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4일, 935일째 주민 촛불문화제 무대에 선 경기도 평택 대추리 신종원 이장이 애써 밝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날은 지난 4년간 미군기지 확장 이전을 반대하며 싸워 왔던 대추리 주민들이 지난 935일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열었던 촛불문화제를 마무리 하는 날이었다. 자신들의 마을과 들판을 지키겠다며 오랜 시간 싸우다 지친 고령의 주민들은 지난 2월 정부와 합의했고, 이로 인해 주민들은 오는 31일까지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마을을 떠나야 한다.
문화제가 열린 대추리 마을창고에는 60여 명 남짓한 주민들 외에도 5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자리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인권운동가, 평화운동가, 문화예술인, 대학생, 평택 시민운동가 등 각기 다른 지역과 영역에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는 이들이 어우러진 풍경은 이색적이기까지 했다.
문화제를 시작하기 앞서 주민들 및 이들과 함께 살아 온 '평택 지킴이'들이 준비한 수백 개의 도시락과 한솥 가득했던 어묵국은 금새 동이 났다. "이렇게 북적이는 것도 오랫만이네." 오랜 시간 마을에 들어와 살던 한 지킴이가 말했다.
"여러분들의 투쟁은 이미 불씨가 됐습니다"
"우리 땅을 지키기 위한 팽성 주민들의 935일째 촛불행사를 여러분의 힘찬 함성으로 시작하겠습니다."
사회를 맡은 주민대책위원회 김택균 사무국장이 낯익은 혹은 낯선 얼굴들을 하나둘씩 무대 위로 불러냈다.
성공회대 대학생 모임, 대안학교 학생들, 그간 주민들과 함께 살아 온 지킴이들과 문정현 신부의 노래가 이어졌다. 여느날과 다를 바 없는 노랫소리와 박수소리가 참석자들을 흥겹게 했다.
민주노동당 권영길 국회의원, 전국농민회총연맹 문경식 의장 등 대추리를 찾은 몇몇 인사들도 나와 소회를 밝혔다. 서울 광화문 열린시민공원에서 13일째 한미 FTA를 반대하며 단식농성 중인 통일연대 한상렬 대표는 떨리는 손으로 마이크를 잡았다.
"이 자리에 오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마음으로 왔습니다. 사과 드리고 싶어서 온 것입니다. 우리 주민들의 몸부림, 문 신부님의 눈물, 모든 지킴이들의 노력… 더 최선을 다하지 못한 제 자신, 그리고 우리 운동의 현실을 사과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축하드리고 싶습니다. 주민 여러분들은 그야말로 정성을 다하고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의 생애 가운데 최고의 삶을 사셨습니다. 문 신부님과 지킴이들도 온 몸을 바쳐서 투쟁하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여러분들의 투쟁은 이미 불씨가 됐습니다. 이 땅의 참다운 삶의 투쟁의 불씨가 돼서 어디서나 타오르게 될 것입니다. 지금 광화문에서 타오르고 있는 FTA를 반대하는 촛불도 바로 여러분들의 이런 불씨가 옮겨져서 타오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시상식도 이어졌다. 한국여성단체연합(공동대표 남윤인순·박영미·정현백)은 "할머니들이 900여 일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한반도 평화의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하신 노고에 조금이나마 위로하는 마음으로 드린다"며 대추리 여성 주민들에게 '성 평등 디딤돌 상'을 시상했다. 마을을 찾은 이들에게 누구인지 묻지도 않은 채 따뜻한 밥을 내주고, 문화제에서 함께 촛불을 밝혔던 주민들이었다.
"우리의 촛불은 길이 빛날 것"
이날 촛불행사의 마지막 순서는 '매향제'였다. '미륵세상의 도래'를 기원하는 이들이 갯벌에 향나무나 참나무를 묻었다는 전설에 기원을 둔 '매향제'는 평택 주민들과 지킴이들이 '지난 4년 간의 투쟁을 잊지 않고 앞으로의 투쟁을 기약한다'는 마음으로 적은 글과 남기고 싶은 물건들을 항아리에 담는 행사였다.
김택균 국장은 "제일 마지막 주민이 이 마을을 떠날 때, 우리는 이 항아리를 마을에 묻을 것"이라고 밝혔다.
마지막으로 마이크를 잡은 문정현 신부는 "마지막 촛불문화제라고 하는데, '마지막'이라는 말이 내겐 마치 대추리라는 고향을 잃는 것처럼 들린다"고 밝혔다.
문 신부는 "이 마을을 떠나야 한다고 생각하니 시무룩하고 자꾸 눈물도 나고 그랬다"며 "그러나 곰곰히 생각해봤는데 935일째 열리는 이 촛불행사는 우리 사회에서 어마어마한 변화였다"고 말했다.
그는 "1952년 미군이 이 땅에 활주로를 만들 때 쫓겨났던 것을 생각해보라"며 "우리가 935일 동안 이어 왔던 촛불문화제는 역사 속에서 길이 빛날 것"이라고 주민들을 위로했다.
"고맙습니다. 죄송합니다. 사랑합니다"
2시간 30분 넘게 이어진 촛불행사는 서로 누가 누군지도 모를 정도로 다양한 사람들이 자리를 함께 했다.
그렇지만 이들이 느끼는 심정은 크게 다르지 않은 듯 했다. 이들은 서로에게 '고맙다', '죄송하다'는 말을 건넸다. 그리고 무대에 선 이들은 모두 '사랑한다'는 말을 어김없이 외쳤다. 누군가는 행사 내내 활짝 웃고 있었고, 누군가는 끝끝내 참지 못한 울음을 터트리기도 했다.
"이것으로 우리 땅을 지키기 위한 팽성 주민 촛불행사, 935일째 행사를 여러분의 힘찬 함성과 박수로 마무리 짓겠습니다!"
김택균 사무국장이 젖은 목소리로 외치자 말없이 촛불을 머리 위로 치켜들고 있던 이들 역시 함성과 함께 눈물을 뚝뚝 흘렸다.
"언제 이 많은 사람들이 한데 다시 모일까?"
행사를 끝내고 창고 문을 나서는 이들의 얼굴이 조금씩 일그러져 보였다. 유례가 없을 정도로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그리고, 만들고, 노래 부르고, 춤추며 '평화예술마을'로 승화시켰던 마을, 인권운동가들과 평화운동가들이 정부의 일방적인 '마을 철거'를 막기 위해 온몸으로 싸웠던 기억을 안고 있는 이 마을을 떠나기가 못내 아쉬웠기 때문인 듯 했다
그러나 참석자들은 한결같이 "이번 싸움은 지기만 했던 것이 아니다"라고도 말했다. 많은 이들이 오랜 시간 평택 투쟁을 이끌어 왔던 대추리와 도두리 주민들을 지켜보며 평화가 무엇인지, 그리고 국가폭력(state terrorism)이 무엇인지를 알게 됐다는 것이다. 그들의 기억 속에, 그리고 그들을 지켜본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평택은 한상렬 대표의 말처럼 '평화운동'의 요람으로 남아 있을 것임을 이날 참석자들은 확인한 것이다.
하나둘씩 자리를 뜬 창고 안에 펄럭이던 '평택, 평화의 씨를 뿌리고'라고 적힌 흰 광목천은 지난 4년간 주민들이 무엇을 이뤘는지 웅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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