에 바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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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찾을 '우리의 고향'에 바칩니다"

[화제의 책] <거기 마을 하나 있었다>

4월을 맞으며 농사 대신 이사 준비를 해야했던 농부들이 있었다. 이들이 지난 4년간 자신들의 마을과 논을 지키기 위해 싸우며 외치던 "올해에도 농사짓자"라는 구호는 이제 외칠 수 없게 돼 버렸다.

미군기지 확장이전 예정부지인 경기도 평택 대추리 주민 40여 가구는 지난달 29일부터 짐을 꾸리고 한두가구씩 마을을 떠나고 있다. 지난 2월 정부와의 이주 합의에 따라 3월 말까지 마을을 비워야 했기 때문이다.

마을을 뒤로 하고, 논밭을 뒤로 하고 떠나는 주민들의 심정을 누구보다도 절절히 공감했던 이들이 있다. 주민들과 함께 팔을 걷어부치고 구호를 외치며, 함께 마을을 지키며, 또 노래를 부르며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그 무엇'을 통해 주민들을 도우려 했던 수천, 수만의 '평택 지킴이'들.

그 중에는 주민들의 투쟁을 함께 했던 '글쟁이'들이 있다. 대추리 담벼락마다 그려져있던 '벽시', 여러 매체에 실렸던 기고 등은 그간 문인들이 힘을 보태기 위해 썼던 투쟁의 산물이다. 그렇게 49명의 문인들이 쓴 80여편의 작품들이 모여 '대추리, 도두리 헌정 반전평화 시산문집' <거기 마을 하나 있었다>(사람생각 펴냄)가 출간됐다.

민족문학작가회의 자유실천위원회와 '들사람들'이 공동으로 엮은 이 책에는 지난해 5월 행정대집행 이후 <프레시안>에 민족문화작가회의 회원들이 연재했던 '황새울에 평화를! 릴레이 기고'도 포함돼 있다.

"우리의 활동이 더욱 강력한 '무기'가 되길 바라며…"
▲ ⓒ사람생각

지난해 5월 류외향 시인이 한 인터넷신문에 보낸 글에는 이처럼 평택을 배경으로 작품활동을 하게 된 예술인들의 활동 역사가 잘 드러나있다.

"2003년부터 도두리가 고향인 가수 정태춘을 중심으로 모인 문화예술인들은 많은 작품을 이 들녘에 남겼고, 우리의 활동이 더욱 강력한 '무기'가 되기를 바라는 뜻에서 올해(2006년) 2월부터 4월까지 12주 동안 집중적으로 '대추리 현장예술제-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열었다.

우리는 우리의 행동을 이렇게 부른다. '평택 미군기지 확장 반대와 대추리 도두2리 주민 주거권 옹호를 위한 문예인 공동행동-들이 운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를 '들사람들'이라고 부른다.

20여 명의 기획연출단을 비롯한 900여 명의 문화예술인들. 가까이는 평택에서, 서울에서, 멀리는 강원도에서, 제주에서 마음으로 몸으로 작품으로 이 외진 시골 마을로 모여들었다. 화가들은 벽화를, 만화가들은 벽만화를 그렸고, 사진작가는 주민들의 일상을 담아 사진관을 열었고 (…) 가수들은 노래를 했으니 (…)" - 류외향, <노래 하나를 품으면 탱크가 될까> 중

그렇게 지난 4년간 문인들을 포함해 화가, 가수 등 수많은 예술인들이 평택을 찾아와 같이 촛불을 들고 비닐하우스에서 콘서트를 열었고, 서울 거리에 나와 예술제를 열었다. 다른 여느 농촌마을과 다름없었던 대추리와 도두리는 어느새 세계적으로도 보기 드문 '문화예술마을'이 됐다.

저 멀리에서도 보이는 '문무인상'과 '파랑새'는 전경버스, 경찰들과 더불어 '이곳이 대추리구나'라고 알 수 있게 해주는 상징이 됐다. 담벼락마다 그려진 '벽시'와 저녁마다 펼쳐졌던 문화제는 한번이라도 대추리를 찾았던 이들이라면 반드시 또 오고 싶게 만드는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 대추리 마을어귀에 있던 문무인상(좌). 저녁마다 촛불문화제가 열렸던 마을창고에 그려진 '들도깨비'(우) ⓒ들사람들

'간절한 마음으로 읊어낸 현장문학의 산 증거'

사람들은 신기하다고 말한다. 어떻게 그 조그만 마을을 배경으로 이 많은 작품들이 탄생했을까? 잠시 책을 훑어보자.

