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의료가 '돈 벌이'로 직접 연결되지 않는 나라도 많다. 의료가 시장이 아닌 공공 부문에 속한 나라들이 주로 그렇다. 대표적인 경우가 쿠바. 쿠바 혁명의 주역 중 한 명인 체게바라가 고급 의료를 무상으로 제공하기 위해 노력한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실제로 쿠바는 의료의 공공성만으로 유명한 게 아니었다. 의료 수준도 상당하다. 미국의 경제봉쇄가 지금보다 느슨하던 시절, 쿠바가 세계 각국에서 몰려온 '의료 관광객'으로 붐볐던 것에서도 드러나는 사실이다.
최근 한국에서는 의료법 개정 논란 등으로 '의료 시장화'에 대한 우려가 높다.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인의협) 등 보건의료단체들은 정부가 추진하는 의료법 개정안에 담긴 △의료법인의 인수·합병(M&A) △민간보험회사의 환자·병원 간 중계 허용 △민간보험회사와 병원 간 직접 계약 허용 △민간보험회사와 병원 간 환자 진료 정보 공유 등에 대해 문제제기 해 왔다. '시민의 건강'을 목적으로 삼아야 할 의료 행위의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은 채, 시장원리 만을 강조하여 사회 경제적 약자의 건강권을 침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쿠바를 다녀온 의사들이 있다. 한국과 다른 방향의 의료체계를 따르는 사회에서 교훈을 얻기 위해서다. 그들 중 한 명인 홍조 씨가 쿠바에서 보고 들은 것을 글로 옮겼다. 홍조 씨의 글은 <인권오름>과 <프레시안>에 3회에 걸쳐 실릴 예정이다. 다음은 홍조 씨의 첫 번째 글이다. <편집자>
허리케인이 남긴 아름다운 만남
쿠바의 수도 아바나의 외곽지역을 지나다 보면, 해군기지를 개조한 '라틴아메리카 의과대학'을 찾을 수 있다. 건물에서 바라보면 넓은 운동장 끝에 펼쳐진 해변이 장관이다.
1998년 중미와 카리브해 주변에 큰 허리케인이 있었고, 이 허리케인으로 인해 인근 국가에서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이에 쿠바는 즉각 주변 국가에 의료원조팀을 파견했다.
하지만 각국의 의료취약지역이 의외로 광범위했다. 게다가 쿠바 의료진이 철수할 경우 이 지역들에서 발생 가능한 의료공백을 메우기도 어려워 보였다. 이에 쿠바에서는 라틴아메리카 의과대학의 문을 열게 됐다.
'연대성, 통합성, 인도주의'를 표방하며 남미의 의료취약지역에서 의료 활동을 할 수 있는 의사들을 양성하고자 하는 목적이다. 남미의 다양한 국가 학생들이 이곳에서 수업을 듣고 있으며, 최근에는 아프리카와 미국의 학생들도 함께 공부하고 있다. 음식, 교복, 교과서, 생활비 등 대부분을 쿠바 정부에서 부담하고 있으며, 현재 28개국의 학생들이 공부하고 있다. 쿠바 자국의 의료산업을 육성하기 위한 이유가 아니라 순수한 국제적 지원활동의 하나다. 체제가 다른 나라의 학생들을 배척하지도 않는다. 빈곤과 건강 악화 위협에 노출된 국가의 학생이라면 누구든지 입학을 허가한다.
자발적으로 가난한 이들을 위한 의료를 선택한 의사들
매년 새 학기에 모집할 인원을 쿠바 정부에서는 각 정부 혹은 진보적 정당, 사회단체 등에 알린다. 그러면 각국의 진보적 정당이나 사회단체, 좌파정부 등에서는 자국의 학생들을 선발해 쿠바로 보낸다.
