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대의 미디어그룹인 미국 타임워너의 리처드 파슨스 회장이 9일 노무현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CNN>의 한국어 방송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혀 언론단체 및 방송계의 거센 반발을 사고 있다. 이번 발언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서 미국이 한국어 더빙을 비롯한 방송 개방을 강력히 요구하는 도중 나온 것이어서 파장이 예상된다.
민주언론시민연합(이사장 이명순)은 10일 한미 FTA 8차 협상이 진행 중인 서울 한남동 하얏트호텔 앞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참여정부는 방송주권까지 미국에 갖다 바칠 작정인가"라며 "방송마저 '퍼주기 협상'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전국 149개 케이블TV방송국(SO) 및 프로그램공급사(PP)로 구성된 케이블TV방송협회(회장 오지철)도 9일파슨스 회장의 발언이 보도된 직후 '한미 FTA 방송시장 개방 저지를 위한 케이블TV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FTA 협상 과정에서 국내 방송시장을 지키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겠다"고 밝혔다.
"미국 요구 들어주기로 약속한 건지, 의미도 모르는 건지…"
민언련은 10일 기자회견문에서 "파슨스 회장의 발언은 정부의 '방송개방 수용'을 전제로 나온 것인가"라고 물은 뒤 "보도전문채널은 그것이 미치는 사회정치적 영향력 때문에 국내 자본들의 진출도 엄격하게 규제하고 있는데, 하물며 외국자본에게 보도전문채널을 내줄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밝혔다.
민언련은 "특히 카툰네트워크코리아는 지난해 7월 중앙일보 계열사이자 거대 복수방송채널사업자(MPP)인 중앙방송과 타임워너의 자회사인 '터너 브로드캐스팅 아시아 퍼시픽'이 설립한 합작법인"이라며 "이들이 <CNN>을 한국어 더빙으로 방송한다는 것은 한국의 거대 족벌 신문 계열사와 미국 최대 미디어 그룹 자회사가 보도전문채널을 소유하고 우리 방송법의 규제기반을 흔드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또 민언련은 "보도에 따르면 노 대통령은 타임워너의 국내 투자 현황과 전망에 대해 큰 관심을 표명했다고 한다"며 "파슨스 회장의 방송주권을 짓밟는 무례한 발언을 듣고도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이미 미국의 요구를 이미 들어주기로 약속한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고 비난했다.
민언련은 "외국방송 재송신의 한국어 더빙은 문화주권은 물론 민주주의 사회의 여론 다양성 보호를 위해서도 허용돼선 안된다"며 "지금 노 대통령이 귀 담아 들어야 할 것은 미국 거대 미디어그룹 회장의 목소리가 아니라 방송주권과 문화다양성, 그리고 우리 방송산업의 기반 붕괴를 우려하는 수많은 시민사회단체, 언론단체들의 목소리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지난 9일 파슨스 회장은 노 대통령과 접견에서 "우리는 중앙방송과 합작으로 설립한 카툰네트워크코리아 사업의 일환으로 CNN을 한국어 방송으로 내보내는 것을 검토 중"이라고 말했다.
케이블TV "우리는 방송위를 믿었다"
'케이블TV 비상대책위원회'도 이날 성명을 발표하고 "더빙을 통해 월경방송을 하겠다는 미국 미디어업계의 주장은 국내 방송법의 규제 자체를 무시한 억지"라며 "우리 정부는 미국의 터무니없는 주장에 휘둘리지 않고 냉정하게 협상에 임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CNN>과 같은 외국방송이 더빙을 통해 국내에 방송될 경우 보도전문채널 승인제도의 입법 취지가 무력화될 가능성이 있다. 또 해외에 설립한 방송사업자가 사실상 국내에 등록한 방송사업자의 지위와 같아져 형평성 문제를 낳을 수 있다.
비대위는 "타임워너 회장의 발언은 한국의 법제도와 문화를 전적으로 무시하는 행태"라며 "케이블TV는 이제부터 범 방송계를 비롯해 우리문화 콘텐츠를 제작하는 다양한 문화세력들과 연대를 통해 '비상대책위'를 구성하고 한미 FTA저지를 위한 투쟁에 돌입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날 기자회견에 참석한 케이블TV협회의 한 관계자는 "우리는 방송 개방은 양보할 수 없다던 방송위원회를 굳게 믿어 왔다"며 "그런데 파슨스 회장의 발언을 듣고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미국은 지난 7차 협상에서 시청각 분야에 대해 '외국 위성방송의 한국어 더빙 및 한국광고 유치 허용'을 비롯해 △지상파 국산프로그램 편성쿼터를 현행 80%에서 50%로 하향조정하고 △SO(유선방송사업자)와 PP(방송채널사업자) 소유지분 현행 외국인 소유지분을 49%에서 51%로 상향조정하며 △온라인 VOD(주문형 비디오) 시장을 전면 개방하고 △미래유보를 현행유보로 하향조정할 것 등을 요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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