서수찬 시인에게 먹물을 받아들고도 나는 한동안 먹먹했다. 저 들이 전해오는 말들을 어떻게 받아 적어야 하나. (…) 부끄럽다. 선배님들의 빼어난 벽시에 비하면 얼마나 보잘 것 없는가. 그러나 한 자 한 자 통곡하듯 썼다. 기운을 불어넣으며 온힘으로 썼다. - 함순례, <정부여, 우리는 한편이다!> 중


황새울 들녘 농수로에 물 대신 콘크리트가 채워지던 날, 논바닥에 주저앉아 통곡하는 농민들을 보았다. 광목 끈에 목이 감긴 채 질질 끌려가는 반백의 가수를 보았다. 가난한 전업시인의 깨진 안경을 보았다. 고통을 주체하지 못해 신음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시를 써야겠구나. 쓸 수밖에 없겠구나.' - 손세실리아, <나는 비겁했다> 중

하지만 나는 보았다. 그들이 아무리 덧칠해놓아도 대추리의 진실을 보고 말았다. 대추리, 도두리 주민들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에 벽시를 쓰면서 그들의 진실을 보았다. 땅은 절대로 사람을 속이지 않는다는 것을…나 같은 사람은 이후에도 끊임없이 생겨날 것이다. - 서수찬,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운 이름, 대추리> 중
▲ 지난해 5월 행정대집행 때 경찰의 강제 진압에 맞아 쓰러져 실려가고 있는 한 '평택 지킴이' ⓒ노순택

대추리와 도두리가 사람들에게 지울 수 없는 기억으로 남게 됐던 건 아름다운 풍경때문만은 아니었다. 지난해 5월 행정대집행과 9월 빈집철거 현장에 있던 이들에게 대추리는 5월의 광주를 떠올리게 하는 충격적인 국가폭력이 자행됐던 공간이었다. '평화를 지켜달라'는 단 한가지를 외쳤을 뿐이었던 이들을 겨냥했던 폭력은 충격을 넘어 공포로 다가왔다. 그 뒤로도 마을 한가운데 그대로 남아있는 대추분교의 잔재, 썩은 벼와 철조망이 함께 엉켜진 들녘 또한 공포스럽긴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대추리와 도두리를 방문하고 또 현장을 목격했던 문인들은 시를 쓰고 글을 썼다. 누군가의 지시도 아니고 누군가의 요청도 아니었다. 마치 일제 때 쓰여진 저항시들처럼, 군사독재시절 쓰여졌던 작품들처럼 스스로의 감정에서 자연스럽게 나온 글들이었다. 주민들에 대한 애정과 국가에 대한 분노, 폭력에 대한 울분 때문에 쓰지 않고는 배길 수 없던 글들이었다. 이처럼 책에 실린 80여편의 작품들은 엮은이의 표현처럼 '간절한 마음으로 읊어낸 현장문학의 산 증거'가 됐다.

"우리의 고향을 다시 찾는 그날까지, 잊지 않기 위해"

지난달 24일, 정부와의 합의에서 정한 이주 완료 시기를 1주일 남짓 남겨두고 대추리 마을창고에서는 마지막 촛불문화제가 열렸다. 가수 정태춘 씨를 비롯해 문예활동을 이끌어왔던 '들사람들'은 이날 무대에 올라 "3년간 현장에서 잘 놀았다, 행복했다, 감사하다"는 인사를 남겼다. 마음 아파하는 주민들 앞에서 어떤 얘기를 해야 할지 오랜시간 고심한 모습이었다.

한편 이날 발언에 나선 신종원 이장은 "우리는 미군이 조만간 한국에서 철수할 것을 믿는다"며 "마을을 다시 찾는 그날, 여러분들도 함께 해달라"고 거듭 부탁했다. 이날 문화제를 함께 했던 수백명의 '지킴이'들 역시 "반드시 그러겠다"며 큰소리로 답했다. 그들의 눈빛과 함성은 확신에 차 있었다.

'지킴이'들은 대추리 투쟁을 잊지 않을 거라 말한다. 평화를 위한 행동도 계속 할 것이라고 말한다. 문화예술인들을 비롯한 그들은 또 어떤 활동 속에 대추리를 담아낼까. 포클레인보다 무서운 망각의 속도에 지지 않기 위해 그들은 지금까지보다 더 열심히 '싸워야' 할지도 모른다.

이 책은 "이제 우리 모두의 고향이 된 대추리와 도두리를 어떻게 잊겠냐고, 잊지 않고 반드시 다시 찾겠다"고 말하는 '지킴이'들의 첫번째 웅변인 듯 하다.

(주문전화: 031-211-5855. 이메일:hrfunf@hrfund.or.kr)
▲ 미군기지가 들어설 평택 황새울 들녘 ⓒ프레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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