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이 지난 20일 KBS를 두고 "자사 이기주의와 전파 남용을 벌이고 있다"며 직설적으로 비난한 발언에 대한 언론계의 반발이 거세다. 전국언론노동조합과 KBS 노동조합은 같은 날 각각 성명을 내고 "노 대통령의 발언은 공영방송과 법 제도도 제대로 모르는 채 한 말"이라고 비난했다.
이날 노 대통령의 발언과 이에 대한 반박으로 공공기관운영법을 둘러싼 정부와 공영방송 간의 대립이 본격화될 전망이다. 기획예산처가 공공기관의 지배구조나 경영평가에 직접 관여할 수 있게 하는 이 법에 대해 방송계 및 언론단체들은 "KBS, EBS, 한국은행 등 중립성이 중요한 기관은 제외해야 한다"면서 정부의 "예외는 없다"는 의견과 첨예하게 대립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가운데 언론개혁시민연대 양문석 정책실장이 노 대통령의 발언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하는 글을 <프레시안>에 보내왔다. 그는 "지금 힘을 가진 집단의 횡포를 행사하는 주체는 언론이 아니라 노무현 정권"이라면서 공공기관법이 방송계에 미칠 영향과 그 문제점에 대해 지적했다. <편집자>
20일 노무현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공공기관운영법의 적용대상이 되는 것이 언론자유 독립과 무슨 관련이 있느냐… 정부가 언론의 독립성을 침해하려 한 적이 있느냐"며 최근 공공기관운영법 개정을 위해서 싸우고 있는 KBS를 직접 겨냥했다.
노 대통령은 "최근 KBS가 방송 80주년과 관련해 특집 프로 등을 방영하면서 이 법의 적용대상에서 제외돼야 한다는 프로들을 방영했는데 이는 자사 이기주의와 전파남용의 예"라면서 "이에 대해 즉각 언급하려 했으나 한미FTA문제 등 많은 현안들이 있어 미뤄왔다. KBS가 의원 60여 명을 통해 법 개정까지 하려는데 이래선 나라 꼴이 문제다"는 말까지 했다.
그리고 또 "그러한 법령 규정이 있다고 해서 기획예산처가 KBS의 언론독립을 어찌 침해할 수 있겠느냐. 힘을 가진 집단의 횡포가 이 땅에서 벌어지고 있다. 해당 부처에서 적절히 잘 대응해 달라"는 당부도 했다.
왜 공공기관법을 '선의'로 받아들일 수 없냐고?
먼저 공공기관운영법이 왜 문제인지 짚어보자.
제14조(공공기관에 대한 기능조정 등)에 따라 기획예산처장관은 공공기관 기능의 적정성을 점검하고 통폐합과 기능재조정, 민영화 계획을 수립해야 하고 주무기관이 이를 집행한 뒤 기획예산처에 결과를 제출해야 한다.
제15조(공공기관의 혁신)에 따라 공공기관은 경영효율성 제고와 서비스 품질 개선을 위해 지속적인 경영혁신을 추진해야 하고, 기획예산처는 관련 지침의 제정과 혁신을 진단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다.
공공기관운영법에 적용받는 KBS와 EBS로서 가장 위험한 조문이 바로 14조와 15조다. 14조의 '통폐합과 기능재조정 그리고 민영화 계획'의 대상에 KBS와 EBS가 오를 수 있다. KBS1과 EBS의 통폐합, 그리고 KBS2의 민영화가 바로 그것이다. 노대통령의 발언처럼, 단순히 '기획예산처가 KBS의 언론독립을 어찌 침해할 수 있겠느냐'며 너스레를 떨 일이 아니다.
기획예산처는 권부 중 권부다. 돈으로 정부부처와 공기업을 통제하며 정권의 의중을 관철하는 곳이다. 그런데 이들에게 통폐합 권한과 기능재조정 권한, 심지어 민영화 권한까지 줬다. 예산처가 작심하고 현재 지상파의 '다(多)공영 일(一)민영'체제를 깨겠다고 하면 깨버릴 수 있는 권한이 법으로 마련된 것이다.
그런데 노 대통령은 "감히 예산처가 그 권한을 사용할 수 있겠느냐"며 '물타기'를 시도한다.
