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혜민 한미 FTA기획단장이 지난 주 미국방송의 더빙 허용을 소위 '중립적'인 관점에서 검토 중이라고 밝히고 나선 것도, 정부 측이 이미 내부적으로 입장 정리한 것을 공개적으로 확인한 것에, 즉 방송을 최후 '빅딜'의 카드로 꺼내 들었음을 노골적으로 공표한 것에 다름 아니다.
더빙 허용이 불러올 변화는 불보듯 뻔해
사실 현재도 케이블이나 위성 채널 중에는 외국 사업자들이 방송위원회 허가를 통해 외국방송을 직접 방송하는 경우가 있다. <CNN>과 <디즈니 채널>이 그렇다. 문제는 더빙을 못하게 하거나 편집을 못하도록 규제하는 규정이다.
미 무역대표부, 미 상공회의소는 오래전부터 국내 더빙을 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그래서 보다 많은 국내 시청자들이 미국 채널을 볼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구해 왔다. 그러다가 4차 협상 쯤 해서 기간통신사업자 지분 제한, 케이블 TV 지분 제한, 온라인 콘텐츠(VOD), 방송융합서비스(IPTV) 등과 함께 공식적이고 본격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한 것이다.
현재 얼마나 많은 국내 시청자들이 미국 채널을 즐겨 시청하는지 알 수는 없다. 그렇지만 한국어 더빙이 허용될 경우, 시청자 수가 지금보다 급증할 것이라는 점, 비단 <CNN>이나 <디즈니 채널>뿐만 아니라 <FOX> 등 다른 상업채널들까지도 국내 진출을 적극 시도할 것이라는 점, 국내 방송사와의 제휴를 통해 진출해 있는 <ESPN> 등 기존 방송사들도 직접방송체계로의 변환을 통해 이윤 확대를 꾀할 것이라는 점 등은 불보듯 뻔하다.
그렇게 될 경우, 문화·산업적 가치를 예측하기 힘든 불확정적 뉴미디어 공간을 미국의 초국적 거대미디어복합기업들이 장악하고, 미국 산 프로그램·콘텐츠들이 주도적으로 유통되며, 민주주의 진보와 문화다원성 발전에 결코 이롭지 않은 이데올로기·선전이 횡행하는 상황을 배제할 수 없게 된다.
미디어 개방은 지식과 언어 교환 좌지우지할 핵심이슈
지난 걸프전쟁, 9·11과 이라크침공에서 <CNN>이 보여주었던 일방적 선전의 모습에 대해서는 재차 반복할 필요조차 없다. <CNN>이 누구의, 누구를 위한 방송인지는 북한을 향한 부시의 호전적 메시지를 확대 재생산하기 바쁜 모습에서도 정확하게 드러났다. 노엄 촘스키는 <CNN>을 "권력의 선전기구,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라고 정의한 바 있다. <CNN>이 평화의 채널, 민주적 교통의 공간이 아니라는 사실은 그 외에도 무수한 언론학자, 정치학자들이 분석·진단해놓고 있다.
부시 정권 내·외부의 네오콘, 신자유주의 초국적 자본, 그리고 일부 '파시즘'적 기독교 세력의 삼각동맹과 긴밀하게 연동된 <FOX>까지 진출하게 된다면 국내법에 따라 등록 승인을 얻어내야 하는 국내 프로그램사업자(PP)의 역차별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이 땅의 저널리즘의 역기능과 결합되면서 한국사회의 언론 민주주의가 심대한 위협을 받게 될 것이다. 시청각·미디어의 개방은 그래서 결코 산업적·경제적 사안이 아닌, 문화적이면서도 무엇보다 정치적인 문제다. 눈과 귀의 감각, 정신과 영혼의 활동, 지식과 언어의 교환을 좌지우지할 핵심적 이슈다.
캐나다의 미디어이론가인 마셜 맥루한은 텔레비전을 영화와 비교될 수 없는 일종의 '환경'으로 간파한다. 초국적 선전매체가 반평화·반인권·반문화의 메시지를 우리말로 선전하는 환경으로의 변환이 가져올 정신과 생명의 폐해는 무엇으로도 보상받을 수 없다.