쿠바 정부에서 정한 입학기준은 특별한 것이 없다. 다만 25세 이하의 가난한 가정의 학생을 우선적으로 받아들인다. 이곳의 학생들은 대부분은 졸업 후 자신의 나라로 돌아간다.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서는 의료혜택으로부터 소외된 산골짜기 오지에서의 진료를 자발적으로 선택한다.
무료로 교육시켜주었는데도 불구하고 자기 나라에서 돈벌이를 목적으로 진료하려는 학생이 있느냐는 질문에, 학교 홍보담당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물론 그런 학생도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학생들은 스스로 산골짜기를 찾아갑니다. 이것은 우리가 학생들에게 부여하는 '도덕적 의무'입니다." 라고 대답한다.
교과과정에 철학이나 인권, 빈곤과 같은 내용이 포함되지는 않다. 그러나 의료 행위는 '돈벌이'가 아닌 '환자의 건강'이 목적이라는 상식적인 덕목을 강조할 뿐이라고 설명한다.
최근 베네수엘라에서도 '라틴아메리카 의과대학'이 문을 열었다. 10년, 20년이 지난 후 이 대학을 졸업하고 돌아간 의사들이 남미의 곳곳에서 의료 활동을 펼칠 미래를 상상해보자. 치료받을 돈이 없다고 해서, 병원이 너무 먼 곳에 있다고 해서 병들고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들은 분명 줄어들 것이다.
쿠바, 베네수엘라, 볼리비아, FTA와 다른 무역협정을 맺다
한미자유무역협정 협상의 타결이 임박했다고 한다. 기업의 이익이 증대되어야 국가의 발전이 있고, 그래야만 가난한 사람들의 삶이 개선될 수 있다는 말은 거짓이다. 많은 사람들이 세계화가 대세라고, 우리도 빠르게 대세에 편승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지금 소개할 남미 국가들은 오히려 반대 방향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2006년 쿠바, 베네수엘라, 볼리비아 정부는 무역협정의 또 다른 모습인 '민중무역협정'을 체결했다.(참조 : "자유무역협정이 아닌 민중무역협정을!")
기업에 이득이 되는 상품 관세 철폐가 아니라, 민중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개방한다. 쿠바와 볼리비아는 베네수엘라의 석유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베네수엘라와 볼리비아에는 쿠바와 같은 발달된 의료자원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볼리비아는 쿠바와 베네수엘라가 필요로 하는 광물과 농산물, 농축산 가공품을 낮은 관세로 제공한다.
자국의 기존 자산을 합리적으로 이용하고 자원을 보존하며, 상호 혜택이 되는 방향으로 협정을 맺는 것이다. 큰 이득을 남기기 위해 경쟁력 있는 몇몇 산업을 개방하며 국가의 필수 산업은 위기에 빠트리는 '자유무역협정'과는 다른 모습이다.
쿠바가 볼리비아 정부에 취할 조취의 내용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높은 의료 비용을 감당할 수 없는 볼리비아 시민들에게 쿠바 정부는 무료 안과수술을 제공하고 다양한 의료기술 장비와 의료 인력을 지원한다는 것이다. 이는 이미 3년 전부터 이어진 쿠바와 베네수엘라 간의 경험을 확장하는 것이다.
50만 명의 눈을 뜨게 한 '기적의 작전'
'기적의 작전(Misión Milagro)'은 라틴아메리카의 높은 문맹률을 개선하기 위해서 쿠바정부와 베네수엘라 차베스 정권의 공동노력에 의해 시작되었다.
높은 문맹률을 개선하기 위해 차베스 정권은 집권 이후 광범위한 교육프로그램을 실시했다. 하지만 녹내장, 백내장 등과 같은 안과 질환으로 인해 교육자체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의 규모가 적지 않음을 알게 됐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려는 목적으로 쿠바의 의료기술을 통해 양국 간에 '기적의 수술' 혹은 '기적의 작전'이라는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되었다.