최근까지 한나라당은 KBS2와 MBC의 민영화를 공공연히 주장해 왔다. 중앙일보는 호시탐탐 지상파 진출을 소망해 왔고, 노 대통령은 취임 후 줄곧 삼성 및 중앙일보와 밀월관계를 즐겨 온 바는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심지어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을 주미대사에 임명하고 유엔 사무총장까지 만들려 하지 않았나. 이런 사실에 비춰볼 때 결코 '예산처의 의지'로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한나라당이 원하고, 삼성이 밀고, 중앙일보가 삼키려 하는 KBS2와 MBC, 그리고 이들 방송사의 '민영화'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이 14조다.
이를 두고 단순히 '정부의 선의'를 의심할 수 있느냐며 고래고래 소리지르는 노 대통령의 '말씀'은 이래서 '쇼'인 것이다.
'민영화'는 공영방송에게 '현실의 재앙'이다
또 있다. 이 법은 오는 4월부터 당장 시행된다. 그러니까 다음 정부의 권한이 아니다. 노 대통령은 정권재창출을 위해 이 권한을 십분 활용할 수 있다. 백번 양보해서 '노 대통령의 선의'를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선거정국이 노대통령의 선의를 '악의'로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지상파를 장악할 수 있는 결정적인 무기를 노 대통령이 쥐었다는 점을 읽어야 한다.
14조는 KBS만 겨냥한 것이 아니다. KBS 입장에서 보면 KBS2의 상실은 치명타다. MBC 또한 KBS2가 민영화 물결을 타면 자기들의 의지와 무관하게 자신의 몸을 그 물결 위에 실어야 한다. 또 SBS는 유일한 민영방송으로서 기득권이 사라지며 KBS2 및 MBC와 지금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는 경쟁을 벌여야 한다. SBS의 대주주인 태영그룹과 비교할 수 없는 삼성급 재벌이 대주주로 지상파를 운영한다면 경쟁 자체가 치열해질 것은 뻔한 일이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공공기관 운영법 14조는 지상파에게는 미래의 재앙이 아니라 현실의 재앙인 것이고, 노무현 정권에게는 당장의 정치수단이요 선거수단인 것이다.
노 대통령은 애국자고 KBS와 EBS는 나라 망치는 주범인가?
15조는 또 어떤가? 경영효율성 제고와 서비스 품질 개선을 위해 기획예산처가 지침을 제정하고 혁신을 진단할 수 있도록 해 뒀다. 지난 해 도올 김용옥 선생이 EBS 논술특강 프로그램에서 영화배우와 감독을 불러다 놓고 한미FTA 반대 의견을 듣고, 도올이 한미FTA가 한국 문화의 정체성을 위협할 수 있다는 요지의 발언을 했다. 그 후 재경부와 청와대 일부에서 EBS에 대한 집중적인 비난을 쏟아냈다. 이 사건이 결국 EBS 경영진 교체로 이어지는 시발점이 아니었냐는 것이 당시 가까이에서 지켜 본 당사자로서의 관측이다.
'서비스 품질 개선'이 '정부정책과 정권을 위한 효율적 홍보 개선'으로 둔갑해 기획예산처가 지침을 내릴 수 있는 조문이라는 의미다. 정부정책을 넘어 정권홍보의 수단으로 정치권력이 지상파를 갖고 놀 수 있는 엄청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정권의 시녀가 될 것인가, 방송인이 될 것인가?' 공공기관운영법 15조는 지금 KBS와 EBS를 향해 묻고 있다.
마지막으로 "KBS가 의원 60여 명을 통해 법 개정까지 하려는데 이래선 나라 꼴이 문제"라는 노대통령에게 묻고 싶다.
"KBS가 동원했다는 의원 60명은 바보인가? 정치권력으로부터 독립을 위해 법 개정 운동을 하면 나라 꼴이 망가지는가? 노 대통령은 애국자고 KBS와 EBS는 나라 망치는 주범인가?"
노 대통령이 "힘을 가진 집단의 횡포가 이 땅에서 벌어지고 있다"고 했던 말에서 가리키는 집단은 결코 KBS가 아니라 노 대통령 그 자신이다. 언제까지 방송을 권력의 시녀로 전락시키려는 노대통령의 횡포를 우리는 참아내야 할까? '방송 덕에 대통령이 됐다'고 고백한 노 대통령, 그는 누구보다도 방송의 힘을 잘 아는 대통령으로 기록될 것이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집요하게 방송을 장악하려 한 대통령으로 기록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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