'소비자 선택' 내세운 미국의 압력에 굴복한 것
지난 1월부터 학계와 언론노조, 그리고 30여 개 다양한 단체들로 구성된 시청각·미디어 공대위가 미국에 제시할 방송 개방안 사전정리 작업을 벌인 정부를 비판하고 나선 것도 바로 이런 위험성이 두드러졌기 때문이다. 국내자본의 공세와 정부의 탈규제 정책에 의해 안 그대로 심각한 위기에 처한 한국 방송·매체 환경을 그래도 최대한 지켜내려는 생태학적 의지의 표현이었다. 공익방송, 공적영역을 '자유'와 '시장'을 빙자한, 상업적 이윤만을 추구할 뿐인 거대자본으로부터 막아내고자 하는 민주적 의사표시였다.
그런데 정부는 이런 다중의 여론을 무시한 채, 심지어는 방송위원회의 의견까지도 배제한 채, 방송의 '미래유보' 입장 철회 카드를 피력하기 시작했다. 해외 재송신채널의 한국어 더빙문제를 소위 '소비자 선택의 문제'라는 이유로 허용해야 한다는 것은 외통부, 재경부가 7차 협상부터 '총괄타결'을 위해 최종 입장 정리한 내용의 일부에 불과하다. 미국의 논리가 애당초부터 '소비자 선택'을 내세운 방송시장의 탈규제화였다는 점을 고려할 때, 한국정부가 미국의 개방 압력에 굴복했다는 것 외에 어떠한 설명도 가능하지 않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김영모 FTA 협상단 서비스분과장은 한국의 "방송계 측에서 정부가 방송 개방을 할 수 있다는 소식을 자꾸 흘려 오히려 미국 측이 이를 빌미로 강하게 개방 요구를 해오고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소도 웃을 일이다. 내용 없는 '대외비' 자료유출을 갖고 협상전략이 탄로났다는 등 호들갑을 떨던 것과 똑 같은 전형적 책임전가 방식, 물 타기 수법이다.
한미 FTA가 타짜들이 설치는 투기판은 아니지 않나?
결정적 시점이다. 국내법인으로 전환하면서 한국어 더빙을 시작한 <카툰네트워크>의 시청률이 4배나 급상승했다는, 또는 <하나TV>에 VOD 형식으로 더빙 버전 프로그램을 공급하고 있는 <디즈니채널>의 프로그램이 큰 인기를 끌고 있다는 최근 뉴스에 비춰볼 때, 더빙 허용이 가져올 파급효과는 정말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런데 누가 이 판도라의 상자를 겁도 없이 열려고 하나? 그 이후 벌어질 자본지배와 선전관철의 광폭한 상황에 대해 누가 어떻게 책임질 것인가?
당대를 살아가는 우리뿐만 아니라 미래 세대 또한 평등·평화·평온한 환경을 누릴 권리가 있다. 그러니 제발 본인도 제대로 모르는 봉인된 상자의 위험한 개봉을 관 두시라. 그런 투기적 작태를 두고만 볼 정도로 우리는 여유롭지 않다. 뽑았으니 몇 년 두고 볼 일이지 왜 참견이냐는 대통령의 푸념이 통하기에, 상황은 너무나 위급하다. 한미FTA가 타짜들이 설치는 투기판은 아니지 않은가?
<YTN>이 이제야 나서는 게 우습다. 언론노조 위원장과 지부장들이 단식을 결의하는데도 태연히 FTA와 FTA반대 뉴스를 주요 뉴스에서 배제하는 <KBS>와 <MBC>도 한심하다. 조·중·동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그렇게 침묵을 강요 당하면서도 사태의 진실을 정확히 간파하고 있는 민중이 있다. 이들의 역사적 판단이 무섭다면, 위험한 카드는 서둘러 거두라. 더빙 허용의 카드, 방송을 포함한 시청각·미디어 개방의 카드, 일방적 한미 FTA의 졸속 마무리의 카드를 철회하라. 그게 지금의 정확한 판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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