1차 '기적의 작전' 기간은 2004년 7월에서 12월까지 6개월이었다. 이 당시 베네수엘라에서 1만3천여명, 쿠바에서 1만여명의 환자가 수술을 통해 눈을 떴다. 당시에는 밤을 새워 수술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하니, 그 때의 열기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1차 작전 기간 동안 수술을 받은 사람들은 대부분 시력을 회복했다. 이들은 자국의 교육프로그램과 연결되어 글을 읽고 쓸 수 있도록 교육받을 수 있었다. 이후 '기적의 작전'은 베네수엘라와 쿠바의 연대 사업에서 확장되어 남미 전체를 아우르는 국제적 연대 사업으로 이루어졌다.
4차 작전 기간인 현재 하루에 120명 정도의 환자들이 수술을 받고 있다. 대다수는 백내장 환자들인데 백내장의 경우 수술 1건당 20여분의 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지난 3차 작전 기간까지 50만 명이 수술을 받았다고 하는데, 최근에는 이동비를 절약하고 남미 전역에서 수술을 보다 효율적으로 진행하기 위해 베네수엘라에도 안과전문병원을 설립했다. 민중무역협정의 내용 중 하나로, 볼리비아에도 안과병원을 설립할 예정이다.
쿠바에서는 미국의 오랜 경제봉쇄로 의료장비들마저 수입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하지만 '기적의 작전'을 처음 수행한 '빤도 페레르(Pando Ferrer)' 안과 병원에 있는 의료장비들은 세계적으로도 손색없는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안과 수술로는 최첨단 수준인 엑시머 레이저수술 장비도 준비되어 있는데, 의료장비를 수출한 미국 밖 회사들에게 미국이 압력을 넣을 가능성을 우려해 장비 관련 사진은 외부로의 유출이 차단돼 있다.
미국 등에서 제기하는 "실력도 없고, 장비도 구식인 돌팔이들이 벌이는 해프닝"이라는 비난은 근거도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런 비난의 시선이 초라해 보일 정도이다.
미국이 아니라 쿠바에서 배워야 한다
다양한 국가에서 진행하고 있는 국제적 지원활동의 적지 않은 부분은 초국적 기업의 이해관계에 의해 결정되고 있다.
최근 이라크의 극심한 의료공백 현상 때문에 부시 행정부는 10억 달러를 이라크 보건부에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현재 이라크 민중을 위한 '인도적' 지원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고 있다. 이라크 재건 사업은 이라크 자국기업의 참여가 배제된 채 미국과 유럽의 몇몇 초국적 기업만이 참가하고 있다. 이는 200개가 넘는 국영기업을 사유화하고, 대다수의 산업체를 외국기업만 소유할 수 있도록 해놓은 부시 행정부의 의도 때문이다.
이런 상황은 전쟁의 위협으로부터 이라크가 안정된 이후, 국가 보건의료 시스템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결국 이라크 민중의 건강은 재건사업에 참여한 초국적 기업들의 이윤추구에 의해 희생당할 것이 자명하다. 이런 상황과 비교해 보면 쿠바의 국제적 지원활동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의과대학을 좋은 성적으로 졸업하면, 성형외과, 피부과 등과 같이 돈 잘 버는 과를 선택하는 우리나라의 상황은 의사들의 윤리의식 개선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다음 기사에서는 쿠바의 의료시스템이 어떻게 자발적이고 도덕적인 의사들을 양산하고 있는지 살펴볼 것이다. 이윤추구가 최고의 가치로 인정받는 사회에서 '기적의 작전'처럼, 가난하고 시력을 잃은 사람들을 위한 국가적 프로젝트는 상상 속에도 존재할 수 없다.
차가운 신자유주의적 기획이 아니라 따뜻한 민중 중심의 기획을, 폭력적인 이윤추구의 가치가 아니라 인간의 건강을 우선하는 가치를 우리는 쿠바를 통해 배워야 한다.
이 글은 인권운동사랑방에서 발행하는 <인권오름> 최근호에도 실렸습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